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용근 사법연수원장은 작천 이남마을 출신 법조인이다. 한양대학교 법과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전국 고등법원장 가운데 최고 선임자에 해당되는 사법연수원장 자리까지 올랐다. 손원장의 고향사랑은 남다르다. 고등법원장 시절에는 전 직원들을 데리고 강진문화탐사를 자주 했다. 중학교 동창들은 지금도 가장 돈독한 정을 나누는 친구들이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높이 출세를 했지만 가장 마음이 따뜻한 사람으로 통한다. 누구와도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손원장의 모습은 소탈한 시골농부 같았다. 지난 6일 오전 경기도 일산에 있는 사법연수원장실에서 손원장을 만났다.
사법부는 마지막 진실의 보루... 투철한 정의감과 진실에 대한 용기 필요 초등학교 졸업상품 '국어사전' 보며 마음의 뿌리를 잃지 않도록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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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사법연수원장으로 부임하셨습니다. 사법연수원은 어떤 곳 입니까?
▷1971년 개원한 사법연수원은 우리나라 유일의 사법부 최고 교육기관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연수생을 교육하여 판사·검사·변호사를 배출하는 법조인 양성기관입니다.
▶판사로서 30여년을 지내오셨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생활해 오셨습니까?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 가치로서 법치주의를 실현하는 판사에게는 소수자를 보호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절대 권력이 판사에게 거짓을 요구하더라도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불이익을 받더라도 진실을 밝히고 지켜내는 것은 우리 판사들의 몫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판사들에게는 투철한 정의감과 진실에 대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조심스럽습니다만, 이런 마음으로 판사생활을 해 왔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80년대 신군부와 관련된 사건에서도 엄정한 판결로 소신을 관철하는 등 '소신파'로 평가받고 계시는데요, 그런 판결을 하시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습니까?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배운 그대로 헌법과 법률에 충실하려고 애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실에 대한 용기를 지켜 내기 위해서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기도하는 것이 어려움을 이겨 내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향 강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움이지요. 어렸을 때의 기억들이 늘 아늑합니다. 월출산의 풍광, 중학교 교정에서 바라본 수인산의 의젓함이 생각나지요. 지금도 마음이 서늘할 때 그저 강진에 내려가 고향 산천을 보며 마음을 추스립니다. 강진만의 해지는 풍광은 세계 최고일 것입니다. 세계8대경이라는 마닐라만의 석양 풍광보다 강진만의 그것이 더 낫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13대 조부께서 광해군 때 수군만호로 병영면에 있는 병마절도사영에 부임해 오셨는데, 그대로 강진에 정착하셨습니다. 13대 이하의 열조가 묻힌 선산이 작천면 상당에 있어 시제 때는 물론 명절 때 꼭 들립니다. 선산도 늘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고향 친구 분들 중에 가까이 만나시는 분들이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 병영중학교 동창들 가운데 여전히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들이 여럿 있습니다. 고향에 가면 거의 매번 수인관 식당 등에서 친구들을 만나지요. 작천면의 김정수, 병영면의 신정일(수인관 식당 사장), 김동곤, 옴천면의 조윤제 등이 그런 친구들입니다. 광주에 거주하는 친구로는 김용남, 최행근 등 더 많은 동창생이 있고 서울·경기도에는 그 보다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 동창회를 주기적으로 하고 있는 편이라서 그때 소식도 듣고, 얼굴도 봅니다. 중학교 동창카페(http://cafe.daum.net/donbatje)에 들어가면 언제라도 소식을 알 수도 있으니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요. 손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더니 중학교 동창회 카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동창들의 근황이 빽빽이 올라와 있었고, 강진신문에서 연재중인 '병영상인'을 올려놓은 글도 눈에 띄었다. 동창들의 글을 클릭하는 손원장의 표정이 마치 어릴적 고향으로 돌아간 듯한 모습이었다. ▶어렸을 적 고향 작천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습니까? 초등학교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하셨겠습니다. ▷기억이 많이 남아 있지요. 태생지인 작천면 이남리는 병영 생활권이라서 초등학교는 지금은 폐교된 '병영동국민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때 수석졸업생에게 주는 교육감상을 받았는데 부상으로 받은 국어사전을 지금도 책상 앞에 두고 내가 처음 먹은 마음의 뿌리를 잃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병영중학교 동창생들이 손원장을 찾아왔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이었는데 검산초등학교 신동요 교감, 무등건축 한승환 대표등이 반갑게 손원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동창들이 손원장의 어렸을 적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한승환 대표는 "손원장은 어렸을 적에 10년만에 한번 나올 정도로 머리가 좋다는 말을 들었다"고 자랑했다. 신동요 교감은 "손원장은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읽은 내용을 앞에 나가 친구들에게 자주 설명을 해주곤 했다"고 회상했다. 친구가 높이 출세하면 아무리 친한 사이도 멀어지기 쉬운 법이다. 출세한 친구는 바빠지기도 하고 어릴적 친구를 애써 멀리하기도 한다. 출세를 덜한 친구는 출세한 친구가 부담스러워 만남을 꺼리게 되어 서로가 멀어지는 것이 다반사다. 손원장의 친구들에게 솔직히 '너무' 출세한 친구가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다. 답변이 일제히 날아왔다. "손원장이 친구들을 너무 따뜻하고 자연스럽게 대해준다. 부담을 가졌던 친구들이 손원장을 몇 번 만나고서는 손원장을 더 좋아하게 된다" 손원장은 인생의 가장 소중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판사로서 원칙을 고수해 오시면서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 절대자에 대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법관으로서 진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신앙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 경우는 한양대 출신 1번 법조인이라는 위치를 수 많은 후배들이 보고 있다는 자긍심도 또 다른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 번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후보로 거명된 것을 들었습니다. ▷기회가 있었으나, 소망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문제야말로 하늘이 정한다고 생각됩니다. 후일 보다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서예와 한학에 능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수준이 어느 정도이십니까? ▷강진문화원에 저의 서예작품 난지귀하(蘭之貴何)가 있고, 도암면 다산수련원앞에 있는 다산어록비 가운데에도 저의 글씨가 있습니다. 병영교회 100주년 기념탑 비문표지글씨도 제가 쓴 것이며 강진베이스볼파크 표지석 글씨도 제가 감수하였습니다. 직접 보시고 평가해 주시면 합니다만 아무래도 전업 서예인이 아니라서 부족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고향 분들께 당부의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출향 인사들에게는 고향 아끼는 마음을 더 가져주시라는 당부를 드리겠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고향에 보답하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습니다만 강진은 특별히 더 고향다운 냄새가 짙은 곳이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고향에 계시는 분들에게는 남도답사일번지를 아끼고 가꾸는 긍지를 가지고 더욱 더 자랑스러운 살기 좋은 강진을 만드는 데에 모두 함께 노력하시는 모습을 기대하고 성원한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손용근 사법연수원장은
-1952년 1월 작천면 이남리 출생 -병영동초(16회), 병영중(15회), 광주일고, -한양대, 연세대학원 졸업(법학박사) -1975년 사법시험 합격(사시 17회)
-2005년 춘천법원장 -2006년 서울행정법원장 -2008년 대구고등법원장 -2009년 특허법원장 -2010년 2월 사법연수원장(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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