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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다시 나타날 엘리야들 184
권두언
하나님께서는 지금 진리의 빛을 전할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람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나아가 재림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전할 사람들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파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이 진리의 메시지는 변론으로 전해지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의 깊은 감동으로 전해질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버리실 것입니다. 대신 자아를 완전히 비운 사람, 큰 성령의 역사에 따라 움직이지만, 거기에 자신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의 품성의 빛을 환하게 비추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이 일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한 성령 안에서 연합하는 특별한 한 백성을 가지실 것이며, 그 백성을 친히 선두에 서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온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려는 소망과 정신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백성들 속에서는 사랑과 겸손과 화합과 협력이 나타날 것인데, 그것은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이 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고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세 번째 엘리야의 사명을 이루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강 병국 목사
Love Letter_ 단풍 숲길을 걸으며
강 영은
하얀 뭉게구름 파란 하늘에 몇 점 떠가더니
코스모스 향기 수줍게 하늘에 흩뿌리더니
어느새 가을이 깊어 숲은 온통 단풍입니다.
아직도 소곤소곤 잎이 물드는 소리가 들리는 숲에서
단풍잎 하나하나마다 서린 사연을 읽어봅니다.
한 해 그렇게 많은 일을 겪은 나무는 할 말이 많은가 봅니다.
빨강, 노랑, 갈색, 잎잎이 마음을 담아낸 단풍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해 내 마음에 물든 사연도 비춰봅니다.
한 나무인데도 서로 다른 빛깔로 물든 잎들은
함께 겪었어도 말하고 싶은 사연은 다 다른가 봅니다.
문득 생각에 잠겨 봅니다.
만일 내 마음의 사연이 색깔로 피어난다면
무슨 색으로 물들어 피어날까?
눈부신 빨강, 사랑과 감사의 색으로 피어날까?
빛나는 주홍, 찬양과 기쁨의 색으로 피어날까?
혹은 황홀한 노랑, 행복과 환희의 색으로?
아니면, 검은 점 박힌 어두운 갈색, 슬픔과 원망의 색으로 피어날까?
꽤 큰 키에 잎을 많이 달고 있는 나무 위를 올려다봅니다.
햇빛을 많이 받은 높은 가지의 잎들은 잘 익어 예쁜데
햇빛을 덜 받은 부분은 물이 잘 안 들어 예쁘지가 않습니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려면 충분한 햇빛이 필요하다지요?
일조량이 풍부하면 나뭇잎의 광합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러면 충분한 염료가 만들어져 색깔이 고운 단풍이 된답니다.
초록잎이 형형색색으로 예쁘게 물드는 것은 다양한 염료 때문인데,
여름 동안 열심히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잘한 나뭇잎은
붉은색을 나타내는 염료 안토시아닌, 그리고 노란색을 내는 염료 크산토필이 많이 가지고 있어 노랗고 빨갛게 예쁘게 물이 듭니다.
나는 한 해 어떤 빛깔로 물들었을까 다시 생각해 봅니다.
햇빛 같은 주님의 사랑을 흠뻑 받고 많이 간직해서
그 사랑의 흔적마다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 나타날지,
사랑한 자국마다 노란빛 빨간빛 단풍들어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지…
아니면 햇빛을 저버린 채 어두운 그늘에서 자란 잎처럼,
그래서 예쁘게 물들지 못한 잎처럼,
불평과 원망의 갈색 점 점점이 박혀 곱지 않게 붙어 있을지…
단풍 짙은 숲길을 걸으며
이 가을 햇빛을 많이 받은 잎처럼
곱게 물들고 싶어집니다.
제1부_ 세 번째 엘리야가 온다
현재 세계 각 곳에서 일어나는 재난과 전염병,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과 분쟁, 그리고 여러 가지 사건과 천연재해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마지막 징조들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 끝이 이르고 있습니다. 가까워져 온 구속을 향해 머리를 들어야 할 때입니다.
이 지구의 역사가 마치기 전에, 멸망해 가는 이 세상을 돌이키고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마지막 때에 세 번째 나타나는 엘리야에 의해 전해질 것입니다. 세 번째 나타날 엘리야는 누구일까요?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이 주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 봅니다. 영적으로 큰 각성을 주는 연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실 –
제1부: 세 번째 엘리야가 온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5,6).
구약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 중에 엘리야만큼 유명한 선지자는 없는 것 같다. 그의 이야기는 많은 목회자들이 즐겨 선택하는 설교 주제가 되고 있으며, 또 어린이들이 읽는 성경 이야기 속에도 대표적인 인기 인물로 등장한다. 심지어 즐겨 애창되고 있는 어린이 찬송 “나의 사랑하는 책” 가사 2절에도 엘리야가 나온다.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타고 하늘에 올라가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즐겨 회자되고 있다 할지라도, 엘리야가 외친 진리 속에 내포된 의미심장한 뜻과 그 사명의 엄숙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더 나아가 엘리야가 외친 진리와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의 연관성을 깨닫는 사람은 더 적다. 과연 엘리야가 외친 진리와 사명이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1) 세 번째 엘리야는 누구인가?
앞에 언급된 본문 말라기 4장 5,6절은 마지막 시대에 엘리야가 나타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 곧 이 지구의 역사가 거의 마쳐지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바로 직전에 또 다른 엘리야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이다. 그 엘리야는 세 번째 엘리야로 불려진다. 그가 누구인가?
성경은 각각의 다른 세 시기에 출현할 세 엘리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표상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첫 번째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왕국시대에, 우상 숭배에 빠진 반역한 이스라엘을 돌이키고 경고하기 위해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선지자 엘리야이다. 두 번째 엘리야는 누구인가? 그의 존재는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말씀 때문에 금방 알 수 있는데 그는 침례 요한이다. 침례 요한 당시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사역이 말라기 예언의 성취라고 말씀하셨다.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14). 요한의 인격 속에 엘리야가 재성육신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엘리야가 전파했던 것과 동일한 진리를 전파하였고 엘리야와 똑같은 사역을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으며, 그것은 말라기 예언의 성취로 간주된다. 그뿐인가? 침례 요한이 태어나기 전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앞으로 날 아이의 사명에 대해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7)고 말하지 않았는가? 말라기에 기록된 예언이 침례 요한의 사역을 통해 얼마나 정확히 성취되었는가!
그렇다면 세 번째 엘리야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직전에, 주님의 오심을 위하여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엘리야가 외치는 진리가 다시 한 번 이 땅에 선포될 것이다. 이 진리는 경고와 개혁의 외침으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으로 돌이키라고 호소하며, 바벨론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내는 일을 할 것이다. 그러면 누가 이 진리를 전하는 세 번째 엘리야인가? 세 번째 엘리야는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다. 곧 현시대에 세상에 필요한 영원한 복음과 현대 진리(present truth)를 전하는 사람들이 세 번째 엘리야들인 것이다. 곧 영원한 복음의 진리를 먼저 받고 깨달은 자들로서, 단순히 이 진리를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교훈과 진리대로 성화 되고 변화된 사람들이며,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에 임할 심판에 대해 두려움 없이 사람들을 경고하고 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왕이 오기 전에 대로를 평탄케 하는 왕의 대사들이요, 침례 요한이 은혜의 왕국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 앞서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킨 것처럼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을 위하여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사람들이다.
2) 세 번째 엘리야의 사역
예수님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기 직전인 이 시대에 침례 요한이 행했던 개혁 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여호와의 큰 날에 설 수 있도록 준비시킬 남녀 일꾼들을 부르고 계신다. 침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위한 길을 예비하기 위해 엘리야의 정신으로 옴으로 두 번째 엘리야로 불린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 길을 예비하는 사람들도 엘리야, 곧 세 번째 엘리야로 표상된다. 창세로부터 변질하지 않은 영원한 복음을 믿는 사람들,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환란의 날에 서기 위한 성품을 준비하며,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 곧 죄를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경건한 사람들은 마지막 시대에 내리는 늦은 비 성령의 큰 역사에 참여하게 될 것인데, 이들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세상에 나아가 바벨론의 죄악을 폭로하고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참 자녀들을 불러내는 일을 할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로 용기백배하여 두려움 없이 세상에 나아가 참된 복음과 진리를 전할 것인데, 그 큰소리로 외치는 진리는 침례 요한의 가감 없던 외침처럼 직접적인 것이 될 것이다. 생명에 위험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왕들의 죄를 책망하고,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위선과 교만과 죄를 책망하며 회개를 촉구했던 침례 요한은 곧바른 기별과 진리가 그의 입술에서 약해지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앞으로 일어날 범세계적인 배도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복음을 외치는 자들에게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그분의 계명을 선포하라고 하신다. 침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위하여 백성을 준비시킬 때에, 죄를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삶, 곧 십계명으로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킨 것과 같이, 마지막 시대에 오는 세 번째 엘리야들도 진리를 왜곡시키는 오류들을 경고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한 세상의 죄를 책망하며 다가오는 심판을 위하여 회개를 촉구할 것이다. 그리하여 분명한 소리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때가 이르렀음이니…”라고 외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마지막 사업은 늦은 비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인하여, 주의 영광으로 온 세상을 환하게 할 계시록 18장 1절에 예언된 넷째 천사의 운동으로 연결될 것이다.
