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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 그 사나이] 10
S#1. 시골집 앞 (밤)
(9부 엔딩에 이어)
지현을 안고 이마에 뽀뽀하는 경민.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표정이 굳어지는 택기.
지현, 경민을 살짝 밀어내고 빠져나오는데...
이때 지현과 택기가 딱 마주친다.
지현은 이내 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택기도 그냥 지나치려는데,
경민, 택기를 불러 세워 인사를 나눈다.
경 민 (멋쩍은 듯, 다가오며 깍듯이) 안녕하십니까. 지난번에는 제가 무례했습니다.
택 기 (뚱하니 보면)
경 민 농사의 기본도 모르는 우리 지현한테 농사 가르치시느라 힘드시지요?
택 기 아닙니다. 저도 실례가 많았습니다.
경 민 요즘 해충이 심해서 고생이 많으시다고요.
택 기 아, 예...
경 민 앞으로 우리 지현이 농사일 좀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또 뵙죠.
경민과 택기,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헤어진다. 경민은 기분 좋게 차에 타고, 택기는 뚱하니 집으로 돌아서는데, 그런 택기를 보며 의아한 수진.
S#2. 시골집 뒤꼍 (밤)
액비통을 뒤꼍에 쌓아놓는 택기.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액비통만 옮겨놓는데, 잠시 후 지현 괜히 쭈삣쭈삣 다가와,
지 현 뭐, 도울 일 없어요? (액비통 들어주려는데)
말없이 액비통 잡아 채가는 택기.
지 현 (괜히 무안하고 어색해서) 왜 그래요? 도와준다니까...
택 기 됐어. 괜히 비싼 액비 쏟지 말고 저리 가. 안 그래도 수진이가 이거 두 번이나 만든다고 욕 많이 봤어.
지현, 그 말에 삐죽 기분이 상해서 돌아서는데, 그 바람에 액비통 넘어지려 하자,
택 기 (얼른 액비통 잡으며) 저리 가라니까! 괜히 얼쩡거리다가 세 번 만들게 하지 말고!!
지 현 누가 뭐래요? 가면 되잖아요! (팩 토라져 돌아선다.)
가는 지현을 바라보는 택기. 이때 화장실에서 숨을 참으며 튀쳐 나오는 지현모. 지현을 바라보는 택기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S#3. 동 마당 평상 (밤)
평상 위에 둘러앉아 다 같이 식사를 하는 사람들. (평상이 좁으면 돗자리라도 깔고 다 같이 둘러 앉아서)
지현모 아이고 닥터김은 어쩜 그렇게 인물도 좋고, 사람이 정 있게 잘하니? 오늘 처음 봤지만, 처음 본 사람 같지가 않고 참 편하고 좋더라.
지 호 앞으로 그 형이 매형되면 나 용돈도 많이 주겠지? 힛히...
지현 얼른 지호를 툭 치는데, 택기 못마땅하다는 듯 지현을 뜩 보고, 지현, 택기 눈치를 보며 불편한 기색이다.
지현부 그럼 지현이 너도 그 친구를 좋아하는 거니?
지현모 이이는? 지현이 얘가 좋아하니까 데리고 왔지, 인사를 그냥 시켜요?
지 현 엄만? 인사는 무슨 인사? 아빠 차가 고장 나서, 모시러간 거뿐인데? 마침 트럭도 연구소에 가고 없고 해서. (변명하듯 택기를 보는데)
병 달 (난감해서) 그라문 그 의사선생하고 사귀는 사이가?
지 현 아니, 사귄다기 보다는 몇 번 만났어요.
지현모 몇 번 만난 사이 같진 않던데? 우리보고 어머님, 아버님 하는 걸 보니.
지 현 (툭 치며) 엄만? 그만 좀 해.
지현모 왜? (병달에게) 세상에! 숙부님께서 포도농사 지으라고 부르신 덕분에 우리가 의사사위까지 보게 됐네요. 호호호.
지현은 난감한데, 기분이 좋지 않은 택기, 수저를 놓고 먼저 일어난다. 그런 택기를 동시에 쳐다보는 지현과 수진. 괜히 눈이 마주치는 두 여자. 뻘쭘하게 눈을 떼며 밥을 먹는다.
S#4. 동 마루 (밤)
쪼로록 놓인 여행가방.
지현모 가만, 그럼 난 지현이 방에 가서 자야겠네?
지 현 (가방 주며) 아빠는 택기씨하고 같이 주무세요. (택기에게) 그래도 되죠?
택 기 (대꾸 없이 지현에게 가방만 받아들고, 지현부에게) 그러시지예.
지현부, 택기를 따라가고,
지 호 (자기 가방 들고 난감) 그럼 난 어디서 자?
병 달 니는 내하고 같이 자자.
지 호 (싫은 티) 난 예민해서 옆에 누가 있으면 잠 잘 못 자는데?
이때 쫙 째려보는 지현모. 지호 얼른 가방 들고 병달 방으로 향한다.
S#5. 병달방 (밤)
병달 짜증나는 얼굴로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인다. 옆에서 스테레오로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빠드득 빠드득 이까지 가는 지호. 되레 잠을 못 자는 건 병달이다. 병달 두르마리 휴지로 귀를 틀어막고 에헴 하지만, (휴지자락 귀 밖으로 너풀너풀) 지호 발까지 턱 병달 배위로 올려놓고 잘만 잔다. 으으으... 열 받으며 지호의 다리를 냅다 집어던지는 병달.
S#6. 지현방 (밤)
수진은 한 켠에서 책을 보고 있고,
지현모 (화장대에서 로션) 어머, 좁은 방에 나까지 와서 미안해서 어떡해요?
수 진 저도 손님인 걸요, 뭘...
지현모 그런데 지현아. 아까 보니까, 저 방에 저 일꾼 말이다.
지 현 (이불 깔며, 수진 눈치) 저기, 엄마. 그 사람 일꾼 아니야.
지현모 일꾼이 아니면 뭐야?
지 현 응? 저기. 그냥 농사짓는 사람이야.
지현모 얘는? 그게 그거지. 그 사람 말이야, 아까 보니까 너를 보는 눈빛이 이상하더라? 밥 먹을 때도 너를 자꾸 쳐다보고?
수 진 (예민하게 지현모를 보는데)
지 현 (수진 눈치. 난처한) 응? 아이, 엄만?
지현모 (기겁하며) 그 사람 혹시 너 좋아하는 거 아니니?
수 진 (신경이 쓰이지만 얼른 책으로 시선)
지 현 아니야~!
지현모 내말이 맞어. 여자가 이 정도 살다보면, 그런 게 눈에 다 보인다. 너 조심해. 괜히 너한테 딴 맘 품고 해꼬지 할라. 닥터김하고 잘 될라문 평소에 행동거지 신경 써야 돼.
지 현 아니라니까, 엄만?
수 진 (차분히 부드럽게 나서며)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그 친구는 제가 잘 아는데, 그럴 사람 아니에요.
지현모 (의아해서 꼬리 내리며) 그래요?
괜히 수진을 빼꼼히 보는 지현. 수진도 지현을 보고는 시선 책으로 거둔다.
S#7. 택기방 (밤)
침대에서 자던 지현부. 자다가 일어나 보면, 침대 밑에 깔아놓은 이부자리에 택기가 없다.
지현부 어디 갔지?
S#8. 마당 (밤)
택기가 평상에 앉아 생각하고 있다.
Insert. - 차 트렁크 뒤에 숨어서 뽀뽀를 하던 지현과 경민.
택기 한숨 내쉬며 속이 상하는데, 이때 방에서 나오는 지현부.
지현부 (괜히 미안해서 허허 웃으며) 침대도 나한테 양보하고... 맨바닥에서 잘라니까 잠이 안 오지요?
택 기 (놀라서 일어나며) 아, 아닙니다. 왜 나오셨어요?
지현부 (옆에 나란히 앉으며) 우리 지현이 데리고 있느라고 힘들지요? 애가 철이 없어서...
택 기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지현부 우리 숙부님도 참 괴팍하신 분인데... 같이 모시고 사느라 애 많이 쓰네요.
택 기 뭘요...
지현부 (택기에게 면목 없는) 조카인 나도 그렇게 못하는데... 고마워요.
택 기 아닙니다. 지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뭐...
지현부 (둘러보며) 나도 늙으면 이런데 와서 살고 싶긴 한데...
택 기 오세요. 얼마나 좋은데요...
