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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elante, Estudiantes adelante!...
전진하라, 에스투디안테스 전진하라
-에스투디안테스 응원가 일부분중-
(60년대 후반 에스투디안테스, 사람들은 이들을 세계에서 가장 악마적인 축구팀이라 일컬었다.)
(폭력 축구의 선봉장인 에스투디안테스 감독 '오스발도 수벨디아')
1965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연고로 하는 축구 클럽인 에스투디안테스는 새로운 감독이 부임했다.
그의 이름은 '오스발도 수벨디아', 강력한 압박 축구를 바탕으로 추구함과 동시에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서슴치 않는 전형적인 결과 주의의 축구론자였던 그는 에스투디안테스에서도 자신의 철학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에스투디안테스의 에이스이자 플레이메이커였던 후안 라몬 베론,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의 아버지로도 알려져있다.)
60년대의 아르헨티나의 클럽들은 대체로 결과 지향적인 축구를 했으며 그 중 가장 강력한 팀이 바로 수벨디아가 이끄는 에스투디안테스였다.
그들은 1967년 아르헨티나 리그 우승을 시작으로 1968, 1969, 197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연패에 성공했으며
1968년에는 유럽 챔스팀vs남미 챔스팀간의 맞대결인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맷 버스비의 맨유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1968년과 1969년 인터콘티넨탈컵에서 보여준 에스투디안테스의 모습은 마치 19세기 영국 축구를 방불케하는 모습이었다.
이미 1966년 월드컵 잉글랜드vs아르헨티나의 경기에서 잉글랜드의 램지 감독이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동물들로 묘사하며 아르헨티나에게 큰 반감을 샀었다.
그러니 1968년, 이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를 대표로 하는 클럽들간의 맞대결은 그 열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상대로 골넣는 마르코스 코니글리아로)
(경기 중 에스투디안테스의 거친 파울에 고통을 호소하는 맨유의 조지 베스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펼쳐진 1차전, 경기 시작 전 홍염이 터지기 시작했고 에스투디안테스의 폭력적인 멤버들은 맨유를 괴롭히기 시작했으며
맨유의 노비 스타일스는 경기 내내 에스투디안테스 선수들로부터 얻어 맞았으며 후반 79분에는 오히려 퇴장을 당하고만다.
또한 에이스인 바비 찰튼 역시 거친 파울에 머리 부상을 입어 머리에 붕대를 감아야만했다.
에스투디안테스는 전반 28분에 후안 라몬 베론의 코너킥을 마르코스 코니글리아로가 헤딩으로 연결시켜 득점해냈고 이 골로 에스투디안테스가 1대0 승리를 거뒀다.
3주 뒤, 에스투디안테스는 2차전을 위해 맨체스터로 날아간다. 약 300명의 아르헨티나팬들의 경기장을 찾았고 경기 전부터 열기는 1차전 못지않았다.
경기 초반, 펫 크레란드의 슈팅은 호세 폴레티 골키퍼에 막혔으며, 전반 7분 에스투디안테스는 프리킥 상황에서 후안 라몬 베론의 선제골로 1대0 앞서 나갔다.
맨유는 후반 43분에 베스트가 우고 메디나와 신경전을 벌이다 퇴장을 당했지만 곧바로 윌리 모건이 동점골을 터트려 1대1을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은 부족했고 에스투디안테스는 적지에서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경기를 앞두고 악수를 하는 양 팀의 주장)
에스투디안테스의 폭력 축구의 압권은 1969년 밀란과의 인터컨티넨탈컵이었다.
1차전은 밀란의 홈인 산 시로에서 열렸고 밀란은 앙젤로 소르마니의 멀티골과 네스토르 콤빈의 골로 3대0 완승을 거뒀다.
2주 뒤, 2차전은 지난 해에 그랬던 것처럼 에스투디안테스는 홈에서 승리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기 전 에스투디안테스 선수들은 몸을 푸는 밀란 선수들을 향해 공을 던졌으며 축구 연습을 하지않고 바늘을 챙겨와 밀란 선수들을 찌를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에스투디안테스 선수들은 밀란 선수들이 터널에서 등장할 때 뜨거운 커피를 부우기까지했다.
에스투디안테스는 경기 내내 폭력적으로 밀란을 상대했고 첫번째 희생자는 피에티노 프라티였다.
그는 가벼운 뇌진탕으로 기억상실까지했다.
전반 30분 밀란의 지아니 리베라의 선취골이 터졌지만 전반 종료 직전 에스투디안테스는 코니글리아로와 아기레 수아레스의 연속골로 역전에 성공한다.
(결국 피가 터져 드러누운 네스토르 콤빈)
(얼굴이 부은 네스토르 콤빈)
경기는 2대1로 에스투디안테스의 승리로 끝났지만 1, 2차전 도합 4대2로 밀란이 인터컨티넨탈컵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밀란은 절대 웃을 수가 없었다. 리베라는 경기 중 가격 당해 부상을 입었으며 아르헨티나 출생의 프랑스 공격수인 네스토르 콤빈은 큰 상처를 입었다.
경기 전부터 조국을 버리고 프랑스로 갔다며 배신자 취급을 받은 콤빈은 가격 대상 1순위였고 에스투디안테스 선수들에게 파울 당해 코뼈와 광대뼈가 으스러졌다.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경기 도중 기절까지 했으며 경기가 끝나고는 병역을 기피한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경찰들에게 구속당하는 황당한 일까지 겪었다.
이 경기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대해서도 정치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 몇몇 에스투디안테스의 선수들은 구속까지 당했다.
대표적으로 리베라와 콤빈을 가격한 폴레티는 영구 자격 정지가 내려왔으며 콤빈의 코와 광대뼈를 부순 아기레 수아레스는 5년간 국제 대회 출장 정지가 내려졌다.
에두아르도 마네로에게는 3년간의 국제 대회 출장 정지가 내려왔고 이 경기 이후 수많은 유럽 클럽이 인터콘티넨탈컵 참가 보이콧을 선언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아르헨티나식 결과주의 축구의 극단적인 면모를 보여줬다.
첫댓글 미쳤나
허걱… 스포츠정신 어디루 갓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