선지자 엘리야와 침례 요한처럼 열성과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의 재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들에게 큰 책임이 맡겨져 있다. 세 천사의 복음과 현대 진리를 깨닫고 오류로 변질되지 않은 성경의 순수한 복음과 진리의 빛이 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과제는, 깨닫게 된 진리 그대로 순종하는 일과 더 나아가 그 진리를 전하기에 합당한 성품과 생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며 재림이 가까웠으니 준비하라는 소식을, 바로 영원한 멸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자들에게 전할 엄숙한 책임과 특권을 누가 회피할 수 있을 것인가?
제2부_ 첫 번째 엘리야가 왔을 때
선지자 엘리야의 시대 이후 장구한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일생의 사업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을 따르며 의를 위하여 홀로 서는 사람들에게 큰 용기와 감명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생애의 기록은 특별히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1) 하나님이 찾아낸 사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필요하셨다. 불신과 반역으로 얼룩진 배도의 시대에 백성들을 깨우고 경고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할 일꾼이 필요하셨다. 아합의 시대에 요단강 동편 길르앗 산중에 사는 신앙과 기도의 사람이 그 일을 위해 택함을 입었는데,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였다. 산중 은신처에서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이스라엘을 바라볼 때에 그의 마음은 고통스러웠고 의분이 일어났다. 당시의 사람들은 아합 왕의 영향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거의 잊어버리고 축복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 대신 바알을 모든 것을 공급해 주는 신으로 믿고 섬기고 있었다. 이방 나라의 악습을 그대로 모방하며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으로 눈이 멀고 현세의 이익과 육욕에만 빠져,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의 임무는 물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목적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다. 엘리야는 한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기적의 역사를 경험하던 백성이 완전히 멸망 받게 되기 전에 회개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는 백성의 악한 행위를 돌이킬 수만 있다면, 필요하다면 형벌이라도 내리셔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였다. 엘리야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엘리야는 비록 그 명령을 순종할 때에 생명이 위태하게 될 것을 알았지만, 그 부르심에 순종하기를 지체하지 않았다. 그의 담대함과 하나님을 위한 열심과 영혼을 위한 열정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이 시대에도 엘리야와 같은 정신과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죄악의 조류에 휩쓸려 가고, 주위의 친구와 친지들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류의 길로 갈 때라도, 엘리야처럼 홀로 굳게 서서 의와 진리의 길을 가며, 죄악의 물결에 휩쓸려가는 영혼들에 대한 부담과 오류에 물들고 표류하는 기독교를 위한 부담을 가지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담대하게 참된 복음과 진리를 가지고 영혼들에게 경고하며 가까이 다가온 심판과 예수님의 재림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엘리야가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거나 인간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합 왕 앞에 나타나 곧바른 진리를 전했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나아가 진리를 외쳐야 할 사람들은 왕과 같은 높은 지위와 권력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별을 전할 것이다.
2) 엘리야의 접전과 아마겟돈 전쟁
엘리야가 치렀던 갈멜산에서의 그 유명한 접전은 표상적인 의미에서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선과 악의 대 쟁투 “아마겟돈의 전쟁”(계 16:16)과 깊은 연관이 있다. 마지막 때에 사탄과 연합한 세 세력이 하나님의 참 백성과 접전하기 위하여,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아마겟돈에 모이게 된다. 성경은 그곳을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아마겟돈”의 헬라어는 “할 므깃도 (Har-megiddon)”로서 이것은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이 있다. “므깃도”는 바로 엘리야가 거짓 선지자들과 접전을 했던 “갈멜산” 아랫부분에 있는 평야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아마겟돈”, 헬라어 “할 므깃도”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갈멜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에서 마지막 전쟁이 일어난다고 묘사했을까? 그것은 갈멜산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 신의 거짓 선지자들 사이에 있었던 투쟁과 같이, 마지막 때에 선과 악의 영적인 대결이 그렇게 펼쳐질 것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로 기록한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갈멜산에서의 대결처럼, 선과 악의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 정점을 이룰 것이다. 그 날에 서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흰옷을 빨리 준비해야 한다. 엘리야의 시대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백성과 거짓 신들을 예배하는 자들 사이에 경계선이 분명하게 그어져 있다. 우리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2, 4, 5)고 외쳐야 한다. 모든 영혼에게 시험이 닥쳐올 시간은 머지않았다. 사람들은 거짓 계명을 준수하도록 강요당할 것이며,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계명 사이에 투쟁이 있을 것이다. 차츰차츰 세상의 요구에 굴복하고 세상의 습관에 동화하는 사람들은 조롱과 모욕과 투옥의 위협과 죽임을 당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세력에 복종할 것이다. 그때에는 금이 찌끼에서 분리될 것이며, 참 경건은 겉치레만의 경건과 분명히 구별될 것이다. 엘리야와 같이 마지막 선과 악의 대쟁투에서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의의 증인과 일꾼이 되도록 하자!
3) 엘리야의 개혁 사업
우리는 엘리야의 생애를 통해 나타난 그의 정신과 신앙의 개혁 사업을 본받아야 한다. 엘리야는 개혁 사업에 전 생애를 바쳤다. 그는 백성의 죄를 견책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종이었다. 악한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을 때에 엘리야는 아합의 운명과 그의 집 모든 사람의 운명을 예언하며 견책하였고, 아하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합이 죽은 후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로 향했을 때에도 맹렬히 그 죄를 견책하였다. 두려움 없이 죄를 죄라고 부르며 견책하고 거기서 돌이키고 개혁하기를 촉구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엘리야의 사명이 맡겨져 있다.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는 말라기의 말씀의 의미는 엘리야의 개혁과 교육 사업을 상고해 보면 확실해진다. 엘리야는 오랫동안 숙원하던 교육과 가정의 영적 회복 사업에 착수했다. 이스라엘은 일찍이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가져 하나님의 율법을 잘 가르쳤었다. 그러나 오래전에 사무엘 선지자가 설립한 선지자 학교들은 이스라엘의 배도의 기간에 낡고 허물어져 있었다. 엘리야는 청년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높이고 존중하는 참교육을 받도록 이 학교들을 다시 설립하였다. 이들 중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에 있던 세 학교는 기록에 나오는 유명한 학교이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기 바로 전에도 그는 후계자 엘리사와 이 훈련소들을 방문하며 학생들에게 교훈을 주었다.
사회가 개혁되려면 먼저 가정이 변화되어야 한다. 변화되고 잘 훈련된 가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설교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가정교육은 필생의 사업이다. 자녀들이 가정에서 받은 교육과 모본은 평생 영향을 끼쳐 그들이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 충성하게 한다. 훌륭한 그리스도인 교육을 입증하는 가장 효과적인 증거는 가정의 감화로 말미암아 형성된 좋은 품성이다. 신앙의 개혁은 가정의 전반적인 모든 일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가족들의 재연합과 재단결과 돌이킴과 회복을 호소하신다. 친절과 온유와 예절과 사랑의 관계가 가족 간에 형성되어야 하며,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모본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성품을 하늘나라에 적합한 성품으로 꼴 지어야 한다. 온 가족이 신앙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나고 영적으로 한마음과 한 목적으로 연합할 때에, 그 가정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위대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엘리야의 외침은 잃어버린 자녀를 구원하고, 신앙과 영성을 잃어버린 부모들을 한데 모으는 복음이다. 가족 간의 불화와 증오를 사라지게 하고 용서와 화합으로 모으는 사랑과 회개의 복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주신 사명을 완수했던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가셨다. 엘리야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지상에 살아 있어 죽음을 맛보지 않고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성도들을 예표한다. 그리스도의 지상 봉사의 끝이 가까웠을 때에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모세와 같이 구주의 곁에 서 있었던 것은, 그가 마지막에 변화함을 받을 사람들의 표본이기 때문이었다. 모세는 재림 때에 죽음에서 부활할 사람들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세상 역사의 종말에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되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할 사람들을 대표한다.
