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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존 도우
1.
2년, 아마도 2년 반 쯤 되었을까.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던가 천상병이 귀천에서 말했듯 잠시 머물다 가는 소풍쯤이라 해도 과장은 아닐 게다. 은유가 아니라 삶이란 뜨네기의 그것이 아니가 싶은 것은 익숙해진 공간과 사람들이 잊히는 게 얼마나 쉬운가 새삼 느껴지기 때문이다.
벌써 그리 되었다. 햇수로 3년.
주말이면 이반들과의 만나 술 한 잔 기울이는 게 낙이었던 나는 어느새 그들 사이에서 도태되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먹고 사는 일이 여유를 주지 않았고 외로움도 잠시 견딜만 했다. 주말이면 출장이 잦았고 타지에서 낯선 풍경에 젖어 있는 시간이 흔했다. 노을이 잠시 머물다 걷히듯 감상도 한 겹 흐리게 가슴 맡에 번지다 스러지곤 했다. 그러고 나면 고단한 일상에 쉽게 눈을 감고 잠들었다가 다시 눈떠 살게 되는 또 다른 하루. 일년이 삼백 육십 오일이니 대략 천일에 가깝게 그렇게 살았던 모양이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친구 하나가 결혼 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부산으로 출장을 갔다가 가뜩이나 식욕이 부진했던 나는 평소에 좋아하는 자극적으로 매운 음식이 입에 당겼다. 지역색을 아는 바가 없다보니 언뜻 떠오르는 친구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 이쪽을 알게 된 게 십년 전이니 그 친구와의 인연도 그만큼 오래되었다. 한 때는 부산과 서울간의 가깝고도 먼 거리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만나던 벗이었다. 그는 5년 전에 서울에 올라와 자리를 잡고 그리 원하던 서울 생활에 대한 기대를 만면에 가감 없이 드러냈었다. 그 뒤로 두어 번 술자리를 갖은 것이 고작, 다른 사람들과 마찬 가지로 우리도 서로 잊혀진 채 살아 왔다.
핸드폰을 꺼내고 잠시 머뭇거린 건 당연했다. 불성실했던 관계의 끈을 새삼 더듬어 붙들고 묶어보려 하니 손놀림이 어색한 것처럼 그의 번호를 떠올릴 수도 본명을 기억하는 것도 더뎠다. 난 차창을 바라보며 창밖으로 펼쳐진 범일동의 일부와 유리면에 반사된 나의 실루엣을 더듬었다. 부산 친구와 거닐던 거리의 추억은 오히려 선명한데 내 모습은 정체성의 모호함 만큼이나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공을 들여 지난 기억들을 꼼꼼히 되짚었다. 이 동네가 부산에서는 가장 이반 문화가 활성화된 곳이라고 했다. 일종의 특구처럼 골목마다 제법 많은 게이바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늦은 시간 불켜진 간판을 찾아 들어가 보면 십중팔구는 이반들의 시선을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따라 들어간 곳은 작고 아담한 원샷바이기도 했고 꽤나 너른 가라오케이기도 했다. 지역은 달라도 사람은 다를 게 없어서 무언가 색다른 것을 기대했던 나는 똑같네, 하는 당연한 결론에 공연히 맥이 빠졌었다.
그 날의 술자리는 즐거웠다. 전에도 부산에 온 적은 있었지만 대게는 바다를 보다 갔다. 부산 바다를 좋아하게 된 것은 너르고 위락 시설을 잘 갖춘 해운대 같은 해변이 있는가 하면 송정처럼 아늑하고 정감어린 감상을 주는 곳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너무 변해서 인위적인 되어버린 해동용궁사도 그 때는 예스런 풍취가 제법이었고, 역시나 지금은 더렵혀진 기장도 그 때는 수면 아래 깊이 잠긴 발끝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맑았다. 덕분에 내게 있어 부산은 대도시이면서도 바다가 공존하는 수변 도시로서의 매력이 가슴 깊이 새겨져 있었다. 이반 문화를 접하게 된 때에도 무언가 다른 분위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마도 그처럼 서울과는 다른 부산의 지방색이 크게 작용한 때문이리라.
