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통일 이후 베트남의 사회적 갈등과 통합 | ▶ 아시아◁태평양

[혜천]

통일 이후 베트남의 사회적 갈등과 통합 | ▶ 아시아◁태평양

2005.06.17 23:49

가우리(uuu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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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블로그 : 가우리블로그정보센터(GBC)

통일 이후 베트남의 사회적 갈등과 통합

김병로(金炳魯, 민족통일연구원 연구위원)

Ⅰ. 통일과 사회갈등

  통일은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이질적인 두 사회체제가 '충돌'함을 의미한다. 즉 역사적 전통과 정치체제로부터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인간공동체가 체제의 보호막 없이 부딪힘으로써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갈등을 야기한다. 통일에 따른 이러한 사회갈등의 증폭은 독일의 통일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2백만이 넘는 실업자가 발생하여 사회문제가 되고 있고, 정신문화와 사회의식에서 거리감과 빈부의 격차 등은 지역갈등으로 집약되어 동서독간의 심각한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통일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적절히 관리하고 조정해 나가야 한다. 사회학자 파슨즈(T. Parsons)는 사회적 갈등을 원만하게 조정?통합하기 위해서는 사회체계의 구성요소들이 전체체계를 지나치게 위협하지 않고 서로 공존.균형을 유지하면서 외부의 환경에 대해서도 체계의 독특성을 보유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개인들은 사회적 역할기대를 개인의 가치지향 유형으로 내면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북한도 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이질적 사회체제가 충돌함으로써 파생되는 사회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관리해 나가며, 동시에 개인들의 생활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들을 모색해야 한다.

  지난 연말 베트남을 견학하고 여러 학자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20여년전 통일을 이룬 베트남은 어떤 사회갈등에 직면하였고, 그것을 어떻게 조정해 나갔는가 하는 것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또한 도이모이 정책 이후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 문제점들은 무엇이며 이러한 문제들이 통일베트남의 사회구조와 문화속에 어떤 갈등을 초래하며 또 어떻게 해소되고 있는가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들 중 여러 나라가 사회주의 내부의 갈등의 증폭으로 인해 체제가 변화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베트남은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배경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궁금하였다. 이러한 관심사들을 이 글에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통일이후 베트남 발전의 역사는 10년을 단위로 크게 이분된다. 통일이후 1976년부터 도이모이 정책을 추진하기 전인 1985년까지는 사회주의 개혁기라고 부를 수 있으며, 1986년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도이모이 정책 추진기로 부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통일이후 베트남 사회의 갈등과 통합을 사회주의 개혁기와 도이모이 정책추진 시기로 구분하여 각 시기에 해당하는 갈등과 통합의 역학관계를 살펴보고 평가해 본다.

Ⅱ. 사회주의 통일과 사회갈등의 잠복

  1975년 통일을 이룩한 베트남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 각 분야에 걸친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하여 사회통합을 시도하였다. 베트남은 먼저 남베트남 정부에서 일했던 군인, 공무원, 경찰로부터 자본가와 지주 및 '우파'지식인에 이르는 소위 '반동분자'들을 척결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베트남 정부는 수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정치범'으로 분류하여 베트남 전역에 설치된 100여 곳에 격리.수용하여 사상개조 및 재사회화교육을 실시하였다.¹⁾

  동시에 반동분자들에 대한 인구재배치 정책을 실시하였다. 베트남정부는 전쟁기간동안 과밀해진 도시인구를 분산하고 변방지역의 토지개발과 농업집단화를 통한 농업생산 증대를 위해 '정치범'들의 가족과 종교신자, 자본가와 상인들을 이주시켰다. 이로써 사회주의 개혁기 10년 동안 약 250만명의 사람들이 '신경제지역' 또는 기타지역으로 강제이동된 것이다.

  이러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당과 지방정부, 공장, 기업, 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서 북부출신들이 남부지역에 파견되었다. 하노이대학의 한 교수의 말에 의하면 통일이 된 후 사이공대학 교수들 가운데는 프랑스로 건너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2∼3년간 '훈련'을 받은 후에 다시 복직했으며, 북베트남의 교수들에게는 남베트남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장려하여 최소한 대부분의 고위 직책은 이렇게 남하한 사람들이 차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기존의 사회적 유대는 와해되고 사회관계의 긴장이 조성되었으며 지역갈등으로 발전되었다.

