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비가 오던 어느 날.
물향기수목원에서 좋은 님들과 맨발로 오솔길을 걸었습니다.
예쁘고 고운 추억만 남겼나 싶었는데
가슴이 싸아해지는 그림도 하나 있었습니다.
그때는 무심코 넘겼지만 '주이'님의 사진에 남은 모습을 자꾸 확인하게 되고
아름다움 속에 스며 있는 처연함에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바로 댕강나무의 꽃진자리였습니다.
꽃이 피어 있어 아름다운 모습도 좋지만,
꽃송이를 모두 떨구고 난 뒤 빗방울을 꽃잎처럼 머금고 있던 모습이 애잔하게 예뻤습니다.
삼십몇 년 전,
조금은 자랑스럽게, 또 한편으론 수줍게
제 청춘의 첫꽃봉오리를 터뜨렸을 때 제 곁에는 아무도 축하해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집안 사정으로 10대의 몇 해를 나 혼자 외롭게 지낼 때였습니다.
준비성 있으셨던 엄마 덕분에 당황스럽고 신비로웠던 첫 달거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엄마가 미안해하며 흘리시던 안쓰러운 눈물에 행복했더랬습니다.
그래서 내 딸아이가 첫꽃을 피웠을 때는 온 식구가 모여 함께 축하를 해줬습니다.
남편은 생애 처음으로 꽃다발을 샀노라며 쑥스러워하기도 했지요.
무뚝뚝한 아들도 제 누이에게 예쁜 일기장을 선물로 주었고요.
고맙게 잘 자라 예쁜 숙녀가 된 것이 대견해 저는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제 인생의 꽃은 이제 더 이상 피지 않습니다.
누구는 거름을 다시 뿌리기도 하고, 또 누구는 신선한 물을 주기도 하지만
저는 세월에 순응하려 합니다.
꽃이 피면 지는 것이 순리이기에 억지로 거스르지 않으려 합니다.
애잔한 아름다움일지언정 분명 꽃진자리도 아름답다는 걸 봤기 때문이고
제 꽃이 진 자리에는, 탐스러운 열매 두 개가 맺혀 보석처럼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꽃은 졌지만 남은 자취가 열매를 지탱케 하는 힘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더 깊어지고 나뭇잎이 모두 지고 나면
물향기수목원으로 다시 가 봐야겠습니다.
댕강나무 꽃진자리가 어떤 모습으로 저를 바라봐 줄지 궁금합니다.
꽃님 여러분,
아름다운 가을을 맘껏 누리시고
행복한 시간들을 만들어 가십시오.
건강도 아울러 기원합니다.
- 2011년 11월 1일 바람재 운영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