아무튼 첫 게이바는 소위 원샷바라고 하는 디귿자 형태의 바가 거의 대부분의 공간을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술집이었다. 손님은 둘 뿐이었고 스태프도 없이 주인 혼자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타지 사람이라 배려를 해주려 그랬는지 말을 걸으며 관심을 보였다. 바의 주인을 제외하고는 K역시 아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인데 어느새 일행이었던 것처럼 다른 두 손님과도 어울리게 되었다.
가라오케로 술자리를 옮겨서도 합석하게 된 우리는 그 밤이 늦도록 술을 기울였다. 이것저것 술을 섞은 탓에 취기가 들어 정신이 흐려지자 미리 잡은 인근의 모텔로 가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친구 역시 동시에 일어났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까무룩 졸음에 빠지듯 머릿속이 캄캄한 채 눈 뜬 곳은 엉뚱하게도 친구의 집이었다.
K는 서면에서 가까운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점심때가 다 되어 일어나 부스스한 채로 부모님들의 눈치를 보며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섰다. 해장을 하러 간 곳의 음식이 꽤나 맛깔스러웠다. 해산물을 제외하고는 경상도 음식에 기대가 없던 나는 의외의 진미가 감탄스러워 연신 맛있다는 표현을 남발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 날 내내 친구는 먹꺼리에 신경을 쓰는 듯 보였다. 저녁에는 대공원 가는 길 중턱에 골목 깊숙이 민가를 개조해 만든 대구뽈찜집에서 평생 잊지 못할 맛을 경험하기도 했다. 저녁엔 해운대가 조망되는 회타운에서 푸짐한 회를 안주로 가볍게 소주를 나누었다.
거진 십년이 지나 한동안 연락이 전혀 없던 그 친구를 기억하는 방식이 고작 그 뿐이라니 내가 맺는 인간관계라는 것이 그토록 빈약했던 모양이다. 배를 불린 기억으로 기억하는 사람... 문득 그의 실명을 떠올린 나는 통화 버튼을 눌러 연락을 넣긴 했지만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는 와중에 핸드폰을 닫고 싶은 주저가 들었다.
여보세요?
K의 목소리가 메말랐다. 잠결이었을까.
나야 민.
어, 민아 오랜만이다.
반기는 기색도 잠긴 음색에는 눌려 있었다.
목소리가... 어디 안 좋아?
내 질문에 그는 목청을 가다듬는다. 가라오케에서 마이크를 쥐고 있을 때면 청중이 일시에 귀를 기울이는 저음 특유의 미성이 조금 살아났다.
아니, 누워 있었더니.
사정을 듣자하니 토요일인 오늘 일찍 출근을 하고 피로감에 몸을 누였다고 했다. 아마도 졸음을 타던 중이었을 것이다. 수년만에 수화음을 통해 귀에 닿은 내 목소리가 현실감 없이 느껴졌겠지. 내가 그를 떠올리는데 시간이 필요했듯 그도 아직은 기억을 더듬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나야 나.
나는 내 존재를 한 번 더 알렸다. 친구가 처음으로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답했다.
알아. 민이. 우석이잖아.
그는 비교적 내 실명을 빨리 기억해냈다. 실마리가 무엇이었을까.
출장을 왔는데 먹을 데가 마땅치 않아서.
어딘데?
국제 호텔.
범일동... 글쎄 나도 하도 오래 돼서 얼른 떠오르는 곳이 없네.
그렇지. 내가 뜬금없었지...
왜 대구뽈찜 먹지 그래 거기 좋아했잖아.
그의 기억은 내 느린 그것에 비해 간단히 십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 넘는다.
기억하고 있네.
물론이지.
당연하다는 듯 그의 단조로운 어투가 어딘가 깊숙이 묻혀 있던 그리움이란 감정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혹 부산에 있으면 좋으련만.
