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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요한 1서의 말씀 1,5―2,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5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6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7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2,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복음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3-18>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사랑 밖에 있는 일은 없다>
오늘 복음은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마태오 2,15)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마태오 2,17)
그런데 이것이 말이 됩니까?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는 말입니까?
예언이 어긋나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 안 좋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고, 오늘 복음의 말씀도 그런 뜻이어서는 안 되는데,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예언이란 미래를 내다보는 말이긴 하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이고, 권력의 속성이란 자기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남을 죽이기에 권력 주변에서 이런 살상은 언제고 일어날 거라고 얘기하는 식이지요.
그래서 헤로데도 아기 예수가 미래 자기 권력에 위협 요소라고 생각하여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한 것이고, 죄 없는 아기들을 죽인 것이며, 복음은 그런 뜻에서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 오늘 복음에서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말 안에는 더 중요한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참혹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에 대해 신앙적으로 아무런 얘기 없이 지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아기 예수 때문에 애꿎은 아기들이 죽은 사건에 대해 그것을 어떻게 주님을 위한 순교라고 얘기하느냐고 생각이 되고, 그러니 이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하지 않고 건너뛰고 싶습니다.
그러나 복음이나 우리 전례는 이런 곤란한 문제에 대해 피하지 않고 성실히 답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고, 그리고 하느님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하느님과 무관한 일인 양 얘기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해 좋은 일도 예언하시고, 안 좋은 일도 예언하시며, 인간이 죄를 지을 것이라는 예언도 하시고, 그 죄를 씻으실 구세주가 오실 것이라는 예언도 하시며, 그 죄를 씻어 주시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도 하십니다.
죄 없는 아기들이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헤로데에게 죽임당한 예수님 당시의 아기들뿐 아니라 지금도 철없이 임신하고 비정하게 버리는 부모들 때문에 죽임당하는 아기들도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그 아기들이 죽음이 하느님마저도 무관심하고 아파하시지 않는 죽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월호 아이들이 죽었을 때 교회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도 얘기해야 하고, 선택의 자유를 주장하는 여성들에게도 피임이나 낙태 같은 문제는 어려운 문제이고 그래서 피하고 싶은 주제지만 얘기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세상의 폭군들이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 어미마저 제 젖먹이를 버려도,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 밖에 있지 않다고, 혹 어미는 버릴지라도 하느님은 버리지 않으신다고 예언해야겠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야 49, 15)
- 작은형제회
♠ 이영근 어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기념하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사실 죄 없는 아기들이 학살당한 일은 겉으로는 헤로데의 잔인한 학살을 드러내지만, 실상은 메시아가 태어났음을 알려줍니다.
곧 그들의 죽음은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메시아가 나타나심에 대한 지상의 왕의 두려움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헤로데의 죄 없는 아기 학살을 두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레미아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8)
이는 예레미야가 아들을 잃은 야곱의 아내 라헬의 통곡을 들어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보다 앞서 있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모세가 히브인들을 억압하면서 저질렀던 어린 사내아기들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사실 파라오와 헤로데, 그들은 모두 자신을 지키고자 빛을 두려워한 이들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완고함과 자기중심적인 폭력과 독선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왕국의 지키기 위해 사랑의 왕국을 저버리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이유를 확고하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마태 2,14)
이는 하느님께서 베푸는 구원의 역사는 그 어떤 어둠에도 방해에도 아랑곳없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죄 없는 아기들이 살육당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 마음은 어떠했을까?
살인자 아닌 살인자가 되어버린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분명 죽어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보다 어머니들의 “애끊는 통곡소리”가 훨씬 더 컷을 것입니다.
아기들의 슬픔은 한 순간이었고 그들의 죽음은 슬픔의 끝이었겠지만,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의 슬픔은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죽은 모든 아기 어머니들의 아픔을 통째로 짊어지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가 희생되어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그녀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 모든 책임을 떠맡아 고통을 받아야 했던 마리아는 또다시 아무런 죄도 없는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죽음을 떠맡아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죄 없으면서도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 써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가 봅니다.
아기 예수님도 훗날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무죄하면서도 억울함을 당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 일을 순교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8)
주님!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아기들이 살육당할 때 어머니 마음은 미어지셨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를 희생시켜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을 짊어지는 일인가 봅니다.
그러니 저희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어머니 마리아처럼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위해 죽는다. 다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게 문제다>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헤로데에게 대신 죽은 순교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헤로데는 그때 아기 예수님이 죽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위해 희생된 어린 영혼들은 교회에서 순교자 지위에 오릅니다.
