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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므린 것들
유홍준
배추밭에는 배추가 배춧잎을 오므리고 있다 산비알에는 나뭇잎이 나뭇잎을 오므리고 있다 웅덩이에는 오리가 오리를 오므리고 있다 오므린 것들은 안타깝고 애처로워 나는 나를 오므린다 나는 나를 오므린다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가슴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입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담벼락 밑에는 노인들이 오므라져 있다 담벼락 밑에는 신발들이 오므라져 있다 오므린 것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숟가락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뜨고 밥그릇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받는다 오래전 손가락이 오므라져 나는 죄짓지 않은 적이 있다
-해설 오므림은 곧 온유(溫柔)입니다. 마음의 형성을 온화하고 부드럽게 하는 것입니다. 주견(主見)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오므림은 어른스럽게 된다는 뜻입니다. 감각의 덩어리를 스스로 단속한다는 뜻입니다. 육근(六根)이 청정(淸淨)하다는 의미입니다. 잘 오므리면 속박이나 장애가 끊어져 자재(自在)하게 됩니다. 죄가 없으니 홀로 있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은일(隱逸)를 알아 한가한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안으로 오목하게 패어 들어가게 매순간 유지하는 것, 그런 평상심이면 재앙과 액화 또한 없습니다. 오므림이야말로 최극 최승의 대지혜(大知慧)라 할 것입니다. / 문태준
-프로필 경남 산청 출생 1998년 <시와반시>등단 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나는 웃는다><저녁의 슬하>등 소월시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시작문학상 수상 현) 이병주문학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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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므림의 미학, 자꾸만 쳐들고 싶은 나를 발 끝까지 숙여 오므려본다
오므림이 이처럼 나를 낮게 흐르게 할 줄이야 .........
문태준시인님의 해설이 더욱 빛이 납니다.
웅크린 태아, 주먹진 손, 무릎을 모아 얼굴을 파묻는것,
벌리는 대항의 자세보다 오므리는 평화의 수그림이 더 따뜻하고 뜨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