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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사람
마가복음 8:22-26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이적이 복음서에 다섯 차례 이상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벳새다에 맹인을 고친 사건은 다른 맹인들을 고쳐주셨던 것과는 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이나 병자를 고치실 때 말씀으로 하시든지, 안수를 하시든지 한 번 만에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벳새다에 맹인에게는 두 단계를 거쳐서 고쳐 주셨습니다. 왜 두 단계를 걸쳐서 고쳤는지에 대해서 대부분의 성도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본문이 주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두 단계를 거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이 사건에는 제자들 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교훈을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벳새다에서 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면서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심으로써 어느 정도 눈을 뜨게 하신 후, 다시 한 번 더 안수하심으로써 눈을 완전히 뜨게 하셨습니다. 한 번 안수한 것이 능력이 모자라서 반쯤 눈을 떠서 한 번 더 안수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 번 만으로도 얼마든지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만지시고 고쳐주셨습니다(마9:29). 여리고의 맹인은 ‘보라’는 말씀 한 마디로 당장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눅18:42).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나사로야 일어나라’는 한 마디로 충분했습니다.
본문 말씀을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8장 전체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건너편을 가시면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15-21)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우리에게 떡이 없다’고 하며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도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9절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이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열두 바구니이니이다 ... 일곱 광주리이니이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여기서 ‘열두 바구니’와 ‘일곱 광주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숫자적으로는 열두 바구니가 많아 보이지만, 양적으로는 일곱 광주리가 더 많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17),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21)고 하시며 계속해서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것과 사천 명을 먹이셨던 이적을 베푸신 것은 굶주린 무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 기진할까 해서 배부르게 먹인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는 것이나,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도 일곱 광주리를 남는 이적은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이적을 행하신 것은 배고픈 무리를 배부르게 해 준 것이 중요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주목적은 제자들이 이러한 엄청난 이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달아 알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엄청난 이적을 베푸시는 것을 눈으로 보았고 직접 떡을 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면서도 이러한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달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설교자들이나 성도들도 떡을 떼어 많은 무리를 배부르게 먹인 이적을 굶주린 자를 축복해 주셔서 배부르게 먹여 주셨다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해 달라고 기도하고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해 달라고 축복하는 자들에게 제자들을 꾸짖고 책망하셨던 것처럼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고 크게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을 꾸짖고 책망을 하시는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는 벳새다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고쳐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맹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23).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려면 가급적이면 사람들이 많은 마을에서 하시면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랐을 것 같은 데,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마을 밖에는 사람이 없는 빈들입니다.
예수님이 맹인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셔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막5:37).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실 때도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서 고쳐주셨습니다(막7:33). 변화산에 올라 가실 때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맹인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신 것은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냐’라고 물었습니다. 맹인은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24)라고 말했습니다. 맹인은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맹인은 눈을 뜨기는 했는데 완전히 뜨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보인다’고 했지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맹인도 시 신경이 완전히 죽어 아무것도 안 보이는 맹인이 있는가 하면, 불빛이나 그림자 같은 건물이나 사람의 형체를 어느 정도 희미하게 보이는 맹인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맹인의 눈을 똑똑하게 보이도록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희미하게 보이도록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맹인은 ‘사람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맹인이 보인다는 사람은 누굽니까? 마을 밖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맹인이 보인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이 맹인의 눈에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으로 보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맹인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맹인을 고치는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깨달아 알게 하는 메시지를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만 있는 데서 맹인을 고치신 것입니다. 맹인이 첫 단계로 눈을 뜨고 본 제자들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을 들었던 제자들의 모습이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베푸신 것은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달아 알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계속되는 엄청난 이적을 베푸신 것을 보고서도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깨달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맹인의 눈을 반쯤 뜨게 해서 제자들을 보고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신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적인 지식이었습니다. 사람도 아니요 나무도 아닌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걸어가는 나무와 같은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중재비들이었습니다. 미성숙한 제자들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대하신 만큼 성숙되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제자답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맹인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그제야 예수님께서 배안에서 책망하셨던 그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걸어 다니는 나무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와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기대가 있습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기대만큼 성숙하지 못한다면 나와 여러분도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사람’처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이 말씀에서 제자들처럼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도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사람’으로 교회를 왔다가 가지는 않은지 자신들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맹인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신지를 깨달아 알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마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깨달아 알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천 명이나 사천 명들에게 ‘떡을 먹고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깨달아 알지 못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깨달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 맘대로 한다고 해서 책망하지 않습니다. 수십 년을 교회 다니고 직분을 맡은 사람이 이제 막 교회 나온 사람처럼 한다면 ‘나무가 걸어 다니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막 학습 받고 세례 받은 사람이 모른다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빌립보 가이사랴로 가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들은 대로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더이다’라고 말했습니다(28). 당시 떡을 먹었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 나름대로 누구신가를 생각하고 서로 누구라고 말하는 것을 제자들은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선자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야 뭐라고 하든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예수님을 누구라 하느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 밖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교인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 것을 중요합니다. 직분도 맡았고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교회 다닌 지가 오래되었고 직분도 맡은 사람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달아 알기를 원하십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신앙적인 고백을 해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달아 알지 못하고 있다면 마치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사람처럼 예수님은 보십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은 제자들이 제자답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은 당시 제자들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맹인의 눈을 두 단계를 걸쳐서 고쳐 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다시 맹인의 눈에 안수를 하셨습니다. 두 번째 안수를 받은 후에 그가 주목하여 보니 사람이 제자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눈을 뜬 그 사람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의 눈을 뜨게 해 주었으니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곧 바로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오미의 두 며느리 중에 오르바는 집으로 돌아가고 룻은 시어머니를 따랐다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라고 하신 맹인은 오르바와 같은 의미로 생각합니다.
‘집으로 가라’는 말씀은 맹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뜨는 축복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와 함께 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병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따르고 제자가 되고 구원받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인이 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았다고는 확신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맹인을 두 단계를 거쳐 고쳐주신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올바로 깨달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알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달아 알고 고백하는 제자들에게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16:1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떡 먹었던 오천 명과 사천 명으로 교회를 세우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맹인이 눈을 밝게 해 준 그 사람을 보고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을 만나시고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고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을 하였고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부흥하는 교회라고 해서 교인 전부가 다 전도를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그 사람의 신앙이 바르면 교회는 부흥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동성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바라고 기대하시는 만큼 성숙한 교인이 되시기를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