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사랑~~~~~~
김부용.(金芙溶)은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네살때 부터
글을 배워 열한살 때 당시(唐詩)의 사서삼경에 달통한 재원이었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다음해 어머니도 잃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적에 이름을 올렸다.
시명(詩名)을 운초(雲楚)라고 한 부용은 영특하고 용모도 특출해 풍류남아의 애간장을 녹였다.
나이 19살 때 평안감사 김이양(金彛陽1755~~1845) 대감에게 소개됐다.김이양은 이미 77세였다.
얼마 후 김이양은 호조판서가 돼 한양으로 부임했다.
이별을 하게 되자 김이양은 직권으로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어 주고 훗날을
기약하며 한양으로 떠났다. 생이별한 부용은 재회의 날만 기다리며 외로움과 그리움의 나날을 보냈다
소식이 없자 그리운 님이 보고도 싶고 잊었는가 걱정도 하며 이별의 슬픔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부용은 애절한 시를 써서 인편으로 보냈는데 이 시가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이라는 명시인데~ 잊었다.
학수고대하던 김이양이 사람을 보내 부용을 불러 한양 남산 중턱에 신방을 꾸몄다.
그 집은 단출해도 숲이 우거졌고 여러 화초로 꾸며녹천당(綠泉堂)이라 했다.
김이양은 83세로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한 생활을 하며 부용과 다정하게 지냈다.부용과 김이양은 서로의
시 세계를 이해하면서 깊은 애정을 지니게 된다. 이때 김이양에게 보인 부용의 시가 부용당청우(芙蓉堂聽雨)다
옥구슬 일천 말을 / 쟁반에 쏟는구나/ 알알이 둥글둥글/ 신선의 환약 이런가/
1844년 2 월 김이양은과거급제 후 60년이 돼 조상들의 성묘를 위해 고향 천안 광덕사경내에 있는 자신의 장원에
부용을 동반하고 순행을 한 후 김이양은 이듬해인 1845년 10 월 감기로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부용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님을 잃자 부용은 방안에 제단을 모시고 밤낮으로 명복을 빌며 애통한 심정을 시로 달랬다.
십오 년 정든 님/ 오늘도 눈물 짓네/ 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이어줄꼬/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외부와 일절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