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7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령 삼위일체주일.hwp
200607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령 시 8; 창 1:1-2:4a; 고후 13:11-13; 마 28:16-20
세상에서 저만큼 설교를 짧게 하는 사람도 보기 드문 것 같습니다. 1~2시간 하는 경우도 있고 보통은 30~40분 정도인데, 저는 10 여분, 리액션도 없고, 목소리 높낮이도 없이, 그저 국어책 읽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늘 설교 준비는 큰 부담입니다. 듣는 분들의 반응도 신경 써야 하고,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기는 하는 걸까 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듣는 분들의 반응은 변화입니다. 어설픈 설교로 변화가 있다면 참 좋겠지만, 기대가 쉽지 않기에 또 부담입니다. 배울 때는 화려하고 유창한 기술을 익혔지만, 홍수에 마실 물 없다는 것처럼, 넘쳐나는 길고 화려하고 유창한 명설교에도 세상의 변화는 부정적입니다. 그렇다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한가지 포인트라도 잡으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짧고 굵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혹 변화가 있습니까? 기나 짧으나 역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일 뿐일 것입니다.
오늘도 역시나 기도로 준비합니다. “주님 무익한 종이 또 당신의 말씀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성령 하나님 도우시고, 지혜를 주옵소서”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가 무슨 영향력을 미치겠냐” 그래서 또 자학스러웠습니다. 그 순간 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셨는데, 이 모습을 통해 작은 역사라도 계획하시겠지”, 그래서 또 자신감을 얻습니다. 평생 이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데, 자학에서 벗어나 할 수 있는 선에서 하나님 명령 따라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 난 사람은 못 난 대로 산다”는 시구처럼, “약한 이를 들어 강한 이를 부끄럽게 한다”는 말씀에 힘을 얻습니다. 주보 표지에 실은 사진을 보면 왕버들 나무가 족히 수백 년은 되어 보입니다. 모진 세월 그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긴 손발을 뻗어 땅과 하늘, 세상을 품은 모습 같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보았습니다. 힘들어 보이는 한쪽 팔에 누군가 지지대를 세워준 모습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입니다. 그냥 내버려 둔다면 팔이 부러졌을 것이지만 미리 지지대를 받쳐서 편안하게 살도록 해준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은 천지 창조에 관한 내용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태초는 공허와 어둠에 있었습니다. 공허와 어둠은 무의미에 가깝습니다. 나와 관계 없음이 무의미일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천지 창조, “빛이 있으라” 빛을 창조하시고, 동식물과 사람,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제 나와 관계있음의 ‘의미 있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나와 너, 우리와의 관계 맺기라 할 수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의 무의미를 빛과 생명으로 활기차게 하셨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자연을 다스리라고 합니다. 다스림은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돌보고 가꾸는, 자연을 자연답게 하라는 것입니다. 무분별한 파괴를 일삼는 것이 아니라, 수백 년 된 나무의 팔이 부러질까 받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창조 후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공허와 어둠보다 생명이 약동하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돌보는 것을 좋아하신 것일 것입니다. 그렇게 역사와 시간이 흘렀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천지 창조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4대강 사업입니다. 이번에 코로나 19로 전국이 경제 위기에 빠졌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지만 긴급지원금 8조 원을 풀었다고 들었습니다. 자영업자와 서민 등, 절대다수 약자들이 기뻐하고 웃었습니다. 8조 원에 전 국민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22조 원 들어간 4대강 사업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고 합니다. 막대한 적자에 부실공사에 폐기해야 할 사업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화자찬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수천 년 흘러 만들어진 강줄기를 인위적으로 바꾸었지만, 자연의 복원력은 인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세계가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생겼습니다. 지구가 쉼을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기 오염이 줄고, 쓰레기가 줄고, 매연이 줄었습니다. 지구 멸망설로 우주에 이사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기후위기 때문입니다.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이고, 공격적이고,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들로 지구는 위기에 있었습니다. 지구는 코로나로 그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 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단순한 것인지 깨닫게 해 주는 시간 같습니다. 개인의 이익, 이기적인 계산은 스스로 자멸할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차별, 편견, 혐오는 결국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뿐입니다.
고린도 후서 본문에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한 분 하나님이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부가 성자를 통해, 성자가 성령 안에, 성자가 성령을 통해, 성부가 성자 안에, 어느 쪽이 되었든 모두가 모두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고백입니다. 어느 쪽이 높고 낮음이 아니라 한 분 하나이기에 동일할 뿐 역할이 다르게 구분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빈다”고 합니다. 삼위일체의 사귐처럼 우리는 서로 기뻐하고 온전하고 서려 격려하고 같은 마음을 품고 화평하게 지낸다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서에 예수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하나님의 명령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나님의 명령은 삼위일체의 사귐이고, 위에서 본 것처럼 바울의 권면입니다. 태초에 창조하신 천지를 가꾸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 아래 사는 생명이 서로 위하고 아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생명 되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구가 쉼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반생명적이고, 파괴적인 일에는 분노하고 미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 주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귐처럼 서로의 사귐 가운데 하나님의 명을 가르치고 지키는,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위하는 저와 여러분이길 간절히 두 손 모읍니다. 함께 시편 본문을 읽으며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