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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3;1-10.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리라. 2020. 11. 29.
이제 11월 마지막 주일로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데 먼저 본문의 배경과 내용입니다. 행2;47은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믿는 무리에게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2장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경이롭고 놀랍고 황홀한 장면이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불타오르는 비전이고, 기쁨의 노래와 찬양과 외침입니다. 이는 성령의 충만을 통해서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부족했던 사람들에 대한 은혜이었고 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3장은 2장의 그런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무엇인가? 황홀했던 시간이 아닙니다. 불의 혀 같은 것과 바람 같은 성령의 충만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때는 제 구시 기도시간입니다. 이 기도 시간은 정하여진 기도시간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 번씩 기도를 했는데 삼시, 육시, 구시입니다. 그래서 제 구시 기도시간은 저녁 오후 기도시간입니다. 오늘의 시간으로 환산을 하면 9에 6을 더한 15시 그러니까? 오후 3시입니다. 이들이 성전에 올라갈 제 구시 기도시간 때에 아무런 일들이 없었고, 주목할 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시간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지체 장애인이 날마다 구걸하는 장소, 성전 미문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함께하는 동료에 의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이 장애인이 기도하러 들어가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도와달라고 구걸을 합니다. 이 때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고 하면서 구걸하는 장애인에게 말을 합니다. 무엇인가? 얻을 까 해서 장애인은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는데, 이 때에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리고 오른 손을 잡아서 일으킬 때에 이 장애인이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며 놀랐습니다. 이 것이 본문의 배경과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 내용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시나요?
1. 정하여진 규칙과 시간과 장소는 늘 은혜와 소망을 주고 은혜와 소망을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은혜와 기적은 평범한데서 만들어집니다. 오늘 말씀 속에는 단순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정하여진 규칙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삼시 육시, 구시입니다. 그 장소는 성전입니다. 이 규칙과 시간과 장소 때문에 사람들이 모입니다. 모이는 사람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모였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구걸하기 위해서, 구걸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 모셔 놓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응답을 받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각자 개인의 목적이 다 있습니다. 성전 미문은 높이 21M, 폭이 18M가 되는 거대한 문으로 금과 은으로 입혀있고 놋쇠로 만든 문입니다.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이 문을 니카노르 문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니카노르 문보다는 아름다운 문, 미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아름다운 미문에 초라하게 앉아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고 앉은뱅이인지라 생활 능력이 안 되어서 구걸을 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4;22절은 이 사람의 나이를 이미 40여세나 되었다고 합니다.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혼자서는 일어날 수 없고, 걸어 갈 수 없는 불쌍하고 초라한 삶의 모습입니다. 당시에는 노동력이 없으면 존재의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365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구걸하며 살았습니다. 자신의 삶에 보람과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걷고 싶은 마음에 수없이 도전을 하고 결심을 했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은 자신에 대하여 비관과 체념을 했습니다. 체념을 해도 일어서고 싶고, 걷고 싶은 생각은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은 외침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렇게 구걸을 하면서 살다 보니까? 그 타성에 젖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살아 왔습니다. 여러분, 구걸하는 사람은 사람을 구별하는 꾀만 늘어서 저 사람이 돈을 줄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쉽게 구별합니다. 눈치가 빠릅니다. 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구걸하는 생활을 위해서 텃새가 심했습니다. 자신의 자리에 대한 집착력이 생깁니다.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니까 거기에서 듣고 느끼는 것이 전부이고 그것만 옳은 것으로 여깁니다. 타성에 젖었습니다. 늘 앉아서 매일 똑 같은 일을 하는 것이 그의 전부입니다. 동전을 모으는 재미와 동전을 세는 재미입니다. 그는 성전을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부 다 들어 알고 있습니다. 머리만 커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이 정하여진 규칙과 정하여진 시간과 정하여진 장소 때문에 온전히 변화 될 기회가 옵니다. 치료받기를 소망했던 일어나고 걷고, 뛰는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이 규칙과 정하여진 시간과 정하여진 장소 때문에 치료와 회복과 은혜와 축복의 시작이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습니까? 2장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고 예수님을 못 박았던 유대인과 각 나라에서 오순절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찾아온 많은 신앙인들에게 역사적인 첫 설교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은혜의 물결이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의 은혜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더하게 하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조용히 성전에 들어가서 정하여진 규칙을 따르고 정하여진 시간에 기도를 하려고 미문을 통과합니다. 그 때 이 장애인을 만납니다. 요구는 물질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른 손으로 장애인을 잡아 일으켰더니 이 장애인의 발과 발목에 힘이 주어지고 서서 걷고, 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정하여진 규칙과 시간과 장소가 만남을 만들었습니다. 구걸을 하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힘입고, 오른손으로 이끌림을 받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기적과 은혜를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의 일상 때문에 변화와 기대와 열정이 없습니까? 나면서부터 걸어보지도 못하고, 뛰어보지도 못한 이 사람의 모습이 어쩌면 나의 인생의 모습이며 신앙생활의 모습입니까? 코로나19의 오랜 시간이 비평과 비판만 늘어 갑니까? 