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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옛날하고 아주 오랜 옛날 충효예의 사상을 중요시 여기고 의복을 잘 차려 입고 다니는 민족이였습니다 그 옷에 맞게 모자도 중요시 여겼는데요 그럼 우리나라의 전통 모자가 어떤것이 있는지 한번 알아 봅시다
백립 : 흰갓을 말하며 조선시대 때 나라에서 왕이나 왕비가 돌아 가시거나 집안에 부모님 또는 어른이 돌아 가셨을때 상복과 함께 착용한 모자로 흰 말총과 대나무를 엮어서 만들었다
흑립 :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모자이며 한국의 전통 모자다 삼국시대 때 부터 썼으며 고려시대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죽립 위에 검정 옻칠을 해서 만들어 썼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말총과 대나무 명주천으로 만든 갓이 생기면서 조선왕조 500년을 상징하는 모자가 된다 양반들은 주로 도포를 입고 큰 갓을 쓰고 다녔으며 중인과 평민들은 두루마기를 입고 작은 갓을 썼다고 한다 개화기랑 해방 후 6.25 한국 전쟁과 1960년대에도 몇몇 시골 노인들이 갓을 쓰고 다녔으나 지금은 갱정유도 도인들과 국악인 그리고 한복을 좋아 하는 사람들이 쓴다고 한다
종립(鬉笠) : 조선시대 기병(騎兵)들이 쓰던 챙이 큰 갓으로 머리에 쓰는 모자(帽子)와 차양부분인 양태(凉太)로 구성되었고. 가늘게 쪼갠 대나무로 뼈대를 잡고 말총으로 엮어 만든 것으로, 모부가 좁고 양태가 넓은 형태다 전체적으로 흑칠(黑漆)이 되어 있으며. 모자의 양쪽으로 공작새 깃털을 장식하고 이를 흑색의 끈으로 둘러 묶어 매듭 지었다 갓 안쪽의 모자 부분 양쪽에 갓끈(끈 길이 67.5)이 하나씩 달려 있다
초립 : 옛날에 관례(남자의 성인식)를 치르지 못한 미성년 남자 또는 신분이 낮은 사람이 썼던 모자로 말 그대로 지푸라기로 만든 조선시대 전통 모자다 신분제도가 짙었던 조선시대 때부터 선비나 양민, 관례를 치른 어린 남자아이가 쓰고 다녔던 모자이며 아이들은 초립동(草笠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운다 패랭이와 비슷해 보여서 천민이나 양민들이 쓰고 다니는 것으로 오인될만 하지만 사실은 패랭이와는 다른 개체이며 선비들도 쓰고 다녔다 하지만 양반계급에서는 주로 흑립(黑笠, 갓)을 쓰고 다녔었다 조선 초기에는 양민 외에도 양반 및 선비들도 한때 쓰고 다녔으나 중엽에 들어서 선비들은 흑립을 쓰고 다니게 되었고 관례를 치른 소년이 혼인을 하기 전까지는 쓰고 다녔기 때문에 초립동으로도 불렸다 재료는 강화도에서 나는 왕골을 사용하였으며 누른빛의 지푸라기 등으로 엮어서 만들기도 하였다
말뚝벙거지 : 조선시대 때 벼슬아치나 양반들이 데리고 다니던 하인과 마부들이 머리에 쓰던 모자로 전립(戰笠)의 한 가지로 말을 다루는 말구종들이 이 모자를 썼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탈춤 주인공인 말뚝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패랭이 :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 평민들이 썼던 모자로 대나무를 쪼개고 엮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는 양반과 중인들도 썼으나 조선 후기가 되면서 신분이 낮은 양민이나 보부상 역졸 천민들이 쓰고 다녔던 모자가 되었다. 별칭으로 평량자, 차양자, 폐양자, 평랑갓이라고 하고 일부에서는 상놈갓, 천출관(賤出冠), 천관(賤冠)이라고도 불렸다.
