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박해 하느님의 종 (충청~1798~1800년 순교자)
이도기 바오로 1743-1798년 방 프란치스코 ? -1799년
박취득 라우렌시오? - 1799년 원시오 야고보 -1730-1799년
장신필 베드로?-1799년 배관겸 프란치스코 ? -1800년
이현보 프란치스코 1773-1800년
이기도 바오로
1743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난 이기도(李道起) 바오로는 고향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본디 그는 글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의 사랑고 천주교의 덕행만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후에 이 바오로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비신자들을 입교 시키는 데 사용하였다. 또 천주교 신앙 때문에 여러 가지 위협을 받게 되자 이곳저곳으로 히해다니며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가족들과 함께 청양을 떠나 산 너머에 있는 정산으로 이주한 뒤에., 그곳 옹기첨에 터전을 잡았다.
1797년 이바오로의 나이 54세가 되었을때 정사박해가 일어났다. 그때 이 소식을 들은 인근의 한 비신자가 와서'천주교인들의 두목으로 고발하겠다,' 며그를 위협하였다.이에 겁이 난 그의 아내가 도망칠 것을 권하였지만. 그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일을 하려하지 않았고. 신입 교우들이 자신의 행동에 걸려 넘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그해 6월8일. 이 바오로가 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에. 한 떼의 포졸들이 나타나 그를 체포하였다. 이내 포졸들은 십자고상과 교회 서적 몇 권을 찾아낸 뒤. 그에게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하면서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정산 관아로 끌려간 바오로는 자주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때때로 포졸들은 그를 장터로 끌고 나가 모욕을 주거나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으며.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 앞에서 용감하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곧 하였다.시간이 지나면서 바오로는 자주 굶주렸고.혹독한 취위로 고통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앉거나 눕거나 끊임없이 천주를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라는 천사의 말을 전해 주는 목소리를 듣고는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저럭 1797년이 지나고.1798년 새해가 밝았다. 이 바오로는 다시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하루는 관장이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하자. 그는 "정산 고을을 전부 주신다 해도 천주를 배반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마음이 약해 질 것을 두려워하여 옥으로 찾아오는 아내와 교우들을 물리쳤다.6월10일 아침. 포졸들이 와서 사형 집행일이 되었다고 알려 주자.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어찌할 줄을 몰라하였다. 이윽고 그는 포졸들에게 이끌려 정산 형장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주변에 모인 비신자들까지 이 형벌에 가세하였다.그러나 그는 결코 배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성모 마리아님, 하례하나이다." 라고 외쳤다.이 바오로는 여러 차례 실신하였고 이틀 후 저녁 무렵.관장은 그의 죽음이 궁금하였는지' 가서 살펴보고 죽지 않았으면 아주 죽이버리고 오라.' 고 명령하였다. 포조들은 이 명령에 따라 그의 몸을 잔인하게 짓이겨 버렸다.
이제 이도가 바오로의 몸은 더 이상 사람 꼴이 아니었으니. 그때가 1798년 7월24일(음력 6월12일)로,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관장의 명에 따라 묻혔는데, 7-8 일 뒤에 정산에서 조금 떨어져 사는 교우들이 그 시신을 비밀리에 찾아다가 그들의 마을에 안장하였다.
방 프란치스코
방(方)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면천의 ''여' 고을 태생으로 감사의 비장(裨將)을 지 낸 사람이었다.그러므로 교우들사이에는 방 비장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우연히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 고는 구누보다도 빨리 이를 받아 들렸다. 그런 다음 정산필 베드로 회장과 박취득 라우렌시오 원시보 등과 자주 만나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였다. 교리를 실천하는 데 비상한 열심을 가졌던 방 프란치스코는 교우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게 되었다.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으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 그들과 같이 순교하기를 간절이 열망하였다. 그러던 중에1797년의 정사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방 프란치스코도 다음 해에. 홍주에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많은 형벌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러렀다.이 때 그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은 교우 두 명을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방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천주와 동정 마리아에게 감사드리고 나서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이지만. 관장이 이렇게 후한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섭리의 은혜인데. 어째서 당신들은 슬퍼하고 풀이 죽어 있소.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고, 만일 우리가 천당을 얻을 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또 어떤 기회를 기대할 수 있겠소."