제3부_ 두 번째 엘리야 침례 요한
“그때에 침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마 3:1-3).
그리스도의 시대에 외치는 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이사야가 오래전에 예언한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 40:3-5).
“네가 누구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바로 전에 그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회개와 개혁의 기별을 외치는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능력 있고 영성 있는 이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고 침례를 받기 위하여 광야로 몰려들었다. 무슨 자격으로 침례를 주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대답하라는 랍비들의 심문에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그는 침례 요한이었다. 그는 자신의 복음 사업을 예증하기 위하여 이사야의 예언을 사용하였다. 옛날에는 왕이 자주 다니지 않는 영토 내의 지역을 여행할 때에는, 일단의 사람들을 왕의 수레보다 앞서 보내 험준한 비탈을 평평하게 하고 우묵한 곳을 메우게 함으로써 왕이 안전하게, 장애 없이 여행할 수 있게 하였다. 요한의 사명도 그랬다. 그는 메시아의 초림에 앞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임무를 띠고 왔다. 주의 길을 예비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하여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으로 온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는 엄숙한 책망과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 메시지는 산처럼 높아진 인간의 교만한 마음을 낮추고, 죄로 인해 패이고 음침하게 된 마음의 골짜기를 돋우어지게 하여, 메시아의 복음 사업이 평탄하게 이루어지도록 예비시키는 것이었다. 침례 요한이 공중 전도를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가 강림하기 전에 직접 나타날 엘리야라고 믿었다. 요한은 이러한 기대를 부정했지만, 예수님께서 후에 요한에 대하여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14)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엘리야가 행한 사업을 하기 위하여 왔다. 영광의 왕국이 오기 전에 은혜의 왕국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지게 하려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1) 침례 요한의 절제 생활
요한은 개혁자요 선구자였다. 그의 사명과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생활습관에 대한 지침이 출생 때부터 지시되었다. 하늘로부터 직접 가브리엘 천사가 파송되어 요한이 지켜야 할 건강 개혁에 대해 부모에게 말해 주었다. 하늘의 사자는 요한이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할 것과 태어나면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할 것에 대해서 말했다. “저가 …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리라(눅 1:15).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요한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빛과 진리와 사람들의 사상에 새 방향을 제시해야 했다. 거룩한 메신저가 되기 위하여 그는 절제하는 생활을 살았다.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체력과 정신적, 영적 능력이 필요하였는데, 식욕과 정욕을 지배하고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 당시에는 재물에 대한 탐욕과 사치와 과시에 대한 방종이 널리 퍼져 있어, 관능적인 쾌락, 먹고 마시는 잔치가 육체의 질병과 쇠퇴를 일으키고, 영적 지각을 흐리게 하여 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있었다. 요한은 태어날 때 받은 지시대로 엄격한 절제와 극기 속에 살았다. 안일하고 사치스러운 생활과 쾌락, 그리고 친구들을 떠나 광야에서 살았다. 그의 단순한 의복, 곧 낙타 털로 짠 겉옷은 그 세대 사람들, 특히 유대 제사장들의 사치와 겉치레에 대한 책망이 되었다. 그는 절제하고 극기하는 삶과 검소한 의복으로 그 시대의 부절제를 책망했던 것이다. 그는 순수한 채식으로 생활했는데, 그의 음식, 곧, 메뚜기와 석청(나무 열매와 꿀 :편집자 주) 은 도처에 편만해 있는 식욕의 방종과 탐욕에 대해 견책이 되었다.
요한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거룩한 진리를 위탁받은 말세에 사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길을 예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요한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위해 길을 예비하고자 엘리야의 심령으로 왔던 것처럼 충성스러운 엘리야로 대표될 수 있다. 엘리야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건강과 절제의 메시지는 세 천사의 복음과 함께 전해져서 사람들의 영과 육이 정결해져야 한다. 세상에 유행하는 의복과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우상숭배와 사치한 생활로부터 사람들을 돌이키게 해야 한다. 특히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방종은 영원한 사물에 대한 예민한 식별력을 둔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의 신체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값으로 사신 바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를 거룩하고 가납할만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보존해야 한다.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해 식욕에 방종하고, 세상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건강을 해치는 유행을 따르는 옷을 입음으로 육체를 약화시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절제하고 극기하는 생활은 우리의 영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2) 침례 요한의 교육과 거주지
정상적인 경우라면 침례 요한은 제사장직을 위하여 교육을 받아야 했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랍비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더라면, 그는 자기의 사업을 수행하기에 부적당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습득하도록 신학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보내지 않으셨다. 당시의 교육은 하나님에 대한 산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은 학문과 인간의 유전과 규례가 주를 이루는 쓸모없는 교육이었다. 랍비들의 교육은 오히려 청년들을 지혜와 산 지식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가게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이 천연계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배우게 하려고 그를 광야로 부르셨다. 요한이 성장한 곳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지역으로, 푸른 언덕들과 황량한 광야와 거친 계곡들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세상의 향락과 사치를 버리고 엄격한 수양을 받기 위하여 그가 선택한 광야의 주위 환경은 단순함과 극기의 습관을 기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세상의 소란함에 방해받지 않고 천연계와 하나님의 계시와 섭리의 공과들을 배울 수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부모는 사가랴에게 나타났던 천사의 말을 요한에게 자주 들려주며 어린 시절부터 요한에게 그의 사명을 계속 제시해 주었고, 요한은 그 거룩한 책임을 받아들였다.
요한의 학교는 광야였다. 그는 광야에서 그의 교과서를 발견했다. 자연계에 나타나 있는 창조의 과학은 하나님의 구속의 과학과 신비를 그에게 알려주는 좋은 교재가 되었고, 그 비밀들을 연구할 때에 그는 하늘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요한이 경외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던 주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었다. 메시아, 곧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약속된 후손의 강림에 대한 계시들과 이사야가 메시아의 영광을 그린 황홀한 묘사를 그는 밤낮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산 중에서 그 메시아, 아름다우신 왕을 바라볼 때에 자기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을 느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이 보낸 메신저로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만왕의 왕을 경배하므로 세상의 군주들 앞에 두려움이 없이 곧게 설 수 있었다. 인간을 높이고 찬양하는 인본주의가 바탕이 되는 헛된 교육 대신에 성령의 지도 하심을 직접 배우므로 요한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육이 참교육이다. 침례 요한이 거룩한 사명과 사업을 위해 그렇게 살았다면 우리도 그의 생활을 모본으로 삼도록 하자.
제4부_ 세 번째 엘리야의 삶의 지침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히 오심과 가까워 온 심판을 세상과 바벨론에 있는 백성들에게 전할 책임을 진 마지막 그리스도인들은 세 번째 엘리야들이다. 세 번째 엘리야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지적으로 진리를 완전히 이해해야 하는 일이다. 특히 마지막 진리의 핵심이 되는 요한 계시록 14장의 세 천사의 복음과 진리를 완전히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대로 실천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주어진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영원한 복음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데,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복음, 타협되지 않고 변질하지 않은 순수한 성경의 복음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첫째 천사가 전하는 메시지인, 심판의 때가 가까웠으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며 변화된 성품과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며, 둘째 천사의 메시지인 바벨론의 죄악과 삶의 방식과 습관에서 나와 개혁하는 삶을 살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바벨론의 죄악을 경고해야 한다. 또한, 셋째 천사의 메시지인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사람이 되고 인내로써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엘리야의 심령과 정신을 가지고 주어진 사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삶의 지침서들을 함께 생각해 보자.