제일 문제 되는 것은 아기들이 자기 의지로 순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공경받을 만 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만약 내가 산길을 차를 몰고 가다가 웅덩이를 피하려고 차를 비트는 바람에 길가에 있던 어미 새가 치어 죽였습니다.
내려보니 둥지에 새끼 새들이 있습니다.
어미가 없으니 이들은 다른 동물들에게 잡아먹힐 것이 확실합니다.
이때 나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 새끼 새들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있어야 했고 그들의 영혼을 주님께서 책임져주셔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만약 어미 새가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고 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 독사는 새끼들도 잡아먹을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는 하느님께서는 사랑도 있고 능력도 있으십니다.
그러니 당신 아드님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을 당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십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 죽음이 누구를 위한 죽음이어야 그 보상을 받게 되는지 잘 깨닫게 해줍니다.
나에게 사랑을 지닌 분이시고 그 보답을 해줄 능력을 지니신 분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 내 죽음이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 대신 죽어주고 싶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여러분 방 안에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사 놓은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반드시 여러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매트릭스’(1999)란 영화에서 네오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 밤에는 해커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에게 모피어스란 자가 나타나 빨간 약과 파란 약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합니다.
파란 약을 먹으면 그냥 이전처럼 침대에서 깨어나겠지만 빨간 약을 먹으면 진실을 알게 되리란 것입니다.
네오는 진리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빨간약을 먹습니다.
그랬더니 눈을 떴을 때 믿지 못할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계는 기계에 의해 프로그램된 조작된 세상이었고, 인간들이 그렇게 허상의 세계에서 사는 동안 기계들이 인간을 빨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오는 이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자아라는 기계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그것을 저지하려는 기계의 세력과 맞서 싸웁니다.
나를 위해 살 수는 없습니다.
착각입니다.
우리는 누구든 모두 누군가를 위해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과연 나의 생명을 바치는 값을 되돌려줄 대상인지 명확히 아는 게 중요합니다.
자아는 나를 이용할 뿐 나에게 자신을 위해 일한 값을 쳐주지 않습니다.
어차피 누군가를 위해 죽어야 한다면 내 죽음의 값을 되돌려줄 수 있는 분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그분이란 나를 만드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딸이 무덤에서 외롭지 않도록 무덤 속에 누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국 아빠의 사연이 있습니다.
중국 쓰촨성에 사는 장 리용씨와 딸 신레이의 사연입니다.
리용씨 딸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지중해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중해빈혈’은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적혈구 내 헤모글로빈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는 질병으로, 중증의 경우 적극적인 수혈 요법이 필요하고, 15세가 되기도 전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리용씨는 가난한 농사꾼이었지만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가며 딸의 비싼 치료비를 감당해 왔습니다.
그간 치료비로만 10만 위안(약 1680만원)을 사용했지만, 딸의 병세에는 차도가 없었습니다.
리용씨 부부는 의사에게 “제대혈(탯줄혈액) 이식을 통해 딸을 살릴 수 있다”라는 소식을 접하고 둘째 아이를 뱄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비싼 수술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모든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엄마 뎅민 씨는 “우리에겐 이제 어떠한 선택도 남아 있지 않다”라고 토로했습니다.
부부는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리용씨는 딸의 묏자리를 알아보고 직접 무덤을 팠습니다.
이후 리용씨는 딸과 함께 이곳을 매일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딸이 죽은 후에도 이 장소를 무서워하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무덤 속에 누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리용씨는 “궁지에 몰린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 더 이상 돈을 빌릴 곳도 없다”라며 “2살 딸아이가 묻힐 이곳에 데려와 같이 놀면서 익숙해지게 하는 일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매일 같이 딸과 함께 이곳을 동행하는 것”이라며 “딸이 무덤을 편안하게 느끼도록, 죽는 순간이 다가오면 너무 두려워하지 않고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습니다.
리용씨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은 피어 비디오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온라인에서 퍼졌고, 사연을 접한 중국 네티즌들은 신레이의 치료비를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딸의 병이 낫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가 죽을 때 그 책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 무덤에 함께 들어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하려는 마음을 지닙니다.
그 마음을 지니신 분이 하느님이라면 어떨까요?