  한편, 베트남은 사회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계획경제 및 집단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개혁에 착수하였다. 1976년 제4차 전당대회에서 채택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6∼80)은 남부지역의 계급구조 재편에 촛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사적소유권의 폐지와 화폐개혁 등으로 봉건지주세력과 '반동매판자본가'는 몰락했고, 농민들도 협동농장에 편입²⁾되었다.

  교육과 문화 및 종교부문에 있어서도 베트남 정부는 사회주의적 개조를 실시하였다.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을 창출하기 위한 교육개혁이 단행되었고 언론기관 폐쇄, 출판검열 실시, 외국방송 청취금지 등 자본주의의 '퇴폐적' 문화 잔재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카톨릭교회를 탄압하였고 불교에 대해서는 분할통치 및 체제내로 편입을 모색하였다. 한편, 정부주도의 농민조직과 청년단체, 여성단체 등 각종 사회단체가 조직되어 당의 지도노선을 상명하달식으로 전달하였다.

  이렇듯 급변한 생활환경 속에서 사회갈등은 이데올로기의 위력에 감추어져 겉으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지도층에 있는 베트남의 학자들이 언급하듯이 "베트남의 통합과정은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베트남 통합과정에서 이념갈등은 없었다"는 평가는 적어도 북베트남의 입장에서 보면 표면상으로 이념적 대결 없이 제도적 통일이 신속하게 이루어졌음을 대변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민족주의를 추종하는 편이었고 사회주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지도층의 입장에서 이러한 평가를 내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점은 남부사람들의 심리적 열등감과 좌절감을 간과한 것이었다. 베트남의 통일은 사회주의 이념과 체제가 우월한 것으로 인정되어 북베트남은 남베트남 사람들에 대해 전쟁의 승리자로, 정복자로 군림하였다. 이로써 남베트남 사람들은 그동안 자기들이 지녀왔던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전면 거부당하고 집단적으로 범죄자 취급을 당함으로써 심리적 열등감과 정체성 상실을 경험하였다. 사회주의의 '점령'으로 인해 남쪽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국노라는 창피한 느낌을 충분히 심어줄 정도로 남북간의 차별의식은 심각하였다고 한다.

  '해방'(베트남은 통일을 해방이라고 부른다)후 10년 동안 추진된 사회주의 개혁은 사회주의 제도를 급격히 재편하고 단기간의 의식개혁을 통해 사회주의 이념과 규범에 동의하는 통합체제를 구축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제도적 통합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통합하지 못하였으며 사회주의 체제에 적극적으로 동화시키는데는 실패하였다. 정치범수용소를 통한 인간개조나 인구재배치 정책은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격리시켰으나 사회주의의 규범을 내면화시키지는 못했다. 종교적 탄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불교 및 카톨릭 지도자들의 반사회주의적 저항과 반체제운동은 간헐적으로 지속되었음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 시기 베트남은 캄보디아?중국과의 전쟁 등으로 주변정세가 불안하여 효과적인 사회통합정책을 추진할 여유가 없었다. 내부적으로도 화폐가치의 폭락과 실업자 발생 등 경제불안이 계속되었고 극도로 경직된 당시의 이데올로기적 분위기 등으로 인해 사회통합은 국가기구의 물리적 기제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외부의 강제력은 일상생활을 통해 깊숙히 내면화되어 있던 남베트남의 사회적 관계나 관행을 단기간내에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Ⅲ. 도이모이 정책의 전개와 사회갈등의 표출

  1986년 도이모이 정책 이후 사회주의 개혁기에 잠재하고 있던 사회갈등은 약간의 자율적 시민공간이 허용되자 지역갈등, 계층갈등 등의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어 나타났다. 먼저 지역갈등을 살펴보면, 도이모이 정책 이후 시장사회주의에 비교적 빨리 적응하는 남부지역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북부지역 사람들과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져 있다. 현재 호치민시 주민의 연평균 소득은 약 420달러(현지에서는 950달러라고 함)로 전국 평균의 거의 3배이다. 호치민시의 가장 가난한 계층의 평균소득도 전국평균을 상회하는 200달러에 근접한다. 남북간에 산업구조의 차이와 시장화.개방화 정도의 차이로 인해 남부와 북부간의 생활수준 차이가 현격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지역간의 빈부격차문제는 빠르게 구조화되고 있다. 하노이의 교통수단으로 자전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호치민시에서는 오토바이가 거리를 누비는 현상은 남부와 북부의 경제적 격차를 분명하게 입증한다.