지현부 (웃고는) 숙부님 포도밭이 여기선 가장 오래됐다면서요?
택 기 예. 제가 태어나던 해에, 영감님하고 저희 돌아가신 아버님하고 같이 이 동네에 들어 오셔가 포도밭을 처음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포도밭하고 제 나이하고 똑같지요.
지현부 아... 그래요...
택 기 도시에 나가 학교도 다녀봤고, 잠깐 연구소에서 직장생활도 해봤는데, 여기만큼 마음 편하고 좋은 데는 없는 거 같아예.
지현부 네...
택 기 말씀 놓으세요. 지현씨 아버님이신데...
지현부 차차 그러지... 뭐...
멋쩍게 푸근히 웃는 두 남자.
S#9. 마을회관 앞 (아침)
마을사람들에게 액비를 나눠주는 택기와 수진, 이장.
한쪽에선 지현과 영배, 명숙이 액비를 희석시키고 있고,
(영배는 명숙에게 웃으며 도와주려 하면, 명숙은 외면하는 분위기.)
지현부와 지호도 액비통 나르고 분주한 모습.
이 장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이게 연구소에서 온 해충 잡는 균인데요, 상태를 봐가면서 사흘 간격으로 뿌려주면 된다 그래요.
지현모는 양산 쓰고 심드렁하게 구경한다. 마을 사람들과 눈 마주치면 인사하면서,
지현모 (입으로는 궁시렁) 아침부터 푹푹 찌네. 포도밭은 보지도 못하고 이게 뭐야?
지 호 (액비통 나르며) 아빠 우리 포도밭 언제 구경 가?
이때 누군가 지현부의 차를 몰고 들어오자,
택기와 지현 등 사람들 모두 낯선 차를 쳐다보는데...
차에서 자동차 서비스직원이 내린다.
지 호 어? 아빠! 우리 차 왔다! 우리 차!
직 원 (인수증 보고) 여기 이병달 할아버지 댁이 어딘가요?
지현부 내가 그 차 주인인데요...
직 원 그럼 맞게 왔네요. 여기 사인 좀... (지현부에게 인수증 내미는)
지현모 근데 차가 새 차가 됐네?
직 원 광택 좀 냈습니다. 부속도 싹 바꿨구요...
지현모 아니, 왜 시키지도 안은 걸 했어요? 고장난 거만 고치면 되지? 수리비 많이 나왔겠네?
직 원 수리비는 김경민씨께서 이미 다 내셨습니다.
지현모 (화색이 돌며) 어머, 그래요? 닥터김이 수리비까지?!
지현 뜨끔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쳐다보던 택기 못마땅해서 굳은 표정으로 다시 액비 나눠준다.
그런 택기를 이상하다는 듯 보는 수진.
서비스 직원은 꾸뻑 인사하고 가고...
지현모 세상에... 닥터김한테 미안해서 어떡하지? 우리가 식사라고 대접해야 되는 거 아니야?
지현부 (차를 보며) 그러게...? 앞으로 10년은 더 타도 끄떡없겠네?
지 호 아빠. 무슨 소리야? 포도밭 받으면 바로 차부터 바꿔야지!
지 현 (택기 눈치 보더니 얼른 다가와) 저기, 다들 포도밭이나 보러 가자. 얼른...
S#10. 포도밭 (낮)
지현부모와 지호, 가족들 드넓은 포도밭에 감탄을 하고 있는데...
지현모 세상에...!
지현부 넓긴 넓구나...
지 호 누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누나 땅이야?
지현 들은 척도 안 하고, 액비통 옮겨놓고 액비 칠 준비한다.
지 현 (약대 메며) 지호야, 너 일루 와서 이 통 좀 잡아. 엄마! 엄마두 와서 줄 좀 잡아.
지현부 (지현 보고는 놀라서 약대 뺏어 쥐며) 지현아, 줘 아빠가 할게.
지 현 아냐. 아빤 이거 못해. 이건 기술이 필요한 거야. (약대 메고는, 바쁘게 지시) 엄만 그 양산 좀 저리 치우고, 이리 와서 줄 좀 잡아. (무거운 통 번쩍번쩍 옮기며) 지호야, 넌 경운기에 가서 새 액비통 좀 다 갖고 와. 이 밭 다 칠라면 더 있어야 돼.
지현모 어머, 얘가 농사꾼 다 됐네?
지 현 (약대 켜고 뿌리기 시작하며) 줄잡고 따라오라니까 뭐해?
지현모 (줄 둘둘 감아쥐고 비틀비틀) 어머, 어머, 이거 어떻게 하는 거니?
지현부 내가 할게, 줘봐.
지현모 아이구, 가만 좀 있어봐요.
이때 지현부와 지현모, 뒤엉켜 모두 넘어진다.
S#11. 마을회관 앞 (낮)
경운기에 액비통을 실어주는 택기.
마지막으로 액비를 받은 아저씨가 경운기를 몰고 떠나면,
액비를 희석 시키는 수진에게로 오는 택기.
택 기 (땀 닦으며) 좀 쉬었다 하자.
수 진 거의 올 사람은 다 온 거야? (물 따라주면)
택 기 (마시고 물잔 주며) 그런 거 같은데...? 오늘 수고 했어.
수 진 아니야. 그나저나 밭에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물 따라 마신다.)
두 사람 웃으며 약간 어색하다.
택 기 연구소 일도 바쁠 텐데... 고마워.
수 진 아니야. 이게 다 내가 하는 공분데 뭘... (택기를 보며 밝게) 언제 밥 한번 사. 그러면 돼.
택 기 밥?
수 진 응.
택 기 (피식 웃더니) 그러지, 뭐. (일어나며) 참, 난 잠깐 우리 포도밭에 좀 갔다 올게. 그 가시나 또 입이 한자는 나왔을 낀데... (수건으로 옷을 털며 간다.)
수진 웃음기 사라지며, 가는 택기를 바라본다.
S#12. 동 포도밭 길 (낮)
택기가 액비 칠 장비와 차림으로 걸어오면,
비실비실 지쳐가는 가족들 데리고 액비를 치고 있는 지현.
지현부 아이구, 허리야. 나 이거 허리 나간 거 같다.
지 현 (액비 치느라 마음 급한) 그럼 아빤 그늘에 가서 쉬구, 엄마 뭐해?
지현모 얘, 난 손 다 까졌다. 지호야! 너 빨랑 일루 못 와!
지 호 (그늘에서 참고서 보며) 엄마! 나 공부해야 돼! 공부!
지현모 저 놈 자식이? (울며 겨자 먹기로 줄잡고 따라가는데)
택기, 보고는 놀라서 달려와 지현모가 잡고 있는 줄을 받아든다.
택 기 이리 주세요.
지현모 아니, 어디 갔다 이제와요, 일꾼이? 우리 지현이 맨날 이렇게 혼자 일 다 시키는 거 아니에요?
지 현 엄마 왜 그래? 이 사람 일꾼 아니라니까?
택 기 죄송합니다. 그만 들어가 쉬세요.
지현모 빠지고, 지현과 택기가 서로를 보더니 뚱하니 약대와 줄잡고 액비 친다.
택 기 (줄잡고 따라가며) 그거 일루 줘. 내가 할게.
지 현 (약대 뿌리며) 됐어요.
택 기 혼자서 많이 했네?
지 현 댁 없으면 나 혼자 못할 줄 알구요? 뭐 하러 왔어요? 박사님이랑 동네 다른 밭이나 돌아보시지?
택 기 (피식 웃으며) 그래도 제법이네?
이때 핸드폰이 울리면 약대를 풀며 전화 받는 지현.
지 현 (돌아서며) 어, 나야, 오빠. 안 그래도 내가 전화하려고 그랬는데... 오빠 뭐 하러 아빠 차 수리비는 다 냈어?
지현, 택기를 피해 전화하며 멀리 가고...
그런 지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택기.
S#13. 영배네 포도밭 (낮)
액비를 쳤는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포도잎들.
수진과 함께 포도나무를 돌아보는 택기. 착잡하니 기분 좋지 않다.
수 진 (기분 좋아) 일단 벌레들이 힘을 좀 잃은 거 같네? 예전처럼 기운차진 않지?
택 기 (표정 좋지 않고 대꾸 없다.)
수 진 (택기를 보며) 왜 그래? 포도밭에 갔다가 무슨 일 있었어?
택 기 응? 아니야...