우리는 누구나 누구를 위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나라를 위한 죽음일 수도 있고, 내가 믿는 신조를 위한 죽음을 수도 있으며, 가족을 위한 죽음일 수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내 목숨을 바치는 대상이 나에 대한 사랑도 없고, 비록 사랑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보답할 능력이 없는 대상이라면 나의 삶과 죽음은 헛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세상에 나의 죽음에 대한 보답으로 영원한 삶으로 되돌려줄 사랑과 능력이 있는 분이 하느님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심장이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심장을 하느님을 위해 썼기 때문일 것입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은 혀와 성대가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주님 말씀을 전하는 데 썼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오른손과 발이 썩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선교하기 위해 그것들을 희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온몸이 썩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심장에 받아들여 온몸이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찮은 새 한 마리를 어쩔 수 없이 죽였어도 그 새끼들에게라도 보답을 해준다면,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나의 목숨을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해 볼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순교자의 피>
성 예로니모는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과 증거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들의 모범을 따라 주 하느님께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하며 주님의 품을 찾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오늘 기억하는 죄 없는 어린이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열정을 일깨워 주며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가르쳐 줍니다.
헤로데는 두 살 이내의 아기를 모조리 죽여서(마태 2,16)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을 잘라 버리고자 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1,22).
이런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낙태 건수는 정부 추정치만 년 40여만 건에 이릅니다.
출생아는 2020년 30만 건을 밑돌았으니 소리소문없이 낙태로 희생되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보호받아야 할 태아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과 인간의 이기심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어린아이를 방치하고 방치를 넘어 학대를 일삼은 부모 이야기가 종종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모성과 부성을 잃어가는 세태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 보다,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이라는 사실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질투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한밤중에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마태 2,13)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마태 2,14).
온갖 어려움을 마다않고 지체없이 발길을 옮기는 요셉의 태도는 곧 순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일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몸에 배어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때 부름을 받던지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과 안배는 언제나 함께 합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분의 손길과 요청에 단호히 응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어떤 처지와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 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폭력이나 편법으로 권력을 차지한 부당한 권력자들, 그도 아니면 통치자로서의 자격 여건을 전혀 갖추지 못해 그 자리에 앉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치고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자리에 대한 일상적 불안감, 위기감입니다.
헤로데가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안에 큰 수치요 오점으로 남은 군사정권 시절의 독재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헤로데의 경우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안 그래도 부실하고 불안불안한 자신의 왕권이 크게 흔들림을 느낍니다.
그 결과 인간의 탈을 쓴 자로서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악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잔혹한 악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만 것입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죽임을 당한 아기들의 운명이 참으로 가련합니다.
가문의 미래요 희망이던 아기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지켜봐야만 했던 부모들의 마음을 예레미야 예언자가 미리 예언했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오 복음 2장 18절)
유다인들도 과거 우리나라 백성들처럼 남아 선호 사상이 유별났습니다.
그런 금쪽같은 아기들, 가문의 대를 잇고 가계를 이어야 할 아기들, 보물 같고 목숨 같던 아기들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잃었으니 고을 전체가 깊은 슬픔에 잠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거룩하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 그 이면에 무수한 아기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지극한 선인 앞에는 그에 맞서는 반드시 극악무도한 악인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악한 인간 존재의 강한 시기 질투심과 극단적 이기주의로 인한 피해자가 속출합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이지만 성 쿠옷불트데우스 주교는 이렇게 아기들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갔고 그들의 부모들은 죽어가는 순교자들을 보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 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말을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했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정권욕과 사리사욕에 눈이 먼 지도자들,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정신 나간 지도자들, 인간미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야수 같은 지도자들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어간 아기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없는 지도자, 정신 나간 리더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움직이는 것,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 참 정의, 참 진리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정의>
헤로데는 메시아께서 태어나신 곳이 어디인지 묻는 동방박사들에게 그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려 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마태 2,8)
아마도 헤로데는 처음부터 ‘그 아기’를 죽이려고 생각했을 것이고, 동방박사들이 배반자 유다와 같은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박사들은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는 헤로데의 말을 믿었을 텐데, 만일에 그들이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천사의 지시를’(마태 2,12) 받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계신 곳을 헤로데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고, 메시아가 곧 예수님이라는 것도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죽게 되었을 것이고,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학살당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로데에게 가는 것을 막은 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헤로데가 하려는 일을 미리 막지 않으셨을까?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막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사를 헤로데에게 보내셨거나 또는 누군가를 보내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도 천사의 말을, 또는 사람들의 충고를 따르거나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신한 일과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학살당한 일은 구약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진 일이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사후 해석’일 뿐이고,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한 것은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분명히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거스르는 범죄를 저지른 일입니다.