  베트남의 이러한 지역격차에 대해 북베트남 사람들은 북부주도에 의한 민족통일의 성과를 '훼손'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며 지역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1975년 공산화 이후 남부지역 사람들에 대해 인구이주정책과 재사회화 정책으로 많은 정치?경제적 차별대우가 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이 경제적으로 부상함으로써 지역갈등은 더욱 복잡한 국면으로 비화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지역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북부에 보다 많은 해외투자를 유치하는 한편 북부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특혜적 재정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들이 남부지역의 불만을 초래하자 베트남 정부는 1995년 북부의 호와빈수력발전소에서 남부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송전탑공사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극히 비효율적인 이러한 사업을 통해 베트남 당국은 북베트남인들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남베트남인들의 불만을 무마시키려고 하였다.³⁾

  계층의 분화와 갈등도 도이모이 정책과 더불어 파생되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 가운데 하나이다.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베트남 경제는 국가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존재하는 이중구조를 형성하였으며, 주민들은 국영부문에서 기본적인 봉급과 사회적 혜택을 향유하는 동시에 부업을 통해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하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⁴⁾ 그 결과 계층간 격차가 점점 커져 1970년대까지는 1.5∼2배 정도에 불과하던 빈부격차가 1994년에는 10배이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빈부격차는 시장경제가 활성화되고 있는 남부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베트남에서 부의 축적은 개인적 연줄과 권력에 대한 접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전직 관료 혹은 당간부, 중국계 베트남인, 그리고 해외에 거주하는 베트남 교포(100만명) 등이 신흥부유층으로 등장하고 있다. 신흥부유층의 부의 축적과정에서 권력과 지위, 개인적 연고 등을 이용한 부정부패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당간부와 전직관료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따른 권한과 정보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으며 통일이전 남베트남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촐롱지역의 중국계 베트남인들도 이러한 부패구조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호치민경제대학에서 만난 한 교수는 "부정부패는 현재 우리나라의 재난"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당과 국가가 부정부패의 퇴치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흥부유층의 성장 및 사유화 추진과 더불어 부정부패가 만연한다면 계층간의 갈등은 증폭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갈등이 아직 본격적인 계급갈등 양상으로 표출되지는 않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노조활동과 농민들의 산발적인 시위는 많은 문제를 빚고 있다. 예컨데, 600만명의 산업노동자들은 비국영기업 부문에서 활발한 노조결성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1992년 복수후보제 선거와 노조의 자체 후보추천 등이 허용되었다. 또한 1988년 10월에 메콩델타지역에서 몰수된 토지의 반환과 부패관료의 경질을 요구하는 농민시위가 있었고, 같은해 11월에도 호치민시에서 농민 수백명이 참가한 시위가 발생하였다.

  젊은층들의 이념적 성향의 퇴색도 도이모이 정책과 더불어 파생된 사회갈등의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대학생들의 자각적인 학생시위가 1988∼89년 사이에 중국의 영향으로 간헐적으로 발생했다. 이들의 주장은 입학조건 완화, 대학자율성 보장 등 교육환경 개선과 이데올로기 위주의 교육 시정을 포함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또한 팝송과 같은 서양음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남베트남의 자본주의적 문화유산과 함께 젊은이들만의 하위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일부 젊은층은 시장경제에 능동적으로 적응하여 '영리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는데 벌써 혈안이 된 사람들도 있다.

