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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시 34:1-10)
할렐루야! 2020년, 마지막 주일,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34편은 22절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자음 알파벳 수는 22자입니다.
시편 34편은 알파벳(알렙 베트)의 순서대로, 첫 글자를 적고 있습니다.
영어 알파벳으로 말하자면, 1절은 A로 시작하고, 2절은 B로 시작하고, 3절은 C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22절까지, 히브리어 자음 22자를 사용하여, 34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를 지을 때에 이렇게 알파벳 순서를 따라서 기록하면, 암송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데, 매우 쉽게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시인입니다. 정말 히브리어를 잘 이해하고, 사용하는 사람으로, 아마추어 시인이 아니라, 시를 아는 전문적인 시인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히브리어의 그 특이한 구조까지, 우리말 성경에 담아낼 수 없다고 하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시를 이해하려고 할 때에, 시인이 처하였던 삶의 정황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34편을 보면,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이 시를 짓기 전에, 많은 어려운 일들을 당했습니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이 적장 골리앗을 물맷돌로 죽이고, 개선할 때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와서 노래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는 말이었습니다. 사울 왕보다도 다윗이 더 위대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요즘, 정치인들은 여론 조사에 아주 민감합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더 예민해 집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민심의 동향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노랫말에, 사울 왕은 기분이 상했습니다. 불쾌하여, 심히 언짢아하였고,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사람들이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사울에게는 수천 명을 돌렸으니, 이제 다윗에게 더 돌아갈 것은 사울 자신이 앉아 있는 왕의 자리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사울 왕이 악신에 들려, 실성거리고, 미친 듯이, 헛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은 시인이요, 수금을 잘 타는 음악가였기에, 악신을 쫓아내기 위하여, 사울 왕 앞에서, 수금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울이 다윗에게 창을 던졌습니다. 그 날,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 왕의 창을 피해야만 했습니다.
사울이 생각하기를, 전에는 하나님이 사울 자기와 함께 하는 줄로 알았는데, 이제는 자기에게서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면서, 속이 타서, 전전긍긍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사울 왕은 골리앗을 죽이면, 자기의 사위를 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큰 딸은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고,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잘 따르고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다윗을 둘째 사위로 맞이했습니다.
다윗이 천부장으로 군대를 통솔하며, 여러 대적을 막아 싸우는데, 가는 데마다, 승승장구하고, 백전백승했습니다. 이렇게, 사위가 전쟁터에 나가서 잘 싸우는데도, 사울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아들 요나단과 다윗이 친형제 이상 가까운 것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에게 직언하여, 신하 다윗을 미워하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고, 여러 번 간청했지만, 이제는 그런 요나단도 죽이려고 합니다.
어느 저녁엔, 딸 미갈과 함께 잠자리에 들어간 다윗의 집을 포위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미갈이 재치가 있어, 다윗이 자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서, 다윗을 몰래 도망치게 했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하다가, 동굴에 숨기도 하고, 광야로 도망치기도 했지만, 이제 더 이상 피할 데가 없어서, 너무 급해서, 철천지 원수의 나라, 골리앗의 나라, 적국 블레셋에 망명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이라는 나라는 5개의 도시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나라가 한 해씩 돌아가면서, 블레셋 연합 국가의 왕을 맡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가장 호의적인 가드의 왕 아기스라는 아비멜렉에게 갔습니다. “아비멜렉”이라는 말은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이며, 블레셋에서 왕을 부를 때, 주로 사용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다가, 블레셋 나라 가드에 가서,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그때, 신하들이 아기스 왕에게 말했습니다.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삼상 21:11)
사실 따지고보면 다윗은 아직 이스라엘의 왕이 아닙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을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이라는 나라는 여러 나라, 여러 명의 왕이 있어, 서로 연합하고, 한 왕이 블레셋을 대표할 때가 있으니, 다윗도 사울과 대등하게 보면서, 왕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아기스 왕의 신하들이 말하는 것이나, 아기스의 어전을 살펴보니, 공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블레셋 병사를 수없이 죽였고, 장군 골리앗을 죽인 자인데, 가만 두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다윗에게, 지혜를 주시는데, 미친 체하고, 침을 수염에 흘리고, 모자라는 척하라는 것입니다.
가드의 아기스라는 왕은 통이 큰 사람입니다. 망명한 적장을 그의 어전에서 죽인다는 것은 왕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고, 그렇다고 신하들이 직언하는데, 그 직언을 모른 척 무시할 수만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기스의 마음을 움직여 주었습니다. 미친 체하는 다윗을 보면서, 아기스는 다윗을 살려 보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아주 실감 있게 그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기스가 신하들에게 소리쳤다. ‘아니, 미친 녀석이 아니냐? 왜 저런 자를 나에게 끌어 왔느냐? 나에게 미치광이가 부족해서, 저런 자까지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왕궁에 저런 자까지 들어와 있어야 하느냐?’”
이것은 하나님이 아기스의 마음을 움직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악한 계략들을 막아주셨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수없이 겪은 다윗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시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지금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귀하신 섭리와 원하시는 뜻을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했기에,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음 마음에 들어하셨습니다. 흡족해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첫째,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아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높이거나 자랑하기보다는 항상 하나님을 높이고, 송축해야 합니다. 찬양해야 합니다.