믿음으로 응답하기 보다는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합니까? 발전과 변화가 없습니까? 기적과 능력이 보이지 않습니까? 내가 스스로 보고 들은 것만이 전부로 보이십니까? 이런 사람은 움직이지는 않고 기독교 상식이 늘어나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늘어가는 것을 재미로 여깁니다. 성경의 지식은 많아도 그의 삶에 체험되어지는 주님의 능력은 하나도 없습니다. 변화 없는 삶속에서 이렇게 버티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이것이 신앙의 전부이고 지성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처럼 이 코로나 19 가운데서도 성령의 충만을 받고 갖은 체험과 기적을 경험하십니까?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도 신앙의 삶에 황홀함과 경이로움이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안 된다고 단정을 짓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주님이 주시는 능력이 나타납니까? 지금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나요? 정하여진 규칙과 시간과 장소에 관심이 없고 받았던 은혜와 기적과 체험만을 뒤 돌아 봅니까? 그러면 필요로 하고 구걸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못 만납니다. 예수의 이름이 적용되는 현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바라는 비전과 목표는 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기회가 되고 모두에게 경험이 되고 모두에게 기적이 되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정하여진 규칙과 정하여진 시간과 정하여진 현장으로의 전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코로나19의 엄연한 현실이지만 삶의 과정에 은혜와 축복과 기적이 펼쳐지시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하지만 정하여진 규칙과 정하여진 시간과 정하여진 장소입니다. 만남과 함께 여러분의 비전이 정하여진 규칙과 정하여진 시간과 정하여진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은혜와 기적이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최초의 기적인데 중요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꿈과 비전을 밀고 나가고 만들어 가는 것은 힘이 아니라 소망이며 이성이 아니라 심장입니다. 여러분, 하찮은 존재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오늘 앉은뱅이는 스스로 하찮은 존재로 자기 자신을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의 동료들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구원 받는 사람들의 수를 더하는 주님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이전에 주님과 함께했던 3년 반의 동행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어서 사람을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때를 따라 주님의 심장으로 사람을 헤아리지 못했고 적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른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웁니다.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이 장애인을 보았습니다.
차 동엽이 지은 무지개원리라는 책을 보면 미국 여류작가인 델마 톰슨의 이야기기 소개되어 있습니다. 델마 톰슨이 작가가 되기 전,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군인인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 주(州)에 있는 모하비 사막 훈련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 사정은 톰슨의 기대와는 아주 다른 곳이었습니다. 톰슨은 남편이 훈련을 나가면 통나무집에 혼자 남았습니다. 섭씨 46도를 오르내리는 지독한 더위에,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음식에 섞일 정도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멕시코인과 인디언입니다. 사는 것이 정말로 고역이었습니다. 상심 이 컸습니다. 그래서 톰슨은 친정 부모님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이런 곳에서 사느니 감옥이 낫겠다는 푸념과 함께 곧 돌아가야겠다는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나 친정아버지의 답장에는 다음과 같이 달랑 두 줄만 적혀 있었습니다. 두 사나이가 감옥의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한사람은 진흙탕을, 다른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다. 하나님은 별을 보는 사람과 함께 한다. 친정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본 톰슨 부인은 충격을 받고 이 두 줄의 글을 마음에 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것이 잊히지 않는 교훈이 되어 톰슨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낀 톰슨은 지금, 현재의 상태에서 무엇이든 좋은 점을 찾아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자신의 감옥의 창에서 별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낯선 멕시코인과 인디언들은 친구가 되었고, 새로운 세계에 자극되고, 감동되어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톰슨은 대자연을 깊이 관찰 연구한 끝에 빛나는 성벽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톰슨을 변하게 하였을까요? 한 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톰슨의 마음가짐입니다. 톰슨은 자신을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여기고 자신의 마음과 기대를 바꿈으로써 포로에서 일약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 나를 변화시켰는가? 모하비 사막은 변하지 않았다. 나의 마음과 기대가 변했다. 마음과 기대를 바꾸면 비참한 경험이 가장 흥미로운 인생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흙탕을 보고 절망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별을 바라보며 소망 속에서 살 것인가, 이것은 마음과 기대 문제입니다. 시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내게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여호와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어떤 존재로 생각하십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낮에 인자하심은 베푸시는 귀한 존재입니다. 여호와의 품에 있는 존재입니다. 밤에는 여호와를 향하여 찬송이 입술에 있게 하는 귀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찬송이 언제 나오나요? 은혜를 받고 기적을 체험하고 놀라운 현상을 체험할 때 찬송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한데요. 코로나19 가운데서도 이 것이 적용이 됩니다. 늦더라도 주의 계절이 오면 화려함의 기개가 펼쳐집니다. 하여 고개를 들고 눈으로 보며 믿음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작정과 섭리가 있습니다. 사44;2-4,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너의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너의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에 버들같이 할 것이라. 여러분, 비전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어떻게 달려갈까요? 힘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입니다. 이성이 아니라 심장입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앉은뱅이 신앙인은 아닌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왜 미문에 앉아 있습니까? 왜 일어서지 않고 미문에 앉아 있습니까? 그냥 그렇게 살아야하는 하찮은 존재입니까? 그러면 왜 성전 미문에 앉은 사람은 스스로 하찮은 존재로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할까요?