  교육부문에 있어서도 이념적이고 이론적인 학문으로부터 실용적인 과목으로 비중이 옮겨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학과 컴퓨터, 정보학, 공학 등의 과목이 인기를 끌고 있으며 특히 법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하노이에서도 대학졸업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으로 하노이에 진출해 있는 대우(주)를 꼽고 있다는 사실과 하노이 대학 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공부하는 학생들의 상당수가 법학과 영어를 공부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이러한 추세를 반영해 준다.

  한편, 도이모이 정책과 더불어 언론의 보도자유(1986)가 허용되고 대중매체와의 접촉이 넓어짐으로써 시민사회의 공간이 확장되고 있다.⁵⁾ 언론영역에서 당의 검열과 규제가 다소 완화되자 '바르게 전하고 진실을 말하자'는 운동이 전개되었고, 문학과 출판계에서도 베트남의 살론(salon)전통이 부활하여 당과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무대가 되었다. 언론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한 기자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언론의 자율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있음을 설명해 주었다.

  특히 당간부와 관료들의 부패를 고발하는데 언론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1986년 6월 까오방(Cao Bang)지역 당원들의 공금횡령 사건을 보도하였고, 언론의 추적으로 탄호아(Thanh Hoa)도의 당서기가 축출되기도 하였다. 현재 하노이, 하이퐁, 후에, 다낭, 호치민시 등에서 '문학협회'가 결성되어 문학평론 및 비평활동이 활발하다. 1990년대 들어 언론.출판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어 하손빈(Ha Son Binh)주의 TV방송국이 폐쇄되고 정부정책을 비판한 잡지사의 편집자가 해임되는 사태도 빚어졌다. 그러나 녹음기, VTR, TV, 라디오 등 대중매체의 보급으로 베트남인들의 지적 능력은 크게 향상되고 있다.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놀란 사실 가운데 하나는 어느 시골지역을 가더라도 TV 안테나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광경이다. 심지어는 가장 빈민촌이라는 강주변을 따라 지어진 판자촌에도 TV안테나가 조밀하게 세워져 있었다.

  종교활동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다. 베트남에는 종교활동에 있어서 '반종교선전'의 자유도 인정되어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자유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만 전도나 선교의 자유는 없다. 프랑스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는 600만명, 개신교 신도는 30만명 정도가 있다고 한다. 호치민도 종교는 인간을 위해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활동은 정치적 색채를 띠지 않는 범위내에서만 허용되며 공안원들은 종교인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인구의 80% 이상을 확보하고 있는 불교를 친체제적 종교로 묶어 두는 전략을 취하며 불교계내의 분파를 이용하여 분리지배하고 있다.

  베트남은 도이모이 정책의 추진으로 남북간의 지역갈등, 계층간의 갈등 등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고, 기존의 조직체계내에서 다양한 시민사회적 욕구가 분출함으로써 사회갈등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시민운동과 저항은 동구의 경우처럼 정치적 불만이나 반체제를 지향하는 조직적인 것이 아니며 정치세력화된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이 유교문화 전통으로 인해 시민사회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억제되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까지는 사회갈등이 기존의 제도권 내에서 적절히 통제.조정되고 있는 상태이다.

Ⅳ. 역사문화적 자원동원과 사회통합

  도이모이와 더불어 표출되기 시작한 사회갈등이 폭발하지 않고 적절히 조정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1996년 8월 제8차 전당대회는 베트남이 추구하는 사회주의는 베트남 공산당이 지도하는 민족경제를 수립하는 것임을 천명하였으며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만 완전한 자유경제 체제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을 취했다. 자유시장체제는 생산성은 높지만 사회주의의 목표 가운데 하나인 '사회적 형평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트남 정권 지도부가 주장하는 이같은 이념적 지향은 도이모이로 파생된 사회적 갈등을 어떻게 흡수할 것인가?

