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세계를 바꾼 가장 위대한 발명품
..무(無)가 유(有)로 바뀌는 순간, 인류는 한 단계 발전한다. 발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지는 노력의 산물, 즉 필요성을 느꼈던 부분을 개선시키고 보완하면서 만들어지는 작은 행위들이 모여 비로소 ‘발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발명품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활용되느냐이다. 활용은 또 다른 발명을 낳고, 발명은 또 다른 발전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편리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위해 발명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도전이 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발명품 중에서 세계를 바꾼 가장 위대한 발명품들을 꼽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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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과를 제어하는 시간계측장치 시계.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일정한 시간대를 규정하기 위해 천문학적 현상, 특히 태양과 달에 의존했다. 해시계와 더불어 양초시계, 등유시계, 물시계 등의 시간계측장치가 있었지만 이런 시계들은 맥박수를 측정하는 것처럼 단기간의 계측에만 사용되었다. 1270년에 영국 수도원에서 추의 주기운동으로 작동되는 톱니바퀴 시계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시계의 종소리에 따라 기도 시간이 결정되었는데, 1300년부터는 이 톱니바퀴 시계가 유럽의 대규모 교회와 대도시 시청에서도 사용되었고, 시계의 종소리에 따라 사람들의 하루 일과가 진행되었다. | 시계는 근무일과 휴일을 통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상공업 분야에서도 시간을 측정하는 일이 점점 중요한 행위가 되었다. 톱니바퀴 시계가 추와 중력을 이용하여 움직였던 반면, 1430년경에는 코일 용수철의 탄성에너지로 작동되는 태엽시계가 등장했다. 하지만 용수철이 팽팽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에너지 편차로 인해 시계가 항상 일정한 속도로 작동하지는 못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시계 세공업자들은 용수철 나선의 외부직경과 내부직경을 달리함으로써 탄성의 편차를 보완했다. 톱니바퀴 시계의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1657년에는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Christian Huygens)가 시간이 정확한 진자시계를 최초로 개발했다. 1713년에는 존 해리슨(John Harrison)이 휴대가 가능한 크로노미터를 발명해 항해를 하는 동안에도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말에는 프랑스의 시계 제조업자인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Abraham-Louis Breguet)가 충격흡수장치와 자동태엽 기능을 개발했다. 1918년에는 미국의 물리학자 윌터 가이톤 캐디(Walter Guyton Cady)가 수정(水晶)에 전기자극을 주면 매우 규칙적인 고주파 진동이 발생하며 이로써 좀더 정확한 시간측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나아가 1949년에는 보다 규칙적인 전자기 파동을 이용한 최초의 원자시계가 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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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알려주는 주머니 속의 북극성 나침반. 옛날 사람들은 방위를 확인하기 위해 태양이나 별의 위치를 지표로 삼았고, 바다에서는 바람과 구름, 조류, 특히 연안지역에서는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도 방위를 가늠했다. 기원전 2세기의 중국 사람들은 연철에 자성(磁性)이 있다는 것과 자침(磁針)이 고도의 방향지침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7세기경 탈레스도 ‘자력’을 언급했었다. 실제로 최초 나침반이 등장한 때는 1124년으로 자성을 입힌 바늘을 빨대 모양의 지푸라기 안에 넣고 이것을 물이 담긴 그릇에 띄우면 바늘의 끝이 북쪽을 가리켰다. 나침반의 원리는 12~13세기에 아랍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유럽의 항해사들은 줄에 매달린 자철석을 ‘방향을 지시하는 돌’이라고 불렀다. | 14세기부터 나침반은 흔해졌는데, 16세기에 이르러 항해용 자석 나침반은 오늘날의 것과 흡사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1492년에 감행한 신세계 탐험의 도중에 자침의 편차를 발견했다. 