2-1. 일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마음은 일어설 것 같은데 실제는 일어서지지 않습니다. 마음은 입을 열어 전도할 것도 같은데, 기도하러 나갈 것 같은데, 무슨 일이든지 열심을 낼 것 같은데 사실은 마음만 있을 뿐 그 능력이 상실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을 상실되었기 때문 아닙니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는 일어설 수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한찮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2-2. 일어서는 것에 대한 자포자기입니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기 전에는 일으켜 세우려 하면 자리에 주저앉습니다. 아예 일어 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한두 번 넘어져도 일어서면 일어설 수 있는데 넘어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걸음마를 배운 아이는 걸어가다 넘어져도 자꾸 걸으려합니다. 기어 다니지 않습니다. 수없이 반복합니다. 때로는 일어서서 일을 하려고 하다보면 넘어지고 상처를 입습니다. 한두 번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일어서려 하지 않고,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일어서기를 포기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미문이라는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이름 옆에 앉아 얻어먹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고 합니다. 거지 근성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포기하는 하찮은 존재로 여깁니다.
2-3. 불안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지금 일어서면 그나마 가지고 있는 이 구걸하는 생계의 자리마저 빼앗기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지금은 걷지 못하는 것이 핑계가 되어 일하지 않아도 먹고는 사는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내 힘으로 먹고 사는 일은 힘들고, 일을 할 줄도 모르고, 배운 것도 없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두려움입니다. 스스로 펼쳐진 현실을 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의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가지고 있는 이 자리마저 잃을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일에 열심을 내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그러다가 친구도 잃어버리고 그나마 안정적으로 하는 이 신앙생활마저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일어서지 않고 주저앉습니다. 은혜 받고 열심 내는 사람을 바라보며 겁을 냅니다. 일어나 걷게 되면 수고의 시간도 많아져야 되고 물질도 더 많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겁을 내는 사람입니다.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하찮은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겁을 내야 할 일이 아니라 도전이고 축복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너의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너의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에 버들같이 할 것이라. 여러분은 주님 안에 있는 생명 싸개 안에 보호된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 앞에는 언제나 기적과 능력이 있는데 이를 경험하고 체험하고 모든 역경과 고난과 고통을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하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상징화된 사실들입니다. 여러분, 도도한 장강의 물결로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중국 賢文에 장강의 뒷 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내고 세상에 새 사람은 옛 사람을 대신한다. 長江 後 浪 催 前 浪 浮 世 新人 換舊人란 말이 있습니다. 현문은 명, 청나라 시대에 민가에 까지 널러 퍼져 아녀자와 어린이들이 공부한 책인데 세상의 격언과 금언을 모은 책으로서 짧고 간결한 대구의 문장입니다. 장강은 중국의 양쯔 강을 말하는데. 그 거대한 강물이 그 자리에 정체 되어 있으면 썩습니다. 물은 흘러야 합니다. 그런데 그 거대한 물이 어떻게 흐르는가? 물은 중력으로 저절로 낮은 바다로 스스로 가지만. 거대한 뒷 물결이 거대한 앞 물결을 밀어낸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몸에 있는 병을 밀어내기 위해서도 거대한 장강의 뒷 물결이 밀어내야 합니다. 병이 생긴 것은 수년 수 십 년에 걸쳐 몸이 못 견디고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수술로 고치고, 자연치료를 합니다. 그런데 돌덩이처럼 병든 세포를 밀어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 생명으로 움틀 거리는 건강한 세포가 생성되어야 합니다. 가뭄에 콩 나듯 한다는데, 가뭄에 흙이 다 말라 딱딱해져도 그 어리고 연약한 콩 싺이 그 무겁고 단단한 흙을 들치고 올라옵니다. 이 것이 창조 생명의 신비입니다. 손으로 살짝만 만져도 부러지는 그 연약한 콩의 새순이 그 단단한 마른 흙을 떠들치고 세상으로 나와 건강한 콩 나무를 키웁니다. 이른 봄 산속 응달엔 미쳐 눈이 녹지도 않았는데도 간밤의 내린 눈덩이의 딱딱한 얼은 땅을 떠들치고 봄 새싹은 돋아납니다. 생명력이 무섭습니다. 사람의 세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돌덩이처럼 얼음덩이처럼 차가운 병도 새로운 건강한 세포가 들어가서 병든 세포를 밀어내고 새 세포를 증식 시킵니다. 거대한 장강의 앞 물결을 밀어내기 위해선 거대한 새로운 소망의 뒷 물결이 밀어줘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는 상징이고 암시입니다. 나면서부터 절음발이는 오늘 우리의 상징입니다. 절음발이 인생은 성전 미문입니다. 이방인과 여인의 뜰입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이 것이 오늘 우리의 위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장애인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과 오른 손으로 잡아 이끄는 주님의 능력이 장애인을 정상인으로, 성전 미문에서 성전 안으로, 구걸에서 찬양으로, 완전히 바뀌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치유 될 때의 표현을 보면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걸으며, 서서 걸으며, 발과 발목이 새로워졌습니다. 