  다분히 이중구조적인 이러한 모순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는 베트남 특유의 실용주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 100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미국으로부터는 20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지배를 받음으로써 서양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프랑스는 베트남 사회의 생활중심이었던 '락'이라는 혈연공동체를 해체함으로써 전통적인 규제로부터 개인을 풀어주었다. 또한 결혼식, 장례식 등 주요 생활양식에서 프랑스식을 따르게 되었으며, 외형적인 영향 못지 않게 베트남인들의 가치의식에도 큰 변화를 주었다. 20년간에 걸친 미국의 개입 또한 베트남에 소비주의와 상업주의의 문화를 확산시켰고, 이러한 서구의 영향은 베트남에 실용주의 문화가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베트남의 개방적?실용주의 노선은 베트남 지도자 호치민에게서 대표적으로 발견된다. 호치민은 1920년대에 이미 풍부한 해외경험을 통해 실용주의적 정신을 터득하였다. 호치민은 1918년에 8개 조항을 주장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이민의 자유와 해외여행의 자유'(제5항)를 요구한 대목도 발견된다.⁶⁾ 호치민의 '8개 조항'과 유사한 내용이 1946년 3월 김일성의 '20개조 정강'에도 실려 있지만 김일성에게는 '이민의 자유'나 '해외여행의 자유'와 같은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호치민은 1952년 10월 베트남 정부의 8개정강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외국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에 대해서 보호한다"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만큼 베트남은 호치민에게서부터 개방적이며 실용주의적인 사고를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베트남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데는 무엇보다도 전쟁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을 비롯하여 현재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나라들을 보면 사회주의 정권수립 과정에서 혹독한 내전을 경험한 나라들임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시켜주는 요인중의 하나가 공산주의 혁명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대중들이 혁명활동에 참여함으로써 혁명이념을 내면화했는가 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변수중의 하나가 바로 '무력화'(militarization)의 범위와 정도라고 할 수 있다.⁷⁾ 혁명과정에서 무력화는 혁명이념에 직접 또는 간접적 형태로 사람들을 동원한다.

  베트남은 30년간 전쟁을 치른 나라이다. 베트남은 19세기 말 우옌왕조가 붕괴된 이후 프랑스 식민주의에 저항하고 미국과의 일전을 불사하면서 민족해방과 국토통일을 차례로 성취하였다.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을 통해서만 300만명의 인명이 사망하였고 4백만명의 부상자와 1백만명의 고아가 발생하였다. 하노이와 호치민시에 잘 꾸려진 전쟁박물관과 전쟁범죄박물관 등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호치민시의 전쟁범죄박물관에 전시된 집단학살, 기형아출산, 고문 등은 제국주의를 혐오하도록 만드는데 충분한 것 같았다. 박물관의 마지막 코스로 사진과 함께 전시된 '성고문 전시실'은 베트남 사람들의 체제수호 의지를 극도로 자극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전쟁세대인 베트남 사람들에게서는 '전쟁으로 다져진' 민첩성이 그들의 생활에 배여 있는 것 같다. 프랑스와의 55일간 마지막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은 주민들의 협동심과 단결력으로 승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베트남은 프랑스 군대가 주둔해 있던 넓은 외곽지역을 달구지와 삽, 괭이 등을 이용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면서 프랑스군을 물리쳤던 것이다.

  구찌마을의 구찌터널을 방문하고서는 베트남 국민들의 생존의지와 강인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였다. 총 280km나 되는 지하땅굴을 3층으로 파내려갔다는 사실, 그것도 현대적 장비가 아닌 호미와 망태만을 가지고 엄청난 지하터널을 주민들의 힘으로 팠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좁은 입구로 어떻게 그 많은 흙을 퍼낼 수 있었을까? 지하3층에는 강을 따라 중간 중간 만들어 놓은 도주로, 내부에 설치되어 있는 회의장, 의료시술대, 안전장치 등 각종 시설, 환기구 설치에 대한 배려, 터널중간에는 몸이 적은 베트남 사람들만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좁은 통로, 주민들의 일사불란한 연락망체계 등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믿기 힘든 사실들이다. 이러한 삶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무슨 일이든 못해낼 것이 있겠는가하는 생각과 함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언제든지 단결할 수 있는 저력을 갖고 있다고 느껴졌다.