이때 천주께서 방 프란치스코의 권고와 격려에 효력을 부여해 주셨다. 그 결과 그의 두 동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스스로 뉘우쳤고, 오래지 않아 거룩한 기쁨을 같이하였다. 그들 셋은 함께 홍주 읍내에서 순교하였는데, 순교일은
1799년 1월21일 (음력 1798년 12월16일)이었다.
박취득 라우렌시오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 고향인근에 전파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이후 그는 한양으로 올라가 지황 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박 라우렌시오 고향의 여러 교우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였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관장 앞으로 가서 "무죄한 사람들을 사납게 매질하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가둔다는 것은 무서운 죄가 아닙니까?" 하고 항의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해마다 홍주 관야로 이송되어 잔인한 형벌을 당하였지만.조금도 용기가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옥에 갇힌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조정에서 석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므로 순교의 영광을 얻지 못하였다. 박 라우렌시오는 이때부터 원 야고보, 방 프란치스코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1797년의 정시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에게 체포명령이 내리지게 되었다.
소식을 들은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지만 아버지가 되신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면천 관야에 자수 하였다.이욱고 문초가 시작되었고. 박 라우렌시오는 그때마다 천주교 교리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화가 난 관장이 그에게 형벌을 가라도록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이 후 그는 다시 몇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고는 옥에서 여러 달을 지냈다. 그러다가 새 관장이 부임한 뒤 다시 문초를 받았으나.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증언하고 홍주로 압송되었다.
홍주에서도 박 라우렌시오는 똑같을 질문에 똑같은 답변을 하였고, 갖가지 형벌을 인내로 참아 내었다. 그러자 홍주 영장은 화가 나서 다리를 부러뜨리고,죽도록 매를 치라.' 고 한 뒤 옥에 가두었다. 이어 영장은 감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그때 감사는'그놈의 다리를 치되. 열네 번을 때려도 항복하지 않거든 아주 죽여 버리도록 하라.' 는 명령을 내려보냈다.
이후 박 라우렌시오는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주 영장 앞으로 끌려 나가 형벌을 받았다. 또 옷이 벗겨진 채로 진흙 구덩이에 갇혀 밤새껏 추위와 비바람으로 고통을 받은 적도 있었다. 바로 이 무렵에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옥에 갇힌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천주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지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 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이 발현은 약간 희미하기는 하였지만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박 라우렌시오는 모두 일천사백 대 넘게 맞았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을 마시지 못한 적도 있었다. 옥졸들은 이 제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옷을 벗긴 다음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박 라우렌시오는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가자.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목을 매면 죽을 것이오. " 라고 옥졸에게 말하였다.
실제로 이튿날 밤에 교우들이 그에게 다가가서 보니 모든 상처가 기적적으로 나아가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제서야 이를 요술이라고 생각한 옥졸이 새끼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으니. 그때가 1799년 4월3일(음력2월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가량이었다.
원시보 야고보
원(元)시보 야고보는 충청도 홍주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 (良人) 집안 출신이다.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가 지난 1789년 무렵, 곧 그의 나이 60세가 다 되어서야 사촌 동생 원시장 베드로와 함께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시보' 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본디 성풍이 어질고 순하여 정직하고 활달하였던 야고보는.입교 하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며 온갖 덕행을 실천하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산을 희사하였고, 금요일마다 금식을 하였으며, 이곳저곳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점차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701년 신해박해가 일어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홍주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곧장 원 야고보와 사촌인 원 베드로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원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갖가지 혹형을 받은 뒤. 1793년에 순교하였다. 뒤에 소식을 들은 원 야고보는 사촌과 함께 순교의 영광을 먿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795년 무렵, 원 야고보는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주 신부에게 성사를 받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바로 첩을 내보냈다. 이로부터 2년 뒤에는 정사박해가 충청도 전역을 휩쓸게 되었다.이 와중에서 원 야고보도 1798년에 체포되어 덕산 관야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혹형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를 섬기고 제 영혼을 구하고자 천주교를 봉행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신앙을 증언나였다.