인간의 범죄가 하느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천사는 왜 헤로데의 계획을 요셉에게만 알려 주었을까?
그리고 요셉은 왜 헤로데의 계획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그냥 떠났을까?
복음서의 표현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하느님께서 성가정만 구하시고 다른 아기들은 죽게 내버려 두셨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또 ‘의로운 사람’인 요셉이(마태 1,19)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그냥 가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의 결과만 보고 함부로 판단할 일은 아닙니다.
천사가, 또는 요셉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지만, 어떤 이는 그 말을 믿고 피신하고, 어떤 이는 안 믿고 그냥 가만히 있고...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어떻든 베들레헴의 아기들은 예수님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 억울한 죽음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로도 마다한다.” 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베들레헴의 아기들의 부모들처럼 끔찍한 불행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 위로가 될까?
하느님(예수님)께서 힘들어하는 사람들보다 더 힘들어하시고, 아파하는 사람들보다 더 아파하시고, 슬퍼하는 사람들보다 더 슬퍼하시면서 함께 울고 계신다는 말이 위로가 될까?
야고보서 저자의 다음 말은 ‘말로만 하는 위로’에도 해당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야고 2,16)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빈말’로 위로하는 것으로 그치는 종교는 아무 소용이(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독재자(살인자)를 법으로 재판하고 처벌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서 그런 독재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막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다고 모든 원한이 풀리고 고통과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빈말로 위로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경우에도 사적인 복수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 12,19)
“평화의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사탄을 짓부수시어 여러분의 발아래 놓으실 것입니다.”
(로마 16,20)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완전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나라이고, 동시에 ‘완전한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정의 구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일은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만일에 이 세상에 사랑만 있고 정의가 없다면, 그 사랑에는 힘이 없고, 금방 약육강식의 짐승들 세상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회개와 용서를 인정하지 않는 무자비하고 차가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빛 속에서의 삶 - 절망은 없다>
어제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게 된 예비부부의 카톡 메시지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형제가 어제 축일인 ‘사도 요한’ 세례명으로 이번 성탄에 세례를 받았으니 축하해달라는 내용과 더불어 부부가 정했다는 부부 십계명이었습니다.
“둘이 부부 십계명 정했어요.”
1. 바람을 피지 않기.
2. 휴일 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지내기.
3. 간섭하지 않고 반복하여 잔소리 않기.
4. 싸울 수 있으나 즉시 둘이 해결하기.
5. 서로 존중하기.
6. 거짓말 않기.
7. 서로 건드리지 않기.
8. 가족을 지켜주기.
9. 함께 하지 못할 때 미리 전화하기.
10. 10시 통행금지 시간 지키기.”
특히 오랜 고뇌 끝에 결단하여 결혼하게 될 자매는 한결같은 믿음으로 빛 속에서 살아 온 분입니다.
결혼하게 될 형제도 참 사연이 많지만 전에 자매와 함께 부산에서 수도원의 저를 방문했을 때 양말 세 켤레를 선물한 가난하나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분입니다.
예비부부 얼굴이 왠지 닮았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마침내 형제는 사도 요한으로 세례를 받았고, 5월에는 결혼식을 갖고 신혼 여행은 수도원 피정으로 대체하여 예약한 예비부부입니다.
새삼 빛 속에서 한결같이 살아 온 자매에게 절망은 없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입니다.
죽음이 절망의 마지막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새 삶의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주님을 떠나서 죽음의 의미는 해결 난망(難望)임을 깨닫습니다.
아침 성무일도 시 초대송과 세 후렴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무죄한 어린 순교자들의 화관이신 그리스도 나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초대송 후렴)
“어린이들은 마치 어린 양처럼 뛰놀며 그들을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였도다.”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출되어 하느님과 어린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이며, 아무런 흠없이 하느님의 옥좌 앞에 서 있는도다.
영원한 그리움이 그들 위에 있고, 기쁨과 즐거움이 따르겠으며, 걱정과 한숨은 사라지리라.”
이어지는 본기도 역시 이들 영혼을 위로하며 우리 모두 한곁같이 믿음의 삶을 살도록 격려합니다.