메인 것이 풀려지고 없던 것이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힘을 얻었습니다. 서서 걸었습니다. 뛰었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예수 이름이라는 장강의 뒤 물결이 40년의 앞 물결을 몰아내었습니다. 주님이 장애인의 옛 사람을 대신 했습니다.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고침을 받고 은혜를 받은 자리이지만 이제 실제적인 삶을 살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기도를 직접 드리고 그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장애인은 무엇을 요구하고 했습니까? 돈을 요구했습니다. 빵 한 조각을 얻을 수 있는 돈이고, 머물 수 있는 잠자리를 지키는 돈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의 요구대로 동전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돈이 없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 말에 그의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은과 금이 없다는 말에 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식의 전환이 있습니다. 그의 무너진 기대에 오히려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기대가 무너져야 주님이 주시는 의식의 전환이 있고 새로운 음성을 듣습니다. 나의 이전의 기대가 무너질 때에 의식의 전환이 생기며 가장 필요한 것은 나의 기대가 아니라 기대 이상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필요로 합니까? 세상적인 것을 계속 추구하고 있을 때 물질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기적을 보지 못합니다. 오늘 미문의 장애인은 앉은뱅이가 아니고 정상인처럼 뛰는 것입니다. 구걸하는 것이 아니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만 바라보고 세상의 것들만 찾는 생각에서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위에 것을 바라보고 위에 것을 찾는 느낌의 필요가 아니라 실제 필요가 무엇인가를 바로 아는 의식의 전환입니다. 주님을 만나야겠고 삶에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삶을 경험해 봐야겠다는 잠깐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느낌의 필요가 아니라 영적 갈급함의 필요를,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는 참된 평안을 만나는 삶의 참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되고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며 평생 이렇게 앉은뱅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결단과 각오가 필요합니다. 이제는 코로나19의 현상과 여건 가운데서도 나사렛 예수 이름의 필요를 느끼고 주님만 바라보는 새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필요를 위해서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들려옵니다. 그래야 주님이 일으키시는 오른 손을 잡을 수가 있고 발과 발목에 힘이 주어집니다. 그래야 주님의 오른 손을 잡을 수 있는 믿음이 들어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회복되면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어지는 기적을 봅니다. 여러분, 믿음보다도 지금 은과 금을 요구하십니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느낌상의 필요인 은과 금을 여전히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의식의 전환이 있으면 됩니다. 주님은 여러분, 모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처럼 히메지 비전교회 안에 예배를 드리며 앉아있는 여러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일어서기를 원하시고 바라십니다. 사람들로 부터의 소외와 무관심으로 당하는 고통과 상처를 기억하시고 코로나19 가운데서도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던져주는 몇 푼의 돈이 아니라 온전하게 일어서기를 원하십니다. 잠깐의 위로와 격려가 아니라 일어서서 세상을 살아갈 힘과 능력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느낌의 필요가 아니라 실질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근본적인 필요가 채워질 뿐만 아니라 영적인 치유와 회복을 주십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대로 더하시는 모든 필요가 채워지고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주목하고 말씀대로 일어서십시오. 앉은 자리, 나태의 자리, 게으름의 자리, 불순종의 자리, 부정과 열등감과 상처의 자리, 낙심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 우리의 위치에서 주님의 능력을 맛보고 베드로와 요한처럼 다른 사람들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미문에서 성전 안으로 기뻐 뛰며 주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향하여 외치십시오.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시107: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입니다. 영어로 steady love로서 견고한 사랑과 영원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이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들의 조상인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을 먼 후손들에게까지 그대로 이행하시는 그 사랑이 헷세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들의 충성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일으키심의 놀라운 축복이 이아침에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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