1) 절제
1. 식생활
영성과 마음의 상태는 몸의 건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건강한 몸에라야 건강한 정신과 마음이 깃들일 수 있다. 건강은 식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올바른 식생활을 통해 건강한 신체와 마음과 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먹는 문제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원칙을 따르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는 미래의 불멸의 생애를 위하여 성품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창조주께서는 최초의 부부 아담과 하와에게 이상적인 음식을 제공하셨다.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 1:29). 타락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음식에 "밭의 채소"(창 3:18)를 더하셨다. 현대인이 걸리는 모든 질병은 음식 및 생활 방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곡식과 과일과 견과와 채소로 이루어지는 음식은 최적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올바른 영양소를 공급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광야에서 육식을 준비하시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그 음식은 질병을 일으키기 쉽고 성격을 온순하지 않게 만들어 불순종을 조장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성질을 교정시켜 주고 더욱 높은 정신능력과 영성을 가지게 하려고 그분은 육식을 금하는 대신 그들에게 천사들의 떡, 하늘의 만나를 주셨다. 곧 그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적합하고 높고 고상한 봉사를 위한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건강 전문가의 보고서에 의하면, 질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많이 들어 있는 동물성 식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질병율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높은 사실이 밝혀졌다. 몇몇 전문가들은 육류 속에 있는 박테리아에 의한 오염이 식품 속에 화학 첨가제나 방부제보다도 훨씬 더 위험하며 질병의 발생 빈도를 높인다고 말한다. 더욱이 최근에 실시된 연구 결과는 증가되는 육류의 소비가 동맥경화, 암, 당뇨병 등의 성인병과 신부전증, 골다공증, 선모충병을 일으키며 평균 수명을 감소시킨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제는 성인병이나 질병들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전염병들이 난무하고 있는 시대이다. 치사율이 높은 에볼라나 메르스 중동 호흡기 증후군 같은 전염병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건강한 몸과 면역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생활 습관과 식생활에서의 절제가 요구되고 있다. 과식이나 폭식, 그리고 자극성 있는 음식물들은 건강과 좋은 성품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고지방 식품이나 설탕이 많이 함유된 음식물은 식단에서 제거하거나 아주 적게 사용하는 것이 좋다. 가능한 한 단순하고 자연적인 방법으로 음식을 준비하며, 소화 기관을 자극하는 조미료와 양념들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 정제되지 않은 통곡류와 신선한 과일과 채소와 견과들은 건강에 좋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인 몸에 부정한 어떤 것을 들여보내는 일은 하나님의 이상에 못 미치는 일이므로, 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깨끗하고 정결한 음식을 섭취하고 식생활에 절제를 하여 하나님께 영광되는 삶을 살도록 하자.
2. 말의 절제
말에 대한 절제는 그리스도인 미덕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말은 그 사람의 됨됨이와 인격을 나타낸다. 진리를 다른 영혼에게 전하고 복음을 설명해 주어야 할 의무를 진 그리스도인들은 경우에 합당한 말과 주님의 은혜 안에서 말을 고르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훈련해야 한다. 말은 마음의 생각들을 드러낸다. 그것들은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이거나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악취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만일 매일 하나님과 교통한 후에 나온다면, 우리의 말은 모든 것을 부서뜨리는 우박과 같지 않을 것이며, 생물을 살리는 부드럽고 향기로운 이슬과 같이 될 것이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그 말이 뿌리는 사랑과 친절의 씨앗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저절로 심어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사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재난과 어려운 일들이 주변 도처에서 일어나는 이때에 주의 종들은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용기와 위로가 되는 말들을 해야 하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말로서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우리의 입술과 마음에 있도록 하자.
그리스도인들이 말을 하며 서로 교제할 때에 예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하며, 또 그분의 임재를 소홀히 취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무의미하고 부적합한 대화로 시간을 보내고, 부주의한 정신으로 예수님을 떠나게 하면 마음이 침울해지고 허전해져서 자주 다른 사람들을 헐뜯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스스로 부족함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잡담이나 농담을 하면서 하늘의 귀한 천사들을 내쳐 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말은 품성에 영향을 끼치는 능력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한 말로 영향을 받는다. 자신이 한 말이 몇 배의 강도로 자신에게 다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의심의 말이나 우울한 말, 불평과 원망의 말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부주의하고 불경스러운 비평은 품성에 영향을 끼쳐서 불신을 기르기 때문이다. 인애의 법이 우리의 입술에 있게 하고 은혜의 기름이 우리의 말에 있게 하자! 부드럽고 동정적이며 예의 바른 말은 내리는 이슬처럼 영혼들을 치유할 것이며, 그 영혼의 치료제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일에 큰 도구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성화된 심령과 입술로부터 나오는, 그 행실에 의해 뒷받침되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의 금 사과와 같을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의 의복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의복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인이 옷 입는 방법은 세상에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정욕"(요일 2:16)을 일으키는 몸차림으로써 품성의 아름다움을 손상하지 않을 것이다. 신체 일부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노출하여 보는 이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단정한 옷차림과 행동을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곱고 예모 있고 우아하고 단정한 옷차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증거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에 대한 청지기들이기 때문에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딤전 2:9)을 피하고 절약할 것이다. 일시적인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하늘이 인정하는 아름다움, 우아함과 단순성과 순결과 자연미로 특징지어진 의복을 입음으로 그리스도를 잘 증거해야 할 것이다. 야곱이 가족들에게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요청하였을 때, 그들은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넘겨주었다(창 35:2, 4). 또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배교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고 명령하셨다. 그들은 회개하는 가운데 "그 단장품을 제하"였다(출 33:5,6). 그리스도인의 검소한 생활은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현대인들의 탐욕과 물질주의와 화려함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룰 것이다.
3) 거주하는 환경
그리스도인들은 주위 환경 가운데서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생각나게 하는 장소를 거주할 환경으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도시를 떠나 밭을 경작할 수 있고 자연의 책으로부터 하나님의 과학을 배울 수 있는 시골에 가정들을 가진다면 좋을 것이다. 천연계의 사물들은 우리에게 영적 진리들을 가르치도록 주신 바 된 것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크신 예술가의 지혜를 알려준다.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가지는 교통은 값으로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천연계의 모습과 창조의 역사를 바라보고 피조물들을 연구할 때에 하나님과 같은 거룩한 형상으로 변화하기가 더 쉽다. 시골 생활은 도시보다 품성 계발에 도움을 준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녀들이 매혹적이고 위험한 시험과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대도시의 거리에서 교육을 받는 것과 나쁜 친구들의 영향을 받는 것을 방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자녀들을 도시의 광경과 소음으로부터 떠나게 한다면, 그들의 정신이 더욱 강건해질 것이고 성품이 더 온순해질 것이다. 한적한 곳에서 자신이 먹을 양식과 과목과 채소를 재배하며 가족과 더불어 자연계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골은 신앙생활에 이상적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위해서는 기도하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며 경솔하거나 충동적인 감정으로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가오는 환난과 성품의 변화를 위해 한적한 시골에서 신앙을 준비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하다.
제5부_ 가장 중요한 신앙과 품성의 개혁
세 번째 엘리야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과 품성의 개혁일 것이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온 예수님의 재림을 열심히 외치며, 기독교에 들어온 오류를 식별하여 진리를 깨닫고, 외양적인 삶의 방식들을 개혁한다 해도, 진리대로 성화 되는 성품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설교와 전도는 바로 그 사람의 품성과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 개혁자의 믿음과 겸손
침례 요한은 구주께로부터 선지자 중 가장 크다는 말을 들은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의 겸손한 태도와 말과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의 말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침례 요한은 당신이 그리스도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주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겸손하게 낮추었다. 또한 그의 제자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주의가 새 선생에게로 향해졌다는 불평을 했을 때, 요한은 그들에게 자기 자신이 다만 약속하신 분 앞에 보내진 메신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는 그분의 백성의 애정의 첫째 자리가 그리스도에게 당연히 속하여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9,30). 우리는 위대한 개혁자였지만, 너무 겸손했던 침례 요한의 신앙과 성품을 본받아야 한다. 겸손은 참된 그리스도인 품성의 대표적인 것이다. 겸손은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사람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특성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사업에 필요한 일꾼들은 이렇게 겸손한 사람들이다. 자부심이 강하고, 질투와 시기심이 많고, 비평적이고 흠을 찾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이다. 진리의 원칙에 확고하고, 의무에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사업에 열성이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겸비하며, 온유하고 부드럽고 인내하고,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영혼들에게 사랑을 나타내고 즐겨 용서해 주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인가를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 품성이 벌써 그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또 그분에게서 배웠다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은 믿음이나 신앙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리와 함께 가야 한다. 침례 요한과 같은 위대한 선구자가 그렇게 겸손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겸손해야 할 것인가!