주말 저녁에 왜 집에 있어?
나 요즘 안 나가.
왜? 혹시 애인 생겼어?
애인? 흐흐흐...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지면서 다시 잠겨들 듯 음색이 건조해졌다.
나 결혼했거든.
아...
난 혀가 잘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잃었다. 서른 중반이나 되고서도 임기응변에 미숙한 나는 입안이 말라붙는 기분에 뜨악해서 허둥대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만에야 친구가 어색한 침묵을 물리쳤다.
근데 미안해서 어쩌냐. 도움이 못돼서...
아니, 내가 엉뚱하지.
그래 그럼 잘 지내다 올라가라.
그래, 너도 잘 지내고.
성급히 핸드폰을 닫았다. 태연히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남의 집인 상황처럼 무안하도고 당혹스런 기분이었다. 이제, 너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었구나.
울컥 적조한 기분이 들었다. K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과 이반을 구분 짓는 세상의 이쪽과 저쪽 어디에도 맥이 닿지 않는 현실 때문이었다. 이반 친구들과 지내느라 소원해진, 물론 저들이야 결혼 이후에 여유 없는 삶을 살게 마련이어서 그렇지만, 일반 친구들과는 일찌감치 남이 되었다. 게다가 이반 친구들 역시 한 둘 잠적하여 뜸해지다가 나 역시 일상에 젖어 지내는 동안 두절되면서 관계 자체가 무산되어버린 셈이다.
호텔을 나서 인근 골목을 걸으며 눈이 가는 데로 간판들을 훑었다. 식당은 여러 곳이 눈에 띄었지만 딱히 발을 들이게 만드는 곳은 없었다. 먹는 일이 급한 게 아닌지도 몰랐다. 바다와 육지를 가르는 방파제 위를 걷는 것처럼 경계를 지나는 듯했다. 호텔이 있는 건널목 이쪽의 블록이나 혹은 건널목 건너 저쪽 이반들이 횡행하는 블록에서도 모두가 무관한 사람들 뿐.
신호등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동안 문들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액정에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 하나 생각났다. 현대 백화점 건너편에 조방 낙지집이 있어. 유명해.’
K가 보내온 것이었다. 짧게 고맙다는 말만 답신에 담아 보냈다. 신호는 그 사이 다시 바뀌었고 나는 여전히 길을 건너지 못한 채 멀리 거리의 불빛들을 더듬어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문득 떠올리고도 시간을 확인하게 되지는 않았다. 저녁을 먹긴 해야 할 텐데 생각하면서도 더는 궁리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처럼.
그런 나를 흔들 듯 핸드폰이 연신 울렸다. K의 메시지.
‘식당 찾았어?’
‘아니, 그냥 대충 때우려고.’
‘너 혼자구나?’
‘응.’
‘그럼 제대로 안 챙겨 먹잖아. 너.’
내가 침묵 하는 동안 그는 일반의 영역을 빠져나와 경계에 선다.
‘술이나 할래?’
‘괜찮겠어?’
발신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울리는 벨소리. K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쩌면 너는 나보다 앞서 경계를 걷고 있었을까. 우리는 의례적인 서로의 사정을 더는 묻지 않고 간단히 장소를 정했다. 그는 십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라고 했고 나 또한 건널목을 앞두고 있는 터라 그가 일러준 매니아, 라는 술집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골목에 들어서 곧 간판을 발견했다. 골목이 비교적 한적했던 탓에 나는 그처럼 외진 느낌의 술집을 예상했다. 그러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왁자한 음성에 가슴이 떠밀리는 듯 했다. 빈 좌석이 눈에 띄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선들이 흘금 거리며 입구를 스쳤고 나는 할퀴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똑바로 들지 못했다.