  이처럼 베트남의 전쟁은 주민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 체제대결 구도를 내면화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체제고수 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쟁을 통한 폭력화의 과정에서 주민들은 혁명이념의 선택에 대한 물리적 강요나 심리적 불안감 등으로 반제국주의 가치의식을 체험적으로 습득하였다. 또한 전쟁을 통해서 정권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민족해방투쟁을 지휘한 군사지도자로서 곧 정권장악의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의 전쟁경험은 도이모이 이후에도 사회통합력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 것이다.

  한편, 베트남은 사회주의 체제를 민족주의와 적절히 융합?발전시켰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해방투쟁을 주도함으로써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인민대중의 지지와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즉 민족해방 투쟁과정에서 독립과 근대화의 이중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계급투쟁의 이념적 목표를 어느 정도 절충하였으며, 이러한 정책노선의 유연성 때문에 인민대중이나 노선을 달리하는 정파의 불만을 체제내부에 수용할 수 있었다. 또한 베트남이 내세우는 사회주의 이념은 대체로 과거의 공동체 이념이나 민족적 종교가 지닌 평등주의적 요소를 비자본주의적 발전이념과 결합시킨 민족적 사회주의 이념의 성격을 지닌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은 자신들의 사회주의 체제가 '평등사회'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유난히 강조한다. 자본주의를 '빈익빈 부익부'의 체제로 규정하고 사회주의는 '평등'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나타난 사회주의는 맑스-레닌식의 소유권의 유무로 자본주의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계급주의적 접근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정의와 평등사회를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사람들은 베트남에 대한 물질적인 파괴 뿐만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의 정신적 파괴를 시도했다," "미국이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무기를 투하함으로써 베트남 사람들의 민족성을 없애버리려 하였다"는 호치민 사회과학원의 한 노교수의 증언은 베트남의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와의 전쟁을 통해 다져졌음을 실감케하였다.

Ⅴ. 한반도 통일시대를 내다보며

  베트남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가 그렇듯이 사회주의에 대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호치민경제대학의 교수들은 현재의 베트남 경제체제에 대해 시장경제라고 부르면서도 엄밀히 말하면 '국가가 지도하는 사회주의 경제'라고 하였다. 이는 경제분야에서 국가의 주도적인 소유와 국가의 주도적인 역할을 인정하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공산당의 지도를 확립해야 한다는 점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평등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사회주의 경제라고 설명하였다.

  국가소유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한다는 대명제는 설정해 놓고 있으나 국가가 어떻게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지, 또 현재 약 50:50으로 되어 있는 국유-사유의 비율을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조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또한 경제체제의 대외개방 정도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개방하는 것이 바람직 한 것인가, 또 누구를 위해 개방할 것인가 등에 대한 많은 문제점들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리고 빈부격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자유시장경제'와 베트남식의 '당지도하의 시장경제'가 다른 점이라고 이론적으로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빈부격차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다.