2) 하나님과의 교제의 필요성
엘리야 선지자나 침례 요한이 하나님의 사업에 합당한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게 된 데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두 사람 다 주님과 깊이 교제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엘리야도 산 중에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기도하던 경건한 사람이었고, 침례 요한도 짧은 개혁사업을 하러 나오기 전까지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 주님과 교통하며 지낸 사람이었다. 아무리 바쁘고 분주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교제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않으면 유혹과 시험에 쓰러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바라봄으로 변하게 된다. 거룩한 모본이신 주님의 완전하심을 명상할 때에 우리는 완전한 변화를 입으려는 욕망을 품게 될 것이며 주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 지음을 입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교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데, 그 교제의 친밀 정도, 지속성, 교제하는 상대에 대한 사랑과 존경 등에 의하여 영향력이 결정된다. 만일 우리가 주님과 친숙한 교제를 지속한다면 그 교제를 통하여 흠 없고 모본 되신 그분과 같아질 것이다. 경험은 실험으로 얻은 지식이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경험, 체험적 신앙이 필요하다.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나왔을 때에 그의 얼굴이 광채로 빛나 수건으로 가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이상 중에 셋째 하늘로 이끌려 가서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받는 특권을 누렸다. 초기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찾고, 발견하고 따랐다. 그들은 집에서, 식탁에서, 골방에서, 들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교사와 함께 있는 학생들처럼 그분과 함께 있었고, 날마다 그분의 입술에서 거룩한 진리의 교훈을 받았다. 주님과의 교제는 그들을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었고, 마침내 맡겨진 사명을 다 할 수 있었다. 하나님과의 깊은 체험을 한 사람들은 교만과 자고심에서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가장 낮은 자리가 그들에게는 너무도 명예로운 자리임을 느낀다. 주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거룩한 은혜를 힘입을 때에 초자연적인 능력이 인간에게 임하게 되며 그 능력이 인간의 정신과 마음과 품성에 역사하게 되어 영혼이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사귀고 주님과 매일 연합하는 것이 얼만 중요한 일인가? 그런 깊은 교제가 오늘 우리에게도 있는가 살펴보자.
3) 회개와 죄에 대한 승리
세 번째 엘리야의 사명을 이루기 원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으므로 우리 자신들이 영적으로 꽤 괜찮은 상태에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변화되지 못한 마음과 품성을 보고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권하신다. 그리고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하신다. 많은 사람이 마음의 문 앞에 너무 많은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어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형제들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문을 열 수 있게 제거해야 할 악한 성질, 이기심들을 가지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마음의 문 앞에 출입을 방해하는 세속적인 것을 쌓아 놓고 있다. 이 모든 쓰레기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문을 열고 구주를 맞아들이고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예수님과 매일 동행할 때에 죄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정복된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하나의 싸움이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히 12:4)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죄를 간직하고 변명한다. 예리한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을 쪼개지 않는다. 모든 죄는 버려져야 한다. 우리의 신앙 생애를 방해하는 모든 방종은 끊어 버려야 한다. 만일 우리 신앙에 거치는 것이 있다면 오른눈이나 오른손을 잘라 버리듯이 희생해야 한다. 사탄의 유혹에 계속 승리할 수 있는 것은 계속적이고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서이다.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는 분명하고 능력 있는 진리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 세 번째 엘리야가 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생애에서 먼저 죄를 승리하는 체험을 하며, 나아가 바벨론의 죄악을 경고하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참 자녀들에게 자신을 변화시키고 죄를 승리하게 하는 복음의 능력을 전해야 할 것이다. 임박한 재림을 알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조는 사람들을 깨우고, 시대의 징조들을 알려주며, 다가오는 환난을 위하여 준비시켜야 할 것이다.
이제 세 번째 엘리야들이 나타나기를 세상은 바라고 있다. 이 암흑과 배도의 시기에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충성할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바벨론의 오류의 포도주에 취해서 깊은 잠에 빠진 형제들을 깨울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엘리야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반역할 때에 진리와 하나님을 위해 홀로 설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침례 요한처럼 죄를 죄라고 부르며 권력과 지위의 여하를 막론하고 용감하게 곧바른 진리를 전할 용사들이 어디에 있는가?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세 번째 엘리야들은 이 세상이 영적 암흑으로 덮일 때에, 사탄의 배도하는 세력 앞에 모든 세상이 무릎을 꿇을 때에 홀로 서서 별과 같이 빛날 것이다. 머지않아 가장 극심한 환난과 시험의 때에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서서 하나님의 마지막 기별을 세상에 담대하게 외친 사람들의 머리에는 보석으로 꾸민 찬란한 면류관이 씌워질 것이다. 우리 모두 세 번째 엘리야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신앙 간증_ 카톨릭에서 진리를 찾기까지
나의 소개
저는 삼대째 내려오는 카톨릭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작고하신 저의 할머니는 80이 넘은 고령에 카톨릭 신자가 되어 92세에 종부성사까지 보시고 잠드셨습니다. 생전에 할머니는 하루에 세 번 삼종기도를 올리셨고 그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기 위해 식사시간도 거르면서 매일 시계만 쳐다보며 사셨던 것이 기억에 납니다. 부모님 역시 할머니 장례식을 카톨릭 의식으로 치르면서 자연스럽게 카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저 역시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최고의 교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가장 신자 수가 많은 큰 교단이었기에 믿을 수 있는 교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카톨릭에 입문하기 이전, 좀 더 젊은 시절에는 참 신앙 참 종교를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교회 저 교회 기웃거리며 방황도 하였고 이단이라 일컫는 몰몬교에서 침례식까지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교회가 옳다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방황하다 삼대째 내려오는 카톨릭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아무런 생각 없이 조상 대대로 믿어왔던 카톨릭에서 영세를 받게 되었고, 카톨릭 의식에 따라 혼배성사로 결혼식도 하였고, 태어난 아이들에게 유아세례까지 주면서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신앙을 갖고 거의 25년이 넘도록 성당 문턱을 넘나들게 되었습니다.
카톨릭 신앙 생활
종교의 자유가 없는 사우디아라비아 현장 재직 시에는 직원 Camp 한구석에서 비밀리에 행하는 공소(신부 없이 행하는 미사 예절)에도 열심히 참석하였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로사리오(묵주) 기도를 드릴 때면 똑같은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이 지루하기도 했지만, 정성만은 주님께서 받아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분심 없이 기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저의 신앙은 자라지 못하고 매일 같은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매주 미사에 참석하고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탓입니다.” 가슴 치며 회개하고,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바치고, 찬송가 몇 곡 부르고, 마치 교양강좌 같은 짧은 신부님 강론을 듣고 성체를 모시는 미사의식은 십 년이 넘도록 거듭되었지만, 크리스천으로 달라진 나 자신의 변화는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같은 교회 내에서도 서로 경쟁하고 술 마시고 주정하며 서로 험담하며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치스러움을 자랑하는 그 모임은 교회라기보다는 사회의 어느 친교단체 모임과 다름이 없어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 번 나가서 미사 올리고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칭하는 성체를 받아먹으면, 나는 그리스도 교인이 되었고 구원도 받게 될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한때는 레지오(성모 마리아의 군대)활동으로 나름대로 봉사도 했으니까 남보다 조금은 더 독실하다 자평하면서 신앙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다녀도 나의 신앙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쳇바퀴 도는듯한 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교회에선 선하고 거룩한 척 미소 짓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깨끗하지 못했고 적당히 음행하고 법을 어기지 않을 정도의 죄는 항상 지으면서도 인간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나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물론 카톨릭 안에서도 독실한 신앙으로 절제하고 교양 있는 분들을 보았지만 정작 나에게는 아무런 변화 없이 일반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덧 인생은 노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갈급함
시간의 속도는 자기 나이만큼 빠르다는 말처럼 세월의 속도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더 빨리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젠 몸과 영혼이 건강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함을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마다 “주님의 충실한 종이 되고 싶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어 남은 인생은 당신의 종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리고 또 드렸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이 느껴질수록 더욱더 열심히 기도 드렸습니다.