그런 다음 홍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덕산으로 끌려와 몹시 두들겨 맞았으며, 형벌로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1799년에 원 야고보는 감사의 명령에 따라 병영(兵營)이 있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가 덕산을 떠나는 날 아내와 자식과 친구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려면 인간의 본성을 따라가서는 안 되네.모든 고통을 참아 낸다면. 기쁨 가운데 주님과 착하신 동정 마리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대들이 여기에 있으면 내 마음이 흔들리니 돌아가게. 이성을 잃고 대사(大事)를 그르칠 수는 없네. "
청주에 도착하자마자 원 야고보는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당하였다. 관장은 그를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순교의 원의로 가득찬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덕산에서 이미 두 다리가 부러졌지만 원 야고보에게 다시 온갖 혹형이 가해졌으며, 그는 결국 이를 이겨 내지 못하고 말았다.그때가1799년 4월17일(음력3월13일)로 당시 그는 나이 69세였다.원시보 야고보가 순교한 뒤 그의 육체는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여인 것 같았으며, 이 광경을ㄹ 목격한 50가족가량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정산필 베드로
청청도 덕산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난 정산필(鄭山弼) 베드로는 본디 성격이 괄괄하고 힘이 예사롭지 않아 모두가 무서워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로는 아주 겸손하고 온순해졌으며.누구에게나 친절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정 베르도는 주 신부를 찾아가 직접 그에게 세례를 받는 행복을 누렸다. 또 이후에는 내포 지역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이 맡은 직분을 다하였다.부지런히 기도와 독서를 하였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격려하는데 정성을 하였다.
정 베르로에게는 박 라우렌시오, 원 야고보,방 프란치스코 등 친절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오가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1797년에 일어난 정해박해 때에 자신들이 살던 마을에서 체포되어 모두 순교하였다.
정 베드로가 체포된 때는 1798년이니 1799년이었다. 그는 덕산 관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용감하게 천주의 가르침을 증언하였다. 또 옥에서는 함께 동료들을 격려하였으며,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도 천혀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사형 집행일이 되자, 정 베드로는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동료들에게 같이 먹자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천주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음시기이니.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먹읍시다. 이제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런다음 정 베드로는 형장으로 나가 장사형''(또는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799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에서 60세 사이 였다.
1) 장사형 (杖死刑) :죄인이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는 형벌
2) 참수형 (斬首刑) : 목을 메어 죽임
배관겸 프란치스코
충청도 당신의 진목(현 충남 당진군 석문면 장항리)출신이 배(裵)관겸 프란치스코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입교하였다. 관명(관명)은 "발은' 으로 얄려져 있다. 그의 고향 진목은 충청도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내포 지역 안에 있었다. 배 프란치스코는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신앙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석방되었으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 열심히 하느님을 섬겼다. 이후 그는 서산으로 이주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 이웃에 있던 면천의 양제(현, 충남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로 돌아와 교우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룩하였다.
1794년 말 조선에 입국한 주 야고보 신부는 다음 해부터 지방의 신앙 공동체를 순방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프란치스코도 이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1798년에 시누를 모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교우들과 함께 양제 마을 안에 강당을 마련하고 그해 10월 3일 한 밀고자가 포졸들을 이끌고 양제 마을로 들이닥쳤다.포졸들은 곧바로 배 프란치스코를 체포하여 홍주로 압송하였다. 관장은 그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면서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고 천주교 서적을 갖다 바치라.' 고 강요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에 홍주 관장은 화가 나서 사실 그대로를 공주 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감사는 프란치스코를 청주 병영(兵營)으로 이송하여 문초하도록하였다. 청주에 이르러 배 프란치스코는 원 야고보 등 다른 교우들을 만나 고통을 함께하였다. 그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였으며, 온몸의 살이 헤어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날 정도가 되어서도 그는 영웅적인 인내로 모든 것을 참아 내었다.
그러나 형리들의 매질이 계속되면서 끝내 이를 이겨 내지 못하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0년 1월7일(음력1799년 12월 13일). 당시 그의 나이 60세가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