이때 영배가 막걸리와 양재기를 들고 달려온다.
영 배 택기야, 막걸리나 한잔 하자. 박사님도 같이 하시죠.
수 진 아니에요. (택기에게) 나 먼저 들어갈게. (간다.)
(시간경과)
영배와 주거니 받거니 막걸리를 마시는 택기.
영 배 내가 말이야, 올해는 우리 홀어마이한테 꼭 좀 효도를 해야 되갔는데... 살맛이 아이 난다.
택 기 (피식 웃으며) 왜 명숙이 누님 하고 잘 안돼?
영 배 솔직히 나는 총각 아니네? 그쪽은 한번 갔다 오지 않았어? 그런데 싫다는 거야.
택 기 (술잔 집으며 피식 웃고는, 말없이 마신다.)
영 배 우리 어마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좀 매느리를 보여드려야 되갔는데... (술 마신다.)
택 기 (술 따라주고 자기 잔에도 말없이 따르는데)
영 배 택기야, 여자 마음으르 잡는 무슨 좋은 수가 없나?
택 기 글쎄... (한숨) 우짜겠나...? 사람 마음을... 싫으면 할 수 없는 기제... (자신도 허허롭게 술 마신다.)
영 배 하긴... 누가 사십 넘은 농촌총각한테 시집올라 하갔아...?
택 기 ...
영 배 우리가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왜 우리한테는 시집을 아이 오냐, 이 말이야? 우리가 열심히 땀 흘려서 가족도 먹여 살리고, 솔직히 전 국민을 먹여 살리 거 아니나? 그런데 왜 여자들이 안 좋아하냐구...?
택기 씁쓸하게 웃으며 막걸리만 들이킨다.
S#14. 저수지 앞 길 (석양)
얼큰하게 취한 택기가 쓸쓸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빈 지게를 지고 걸어온다.
노래 부르다 말고 멀건이 서서 저수지 물을 바라보는 택기.
택 기 (혼잣말) 그래, 맞다. 누가 농사꾼을 좋아하겠나. 의사 사모님 소리 듣고 사는 것도 좋은 일이지...
다시 쓸쓸하게 노래 흥얼거리며 가는 택기.
S#15. 시골집 마당 (석양)
집 앞에 경민의 차가 멈추고 경민이 내리면,
지현모 어머, 왔다!
외출복 차림으로 평상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현과 지현가족들이 우르르 일어선다.
경 민 (인사하며)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지현모 아냐. 우리도 방금 나왔어.
경 민 (차문 열며) 가시죠. 제가 좋은 데로 예약해 뒀습니다.
지현부 아니 우리가 식사를 대접해야 할 텐데...?
경 민 아닙니다. 타세요.
차로 향하는 지현가족들. 지현만 찜찜한 듯 병달의 눈치를 본다.
지 현 할아버지, 정말 같이 안 가실 거예요?
경 민 (병달에게) 할아버님도 같이 가시죠.
병 달 (경민이 있으니 부드럽게) 내까지 뭐할라 가노. 다녀들 오그라.
지현모 (병달에게) 그래도... 어떻게 저희들만...
병 달 다녀 오라카문! (들어가고)
지현모 아니, 왜 소린 지르고 그러시지? (경민에게) 우리끼리 가야겠네. 워낙 괴팍하신 성미라, 우리끼리 가자고...
모두 차로 들어간다.
S#16. 동 저수지길 & 경민차 안 (석양)
지게를 지고 걸어오는 택기.
지현가족을 태운 경민의 차가 택기를 향해 마주 온다.
다가오는 경민의 차를 보고는 걸어가는 택기.
차 안의 지현도 걸어오는 택기를 보는데,
차가 택기 옆에 멎고, 창문을 내리는 경민.
택기 보면, 차안에 타있는 지현과 눈이 마주치고,
뒷좌석에 지현가족들이 보인다.
경 민 식사하러 가는데, 같이 가실래요?
택 기 아닙니다. 다녀오시죠.
경 민 그럼...
지현과 택기의 눈이 다시 뻘쭘히 마주치고,
창문 닫으며 가는 경민의 차.
차 안에서 택기를 돌아보는 지현.
택기의 무거운 표정이 스치고, 돌아서서 가는 택기.
택기, 왠지 초라한 기분을 느끼며 간다.
S#17. 레스토랑 (밤)
근사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경민과 지현가족.
지현만 무거운 표정이다.
지현부 시골에 이런 데가 다 있었네...?
지현모 그러게요... 음식 맛이 제법 깔끔하네?
지 호 엄마가 언제부터 음식 맛을 알았다고?
지현모 (눈 흘기며) 얘가?
지 호 형. 앞으로 자주 만났으면 좋겠어요.
경 민 그래. 자주 만나야지. 많이 먹어.
지현부 참, 지현아. 그 장택긴가 하는 친구 말이다.
지 현 택기씨가 왜요?
지현부 솔직히 한집 산다 그래서 아빠가 걱정을 많이 했거든. 그런데 그 친구 괜찮더라. 심성이 맑은 게 욕심도 없고 믿을 만 해. 사람이 됐더라.
지현모 되긴 뭐가 돼요? 난 그 사람 별루더만. 지현이 널 보는 눈빛이 영... (이때 갑자기 경민과 눈이 마주치자) 어머나!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닥터 김 앞에서 그럼 닥터 김은 보건소 복무 끝나면 뭘 할 생각인가?
경 민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 감추며) 서울로 올라가야죠. 강남 쪽에서 개인 병원을 할까 해요.
지현모 강남에서? 그게 만만치가 않을 텐데...?
경 민 네, 그래서 실은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합니다.
지현모 그래. 그럼 우리 지현이하고는 언제 쯤?
지 현 (얼른 눈짓하며) 엄마!
S#18. 시골집 마당 (밤)
평상 위에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는 병달과 택기, 수진. 병달과 택기는 말없이 밥을 먹고, 수진은 약간 불편한 기색인데...
택 기 영감님도 같이 가시지, 왜 안 가셨어예?
병 달 내 뭐 한다꼬 거기 껴서 같이 가노? 에이, 서울 것들은 와가 시끄럽기만 하고... 어데 하나 마음에 드는 기 ?다.
택 기 와요? 보건소 의사 좋아하셨잖습니꺼?
병 달 내가 은제?
택 기 의사 손자사위 맞으시면 뿌듯하실 낀데요.?
병 달 그 의사선생이 실력은 있다만, 사람 속이 으떤지야 알 수가 없지. (괜히 안타까운 기분으로 택기를 본다)
택 기 (무심코 눈이 마주치자) 와 내를 보심니꺼?
병 달 내가 은제 니를 봤다고 이카노?
시선을 떼고 각자 밥을 먹는 병달과 택기. 그런 두 사람을 이상하다는 듯 보는 수진.
S#19. 레스토랑 계산대 앞 (밤)
나오는 지현가족과 경민. 지현모가 빨리 계산하라는 듯 지현부를 떠밀면, 얼른 계산대 앞으로 나가는 지현부.
지현부 (지갑 꺼내며) 얼마죠...?
경 민 (재빨리 지현부 말리며) 그냥 두세요. 제가 대접하는 건데요... (얼른 카드 꺼낸다.)
지현부 그래도 어떻게... 차 수리비도 자네가 계산했는데...
계산원이 카드결제를 하는 사이.
지 호 근데 나 오늘 아빠랑 같이 자면 안돼?
지현모 왜?
지 호 할아버지가 어찌나 시끄럽게 주무시는지 잠을 통 잘 수가 없어. 내가 원래 좀 예민하잖아.
지현부 그래? 그럼 오늘은 내가 숙부님 하고 자고, 니가 택기 그 친구 방에 가서 자라.
지 호 나 그 사람도 싫은데...?
지현모 시끄러! 아무소리 말고 할아버지 방에서 그냥 자!
경 민 그럼 저희 집에 가서 주무시죠. 어차피 저 혼자 쓰는 집인데... 오늘 마침 제가 야간 당직이라 집이 비거든요.
지 현 (놀라서 펄쩍) 아니야, 오빠. 왜 그래?
경 민 아냐. 시골집은 아무래도 불편하실 테고, 우리 집이 낫지. 저희 집으로 가세요.
지현모 아니... 그래도 될까...?
S#20. 시골집 마당 (밤)
지현이 혼자 들어오면,
평상에 앉아 포도상자를 만들고 있는 병달과 택기.