즉, 자기장을 지닌 지구의 남북극점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나침반은 정확하게 북쪽을 가리키지 못하고 현 위치에 따라 소위 ‘방위각’이라는 편차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편차는 심각한 항법상의 과실을 초래할 수 있었다. 17세기 말부터 지구의 자기장이 체계적으로 연구됨에 따라 나침반의 적절한 사용위치를 선택하거나 보정된 자석을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편차를 줄여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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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을 교정하는 광학 보조기구 안경은 13세기 말에 처음 등장했다. 렌즈의 굴절성은 이미 고대에 발견되었지만 이러한 특성을 시력 교정에 응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11세기에 하산 이븐 알-하이탐(Hassan Ibn Al-Haitham)은 확대효과를 지닌 렌즈를 시력 보조기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13세기에는 섬세하게 연마된 녹주석과 석영이 돋보기로 이용되었다. 13세기 말에 베네치아에서 개발된 안경은 두 안경알 사이에 리벳으로 고정한 막대를 두어 눈앞에 걸칠 수 있도록 했다. 노안을 교정하는 용도로만 사용되던 15세기의 안경은 안경알 둘레에 주철로 테를 둘러, 독서할 때 눈앞에 고정할 수 있었다. | 그 후에는 코걸이가 부착된 안경과 외알 안경이 출현했으며 근시를 교정하기 위한 오목렌즈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18세기 중반에는 프랑스의 안경업자 마크 토밍(Marc Thomin)이 강선으로 만든 안경다리를 부착한 안경테를 제작했고, 19세기 전반에는 렌즈와 도수를 산출하는 방법이 개발되어 안경의 성능도 개선되었다. 한편, 안경은 교양 있는 상류층의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기도 했다. 시력교정의 용도 외에도 렌즈에 색을 입혀 강한 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안경도 생겨났다. 이미 중세의 유리세공업자들은 화로의 열기와 눈부심을 방지하기 위해 보호 안경을 착용했으며, 에스키모인은 설맹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가면 모양의 안경을 착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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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장기보존하기 위한 획기적인 아이디어 통조림 캔. 오래 전부터 인류는 음식을 가능한 오랫동안 보존하고자 노력했다. 실제로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805년에는 프랑스 정부에서 군대의 식량공급에 적합한 식품보관방법 개발에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었다. 이때 프랑스의 제과업자 프랑수아 니콜라스 아페르(Francois Nicolas Appert)는 가열된 무균 식품을 병에 담아 진공상태로 보관하는 방법을 제안했는데, 병이 쉽게 깨지는 단점을 가졌다. 이후 1810년에 영국의 피터 듀란드(Peter Durand)가 함석깡통 통조림을 만들어 특허를 획득했다. 깡통 무게가 내용물보다 무겁고, 아무런 도구 없이 깡통을 맨손으로 열기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통조림의 인기는 대단했다. 1820년대 초, 영국의 윌리엄 언더우드(William Underwood)는 미국에 최초의 통조림 캔 공장을 설립했고, 1858년에는 미국의 이즈라 워너(Ezra J. Warner)가 깡통따개를 발명했다. 다루기 어려웠던 깡통따개도 발전을 거듭했다. | 1870년에는 깡통의 가장자리 부분을 쉽게 자를 수 있도록 작은 바퀴 모양의 칼날이 부착된 따개가 만들어졌고, 1925년에는 깡통의 가장자리에 따개를 끼우고 톱니바퀴 모양의 칼날로 깡통의 둥근 가장자리를 돌려가면서 따는 방식이 제안되었고, 1931년에는 전동 깡통따개가 등장했다.1958년부터는 미국의 카이저(Kaiser) 사에서 함석에 비해 가벼운 알루미늄으로 캔을 만들기 시작했고, 1959년 미국의 기계 제조업자 어말 프리즈(Ermal Freeze)는 깡통따개 없이 캔 뚜껑을 열 수 있는 ‘팝탑 캔(pop-top-can)’을 개발해 특허를 획득했다. 하지만, 오늘날 널리 사용되고 있는 알루미늄 캔은 환경에 악영향을 끼쳐 문제 해결이 시급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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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서기 1000년경 아라비아의 학자 알하젠(Alhazen)은 ‘한쪽 면에 작은 구멍이 있는 어두운 방’이라는 뜻의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에 대해 기술한 바 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을 통해 맞은편 벽에 외부의 상이 거꾸로 맺히는 장치였다. 1827년에 프랑스의 조제프 니세포르 니옙스(Joseph Nicephore Niepce)는 주석판을 사용하여 노출시간이 8시간인 ‘사진기’를 만들었고, 풍경화가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는 금속판에 은염을 도포하여 최초의 사진촬영에 성공했다. 1839년, 영국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는 최초로 종이 인화법을 발명했다. |