번성하거나 실패할 때에도, 안전하거나 위험할 때에도, 평안하거나 곤고함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그 어떤 형편에 처할지라도,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높여 합니다.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자랑”이라는 말은 “찬양하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이야마로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감히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입을 열어서, 어찌 주님을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온 맘 다하여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찬양함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자기만 혼자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3)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빼놓지 말고, 모든 사람이 함께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 시대,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믿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하는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미국 오페라계에서 활동했던 “할버튼”이란 가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할버튼은 자기 집에 돌아오면서, 자기 아들과 이웃집 아이가 놀면서 주고받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이웃집 아이가 “우리 아버지는 시장님을 잘 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할버튼의 아들은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안다.”고 당당히 대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화를 들은 할버튼은 그의 서재로 들어가 실컷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사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옛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는 사이였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나 모세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벗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아는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축복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 더군다나, 가장 높으시고, 가장 전능하시고, 가장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놀라운 감격, 바로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분은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둘째,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4-8절 말씀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아멘.
다윗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다윗은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미친 척하게 하여, 피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는 것이요,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십니다. 우리의 얼굴을 부끄럽지 않게 해주십니다.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신다고 약속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리시는 천사들을 보내어, 주를 경외하는 자들을 둘러 진치고 그들을 건져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피하는 사람이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힘입어 살겠다고 하는 결단입니다.
기도할 때,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은총과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귀한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귀한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고 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은혜와 축복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삶에 기쁨이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지상에도, 하늘에도 없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시 16:11)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도는 악기를 조율하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제 가는지, 기억이 가마득하지만, 음악회에 가보면, 악단이 연주하기 전에, 피아노의 음에 맞추어, 악기를 조율합니다.
조율하는 시간에, 음을 들어보면, 참으로 요란합니다. 시끄럽습니다. 모든 음이 맞지 않아, 앵앵거립니다. 그런데도, 연주가 시작되기 전, 악기를 조율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중국 선교의 선구자인 허드슨 테일러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중국 땅을 밟아 평생동안 중국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어떻게 평생동안 중국 선교사로 헌신할 수 있었습니까? 그 낯선 땅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의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에, 악기를 조율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에 나의 생각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하루가 보람되고, 인생이 행복해지게 마련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연주회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악기를 조율하는 것처럼,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의 삶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를 시작하기 전, 뭔가를 시작하기 전,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줄이 느슨해졌으면 조이고, 너무 조여서 끊어질 것 같으면, 풀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음을 낼 수 있게 합니다. 조율이 잘 된 악기들이 모여서, 화음을 만들어내면, 정말 아름답고, 웅장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의 조율이 잘되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므로, 늘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9-10절 말씀입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멘.
성경에서 “경외한다”는 말은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엄위하심 앞에,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할 때에 처음에는 “무서워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을 무서워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감격 속에 살아가라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는 말은 결코 “하나님을 무서워하라”는 그런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거룩한 두려움, 경외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공경하며,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높여드리는 것이며, 경건한 자세와 받드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을 인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잘잘못을 가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진품명품”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나와서, 골동품의 진위와 가치를 가격으로 평가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먼저, 골동품 소장가들에게, 그 물건을 소장하게 된 사연을 직접 듣습니다.
조상들이 물려주었다거나, 비싼 값을 주고 그 물건을 구입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연애인 판정단들이, 골동품의 예상 가격을 맞춰 봅니다.
마지막에는, 전문가들이 진품 여부를 확인하고, 예상 가격을 확정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골동품 가운데, 고가의 진품으로 생각하는 것 중에, 가짜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한번은 중년 신사가 오래 되어 보이는 붓글씨 한 점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분은 애국지사가 쓴 작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습니다. 연예인 감정가들도 감탄하면서, 매우 비싼 가격을 매겼습니다. 소장자도 감정가를 1억 원이 넘게 써냈습니다. 모두가 마지막으로 전문가의 평가를 기다립니다. 숨을 죽이고, 전광판을 지켜보는데, 감정가가 단돈 500원이 나왔습니다. 소장자의 얼굴이 벌겋게 변하더니, 금방 표정이 굳었습니다. 그것은 진품이 아닌 가짜였습니다. 소장자는 지금까지 가짜를 진짜인 줄 알고,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품명품”이라는 프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도 저런 모습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주님께서 나의 믿음을 살펴보시더니, “가짜”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신앙은 높은 경지의 경건한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진품이 아닌 “가짜”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우리의 신앙은 진짜입니까? 아니면, 가짜입니까?
우리의 신앙은 그럴싸한 가짜가 아니라, 누가 보아도, 특별히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짜 신앙”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진짜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시기에, 날마다, 진짜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자, 힘쓰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의 신앙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므로,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크신 은총을 내려 주옵소서.
우리의 입을 열어, 주님을 찬양하며 살기 원합니다.
우리의 입을 열어, 주님께 기도하며 살기 원합니다.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경외하며 살기 원합니다.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