택기는 지현을 힐끗 볼 뿐 말없이 상자만 만드는데,
지 현 저녁은 드셨어요?
병 달 와 니 혼자 오나? 다들 어데 갔나?
지 현 저기... 경민 오빠 집이 마침 비었다고 해서요... 오늘은 거기서들 주무신다고...
병 달 뭐? 와 내 집 놔두고 남으 집에서 잠을 잔다 말이가?
지 현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거기 빈 방도 많고 해서...
병 달 아이고... 의사선생한테 폐가 되는지도 모리고... 으째 그래 생각들이 ?을꼬! (들어가 버리면)
지 현 (면목없어) 경민 오빠가 가자고 해서 모시고 간 건데...?
그러다 택기와 눈이 딱 마주치자,
택 기 와? 니도 거서 자고오지, 왜 왔어?
지 현 그냥 왔어요... 아침 일찍 밭에도 나가야 하고 해서...
택 기 와? 갱민오빠헌테 새벽 같이 밭에 모시다 달라카지?
지 현 (뚱하니) 아니, 왜들 이래요? 거기서 하룻밤 자는 게 뭐가 대수라고?
택 기 아주 이 기회에 거 가서 살아!
지 현 그래요. 가서 살라고 마음먹고 있어요!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탕! 닫히는 방문소리가 들리자, 택기 괜히 낭패감이 든다.
한숨 쉬고는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가는 택기.
택 기 에이, 가시나...!
이때 뒤꼍에서 오던 수진이 밖으로 나가는 택기를 돌아본다.
S#21. 포도밭 원두막 (밤)
원두막에 누워 팔 베게 하고는 화가 나서 노래를 부르는 택기.
잠시 후 수진이 원두막을 올라오자,
수진을 보고는 노래를 멈추는 택기. 일어나 앉는다.
수 진 왜? 계속하지...
택 기 (머쓱해서) 여긴 뭐 하러 나왔어?
수 진 잠도 안 오고해서...
택 기 바쁠 텐데 이젠 연구소로 돌아가도 돼. 기다리는 일만 남았는데, 뭐...
수 진 아니야. 여기서 경과를 지켜보고 싶어.
잠시 말이 없는 두 사람.
수 진 너 혹시 지현씨 좋아하니?
택 기 (퍼뜩 놀라며) 니... 무신 소리 하나?
수 진 (더 묻지 않고) 아니면 됐고... (숨 크게 들이마시고는) 이제 정말 포도가 익어가나 봐. 단내가 확 풍기네?
택 기 ...
수 진 서양에 이런 속담이 있대. 포도가 익어갈 때는 포도밭에 남녀가 함께 들어가지 마라. 포도향기에 취해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택 기 (수진을 보면) ...?
수 진 (다른 곳 본 채, 편안한 어투로) 애인 있는 여자 좋아하지 마. 니가 다칠지도 몰라.
택 기 니 무신 소리고? 자꾸?
수 진 아니면 됐구... (미소 지으면)
말없이 시선 돌리는 택기.
S#22. 동 마당 (밤)
지현 방에서 나와 보면, 평상 위에 혼자 앉아 상자에 포도를 넣어 포장하는 병달.
지 현 죄송해요... 할아버지. 다음부터 안 그럴게요...
병 달 알았으면 됐다.
지현, 같이 마주 앉아 포장을 하는데,
병 달 (속상해서) 지현이 니, 택기 저놈아가 그래 안 좋더나?
지 현 (갑자기 의아해서) 네? 제가 뭘요...?
병 달 (답답해서) 택기 저놈아가 참 괜찮은 놈이야. 니 그래 싫나?
지 현 할아버지, 갑자기 왜 이러세요...? 택기 저 사람은 강박사한테 설설 기잖아요. 다시 잘해보려는 모양인데요, 뭘. 아니, 그리고 저를 어디 그런 놈한테...
이때 발소리가 들리면서 택기와 수진이 들어오면, 지현, 쳐다보고는 그냥 일어나 방으로 들어간다. 수진도 병달에게 인사하고 들어가고...
택 기 둘이 산책 좀 했어예...
병 달 그래...
S#23. 시골집 마당 (아침)
밭에 가려고 경운기에 짐 싣고 준비하는 지현과 택기. 문득 경운기에서 다 시들어버린 해바라기를 발견하는 지현.
지 현 어? 해바라기잖아? 이게 왜 여?지?
택 기 (농기계 들고오다 보고는 놀라) 어이, 가시나가. 이런 건 왜 손대고 그래?
지 현 다 시들었네?
택 기 (지현이 들고 있던 해바라기 뺏고) 해바라기 씨 기름 짤라고 베다 놨는데... 잊자뿌렀네? (얼른 경운기의 것도 몽땅 거머쥐는데)
지 현 아니, 해바라기 씨도 안 영글었는데 무슨 기름을 짜요?
택 기 모르면 가만있어? 원래 덜 영근 게... 기름 짜면 고소하고 맛있다고. (가져가 버린다.)
지 현 어머? 별 꼴이야... 그런 소린 첨 듣네. 나를 무슨 유치원생으로 아나...? (의아한데, 쫓아가며) 그거 일루 줘요. 마른 해바라기도 방에 걸어놓으면 얼마나 예쁜데요?
택기, 해바라기를 쓰레기통에 넣으려는데, 와서 뺏어가는 지현. 수진은 샘플 채취 박스 들고 나오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이때 집 앞으로 경민의 차가 들어오더니, 가족들이 내린다. 돌아보는 지현, 택기, 수진. 경민은 차 밖으로 나와서 가족들에게 꾸뻑 인사하고, 지현에게는 살짝 손 흔들어 보이더니 다시 차타고 떠나고. 가족들 흐뭇한 표정으로 집으로 들어온다.
지 호 누나 그 집 참 좋더라. 무슨 별장에 놀러온 거 같았어.
지현모 세상에... 지현아. 닥터 김 볼수록 괜찮더라.
지현부 그래... 그 친구도 참 괜찮더라. 예의 바르고...
지현모 다 딸을 잘 낳아놔야 그런 사위도 얻는다구... 너 나한테 감사해야 된다. 내가 딸을 잘 낳은 거 아니겠니?
지 현 (해바라기 안은 채) 엄마? 그만 좀 해.
지현모 얘가 아주 봉 잡았어? 포도밭 만평에다 의사까지 만나고... 우리가 시골 보내길 잘 했어요. (좋아 죽겠는) 얘, 침대 맡에 니 사진도 놔뒀더라. 둘이서 어디 놀러 갔었나부지?
지현, 지현모를 쿡쿡 찌르는데,
택 기 잘 다녀오셨습니꺼. 그럼... (꾸뻑 인사하더니, 수진에게) 가자.
지 현 아니, 저기... 밭에 안 가요?
택 기 중간 결과 샘플 채취해야 돼.
지 현 으이... 씨?
S#24. 포도밭 인근 길 (낮)
지현이 아슬아슬하게 경운기를 몰고 있고, 경운기에 타있는 가족들 매우 불안하다.
지현모 아이구, 얘, 지현아...!
지 혼 누나. 우린 그냥 걸어갈게...
지현부 지현아, 아빠가 해볼게.
지 현 아니야. 아빤 못해. 가만 좀 있어봐. 정신 사납게 하지들 말고...
지현모 너 이거 운전면허는 있는 거니?
지 현 경운기가 운전면허가 어딨어? 택기씨 하는 거 맨날 봤으니까 고대로 해보는 거지.
뭐? 으으으... 나 내릴래... 가족들 더 불안에 떠는데,
이때 포도밭 쪽에서 홍철과 황동춘 일행이 걸어 내려온다.
지 현 (경운기 멈추며) 아니, 저 사람들이 왜 우리 포도밭에서 나오지?
홍 철 이쪽이 개발만 되문요... 알짜배깁니다. 경관으로 보나 지형상 리조트 핵심부에 있습니다.
황동춘 그런데 그 노인네가 알 박기를 하면서 여길 안내놓고 버틴다 이거지?
홍 철 그렇죠.
가족들도 모두 의아해서 보는데, 지현 갑자기 경운기에서 내려 달려가더니,
지 현 아니 남의 밭에서 뭐하는 거에요? 나가요!
홍 철 어이구, 안녕 허셨슈. 안 그래도 좀 뵙고 갈라구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슈. (황동춘에게) 이 아가씨가 바로 지가 말씀드린 이 포도밭을 상속 받을 여주인이구요... (지현에게) 그 이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황동춘 회장님이라구, 앞으로 우리 마을의 지역개발을 위해서...