먼지만 뽀얗게 쌓여있던 성경책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고 천주교 창세기반에 등록하여 처음으로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쌓여왔던 궁금증을 해소하기엔 너무 느리고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침례교 목사님이 저의 갈급함을 이해하시고 매주 한 번 별도로 성경에 대해 개인지도를 해 주셨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개신교회에서 다른 하루는 카톨릭에서 공부했지만, 그것만으로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이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집에 와서는 유튜브를 검색해서 가리지 않고 많은 목사님들의 강의를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목사님이나 신부님이 강의하는 인터넷 강좌는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공부할 수 있어서 아주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듣다 보니 혼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찾아서
몇 달 동안 유튜브를 통하여 교단/교파를 떠나 말씀을 가리지 않고 들으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참 교회를 찾기에 몰두하였습니다. 카톨릭을 십 년 이상 다녔지만 정말 성경 말씀에 너무나 무지했고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그리고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것이 바로 신앙인 줄 알고 믿어왔던 나 자신의 어리석음이 참으로 후회스러웠습니다. 작은 물건 하나 살 때도 이 가게 저 가게 찾아다니며 숙고하면서 나의 영혼을 맡기는 중요한 문제는 왜 그렇게 단순하고 쉽게 교회를 결정했는지 저는 참 경솔했습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에 관해 모든 것이 알고 싶어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말로는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 사랑합니다” 를 외치면서 성경책 한번 들추지 않았으니 전 지금까지 거짓으로 주님을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회개와 번민 속에 하나님께서 저를 당신의 종으로 선택하신다면 제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손계문 목사님의 “성경의 예언들”이라는 시리즈 강의를 유튜브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다니엘서 요한계시록 등 예언서를 접하는 저로서는 설교의 내용이 신선하기도 했지만, 인류의 미래에 관한 예언의 말씀은 들으면 들을수록 궁금증이 샘 솟아오르듯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는 이단도 많고 거짓 종교도 많으니 처음에는 의심을 품고 접근하였습니다. 인터넷에서 “생애의 빛” 혹은 ”강병국 목사/손계문 목사”를 입력하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단어가 “이단”, “안식교에서 파직당한 목사” 등등… 수많은 비판의 글들이 제일 먼저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의 열정적인 강의에서 영적인 순수함과 진솔함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지금껏 가슴속에 품어왔던 신앙에 대한 정의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론 의심도 가고 망설임도 있었지만, 성경에 맞는 말씀이었고 전해지는 감동과 감화에 눈물 흘려 본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매일 밤 강의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고, 자다 깨면 또 들었고 잠에서 깨면 또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저의 가슴속은 온통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달구어져 있었습니다. 잠자고 있던 저의 양심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으며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게 됨을 느꼈습니다. 교회는 가지 못하고 인터넷을 통하여 혼자 예배 드려야 했지만, 지금까지 살아왔던 남 보기 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 생명 주신 하나님, 나에게 올바른 선택을 하게 도와주신 하나님, 그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저도 모르게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진리가 살아 있는 교회는 신자가 많고 화려한 대형 건물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실천하는 바로 그곳이 진정 참 교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계략을 깨우침
인쇄술의 발달로 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성경은 보급될 수가 없었습니다. 카톨릭은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를 더 높이기 위해 성경의 번역이나 보급을 금지했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소유한 죄만으로 5천만 명 이상의 사람을 종교재판으로 처형했다는 믿기지 않는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카톨릭의 횡포로 말미암아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기는커녕 소유조차 할 수 없었고 본격적인 성경에 대한 보급과 연구가 시작된 것은 2~30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근대에 와서 성경대로 믿고 말씀대로 따르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기존 교회는 이러한 운동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려 합니다. 이러한 진리 회복운동을 이단으로 몰아붙이려 한다면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를 이단으로 몰아 핍박했던 카톨릭의 범죄를 또 다시 재현하는 것과 다름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10억이 넘는 카톨릭 신자들은 일요일을 안식일로 오해하고, 고해성사하고, 로사리오 기도를 하면서 사탄이 보여주는 이적을 성령님의 임재로 착각하며 속고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이 개신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탄이 장난치는 헛것을 보고 혹은 신들림 같은 빙의 현상을 보고 성령님으로 오해한다면 작두 타는 무당이야말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었습니다.
진실한 교회
이왕이면 큰 배가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안전하겠지라는 마음으로 저 역시 카톨릭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가 올바른 교회일 거라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성당에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압도당하는 기분으로 저절로 기도를 드리게 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젠 웅장하고 화려한 대성당을 보면 감동에 앞서 전쟁과 수탈, 면죄부 판매 등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엄청난 규모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교회의 부정과 핍박당한 개혁자들의 피와 눈물이 가슴으로 느껴져서 애통할 따름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바로 교회라고(고전 3:16), 그래서 항상 성령이 임재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강건하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아무리 명성 높고 큰 교회에서 자신의 높은 헌금고를 자랑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고 거룩한 척 흉내 내어 사람들 눈에는 존경스럽게 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 심판 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은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그럼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 14:15)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교회입니다. 사탄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고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내가 바로 교회임을 이젠 압니다. 항상 성령께서 내 몸과 함께 거할 수 있도록 내 몸과 영혼을 강건하게 하여야 하며 취하지 말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머지않아 주어진 생을 마치고 이 땅을 떠날 때 장례식도 없이, 신부님이나 목사님의 기도도 없이 쓸쓸히 땅에 묻힌다 해도 이제 그것은 중요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적어도 남은 생애만큼은 의롭게 살았다는 주님의 한 말씀이면 언제 죽어도 행복하고 가장 은혜로운 삶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찾는 개신교인들과 천주교 신자분이 있다면 성경과 유튜브를 통해서 진실과 거짓을 확인하고 잘못된 역사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세에는 모든 거짓된 것들이 드러납니다. 성경은 그때가 되면 인간의 왕래가 빨라지고 지식이 늘어난다고 말씀합니다(다니엘 12:4). 모든 것이 초고속화되어 있고, 아주 쉽게 인터넷을 통하여 모든 정보와 지식이 공유되고 있는 바로 이때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바로 그 마지막 때입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이철우
신앙 칼럼_ 오직 예수만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자신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자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은 이 진리를 불편해합니다. ‘오직 예수만’이라는 주장은 “기독교의 오만이요 독선”이라고 힐난합니다. 그들은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는데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나 진리는 다 같은 것이고 다만 해석하는 방법과 관점만 다를 뿐이므로 결국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같은 꼭짓점으로 모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든 잘 믿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꼭 기독교일 필요도 없고, 불교일 필요도 없고, 이슬람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만 되고 다른 것은 안된다”는 말은 "기독교의 오만이요 독선"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한 아버지와 딸이 벤치에 앉아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누군가 와서 “이 아이의 아버지가 당신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당연하게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그가 “세상에 수 천 수 만 명의 아버지가 있는데 어떻게 당신만이 그녀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소! 그것은 오만이요”라고 반박한다면 타당한 걸까요?“
천만번이라도 양보해서 ‘자신만이 그 아이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것’이 오만하고 독선적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점만은 절대 바꿀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 원수 사이가 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속의 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속량되고 원수 사이가 된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롬 5:10) 브라흐만, 부처, 마호메트, 공자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만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오만이나 독선이기에 앞서 ‘사실’이기 때문에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 탐구_ 유대인과 이방인 속의 하나님의 "참 백성"
구약의 구원 역사도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만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듯이 신약시대도 특별히 이방인을 위한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7년 환란의 교리처럼 유대인만 구원받는다는 그러한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창세 전부터 세상 마지막 시기까지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은혜가 시대나 민족을 불문하고 “공의롭고 평등하다”라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 또한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살후 1:5) 구약 성경의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 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등 역사서의 12권에는 이방인이나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 백성에 포함되어 하나님의 은혜인 구속함을 받는 은혜가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이나 기생 라합의 구원, 열왕기상 5장에서 아람 장관 나아만과 이스라엘 여자아이의 이야기, 열왕기상 17장의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에게 죽을 운명에서 구원을 베푼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별히 “요나”서는 이방 민족에게도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차별 없는 복음과 사랑의 구속 계획을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주시는 성경 말씀입니다.
요나는 당시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던 니느웨성의 구원의 소식 전파를 거부하고 도망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는 그 당시 유대인의 원수인 그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으나, 우리는 요나서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의 구원을 원하셨으며 이는 또한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0,11) 이러한 성경의 역사적 기록은 오늘날 교회의 복음 전파와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기준을 정확히 판단 할 수 있는 귀중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큰 무리는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다양한 민족이며, 성경은 “구원”이라는 단어를 어떠한 한 민족에게만 적용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민족의 선택(선민)이라는 영적인 의미는 유대 민족이나 이방 민족의 구분 없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거룩한 백성”을 구성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시대와 민족을 따로따로 구분하는 구원의 계획이 아닙니다.