전립 : 조선시대 때 사또와 장교 그리고 장군과 무관들 썼던 모자로 짐승의 털을 다져서 만든 담毯을 틀에 넣어서 밑바닥이 둥근 밥그릇을 엎어 놓은 형태의 높고 둥근 모자집[帽屋]과 테두리[簷]가 달린 형태로 만든 패랭이형태의 모자다 전립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갓의 구성처럼 모자집인 대우와 모자의 챙인 양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갓의 대우가 윗부분이 약간 좁은 원통형인 것과는 달리 대우의 형태가 밥그릇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복발형覆鉢型인 것이 특징이다 고급 무관이 쓰는 전립은 안쪽을 남색의 운문단雲紋緞으로 꾸몄다
주립 : 조선시대 문무당상관이 융복에 착용하는 붉은색의 갓이며 갓[黑笠]과 같은 형태이며, 문신 당상관의 융복(戎服)에 착용 하였다 융복 착용시의 주립에는 호수(虎鬚)를 전후좌우에 꽂고, 정자(頂子)를 장식하고 패영(貝纓)을 드리웠다고 한다
호건 : 어린 남자 아이들이 색동옷과 같이 입는 옷으로 설날 같은 명절이나 돌날·생일 등에 두루마기 위에 전복을 입고 복건 대신에 호건을 썼다 어린 남자 아이가 아이가 씩씩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호랑이의 상을 건(巾) 위에 수놓았다. 곧, 호랑이의 눈썹·눈·수염·이빨·귀를 건의 이마 부분에 수놓아 표현하였으며, 끝에 끈이 달려 있어, 뒤통수 밑에서 매게 되어 있다. 그리고 또한 밑에는 길상어문(吉祥語文)을 금박으로 새겨 모든 기원을 나타내고 있다.이 호건은 5, 6세까지 착용하였는데, 거죽은 검정 사(紗)로 하였고 안감은 남색 사로 받쳐 은은하고도 아름다운 색의 조화를 이루었고, 여기에 장식한 화사한 금박은 이를 더욱 돋보이게 하여 양가(良家) 자제의 쓰개가 될만하였다.
금박 복건 (어린이용)
복건 (성인용)
복건 : 복건은 어린 아이들이 입는 한복 머리 쓰개 일종으로서 어린 아이들이 머리에 쓰는 것이다. 명절이나 돌잔치 때 쓰는데 때로는 유생들이나 학자가 쓰기도 했다. 보통 복건은 검은 천으로 만들며 머리에 쓰는 복장이라 두꺼운 천은 쓰지 않았다 또한 어떤 양반 남자들은 복건 위에 갓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삿갓 : 대나무를 쪼개고 엮어서 만든 모자이며 우리나라 에서는 삿갓 또는 개립(蓋笠) 또는 삿갓과 도롱이를 묶어 사립(簑笠)이라고 부른다. 재료는 대나무나 갈대등으로 만든다. 먼 길을 떠나는 여행자나 대개 바깥에서 일하는 농민들이 많이 썼으며, 부녀자들이 외출시 사용했던 전모(氈帽)도 삿갓의 일종이며 지삿갓(종이 삿갓)이라고 불렀다. 전모는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전모를 쓴 여인》에도 잘 나타나있다. 그리고 방랑 시인 김병연의 속칭이 김삿갓이다
송낙 : 승려가 평상시에 납의(衲衣)와 함께 착용하는 모자로 송라립(松蘿笠)이라고도 한다. 소나무 겨우살이, 즉 소나무에 기생하는 지의류(地衣類)인 송라로 짚주저리 비슷하게 엮는데, 위는 촘촘히 엮고 아래는 15㎝쯤 엮지 않고 그대로 둔다. 위는 뾰족한 삼각형이나 정수리 부분은 뚫려 있다. 기본형상은 상고시대의 고유관모인 변(弁)과 비슷하다
갈모 :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는 우장(雨裝)으로 원래 명칭은 입모(笠帽)이며, 우모(雨帽)라고도 한다.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둥그스름하게 퍼져 있어 펼치면 고깔모양이 되고 접으면 홀쭉해서 쥘부채처럼 된다.갈모지 또는 환지라는 기름을 먹인 종이에 접는 간살마다 대를 가늘게 잘라서 만든 살을 넣고, 꼭대기에 닭의 볏처럼 생긴 꼭지를 단다. 안쪽 중턱의 양옆에 실끈을 달아서 비가 올 때에는 갓 위에 펼쳐쓴 뒤 이 끈을 턱밑에 매어 고정시킨다.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조선 초기부터 갓을 쓰기 시작하였고, 선조 때 이제신(李濟臣)이 쓴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는 명종 때를 전후한 입제(笠制)의 설명 중에 우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방립 : 방립(方笠) 또는 방갓은 초상집 상제가 외출할 때 쓰던 갓이다. 