지 현 (경운기에서 갈쿠리라도 꺼내) 저기 썩 못 나가요?
홍 철 아니 왜 이런데유? 이 분 알아 놓으면 아가씨도 나중에 땅 팔 때...
지 현 전 땅 안 팔아요! 저리 썩 못 가요? 썩 나가요!
홍철과 황동춘 놀라서 쫓겨 나오는데, 그 사이 경운기에서 내려 의아해서 보고 있던 가족들.
지현모 아니, 쟤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땅을 왜 못 팔어? (황동춘에게 나서며) 아이, 저기 안녕하세요. 수고들 하시네요.
홍 철 누구시래유?
지현모 저애 에미 되는 사람이에요.
지 현 엄마!
지현모 얘가 왜 이래? 나중에 다 필요한 사람들인데, 미리미리 안면을 터놔야지...
홍 철 (얼른 지현모에게 명함 주며) 그라문유...
지 현 엄마 정말 왜 이래? 이럴 거면 그냥 빨리 올라가!
지현모 (그 틈에도 명함은 받은) 너야 말로 왜 이래?
지 현 방해만 되니까 빨리 서울 가. 다들 올라가세요!
의아해서 뻘줌히 지현을 보는 가족들.
S#25. 영배네 포도밭 (낮)
샘플을 채취하는 수진과 택기.
수 진 이 밭도 많이 호전되는 거 같은데?
택 기 그러게...
수 진 언제 밥 살 거야?
택 기 밥? 사야지.
수 진 오늘 밤 어때? 니가 밥 사면, 술은 내가 살게.
택 기 (피식 웃고는) 그래, 알았다.
수진도 모처럼 활짝 웃으며 샘플을 박스에 집어넣는다.
S#26. 시골집 앞 (석양)
지현부 그럼 숙부님 저희는 올라가보겠습니다.
병 달 그래, 올라들 가그라. 시끄럽기만 시끄럽구로...
지현모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또 찾아뵐게요...
지 호 또 올게요. (꾸뻑)
모두 차 안으로 들어가고, 속상하지만 그래도 아쉬워서 손을 흔드는 지현. 차안의 가족들도 아쉽게 손을 흔들고, 차 떠난다. 이때 집 뒤쪽 다른 길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택기와 수진.
택 기 (차를 보며) 또 어디들 가세요?
병 달 서울 갔다. 이으구, 그것들... 이제 좀 조용하구마. (집으로 들어가면)
지현과 택기 뻘쭘히 보고는, 각자 안으로 들어간다. 수진은 모처럼 미소 띤 얼굴로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지 현 (방으로 가며, 혼자 중얼중얼) 아! 찌뿌두두해. 원두커피 한잔 먹었으면 좋겠네... 지난번에 장에 갔을 때 사올 걸... (방으로 들어간다.)
수돗가로 가며 그 말을 듣고 돌아보는 택기. 물을 마신다.
S#27. 지현방 (밤)
지현이 마른 해바라기 다발을 예쁘게 엮어 창가에 장식을 한다. 수진이 근사한 옷을 입고 화장을 하자,
지 현 어디 가요?
수 진 택기하고 데이트하러요.
지 현 데이트요...?
수 진 네. 오늘 좀 늦을지도 몰라요. 먼저 자요.
지 현 (시큰둥해서) ....
수 진 (거울 속으로 지현 표정 힐끗 살피고는) 영동에 우리 자주 가던 술집도 있는데, 거기 가서 술한잔 할려구요.
지 현 네... (밖으로 나간다.)
그런 지현을 돌아보는 수진.
S#28. 택기방 (밤)
택기가 옷을 빼입고 거울을 보고 있으면, 밖에서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지현.
택 기 가시나. 노크 좀 하라면...
지 현 쫙 빼입은 걸 보니 무슨 좋은 일 있나부네? (괜히 책 이것 저것 꺼내보는 척)
택 기 (표정은 심란, 말로만) 그래. 윽수로 좋은 일 있다.
지 현 데이트하러 가니까 좋긴 좋은가부죠?
택 기 (순간 괜히 뜨끔하지만) 으트케 알았어? 데이튼지?
지 현 못 보던 옷이네?
택 기 와 멋있어?
지 현 댁이 걸치면 다 똑같죠. 뭐가 멋있어요?
택 기 멋있으면 멋있다꼬 해.
지 현 자뻑이 심한 것도 병이래요... (책 하나 골라들고 서서 보고)
택 기 심심하면 따라 오던가...
지 현 내가 거길 왜 따라가요?
택 기 그럼 갔다 올게.
지 현 밭에 무슨 일 생길지 모르니까, 일찍 들어와요.
택 기 (일부러 얼굴 들이대며) 오늘 못 들어올지도 몰라. (가버린다.)
괜히 약이 올라 쳐다보는 지현.
S#29. 동 시골집 앞 (밤)
택기가 수진이 운전하는 수진의 차에 타고 떠난다. 그런 두 사람을 힐끗 보고는 들어가려는 지현. 이때 역시 밖을 내다보고 있던 병달과 마주친다.
병 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둘이 어데 가는 기가?
지 현 데이트 하러 간대요. 데이트! (들어가면)
병 달 (밖을 내다보며) 거 참. 이기 참말로 우찌 되가는 기고? (뭔가 영 맘에 안든다.)
S#30. 가든 식당 (밤)
집게 들고 고기를 타지 않게 잘 뒤집는 택기.
수 진 니가 구워준 고기는 참 맛있어. 부드럽고...
택 기 (수진의 접시에 놔주며) 많이 먹어. 귀한 집 외동딸이 한여름에 시골 와가 고생 많이 했다.
웃고는 쌈을 싸서 택기에게 내미는 수진.
택 기 됐다. 니 먹어. 와 이라노?
수 진 계속 굽기만 했잖아. 자, 먹어.
택기, 손으로 받아서 먹는다.
수 진 밥 먹고, 우리 옛날에 자주 갔던 술집 아직도 있나 가볼까?
택 기 그 집 없어졌어.
수 진 그래...?
택 기 운전해야 되는데, 술은 무슨 술... (물 마시고는) 연구소 출근도 해야 될낀데... 벌레만 잡히면 그만 가봐.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 거 같아가 미안네.
수 진 왜 자꾸 가라고만 해? 어차피 내 분야 일인데? 부담 갖지 마.
택 기 그래도 니 불편한 거 참는 거 내 다 아는데...
수 진 아니야. 너랑 같이 있으니까 참 좋아. 옛날엔 왜 이 시골이 그렇게 답답하기만 했는지... 그때 니가 하자는 대로 그냥 할 걸... 여기 와서 그게 제일 많이 후회가 돼.
수진에게서 시선을 떼고 말없이 고기만 뒤집는 택기.
S#31. 시골집 마당 (밤)
지현과 병달이 평상에서 포도 포장을 하고 있다.
병 달 니는 그럼 그 의사선생이 좋나?
지 현 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좀 더 만나봐야죠.
병 달 니가 그 의사선생을 좋다카문 내도 뭐 할말은 없다만은... (뭔가 할말을 못하고 망설이는)
지 현 왜요?
병 달 (슬쩍 딴소리로 유도) 촌에는 소문이 빠른 거 알제?
지 현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의아해서) 네.
병 달 만나더라도 좀 살살 만나그레이. 당분간 그만 만나자카고, 수확철 지나가 포도농사 끝나고 교제를 해보면 우떻겠노?
지 현 네? 저기. 지금도 자주 만나는 건 아니에요. 사실 수확량 올리느라고 어쩌다 만나는 거죠.
병 달 (슬쩍 떠보는) 그라문. 니 만약에 그 의사선생하고 잘 되면. 포도밭 받아가. 여서 농사지을 수 있겠나?
지 현 네?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죠. (그러다 병달 표정 보고는) 아니, 어떻게든 여기서 농사를 지어야죠. 근데, 아직 경민오빠하고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요?
병 달 그래? (안심이 안돼서) 여자가 남자를 고를 때는 신중해야 하는 기라. 포도도 성장호르몬 주고 농약 잘 뿌리가, 벌레 하나 안 먹고 겉모습만 튼실한 포도가 있다. 먹어 보문 자연쩍으로 익은 포도하고는 완전히 틀리다. 사람도 겉모습만 보기 말고, 유기농 겉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기라...