  베트남의 학자들과 토론하면서 베트남식 사회주의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하면 "국가가 강하고 국민이 부유하며 사회가 공평하고 문화가 문명한 사회"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사회가 살기 좋아져서 지난날 사회주의 개혁시기에 나라를 떠났던 난민들이 이제는 '자발적으로' 귀환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사회주의가 쇠퇴해가는 이 시대에 과연 베트남의 토양에서 역사문화적 자원을 활용한 사회갈등의 통합은 지속될 수 있을까?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전쟁으로 얼룩진 역사와 도이모이 정책의 여러 현장을 목격하였다. 베트남의 통일과 사회갈등, 그리고 통합 등을 생각하며 한반도 통일시대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우선, 북한의 붕괴로 통일이 이루어졌을 경우 통일후 재사회화 정책이 매우 중요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회주의 개혁시기에 추진한 재사회화 정책은 많은 문제점을 던져주었다. 이런점에서 최근 베트남으로 귀환하는 난민들에 대해서는 재사회화 혹은 재교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재조정(reorientation) 혹은 재적응(readjustment)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유연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통일이 되면 어떤 방법으로든 재사회화교육은 필요할텐데 과거 냉전시기 베트남이 행했던 것처럼 피정복자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과 재교육을 통해 강압적인 방법으로 체제에의 동의를 얻어내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강압과 폭력은 일시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잠복시킬 수는 있으나 결국 더 심각한 증오심만을 만들어 내고 말 것이다. 자발적인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통합을 도모해 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북쪽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사회변화를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남북한의 통일이후 발생할 사회갈등을 예상한다면 도이모이 정책과 더불어 발생하는 베트남의 사회갈등이 보다 적절한 시사점을 준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은 도이모이 정책으로 경제가 호전되고 있지만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고 부정부패, 지역갈등 등으로 상당한 갈등을 겪고 있다. 북한은 개혁.개방이 본격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은 문제시되지 않고 있지만 부정부패는 광범위하게 만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한사회에서도 수서비리사건과 최근 터져나온 한보사건 등으로 부정부패가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이렇게 볼 때 체제전환과 개혁과정에서 부정부패문제는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갈등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한편, 베트남에서는 남쪽사람들의 정치적 열등의식이 도이모이와 함께 상승한 경제력으로 열등감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는 물론 북쪽사람들의 정치적 우월의식에 손상을 줌으로써 새로운 갈등을 야기하고 있지만 남베트남에 대한 차별의식은 상당히 해소된 것이 사실이다. 정신적인 열등감을 경제적 지위의 성취를 통해 극복한 셈이다. 그러나 남북한의 경우에는 북한사람들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모두 열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북한사람들을 통합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북한주민들이 경제적으로 잘 살기 전에는 심리적 열등감이 극복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니 통일후 남북간 사회통합은 비관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통일과정에서 남북한은 사회통합을 위해 어떤 역사문화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을까? 남북한민족은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다져진 강인한 국민성을 지니고 있다. 전쟁으로 많은 부정적 유산도 물려받았지만 전쟁을 통해 습득한 '민첩성'은 한국민의 자산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민첩하고 조직적인 사회적 자원을 국민적 자산으로 동원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베트남에서 처럼 민족주의를 사회통합의 자원으로 충분히 활용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우리민족이 일제와 미제를 타도한 세계제일의 민족이라고 교육시키고 있다. 남한은 2차대전 이후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였다. 남북한이 민족주의를 잘 다듬고 발전시켜 민족적 자부심과 자긍심을 심어줌으로써 남북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데 사용해야 할 것이다. 호치민과 같은 민족적 영웅은 없지만 민족적 지도자를 발굴하고 민족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21세기는 아시아.태평양 연안의 국가들이 세계역사를 주도하는 아.태시대가 전개될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낙후되었던 사회주의 국가들도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하며 경제발전을 꿈꾸고 있다. 아시아 어느 나라를 보아도 비약적인 도약을 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남북한이 만일 분단된 채로 소모적인 군비경쟁이나 인력낭비를 지속한다면 21세기에는 후진국가로 낙후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가 하루속히 정착되어 다가오는 세기에는 통일된 선진국가로 발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고대한다.

1) 전상인, "베트남에서의 시민사회 형성," 」민족과 문화? 제2집(1994), p. 140.

2) 남부베트남지역에 대한 농업집단화 정책은 농민들의 저항으로 호응을 얻지 못하였으며, 1980년의 경우 남베트남 농업집단화 실적은 9%에 불과하였다. Long, "Some Aspects of Cooperation in the Mekong Delta," David G. Marr and Christine P. White, eds., Postwar Vietnam: Dilemmas in Socialist Development. Ithaca: Cornell University Southeast Asia Program, 1988, pp. 163∼173.

3) 박종철, "베트남의 도이 모이 이후 사회적 갈등과 방어적 시민사회," p. 8.

4) Anh, Vu Tuan, ed., Economic Reform and Development in Vietnam. Hanoi: Social Publishing House, 1995, pp. 147∼196.

5) Carlyle A. Thayer, "Political Reform in Vietnam: Doi Moi and the Emergence of Civil Society," Robert F. Miller, ed., The Development of Civil society in Communist System (North Sydney: Allen & Unwin, 1992), pp. 110∼129.

6) The Gioi Publishers, The Man Who Made a Nation--Ho Chi Minh. Hanoi: The Gioi Publishers, 1996, p. 16.

7) Irving Horowitz, Foundations of Political Sociology(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72), pp. 205∼230.

출처: 남북나눔운동 연구위원회 베트남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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