19세기 중반부터 사진기술은 특히 자연과학 분야와 언론, 군대, 예술 분야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사진은 화가들의 초상화를 대신했고, 회화기법도 사진의 영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19세기 후반부터 보다 견고하고 조작이 간편한 카메라와 필름을 만들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마침내 1861년에 토머스 서턴(Thomas Sutton)이 최초의 반사식 카메라를 발명했다. 1884년에는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이 셀룰로이드 필름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여 시장에 출시했고, 이후 코닥을 설립해 사진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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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진동을 전기의 파동으로 변환하는 전화기. 1830년경, 많은 실험가들은 음향 진동을 전기 파동으로 변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1863년, 사립학교 교사였던 요한 필립 라이스(Johann Philip Reis)는 소리를 전기로 바꾸어 장거리로 전송하는 장치를 고안해냈다. 그는 나무로 사람의 귀 모양을 만들어 송신장치로 사용했는데, 돼지의 내장으로 진동판을 만들어 이도(耳道)의 끝에 팽팽하게 연결시켜 소리가 진동할 때마다 진동판이 떨리도록 설계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전송수단은 아직 불완전한 단계였다. |
미국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은 1870년부터 하나의 전선으로 다수의 메시지를 동시에 전송하는 다중 전신 시스템 연구에 몰두했다. 주파수가 서로 다른 음향 진동을 전기 파동으로 변환시키고, 수신 장소의 개별 주파수로 여과시켜 다시 변환시킨다는 발상이었는데, 벨은 이 방식을 사용하여 언어도 전송할 수 있다고 생각해 결국 1876년 특허출원을 신청했다. 전화기는 미국과 유럽 전역에 빠르게 보급되었다. 최초의 전화망은 수신 범위가 30km에 불과했지만, 조지 캠벨(George A. Cambell)과 마이클 |
| 푸핀(Michael I. Pupin)이 1900년에 발명한 오도코일의 도입으로 전화기의 수신 범위는 2,000km까지 확장되었고, 이어서 1915년 전기신호를 증폭시키는 전자관이 도입되어 4,500km에 이르는 장거리 통화도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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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가 19세기의 경제성장과 교통발달의 원동력이었다면 20세기에는 자동차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최초의 자동차는 1770년에 프랑스의 공병 대위 니콜라스 조셉 퀴뇨(Nicolas Joseph Cugnot)가 포차를 끌고 가기 위해 만든 증기자동차였다. 하지만, 이 자동차는 실용화되지 못했다. 1885년에는 칼 프리드리히 벤츠(Carl Friedrich Benz)가 최초의 삼륜차를 제작했는데, 이는 엔진을 별도로 장착한 기존의 마차 형태가 아니라 차체와 엔진이 하나로 통합된 형태였다. 1886년에는 고트프리트 다임러(Gottfried Daimler)와 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가 오토(Otto)의 4행정내연기관을 장착한 최초의 사륜자동차를 제작했다. 1893년에 빌헬름 마이바흐가 발명한 기화기, 1899년에 특허를 취득한 카르단 샤프트(Cardan Shaft) 구동방식, | 20세기 초에 도입된 보쉬(Bosch)의 점화용 자석발전기, 그리고 공기타이어의 등장은 이후 자동차 기술 발전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1901년에 빌헬름 마이바흐는 칸슈타트(Cannstadt)에 소재한 ‘다임러 자동차 회사(Daimler Motoren Gesellschaft)’에서 마차의 특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최초의 현대식 자동차 메르세데스를 제작했다. 이는 현대식 자동차의 원형으로 1970년대까지 지배적으로 통용되었던 자동차 제작의 표준모델이 되었다.