조선시대의 상제는 외출시 방립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었다. 삿갓과 생김새가 매우 비슷하지만, 운두 꼭대기가 뾰족한 삿갓과 달리 꼭대기가 둥글고 바닥의 네 귀퉁이가 옴폭 패여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벙거지 : 조선시대 궁중 또는 양반집 군노(軍奴)나 포졸 마부(말을 다루고 말을 키우는 사람)하인들이 쓰던 털로 만든 모자로 짐승의 털을 다져서 전(氈)을 만들고, 그것을 골에 넣어 위는 높고 둥글며 전이 편평하고 넓게 되어 있는 평량자형의 쓰개이다 전립(戰笠, 氈笠) 또는 병립이라고도 하는데, 전립(戰笠)이라고 할 때는 무관(武官)이나 대관(大官)이 쓰는 안울림벙거지도 포함된다. 벙거지는 대개 흑의(黑衣)와 병용하거나 전령복(傳令服)에 사용하였다 안올림벙거지는 양테 안쪽에 남색 운문단으로 안을 하였다. 일반 벙거지는 아무 장식도 없는 만듦새로 그 재료는 돼지털을 사용하였다. 또한, 벙거지는 일반 모자를 속되게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문라두건 : 조선시대 이전에 엄청나게 자주 쓰이던 쓰개(두건)의 일종 복건, 고대 중국인들이 상투에 묶던 수건과 함께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두건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에는 알 상투 차림을 싫어하여 반드시 두건이건 문라건이건 건을 써야 성에 찼고 따라서 건을 쓰지 않는 사람은 고려에서 죄수밖에 없게 됨으로서 만약 고려 거리에서 알상투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영락없이 죄수처럼 보여서 비웃음을 샀고 쪽팔림을 겪었다고 한다 참고로 고려시대에도 노비나 장가들지 않은 사람은 건을 쓰지 못했다 장가들지 않은 사람은 상투를 틀지 못했기 때문이고 노비들은 아예 그냥 상투를 튼 다음 머리띠 처럼 수건으로 묶었고 총각들도 상투를 안 틀고 그냥 뒤에서 댕기로 꽁지머리를 묶었다고 한다
치포관(緇布冠) : 선비가 평상시에 쓰던, 검은 베로 만든 관으로 선비가 평상시에 썼다고 한다
방건
사방관
방건과 사방관 : 조선시대 사인들이 편복을 입고 쓰던 관으로 사면이 편평하고 네모지다고 하여 방건·방관(方冠)·사방관(四方冠)·사방건(四方巾) 등으로 불렸다 방건은 중국에서는 명나라 초기에 선비들이나 문인, 유자(儒者)들이 사용했던 두건으로서 이것은 이미 옛날 남조(南朝)의 사대부들이 애호하여 사용했던 각건(角巾)의 제도에서 기인된 것이며, 사방평정건(四方平定巾)·사방각건(四方角巾)이라고 불렀다 우리 나라에는 유학의 진흥과 함께 방건이 유학자들이나 선비들 사이에서 집안에 있을 때 맨상투 바람을 면하기 위해 편복포와 함께 사용되었다. 방건의 형태는 네모난 상자모양으로 사각(四角)이 편평하며 정수리부분이 막힌 형태와 터진 형태로 나뉘는데 전자는 사방관, 후자는 방건이라고 불리었다 그 재료는 인모(人毛)를 사용하여 만든 것이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주와 통영 등지에서 생산되었고, 말총으로 엉성하게 그물처럼 얽어 꿰맨 것은 충주 등지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사방관은 조선 중기에는 사면이 각진 형태로서 위가 막히고 상부와 하부가 별차이 없이 정입방체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나, 17, 18세기로 갈수록 위는 막혀 있으나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상광하협(上廣下狹)의 형태로서 약간의 변모를 보인다. 조선 후기인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위가 터진 방건의 형태를 많이 착용하였다
동파관 : 고려와 조선시대 때 사대부와 양반 유학자들이 평상시에 쓰던 모자로 송나라 때 소동파(蘇東坡)가 썼던 관이라 하여 동파관이라 불린다 명나라 때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문인·선비들이 한가히 지낼 때 쓰던 관이다 형태는 당건(唐巾)이나 사방건(四方巾)의 옆에 위로 올라가는 수(收)가 덧달린 형태이다. 이것은 망건 위에 탕건(宕巾)을 쓰고 그 위에 쓰는 것으로, 말총으로 만들고 외관(外冠)으로 착용하였다