시편에는 세상 모든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 많은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회중에 이방 민족이 포함되는 것은 구약시대 및 신약시대의 구원사상과 하나님의 이 세상 마지막 심판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올바른 믿음을 결정할 수 있는 귀중한 말씀입니다. 세상 역사부터 민족과 나라의 구분 없이 구원의 은혜도 같이 주시고, 심판도 같이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공의이며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입니다.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난 민족은 그 애굽에서 고통받고 눈물을 흘리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든 모든 백성임을 이해하셨다면,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는 그 성에서 하나님께서 큰소리로 외치시는 “내 백성아, 나오라!”라는 소리를 들으실 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각자의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는 길에 한 걸음 더 내딛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사탄은 여러분의 진정한 이름을 되찾지 못하도록 더 많은 훼방과 미혹과 불신의 씨앗들을 뿌려놓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탄에게 하나님 백성의 등장은 진실로 두려움과 절망과 분노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께 성령의 은혜와 보호하심을 더욱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기독교회사_ 아일랜드의 패트릭, 카톨릭의 성인인가 광야교회의 영웅인가
패트릭(A.D.360~)에 관해 알려진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인류 역사상 그보다 더 숭고한 기독교 선교사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시리아에서 아일랜드로 건너온 초기 교회의 자녀이며 사도였다. 패트릭은 브리튼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과 아일랜드인들이 속해 있던 켈트족의 일원이었다. “나는 육체를 따라서는 자유의 사람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나의 아버지는 우리 지방의 원로원 의원이었다. 나는 나의 고귀한 신분을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팔아버렸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부끄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영광, 곧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의 영광을 위하여 이국땅으로 보내진 그리스도의 종이다.” 소년 시절 노예로 잡혀갔던 패트릭은 문명의 창조자로서 매우 두드러진 역할을 한 영웅적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했기에, 또한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했기에, 사로잡혔던 아일랜드로 갔다….
그는 유럽 사회를 개척한 인물이며 동시에 아일랜드 기독교의 아버지이다. 그는 또한 양의 옷을 입고 우리로 들어오는 늑대들을 대항해서 깃발을 높이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에 관한 수많은 전설과 꾸며낸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패트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인물, 즉 진짜 패트릭과 가공의 패트릭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의 패트릭이 광야 교회에 속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다. “죄인이며 신자 중에 가장 거칠고 가장 작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경멸을 받아 마땅한 나 패트릭은 집사였던 칼푸르니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인이 되신 내 할아버지 포티누스는 장로였으며 티베르니아의 바나반이란 마을에 사셨다. 그는 그곳에 한 작은 농장을 소유하고 계셨는데 바로 그 지역에서 내가 잡혀갔다. 그때 나는 거의 열여섯 살이었다. 그때 나는 참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나는 수천의 사람들과 함께 아일랜드로 끌려갔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당연한 벌이었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윗글에서 우리는 패트릭의 할아버지가 장로(교황권에서의 주교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초기 영국 교회에서는 성직자들에게 독신생활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패트릭의 아버지는 교회에서 집사였으며, 마을의 상담역이었고, 농부이며 남편이었다. “소아시아의 식민지 주민들이었던 이 켈트족 공동체에 속한 많은 수의 사람이 그곳으로부터 나와서 아일랜드로 이주하여 패트릭 이전 시대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Yeates, East Indian Church History, p. 226
패트릭은 성경을 전파하며 아일랜드 교회의 기초를 놓는 일에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삼았다. 당시에 로마 교회는 이미 여러 개의 신조를 승인해서 그것들을 지키도록 명하고 있었지만, 패트릭은 다른 어떤 세상적 권위도 믿지 않았으며, 그 어떠한 신조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고백”에서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간단한 진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종교회의 또는 신조를 그 권위로 삼지 않았다. 후에 성장하여 대학들이 된 그가 설립한 훈련 학교들은 모두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들이었다. 이 학교들의 이름난 학생들은 모두 성경을 자신들의 최고의 권위로 삼았던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스코틀랜드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콜룸바, 이교 지역이었던 영국에 복음을 소개한 아이단,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 자신의 후계자들과 더불어서 기독교를 소개한 콜룸바누스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또한 신자들을 위하여 그 이름들이 널리 알려진 성서 훈련 학교들을 설립하였다. 이 분야에 정통한 한 권위자는 이 학교들에서 만들어진 필사된 성경들에 관해 기술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다룸이 섬세할 뿐 아니라 그 내용이 정밀하면서도 흠이 없는 이 아일랜드 사본들은 그 어떤 고문서와도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것들이다.” 패트릭은 자신의 “서신”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무지를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렇게 이루어진 것임을 나는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간증한다. 내가 라틴어로 기록한 이 말들은 내 말들이 아니라 거짓을 말씀하신 적이 절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말씀이다.”
패트릭은 그의 모본이신 예수님처럼 성경 말씀을 사람의 가르침보다 더 존중하였다. 그는 그런 면에서 교회의 전통을 성경보다 위에 놓아두는 교황권과 차별되었다. 패트릭은 기독교가 가정과 가족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져야 그 힘이 강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 조직체는 독신주의를 그 중심으로 하고 있었지만, 아일랜드 교회와 그 교회가 낳은 대영제국과 스코틀랜드, 유럽 대륙에 있던 켈트 교회들은 그렇지 않았다. 패트릭에 의해서 조직되고 발전된 켈트 교회는 그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결혼을 허락하였다. 켈트 교회에서 독신주의가 시행되지 않은 것은 로마 교회와 연관을 맺고 있지 않은 또 하나의 증거였다.
Healing Story_ 초콜릿
호랑이가 왔다는 말에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이가 곶감을 준다는 말에 울음을 뚝 그쳤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요즘은 우는 아이들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요?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대표적으로 초콜릿이 아닌가 싶습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버리는 초콜릿, 그 주성분인 카카오에는 항산화 물질인 폴리페놀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심혈관 질환과 고혈압 등을 예방한다고 합니다. 과연 맛도 좋은 초콜릿이 몸에도 좋은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초콜릿의 원료는 카카오나무 열매입니다. 열매의 종자를 나무로 만든 통에서 며칠 동안 발효시키면, 종자가 붉은빛을 띤 갈색으로 변하고 독특한 향기가 납니다. 이것을 물로 씻은 다음 건조한 것이 카카오(Cacao) 콩이며, 볶아서 분말로 만든 것이 카카오 페이스트(CacaoPaste)입니다. 여기에 설탕, 카카오버터, 첨가물을 섞어서 굳힌 것이 초콜릿입니다. 카카오 페이스트(CacaoPaste)를 압축시켜 지방을 뽑아낸 것이 코코아 분말이며, 뽑아낸 지방을 카카오 버터(CacaoButter)라고 합니다. 카카오 버터는 녹는점이 28~36℃로 세상에 존재하는 유지 중에서 유일하게 체온과 비슷한 온도에서 녹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고체상태인 초콜릿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체온으로 부드럽게 녹는 것입니다.
2. 카카오 종자에는 약 2%의 테오브로민(Theobromin)과 약간의 카페인(Caffeine) 그리고 50%의 지방이 들어 있습니다. 테오브로민의 아버지는 메틸잔틴이며, 형제로는 카페인과 테오필린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카페인이 가장 독성이 강하고 다음이 테오브로민, 테오필린 순서입니다. 메틸잔틴의 아버지는 알칼로이드인데, 식물에서 나오는 것으로 독성을 지닌 족보에 속합니다. 테오브로민은 난소, 고환, 유방, 전립선, 갑상선, 뇌와 같은 선장기를 비정상으로 자라게 하고, 중추신경을 흥분시킵니다. 그리고 카카오에는 탄닌이 있는데 성장하는 어린이에게 절대 먹여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칼슘 흡수를 방해하고 배설은 증진시키므로 뼈에서 칼슘을 빼앗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른에게도 골다공증의 위험을 가져옵니다.
3. 카카오 종자는 나무통에서 7~8일 동안 완전히 발효가 되는데 그 속은 손이 데일 정도로 뜨겁다고 합니다. 또한 벌레, 쥐 등 깨끗하지 않은 짐승들이 먹을 것을 파먹고 집을 짓고 살기 때문에 그 오염도가 대단히 높다고 합니다. 한 과학자가 거기서 샘플을 가지고 도대체 어떤 곰팡이가 발효를 시키는지 연구해 보았습니다. 아플라톡신(Aflatoxin)이었습니다. 아플라톡신은 곰팡이류가 만들어 내는 진균독(Mycotoxin)의 한 종류로 쌀, 땅콩을 비롯한 탄수화물이 풍부한 농산물이나 곡류에서 잘 번식합니다. 그리고 여러 진균독 중에서 독성이 매우 강하여 발암성, 돌연변이성이 있으며, 사람이나 동물에게 급성 또는 만성 장애를 일으킵니다. 체질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알레르기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어떤 11살 된 남자아이가 갑자기 피하출혈을 보여서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치료 과정에서 초콜릿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4. 카카오 종자는 맛이 아주 쓰므로 여러 가지 첨가물을 넣어 초콜릿을 만듭니다. 실제로 초콜릿은 카카오 성분보다 정제한 흰 설탕과 카카오버터가 대부분이고, 바닐라 같은 향신료와 레시틴 등의 유화제가 들어갑니다.