주인인 듯 보이는 사람이 와서 친절히 자리를 안내했다. 구석진 곳으로 테이블 하나가 비어 있었다. 자리를 잡고는 일단 호프 한 잔을 청했다. 시종 사람 좋은 미소로 대하는 주인에게 일행이 오면 주문을 마저 하겠다고 양해를 구한 다음에는 어색함이 얼마간 가셨는지 가게 안의 활기가 싫지 않게 느껴졌다. 눈을 바로 뜨고 소심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공교롭게도 가까운 쪽은 살피지 못했다. 별안간 앞으로 마주 앉는 사람을 발견하자 몸이 절로 움츠려들었다. 벌게진 얼굴에 장난기 넘치는 미소가 잔뜩 배인 얼굴의 남자였다. 서른 내외로 보였고 중키에 보통 체형이었다. 모자를 눌러 써서 그늘진 눈매는 조금 강인해 보였다. 아마도 개구쟁이 같은 인상 때문이겠지만 무슨 장난이라도 칠 속셈인가 싶어 경계가 들었다. 그는 느닷없이 술 한 잔을 시키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권한다는 걸 깨닫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어색하게 손을 마주 잡는 데 그의 아귀힘이 세게 느껴졌다. 친밀하다기 보다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나로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대함에 있어서 무람없어 보였다.
“잘 지냈어요?”
“...?”
“잘 지냈냐구요. 오랜 만이죠? 한 삼년 쯤 됐나?”
그제서야 난 겨우 입을 땠다.
“저, 죄송하지만, 누구시죠?”
“어라?”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모자를 조금 벗더니 능숙하게 손을 집어넣어 머리카락을 쓸었다. 모자챙이 들리자 그늘에 가렸던 이목구비가 번듯하게 드러났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기름한 눈매가 매력정인 호남형의 남자였다.
“형님 저 기억 안나요?”
“네, 죄송합니다.”
“아, 미치것네. 저에요 저.”
나는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고 그도 선을 뵈듯 얼굴을 들이밀기까지 했다. 기억을 해야 할 것 같은 당위감에 다급하게 기억을 더듬는다지만 그는 내게 미상의 존재였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 그를 바라보느라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겨우 표정을 수습한 내가 껄끄러워진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내가 이제야 저를 알아봤다고 생각했는지 의기양양한 기색이면서 섭섭하다고 꾸지람이라도 하듯 슬쩍 눈을 흘겼다.
“형님 뭡니까. 날 그렇게 못 알아보다니!”
난 무안해져 얼굴이 화끈 거리는 채로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벌려 되물어야 했다.
“죄송한데 제가 기억력이 좋질 못해서... 어디서 뵀었죠?”
“에?”
그의 얼굴에서도 이제 장난기가 걷히기 시작했다. 입꼬리 말린 웃음이 서서히 쳐졌고 기울였던 상체를 뒤로 하고 등받이로 기대었다. 눈매에도 모호한 기색이 감돌았다. 진심인지 아닌지 내게 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아차 싶은 표정을 짓는 게 감지되었다. 순간적이었지만 그 역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곧 고개를 푹 숙이고는 미안하게 됐습니다, 말하고 자리를 뜰 때에도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미가 느껴졌다. 어줍잖게 마주 고개를 숙이며 아니요 괜찮습니다, 말은 해 놓고도 그 당혹스런 일별로 인해 술집 분위기에 막 익숙해지려던 차에 튕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사이에 주위의 시선이 모조리 내게 쏘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댓글 갈매기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부산 배경에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물도 스릴이 넘치고, 역시 호감님이세요.
뭔가 스릴넘침 ..^^
익숙한 문체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으아우아!!!!!!! 오랜만의 신작! 두근두근^^
잘 읽었습니다.. 근데 천정명-> 천상병 아닌가요..
네 수정한 것 같은데 안 되어 있네요.. 근데 혹시 제가 아는 열이형인가요..
재밌어요 ㅎㅋ
호감님, 적묘님...제가 기억하는 작가분들.... 오래오래 건필하시기를~
너무 제밌어요 끝까지 모고 말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