이때 영배가 달려 들어온다.
영 배 (울쌍) 택기야! 택기 어딨아요?
지 현 왜요? 지금 그 사람 집에 없는데?
영 배 큰일 났아요. 우리 밭에 도둑이 들어게지구 포도 다 따가고 밭이 아주 엉망진창이 됐아요...!
병 달 (벌떡 일어나며) 뭐라꼬? 은제 그랬나?
영 배 오늘 초저녁 답에 그랜거 같아요... 차까지 대놓고 싹 다 따갔아요... 어카문 좋아요...!
병 달 밭떼기 도둑눔들이 또 포도 익는 냄새를 맡았구만! 쳐죽일 놈들! 남이 피땀 흘려가 지은 농작물을...!
병달, 급히 영배를 따라 나가면,
지 현 어? 그럼 우리 포도밭도 지켜야겠네? (얼른 옆에 있던 갈쿠리 들고 달려 나간다.)
S#32. 영동시내 거리 (밤)
나란히 걸어가는 택기와 수진.
수 진 (주변 둘러보며) 여기도 참 많이 변했다. 옛날보다 차도 훨씬 많아지고, 높은 건물도 많아졌네?
택 기 많이 발전했다 아이가... 그래도 난 옛날이 좋아. 푸근한 맛이 없다 아이가?
수 진 그렇긴 하지... 참 오랜만이다. 둘이서 이렇게 어디 가는 거. 옛날엔 내가 늘 니 손을 잡고 다녔는데...
택 기 옛날 얘기는 뭐할라 자꾸 하나?
수 진 넌 여자 손도 잘 잡아주지 않아서 사람 마음을 얼마나 애타게 하는지 몰라.
택 기 ....
걷다말고 문득 인형 노점수레 앞에 멈춰서는 택기.
Insert. - 인형을 들고 보며, 귀엽죠? 하던 지현.
택기 멀건히 인형을 보는데,
수 진 왜?
택 기 아이다. 가자.
수 진 어머, 저 인형 예쁘다.
택 기 애들이고? 인형이 이쁘게?
수 진 왜? 귀엽잖아. (주인에게) 이거 얼마에요?
주 인 2만원이요...
수 진 (택기에게) 나 이거 사줘.
택 기 이런 걸 뭐할라 사?
수 진 지현씨 방이 너무 허전하잖아. 하나 사줘.
어쩔 수 없이 돈을 내미는 택기.
S#33. 원두막 & 은영방 (밤)
원두막에 앉아 후레쉬로 포도밭 여기저기를 비춰보며 둘러보고 있는 지현.
한손엔 쇠갈쿠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다.
지 현 뭐야? 지금이 데이트 할 때야? 수확철 앞두고 포도도둑 들면 어쩌려고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아주 좋아 죽나부지?
이때 어디선가 까마귀소리가 들려오면,
지 현 (갑자기 무서운) 엄마야. 근데 왜 이렇게 안와? 왔으면 벌써 포도밭으로 왔을 텐데? 어째 좀 으스스해진다?
얼른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지현.
지 현 (주변 살피며 발발 떨며) 은영이니?
은 영 (화면 들어오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지 현 지금 혼자 포도밭 지키는데 좀 무서워서 그래.
은 영 니가 왜 혼자 포도밭을 지켜? 강간범은 어디가구?
지 현 그 놈 요새 신났어. 그 박사라는 옛날 애인 왔다 그랬잖아. 오늘도 데이트 하러 나갔어. 포도밭은 아예 관심 밖이야.
은 영 그래? 그럼 너 수확량 못 맞추면 어떡하니?
지 현 그러게 말이야. 둘이 아주 맨날 붙어 다니는 통에, 눈꼴 셔 죽겠어. 옛날 애인하고 다시 잘해보겠다는 거야, 뭐야?
은 영 야, 니가 왜 신경 써?
지 현 내가 무슨 신경을 써?
은 영 신경 엄청 쓰는데? 너 혹시 그 사람 좋아하는 거 아냐?
지 현 얘는? 너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니?
이때 핸드폰 밧데리 다 됐다는 신호음 울리면.
지 현 어머? 밧데리 끊어진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때 까마귀 소리와 멀리 개 짓는 소리. 마침 초승달도 구름에 가리고. 엄마야! 겁이 나는 지현.
S#34. 영동시내 길가, 커피전문점 앞 (밤)
인형을 안고 걸어와 세워져 있는 차 문을 여는 수진. 택기 차에 타려다 말고 문득 길가의 커피전문점을 본다.
택 기 잠깐만 기다려. 나 커피 좀 사갖고 올게.
수 진 커피? 너 커피 안 마시잖아.
택 기 응, 서울 그 가시나가 하두 커피 커피 해가, 본 김에 사갈라고.
커피전문점으로 가는 택기. 수진 물끄러미 본다. 커피 전문점 안에 들어가 커피를 사는 택기. (수진 시야) 씁쓸하게 인형을 안고 서성거리는 수진.
S#35. 마을회관 앞 (밤)
불이 환하게 켜있고, 회의가 끝났는지, 웅성웅성 하나 둘 나오는 사람들. 수진의 차가 와서 멎더니, 택기가 튀어 나온다.
택 기 와요? 무슨 일 입니꺼?
이 장 영배네 포도밭에 도둑이 들었어.
택 기 네? (영배를 보면)
영 배 (울먹이며) 고생고생해서 키워 논 포도 다 따가고... 밭까지 다 망쳐놓고...
택 기 (말없이 영배 어깨를 다독이는데)
이장댁 아이구, 나쁜 놈들... (지나가고)
명 숙 영배씨... 너무 걱정 말어유...
택 기 (이장에게) 그럼 오늘부터 순번을 정해가 돌아봐야겠네요.
이 장 마을 진입로에 무인카메라도 설치하기로 했어.
택 기 네... (이때 병달이 나오자) 우리 밭은 괘않습니꺼?
병 달 지금 지현이가 지키고 있다.
택 기 예? 혼자서예?
이내 달려가는 택기. 바라보는 수진.
S#36. 포도밭 (밤)
대왕나무 앞에 앉아 후레쉬로 여기저기 살펴보는 지현.
지 현 그래도 벌레가 죽기는 많이 죽었네? 그 여자 실력은 쫌 있나봐...? (나무 만지며) 니들 벌레 어서 싹 다 이겨내. 그 여자 빨리 가게, 얼른 이겨내라구.
이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리자, 휙 돌아서는 지현. 얼른 갈쿠리를 집어 든다.
지 현 뭐야? 도둑인가?
침 꿀꺽 삼키더니 소리 나는 쪽으로 다가가는 지현. 갈쿠리를 든 손에 더욱 힘을 준다. 서서히 다가가는 지현. 막 포도나무 가지를 밀쳐내며 뭔가를 보려 하는데... 뒤에서 갑자기 시커먼 손이 불숙 튀어나와 지현의 어깨를 잡는다. 비명을 지르며 냅다 갈쿠리를 휘두르는 지현.
지 현 아악! 도둑이야! 도둑!
택 기 (얼굴을 감싸 쥐고) 와 이라노! 내야!
지현 보며, 택기가 얼굴을 감싸쥐고 있다.
지 현 얘길 하고 와야죠? 놀랬잖아요!
고개를 드는 택기. 택기의 뺨에 갈퀴가 스친 상처가 보인다.
지 현 어머, 피나잖아? 많이 다쳤어요?
S#37. 시골집 평상 (밤)
택기의 뺨을 치료해주는 지현. 소독약을 바르자 택기의 표정이 찡그려진다.
택 기 무슨 여자가 그래 난폭해? 앞뒤 없이 흉기나 휘두르고.
지 현 데이트 하러 간 사람이 거기 올 줄 누가 알았어요?
택 기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
지 현 포도밭엔 도둑이 들든 말든, 관심도 없나부죠?
택 기 도둑든 거 알았으면 나도 안 갔어.
지 현 뭐요? 더 눕고 싶은 거, 더 놀고 싶은 거 참아가매 하는 게 농사라구요? 놀 건 혼자 다 놀면서, 나 혼자 포도밭에서 정말 도둑이라도 만났어봐요! 어쩔 뻔 했어요?
택 기 그래서 내가 갔잖아.
더 세게 소독약을 바르는 지현. 택기 비명을 지른다.
택 기 아파! 살살해!