* 설탕: 설탕은 우리 몸의 면역력을 현저히 저하시킵니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으면 백혈구 하나는 14마리의 균을 죽입니다. 그러나 설탕이 6ts 들어가면 백혈구 기능은 30% 줄어듭니다. 설탕 섭취가 많아지면 면역력이 떨어져 박테리아, 바이러스 하고 싸우는 힘이 약해집니다. 따라서 암뿐 아니라 여러 가지 질병의 원인이 됩니다. 슈거블루스 [Sugar blues]라는 책을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카카오버터: 연한 미색을 띤 흰색의 지방덩어리로 식물성임에도 포화지방이 매우 높습니다. 또한, 발효과정에서 산화되었기에 산화 콜레스테롤로서 동맥경화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더 슬픈 사실은 카카오버터 값이 비싸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대용할 카카오버터를 찾아내었는데 그것 역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소첨가 방법으로 만들었다면 틀림없이 트랜스지방산이 들어있을 것이고 다른 기술로 만들어서 트랜스지방산이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지방산 분자들이 상처받은 것이기 때문에 좋지 않습니다. 이런 유지는 체내에서 정상적으로 대사되지 않습니다. (트랜스 지방산은 운송과 저장의 편이를 위해 식물성 기름에 수소를 첨가하여 고형화 시킨 지방입니다. 트랜스 지방산은 혈중 LDL 콜레스테롤을 상승시키며 동시에 HDL 콜레스테롤을 감소시켜 심혈관 질환의 발생 위험을 증가시키게 됩니다. 최근 연구에 따라면 트랜스 지방산이 포화지방산보다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을 더욱 증가시킨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트랜스 지방 함량이 많은 과자, 머핀과 같은 제과류와 튀김요리 등의 섭취를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유화제: 레시틴을 비롯하여 초콜릿 가공품에 들어가는 식물성 유지가 옥수수, 대두에서 유래한 경우, 유전자재조합 식품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초콜릿 제품 중 레시틴을 유화제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으므로 유전자재조합 식품을 피하고 싶다면 과도한 초콜릿 섭취는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5. 우리 아이들이 먹는 초콜릿은 전체 함량 중 카카오 함량이 10% 미만이며 카카오버터 대신 100% 대용 유지만으로 만듭니다. 과자나 케이크 등의 코팅에 주로 사용되는데 당연히 설탕이나 인공 경화유, 첨가물 등의 함량이 높습니다. 어린이나 젊은 층이 주로 선물로 주고받는 캐릭터 초콜릿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카카오에는 폴리페놀이 함유되어 있어서 동맥경화를 방지하고 활성산소를 억제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장점 때문에 초콜릿을 좋은 식품으로 권하기에는 너무 큰 무리가 있다는 것을 이제 아셨을 것입니다.
지난 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전두엽은 우리의 지력, 마음, 영성, 도덕성, 의지, 품성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중추신경 전체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초콜릿과 커피는 이 전두엽을 손상시키는 일을 합니다. 초콜릿은 절대로 식품이 아닙니다. '그동안 몰라서 먹었지. 이제부터는 잘 만들어진 내 몸을, 하나님께서 들어와 좌정하셔야 할 이 몸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 결단하시고 우리의 어린아이 같은 여린 의지, 그 작은 손을 주님의 능하신 손에 접붙이심으로 여러분의 결정이 꼭 성공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계 동향 Top News
1.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와 유럽의 분리독립 열기
영국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묻는 투표가 지난 9월 18일 진행되었다. 결과는 반대표가 전체의 55%로 결국 스코틀랜드의 독립은 부결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분리독립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스페인에서 분리독립을 추진하는 카탈루냐주는 예정대로 오는 11월 분리독립 주민투표를 강행하기로 했다. 이탈리아와 분리독립을 추진하는 동북부 베네토주와 벨기에에서 분리 독립하기를 원하는 북부 플랑드르 지역도 분리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분리독립 열기는 유럽의 경기가 침체되면서 점점 더 심화될 전망인데, 지방의 자치정부와 주민들이 중앙정부의 세금 및 경제정책에 불만을 품기 때문이다.
2. 미국 시리아 내 이슬람 국가(IS) 공습 개시
미국 국방부는 지난 9월 22일 “미군과 동맹국이 함께 시리아 내 급진 무장 세력 ‘이슬람국가’(IS) 토벌을 위한 공습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미군은 이미 지난 8월부터 이라크 내 IS를 상대로 190차례의 공습을 실시했으며, 프랑스군은 지난 9월 19일부터 이라크 내 IS공습에 동참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및 “시리아 주변 아랍 국가들이 이번 공습을 돕고 있다”고 CNN방송과 로이터가 보도했다. 이번 시리아 내 IS공습은 시리아 시간으로 23일 새벽 3시 30분에 시작되었고, 토마호크 미사일, F16, F18, F22 등 전투기, B1폭격기, 무인기 등이 투입되었다. 시리아인권관측소(SOHR)는 이번 공습으로 하루 만에 최소 70여 명이 사망하고 300여 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3. 미국 캘리포니아에 대형 산불 확산 ... 수천 가구 대피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는 미국 캘리포니아가 이번엔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발생하는 산불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올해 산불이 무려 5천 개 가까이 발생하여 예년 평균보다 천 개 이상의 산불이 더 발생한 것이다. 올해 가장 큰 규모의 해피 캠프 콤플렉스 산불은 9월 23일 현재 13만 2천여 에이커를 태운 가운데 진화율은 85%로 아직 완전히 산불 진압이 이뤄지지 않았다. 두 번째 규모의 엘도라도 카운티에서 발생한 ‘킹 파이어’는 23일 현재 8만 9천여 에이커, 여의도의 110배 면적을 태우고 계속 번져 인근 지역 수천 가구 주민이 긴급 대피했다. 10개의 주택과 22개의 부속건물이 불에 탔으며 현재 진화율이 35% 정도로 아직도 2만 개 이상의 건축물들이 산불의 위협 아래 놓여 있다. 플로리다에서 알래스카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출동한 7,000명 이상의 소방대원들이 진화를 위해 투입되었다. 제리 브라운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산불 ‘킹’과 ‘볼스’로 황폐해진 북가주 엘도라도와 시스키유 카운티에 화재 관련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4. 우크라이나 정부군, 반군과 불안한 휴전
지난 9월 5일 우크라이나 정부, 분리주의 반군, 러시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대표 등은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 다자회담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반군 간 휴전을 협의했다. 그리고 지난 21일 다자회담 대표들은 민스크에서 다시 만나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반군이 전선에서 각각 15km씩 물러나 총 30km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9월 5일 휴전 이후에도 곳곳에서 충돌이 계속되면서 하루 평균 10명가량이 사망하고 있으며 이번 내전으로 9월 23일 현재까지 최소 3,54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유엔 인권담당 사무차장이 밝혔다. 현재 휴전과 비무장지대 설정 합의로 우크라이나 사태가 평화적 해결의 길로 들어섰다는 낙관적인 전망과 양측이 전열을 정비해 다시 충돌하여 휴전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5. 중국, 금값도 호령한다 ... 국제금거래소 개설
중국은 9월 29일 상하이에 독자적으로 금 가격지수를 발표하는 국제금거래소인 ‘상하이 황금국제판’을 개설한다고 지난 9일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지금까지 수 십 년간 세계 금값을 결정해 온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의 국제금거래소 외에 중국에 위안화로 거래되는 국제금거래소가 생기는 것이다.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를 유지하기 위해 금 가격을 통제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지난해 중국의 금 수입은 약 1,160t으로 세계 최대이다. 수년 전부터 미국 국채 대신 막대한 양의 금을 수입하고 있으며, 국제무역에서 달러의 사용을 줄여나가는 중국의 행보가 달러를 기반으로 한 현 세계 경제 질서에 위협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