“하느님,
죄 없이 살해된 아기 순교자들이 말도 배우기 전에, 죽음으로 주님을 찬미하였으니, 저희도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무죄한 이들의 죽음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이미 이집트에서 모세의 탄생 시 파라오 임금에 의해 살해된 무수한 죄없는 히브리인 아기들에 이어, 오늘 예수님에 앞서 무죄한 이들이 순교하였고, 무죄하신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무죄한 순교자들의 피로 점철된 교회 역사인지요!
이런 악순환의 반복되는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빛속에서 하루하루 빛이신 주님의 인도하에 사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우리만이라도 악순환의 반복되는 역사에서 탈출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앞서 소개한 예비부부가, 또 오늘 복음의 성 요셉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악의 어둠 속에 하느님 빛의 인도 따라 악의 질곡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결코 절망은 없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 장면이 선과 악의 싸움 같습니다.
요셉과 헤로데 임금의 대결이지만 요셉의 배경에는 늘 빛이신 하느님이 계시니 실제는 하느님과 헤로데의 대결입니다.
그러니 악이 선을, 악마가 하느님을 결코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암흑속의 빛처럼 하느님은 주님의 천사를 통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구출해 주십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이미 하느님의 구원 섭리의 역사 안에 있는 요셉과 그 성가정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한결같이 하느님 빛에 따라 충실히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가장 성 요셉의 믿음의 삶이 감동적입니다.
바로 여기서 아기 예수님으로 인해 죄없이 죽은 아기 순교자들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궁극의 원인은 인간의 무지에 있습니다.
무지한 탐욕의 인간들에게 악순환의 반복되는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으로 인한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에게는 물론 하느님의 구원이 뒤따르겠지만, 우리가 무지속에 있는 한 무지의 악순환 중에 무죄한 이들의 죽음은 알게 모르게 계속될 것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무지의 질곡에서 벗어나 빛 속에서 사는 일이 화급하고 절실한 과제로 부과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빛 속에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요한을 통한 주님의 가르침이 고맙습니다.
인간 무지의 어둠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빛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이 해 줍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실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바로 이런 예수 그리스도만이 무지의 죄와 악에 대한 근원적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빛이자 생명이신 주님과 일치되어 빛 속에서 진리를 실천하며 살게 하십니다.
빛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 평생 삶의 인도자가 되시어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코 무지로 인한 악순환의 반복의 삶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제 제가 가르쳐 드린 ‘오소서, 주 하느님!’ 기도문을 자주 바치시기 바랍니다.
무지로 인한 악순환의 반복의 질곡에서 하느님 은총으로 벗어난 이들의 오늘 화답송 시편을 통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사냥꾼의 그물에서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의 도움은 주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네.”
(시편 124,7-8)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얇은 A4 용지 한 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의 절반을 접고 또 절반을 접고 또 절반을 접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절반을 접어 나간다면 몇 번까지 접을 수 있을까요?
그래도 10번은 접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해보니 7번까지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 A4 용지 접기의 기록이 기네스북에 있습니다.
몇 번일까요?
9번이었습니다.
저보다 단 두 번 더 접을 수뿐이었습니다.
종이접기도 이렇게 어렵습니다.
하물며 우리의 마음 접기가 과연 쉬울까요?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네가 참아!”라고 말합니다.
쉽게 마음을 접을 수 있을까요?
물질적인 욕심이 커지는 상황에서 “돈이 전부는 아니야!”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접을 수 있을까요?
마음을 접는 것은 종이접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딱 한 번을 접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포기하면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한 번만 접을 수 있다면, 이것이 커다란 경험이 되어 접어야 할 것들을 계속해서 접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접는 것은 특별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접는 것입니다.
그래야 잘못된 판단에서 벗어나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입니다.
헤로데 대왕은 점령군인 로마 정부가 정책적으로 세운 유다인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짜 유다인이 아니었고 혼혈 유다인 취급을 받던 이두메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인들의 비호를 받으면서도 유다인들에게 자기도 유다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부서진 성전을 다시 짓는 등의 열성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행동이 권력을 유지하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헤로데 대왕의 나이는 70세였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70세이면 젊다고 말하지만, 당시에는 엄청나게 많은 나이였습니다.
그런데도 권력욕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가 말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난 아기를 없애야겠다는 생각에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여버리는 악행을 합니다.
잘못된 마음을 접지 못했던 헤로데 대왕이었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진정한 겸손의 삶으로 자신을 낮추지 못했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해서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이천 년 넘게 욕을 먹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쓸모없는 마음은 과감하게 접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가리는 마음은 모두 필요 없는 마음으로 과감하게 접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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