..1877년, 미국의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은 오랜 시도 끝에 축음기를 만들어 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하는데 성공했다. 에디슨 축음기의 원리는 뾰족한 바늘이 납이나 밀랍으로 덧칠된 회전식 원통의 외피에 음의 진동을 새기고, 새겨진 홈을 바늘이 인식하여 진동판을 통해 다시 진동으로 변환시켜 소리를 재생시키는 것이었다. 에디슨은 자신이 발명한 축음기를 맹인을 위한 ‘귀로 듣는 책’이나 녹음기로 상용화시키려고 했지만, 음질이 좋지 않고 밀랍 원통의 가격이 너무 높아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1887년, 에밀 베를리너(Emil Berliner)는 밀랍 원통을 음반으로 대체시켰다. 그는 초기 실험에서 그을음을 입힌 유리판을 사용했는데, 진동판에 의해 움직이는 바늘이 유리판에 새겨지면서 소리가 녹음되는 원리였다. 그 다음에는 유리판 대신 밀랍을 입힌 아연판이 사용되었다. 이후 금속제 원반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음반의 복제가 가능해졌다.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음반에 녹음을 하려면 소리를 깔때기로 모아 진동판으로 전달하여 밀랍 판에 홈을 새기는 방식을 사용했다. 1925년부터 음반 산업에 널리 보급된 전기녹음 방식은 기계식 녹음을 대신했다. |
| 전기녹음 방식에서는 음의 진동이 기계적 진동이 아니라 확성기를 통해 전기 진동으로 변환되어 음질이 개선되었다. 음반의 크기가 커지고 회전수가 줄어들면서 음반의 재생시간도 길어졌고, 1950년대부터는 스테레오 음반이 대중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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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가장 중요한 발명품을 꼽으라면 ‘컴퓨터’가 최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사실 20세기 후반부터 컴퓨터는 현대인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레이더와 제트엔진, 로켓, 원자로 등 20세기에 고안된 기술적 발명품들과 마찬가지로 컴퓨터의 개발 역시 부분적으로는 군사적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되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컴퓨터를 제작하는 모든 기본원리는 10진법을 토대로 두고 있었다. 1938년, 독일의 건축기술자 콘라트 추제(Konrad Zuse)는 디지털 계산기와 2진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진법의 체계는 단지 두 개의 단위, 예 | 컨대 ‘0과 1’이나 전원의 ‘온(on)과 오프(off)’라는 신호로 작동하기 때문에 훨씬 적용범위가 넓고 유용했다. 추제의 연구를 지원했던 독일제국의 연방항공청은 그가 개발한 컴퓨터를 원격조종폭탄의 최적 항공역학 수치를 계산하는데 사용했다. 1944년, 미국인 수학자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은 컴퓨터 내에 프로그램을 저장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이에 따라 1950년에는 프로그램을 실행시킬 수 있는 컴퓨터가 최초로 출시되었다. 전자 컴퓨터의 발달사는 주요 부품의 특성에 따라 여러 세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세대 컴퓨터는 애니악(ENIAC)으로 1만 7,486개 의 진공관과 1,500여 개의 계전기를 비롯한 모든 부품들이 자그마치
140제곱미터의 면적을 차지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개발된 제2세대 컴퓨터는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때부터 컴퓨터의 크기가 작아지고 속도도 빨라졌다. 1960년대 초에 등장한 제3세대 컴퓨터의 특징은 모노리스(Monolith) 차단기로, 이 소형 개폐장치는 전기회로를 간소화하고 작업능률을 높였다. 제4세대 컴퓨터가 시작된 1971년에는 고성능 집적회로인 칩이 컴퓨터에 처음 사용되고, 1976년에는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PC)가 개발되어 보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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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훌륭한 발명가들의 덕분에 우리는 이처럼 편리하고 과학적이며 문명을 함께하면서도 감사를 를 느끼지 못함을 아쉬워 하면서 여기에서 더 새로움에 도전하는 분들에게는 격려와 찬사를 보냅니다.
위의 발명품들도 중요 하지만 지우개도 큰 발명품으로 평가 ............. 사람이 글 썼다가 지우지 못한다면 수정 할수 없겠지요.. 그 지우개는 여려면에서 사람에게 생각케 해주며 지울수 있다는 희망을 준 발명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