지 현 아프긴 뭐가 아프다 그래요?
방 안에서 수진이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본다.
S#38. 지현방 (밤)
들어오는 지현.
지 현 (혼잣말) 남자가 엄살은?
못 들은 척 책장만 넘기는 수진. 자리에 앉으려던 지현. 문득 수진 옆에 놓인 인형을 본다.
지 현 어? (다가가 인형을 들고 보며) 이 인형?
수 진 택기가 사 줬어요.
지 현 그래요? (속마음 소리) 아니, 내가 찜해 논 건데? 내가 찜해 논 걸 뻔히 알면서 지 애인한테 사줘?
기분 나쁜 투로 인형을 내려놓는 지현.
지 현 좋겠어요. 애인이 이런 것도 사주고.
수 진 네...
지 현 해충은 좀 잡히는 거 같던데... 언제 가세요?
수 진 나 때문에 불편하죠?
지 현 아뇨, 뭐... 해충이 잡혀서... 저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수 진 (책 덮으며) 지현씨한텐 미안한데... 저 여기 좀 더 있으면 안 될까요?
지 현 네?
수 진 실은... 제가 여기 온 건... 택기하고 다시 잘해보고 싶어서예요.
지 현 ....??
수 진 (인형 집어서 보며) 이런 게 받을 땐 참 좋은데, 헤어질 땐 부담이 돼죠... 예전에 택기가 사줬던 많은 걸... 헤어질 때 다 버렸어요. 이제 이건 안 버리고 싶어요... 나 좀 도와주실래요?
지 현 (당황. 수진의 시선을 피하며) 제가 뭘... 도와드릴게 있나요?
수 진 그냥 이 방에 더 있게만 해주시면 되요.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시선을 돌리는 지현.
S#39. 부엌 (아침)
지 현 (설거지를 하며 심각한, 혼잣말) 아이, 씨... 안갈 모양인데, 어떡하지...
지현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이때 싱크대 위에 원두커피를 올려놓는 택기.
지 현 뭐예요?
택 기 어제 영동 나갔다가 사왔어.
지 현 (착잡한 기분. 조용히) 난 박사님 커피 심부름까진 못해요. (가려는데)
택 기 니 먹으라고 사온 기야. 수진이는 커피 안 마셔.
지 현 (의아해서) 그래요? (커피 집어서 보며) 근데 이거 원두 알이네? 알 커피를 그냥 사오면 어떡해요?
택 기 그럼 뭘 사오는 건데?
지 현 가루로 갈아와야죠. 비싸게 줬을 텐데, 괜히 돈만 버렸잖아? (놓는데)
택 기 마시게 해줄게. 가루로 뽀사다 주면 될 거 아이가!
지 현 아니, 왜 화는 내고 그래요?
커피를 집어 들고는 나가버리는 택기.
지 현 아니, 저 사람이 뭘 어쩔려구 그러지? (따라 나간다.)
S#40. 홍이네 집 마당 (낮)
커피를 들고 들어서는 택기. 지현이 따라 들어온다. 마침 물에 불린 콩을 맷돌에 갈고 있던 홍이모.
홍이모 아이구, 택기 왔네? 웬일이여?
택 기 저기 맷돌에다 이거 좀 갈 수 있을까 해서예?
지 현 (세상에! 어이가 없다.)
홍이모 그려. 그게 뭔디? 무슨 콩이 시커먼 겨?
택 기 이게 원두커피라는 건데예... 잘게 뽀사주시면 되예.
홍이모 그려. 인줘봐. 마침 콩국수 좀 하느라고. 다했어. (맷돌 물로 닦아내며) 근디 이기 무슨 커피라고? 녹두 커피?
택 기 원두커피요.
양재기에 원두알을 쏟아놓는 홍이모.
홍이모 녹두커핀지 원두커핀지 간에... 이것도 물에 불려서 가나? 콩은 물에 불려서 가는데?
홍이모 물을 부으려 하면,
지 현 (얼른 달려들며 물그릇 잡는) 어머, 안돼요. 이건 그냥 가루를 내야 돼요.
(시간경과)
지현이 맷돌 구멍에 원두알을 떨어뜨리면 홍이모가 맷돌을 간다. 맷돌 돌아가며 떨어지는 커피가루. 지현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S#41. 동네 길 (낮)
갈린 커피가루를 안고 오는 지현.
지 현 세상에, 커피를 맷돌에다 가는 사람이 어딨어?
택 기 왜? 아무튼 갈아 줬잖아.
지 현 (커피 봉투 열어 냄새 맡으며) 커피에서 콩 비린내가 나는 거 같애. 하필이면 콩국수 하던 맷돌에다 갈 건 뭐야?
택 기 우찌된 가시나가, 해줘도 말이 많아...
투덜 대며 가는 두 사람.
S#42. 시골집 부엌 (낮)
약탕기 위에 삼베 천을 놓고, 그 위에 커피가루를 놓는 지현.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붓는다.
지 현 이건 완전 원시적인 커피 메이커잖아.
택 기 어때? 제대로 되는 거 같아?
이때 뒤에서 병달과 수진 들어온다.
병 달 뭐하노? 보약 다리나?
택 기 아니예, 커피 좀 만들어 마신다고 해서예...
그말에 수진은 택기를 힐끗 보는데, 이내 지현이 물을 다 붙고, 약탕기를 들어 밥공기에 커피를 따른다.
지 현 할아버지도 이거 한잔 드셔보세요.
병달 받아들고, 지현 수진과 택기에게도 한잔씩 따라준다. 밥공기에 든 커피를 훌훌 불며 식히고 있는 병달.
병 달 날도 더븐데, 뜨거운 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 모금 마시는 병달. 피식 웃는다.
지 현 어때요? 할아버지?
병 달 이기 나름대로 맛이 괜찮네. 쌉쌀한 기 몸에 좋겠다.
택 기 그러게예. 향기도 괘안네예?
수진도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더니 마신다.
지 현 (음미하고는) 음! 이게 맷돌에 갈아서 더 맛있는 거 같아요. 한국적으로.
병 달 (꿀꺽꿀꺽 마시고는) 우리 이거 자주 해먹자. 우리도 맷돌하나 사라.
웃는 네 사람.
S#43. 포도밭 (낮)
진지한 눈으로 포도나무들을 살펴보는 수진. 택기와 이장, 병달, 지현 등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다.
수 진 여기도 다 잡힌 거 같네요. 해충이 사라졌어요.
그래유? 다 잽혔슈? 사람들 좋아하며, 일제히 박수를 치고, 아이구, 박사님 애 많이 쓰셨어요... 수고 많으셨슈... 택기도 수진의 어깨를 도닥여주며 두 사람 같이 웃고... 지현과 병달도 좋아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싱그러운 포돗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흥겨운 음악 시작된다.
S#44. 마을회관 앞 (석양)
마을 잔치가 한창이다. 한쪽에선 노인 한분이 정겨운 목소리로 장구를 두들기며 소리를 하고 있고, 마을 사람들은 떡과 음식을 나누며 모처럼의 잔치를 즐긴다. 포도주를 항아리째 날라 오는 사람들. 범수와 어린 애들도 노인들의 어깻짓을 따라 덩더쿵 춤을 춘다. 아이들의 재롱에 어른들의 입가에도 웃음이 만발하고. 수진에게 술잔을 내미는 이장.
이 장 박사님께 정말 감사 디레요!
수 진 (잔 받으며) 뭘요. 동네분들이 마음고생 많이 하시고 욕보셨지요. 동네분들 뵈면서 저두 해충 못 잡으면 어쩌나, 간이 조마조마 했어요...
이 장 그래요, 그동안 밤잠도 못 주무시고 을매나 애써주셨어요...!
영 배 맞아요. 이장님, 우리가 박사님한테 뭔가 보답을 해디레야 되는 거 아니래요?
수 진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이 장 그래요, 뭐 필요하신 게 있으문 말씀을 해주세요...
수 진 아니에요. 마음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송할멈 아휴, 워때유? 말씀하셔유. 그래야 저이들두 맴이 편허지유.
이장댁 그래유...
모두들 수진의 얼굴만 보고 있는데, 멀리 떨어져서 사람들 속의 지현도 수진을 쳐다보고...
수 진 (난감한) 아이, 참...
택 기 (옆에서) 얘기 해.
수 진 그럼, 저기... 저희같이 연구하는 사람들은 실습장이 절실하거든요. 연구소에 딸린 실험장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자기 실습장을 갖긴 힘들어서요...
