정태현 신부님 미사강론(2023.01.07.)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카나에서 첫 번째 표징을 일으키신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기적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을 표징이라고 부릅니다. 표징은 표시판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운전하고 갈 때 전주역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전주역에 왔다고 여겨 그 표지판 밑으로 가면 전주역은 없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표징은 예수님의 모든 행적이 죽음과 부활, 그것도 십자가의 끔찍한 죽음과 부활을 겨냥하는 표지판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표징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완전하게 가리켜주고 있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하신 기적이 왜 죽음과 부활인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여인이시여” 하고 부릅니다. 이 ‘여인이시여’는 마담, 마돈나, 귀부인이라는 호칭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똑같은 호칭이 또 나옵니다. 바로 십자가 밑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입니다. 고통 속에서 성모님을 바라보며 “여인이시여, 당신이 아들입니다.” 라고 하십니다. 이 ‘여인이시여’는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물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심장에서 마지막으로 흘러나오는 물과 피를 가리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표징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모든 것입니다. 하느님의 존재 자체가 십자가와 부활이고, 그리스도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은 우리 자신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 신비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이런 말씀을 편지에 적고 있습니다. 주로 신부님, 캘커타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인데 이 편지 내용을 보면 끔찍한 어둠, 고통이 성녀 안에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분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한평생을 보낸 사람이고 또 그렇게 보내겠다고 예수님과 약속했던 분입니다. 예수님게서는 마더 데레사가 자신을 당신께 내주겠다고 하였을 때 “너는 내 빛이 되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밝은 대낮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빛은 어둠 속에 가야만 작은 촛불마저도 찬란한 광채가 될 수 있고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는 예수님의 빛이 되기 위해 캘커타의 빈민굴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댓가가 아주 혹독했습니다. 자기 안에 끔찍한 어둠을 체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반평생 전체가 지속적인 어둠이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몹시 놀랐습니다. 이렇게 혹독한 댓가를 지불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내가 성녀가 된다면 어둠의 성녀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나는 천국 안에 있지 않다. 나는 짙은 어둠에 싸여 있는 세상 한복판에서 나 자신을 찾는다’고 말합니다. 그녀만큼 하느님과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없고,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화답송에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고 되어있는데 이는 ‘좋아하신다’가 아니라 ‘사랑에 빠졌다’고 해야 맞습니다. 사랑에 빠졌는데, 그 백성이 똘똘하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못나빠지고, 지지리 가난해서,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하느님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짙은 어둠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어둠 체험이 없으면 어둠을 알지 못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고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빛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어둠과 하나가 되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을 체험하셨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백성, 제자, 지도자들에게 버림받은 것까지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아버지 하느님에게조차 버림받은 것은 견딜 수 없는 최고의 어둠이었습니다. 그런 상태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조차 버렸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지옥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부활이 없는 죽음은 절망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입니다. 우리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서만, 어둠을 통해서만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이 살이 되어 오실 때 우리와 사랑에 빠지기 위해 오셨는데 그때 그분이 선택하신 유일한 길이 바로 어둠이었습니다. 이런 사랑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랑은 없습니다. 이런 사랑에 제대로 눈만 뜬다면 하느님과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런 어둠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사랑하는 아드님 그것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만 좋아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어둠 속에 우리를 던져 넣어야 합니다. 루치펠은 ‘빛을 내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엄청난 광채에 비하면 이 천사가 가진 빛은 보잘것 없는 것인데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빛을 과시하고 감히 빛 자체이신 하느님께 도전했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조금이라도 빛이 있다면 그것은 전부 반사하는 빛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햇살이 닿지 않으면 암흑으로 바뀝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존재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절망이지만 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