이 장 아이구, 그게 뭐가 힘들다고... 우리 부락사람들이 힘을 합쳐보면 박사님께 작은 실습장 정도는 마련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람들에게) 안 그래요?
사람들 모두 박수를 치고.. 지현도 애매하게 웃지만, 기쁜 상태. 박수 친다.
영 배 (박수치며) 박사님께서 이래 우리 마을에 자주 와계시면 우리두 좋은 거 아니래요?
이 장 자! 그런 의미에서 우리 건배한번 하죠?
나란히 앉아있던 택기와 수진도 잔을 들고, 떨어져 있는 지현도 잔을 들어 올린다. 이장의 선창에 따라 위하여!를 외치며 건배를 하는 사람들. 택기과 수진, 웃으며 마시고, 지현도 사람들과 웃으며 마신다.
S#45. 동 마을회관 앞 (시간경과. 밤)
북적대던 사람들, 끼리끼리 나뉘어져 술을 마시고, 수진은 여전히 이장, 영배 등에게 붙잡혀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한쪽에서는 누군가 아코디언으로 뽕짝을 연주하고, 박영감이 코믹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병달과 송여사도 박영감의 춤을 보며 박장대소하고. 음식을 치우던 지현도 그 모습을 보며 웃고는 쟁반 들고 가려는데, 이때 한쪽에서 아저씨들과 술을 마시다 일어나는 택기. 지현의 쟁반을 잡아 한쪽에 놓더니, 지현의 손목을 잡아 빈 술상에 나란히 앉는다.
택 기 자, 니도 일루 와서 한잔 해.
지 현 (괜히 손목 빼며) 무슨 술을 해요?
택 기 (술 따라주며) 자! 니도 수고했어. 징그러운 벌레 참 많이도 잡았지?
입만 삐죽거리는 지현. 택기가 잔을 내밀면, 마지 못하는 척 건배하고 술 마신다.
택 기 (술 마시고는) 포도밭에 와가 고생만 하고... 시골 징글징글 하지?
지 현 어떻게 알았어요?
택 기 맨날 투덜투덜 대면서도, 그래도 안 올라가는 거 보문 살만은 한가보네?
지 현 살만하긴 뭐가 살만해요...? (한숨) 솔직히 난 시골에 오면... 맨날 좋은 거만 먹고... 일은 일꾼들이 다 해주고... 시원한 냇가에서 발이나 담그고 노는 건 줄 알았는데...
택 기 그랬어? (웃으며 술 따라주면)
지 현 밤에는 반딧불이가 환상적으로 날아다니고, 낭만적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반딧불이는커녕 맨날 모기만 물리고... 시골에 빈딧불이가 어딨어? 순 생 뻥이지. (술 마시는데)
택 기 반딧불이가 왜 없어? 있어.
지 현 반딧불이가 어딨어요? 내 한 번도 못 봤네!
택 기 정말 있다니까? 내가 보여줘? (일어나며) 일루 와봐.
지 현 아이, 됐어요. (술 따르려고 병 집는데)
택 기 일루 와보라니까? 그게 그렇게 보고 싶었어? 진작에 말을 하지. 우리 뒷산에 많아.
대뜸 지현의 손목을 끌고 가는 택기. 지현 한손에 술병 든 채로 끌려간다. 이장에게 붙잡혀 있는 수진이 이런 두 사람을 본다.
S#46. 숲속 (밤)
한 손에는 포도주 병을 들고, 한 손으로는 지현의 손목을 붙잡고 숲속을 걸어가는 택기.
지 현 (술 취해 약간 비틀거리며) 도대체 어딜 가는 거예요?
택 기 다 왔어. 조금만 기다려.
이내 졸졸 흐르는 개울 앞에 멈춰서는 택기.
택 기 자 여기야.
지 현 (주변 둘러보며) 어디? 반딧불이 어딨어? 또 뻥이죠?
택 기 쉿! 가만있어 봐. 조용히 있어야 나온다꼬!
택기와 지현 숨죽이고 앉아 둘러보고 있으면,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달빛은 휘엉청 빛을 발하는데, 잠시 후 하나 둘 나타나는 반딧불들. 꼬리에 노란 불빛을 달고서 유영하듯 부드럽게 날아다닌다. 자기도 몰래 해맑게 웃는 지현.
지 현 헤... 있네?
택 기 (속삭이듯 나직이) 그치? 있지? 내 말이 맞지?
지 현 예쁘다...!
천천히 두 손을 뻗어 날아가던 반딧불이를 한 마리 손아귀에 잡는 택기. 천천히 펴보면 손바닥 안에서 반딧불이 숨을 죽인 채 불을 반짝인다. 신기한 듯 들여다보는 지현. 그런 지현을 쳐다보는 택기. 손아귀의 반딧불이는 어딘가로 날아가고, 지현, 택기를 보며 활짝 웃는다. 미소를 머금고 기분이 좋은 택기.
S#47. 동 숲속 개울가 (밤)
개울에 발을 담그고 앉아 포도주를 마시는 지현과 택기. 잔을 가지고 오지 않아, 입을 대고 마시고 주면, 입을 대고 마신다.
지 현 풀벌레 소리도 참 좋다... 여기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택 기 여기서 시간 멈추면 니 포도밭 못 받아.
지 현 치, 그만큼 평화롭고 행복하단 뜻이죠! 아, 이 풀벌레 소리... 무슨 벌렌지 알아요?
택 기 이건 여치소리고... (다시 귀 기울이더니) 이거는 쓰르라미...
지 현 쓰르라미... (귀 귀울이고)
택 기 이거는... 방울벌레...
지 현 (귀 기울이며) 그럼 이건 귀뚜라미 소린가?
택 기 귀뚜라미는 가을에 울어.
지 현 그래요...?
히죽 웃는 지현.
지 현 이제 가요.
택 기 그래. 가자꼬...
S#48. 시골집 앞 (밤)
수진이 들어서면 병달이 수돗가에서 일어난다.
수 진 (택기방을 보며) 택기 왔어요?
병 달 아니. 안즉 안 왔다.
수 진 (지현방을 보며) 지현씨도 안 왔어요?
병 달 그래. 안 왔는데? (들어가면)
수진 걱정스레 돌아서고, 이때 집 앞으로 들어서는 경민의 차. 수진 나가보면, 장미 꽃다발과 케이크 상자를 들고 차에서 내리는 경민. 수진 경민에게 먼저 고개인사 하는데,
경 민 안녕하세요. 지현이 있지요?
수 진 지금 지현씨 집에 없는데요?
경 민 네?
S#49. 동 숲 (밤)
돌아오는 길. 지현과 택기가 올 때보다는 제법 취했다.
택 기 니 취했어? 똑바로 걸어.
지 현 안 취했어요. (비틀거리면)
택 기 (얼른 잡아주며) 취했는데, 뭘?
막상 잡고 보니, 택기는 기분이 이상한데,
지 현 괜찮아요. 아, 기분 좋다.
택기를 지나쳐 먼저 앞서가는 지현. 택기 따라 가는데, 이때 지현이 발을 헛디디며 넘어진다.
지 현 아야!
택 기 (달려가 지현의 다리 보며) 괜찮아?
지 현 아야! 아파요! 아아!!
택 기 다리 삐었어? 그러게 조심하라니까! 업히!
지 현 업히긴 뭘 업혀요? 챙피하게...
지현 일어나 가지만, 이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다.
S#50. 저수지 앞 길 (밤)
지현을 업고 오는 택기.
택 기 가시나 디게 무겁네?
지 현 그럼 내려요...
택 기 알았어. 하나도 안 무거워.
지현도 싫지만은 안은 눈치다.
지 현 (잠시 후 택기에게) 노래 좀 불러봐요. 노래 잘하던데?
택 기 됐어.
지 현 그러지 말고 한번 불러봐요.
어쩔 수 없다는 듯 노래를 부르는 택기. 부드러운 노래가 택기의 등을 타고 지현에게 전해진다. 지현 흐뭇하게 웃으며 택기의 등에 얼굴 기대는데... 저쪽에서 사람들이 달려온다.
경 민 지현이니? 지현아!
고개를 드는 지현. 달려오던 경민이 택기의 등에 업혀있는 지현을 발견하곤 표정 굳어진다.
경민의 뒤에서 수진도 나타나고. 네 사람의 모습이 굳은 듯 정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