정자관 (2층)
정자관 (3층)
정자관 : 한국의 대표하는 또다른 모자이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굉장히 친숙한 모자다 남자가 한복을 입을 때 쓰는 관(冠)들중 하나로 흑립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양반 남성을 상징하는 모자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흑립은 주로 외출할때 쓰는 모자인 반면 정자관은 집에 있을 때 쓰는 모자라는 점이다 사대부는 집안에서도 의관을 정제해야 하므로, 실내에서 쓰는 모자가 따로 존재했다 망건과 함께 말총(말의 꼬리)를 꼬아서 만들었으며 대부분의 조선시대 양반이면 하나씩은 꼭 가지고 있었다. 흑립과는 달리 오직 양반만 소지할 수 있으며, 중인 이하는 소지할 수 없었다 현대의 일반인들에게는 일명 '놀부 모자'로 유명하다 혹은 '훈장 모자'라고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이라든가, 실존하는 훈장 김봉곤 씨가 미디어에 출연햔 영향을 받았을 듯하다 1960년대 전까지만 해도 간간히 노인분들이 쓰는 경우가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쓰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생김새 때문에 종종 왕관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시중에서는 대감모자, 뿔갓 등의 이름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감투 : 일반 평민 중, 집안 재력이 넉넉했던 사람들이 쓰던 모자로는 ‘감투’가 일반적이었다. 감투는 말총이나 가죽, 헝겊 등으로 차양 없이 만든 모자다. 다른 모자들과 달리 넓다란 챙이 없다 보니 간편하게 착용할 수 있었고 고려시대부터 낮은 계급이 착용하던 모자로, 조선시대에는 평민들이 사용을 했다. 조선 후기에는 겨울에 솜을 넣어 방한의 기능을 갖춘 감투가 쓰이기도 했고, 제주도에서는 동물의 털로 감투를 만들어 겨울에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탕건
바둑탕건
홑탕건
겹탕건
탕건 : 조선시대 남자들이 망건을 덮거나 갓 아래로 받쳐쓰던 모자로 말총을 재료로 만들어 앞쪽은 낮고 뒤쪽은 높은 형상으로 앞쪽 중간에 턱이 있는 쓰개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 그리고 늙은 노인들은 상투를 틀고 망건으로 머리를 정돈한 후 일상에서 탕건을 썼다 개화기때도 몇몇 남자들이 탕건을 썼으나 해방 후 6.25 한국전쟁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시골 노인들이 의복을 갖추고 가볍게 외출 하거나 집에서 평상시에 썼으나 지금은 훈장님 또는 유학자들이 쓴다고 한다 탕건 종류로는 겹탕건과 홑탕건 바둑탕건이 있다
유건 : 유생들이 도포와 창의 두루마기 중치막을 입을때 같이 썼던 모자이며 민자관(民字冠)이라고도 한다 유건을 넓은 의미로 생원·학생·사인(士人) 등 유생이 착용하던 관건(冠巾)으로 볼 때에는 복건도 이에 포함된다 그 형태를 [연려실기술별집] 관복조에서는 “민자건(民字巾)이라고도 하는데, 대[竹]로 엮어 검은 베로 싸거나 종이를 바르고 옻칠을 하였는데 그 모양은 단정하며 그다지 뾰족 하거나 비스듬하지 않다”라고 설명 하였다 그러나 이는 중국의 유건을 설명한 것으로 보이며 그것이 우리나라 유건의 형태와 비슷한지는 알 수 없으나 재료에 있어서는 중국과는 달리 검은색 삼베와 모시 비단으로 만들었다 성균관 안이나 집안에서만 썼고, 거리에서는 쓰지 않았다
망건 : 조선시대에 상투를 틀기 위해 사용하던 머리장식. 상투가 흘러내리지 않고 갓이나 관모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하는데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도구였다 말총을 엮어 만들었으며 정중앙에는 유난히 엉성하게 엮어 바람이 잘 통하게 만든 통풍망이 있고 그 위에는 갓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하는 턱인 풍잠을 달기도 한다 망건의 양쪽 끝에는 끈인 당줄이 4개가 달려있으며 망건을 머리에 맸을 경우 양 옆쪽에 해당하는 곳에는 당줄을 고정시키는 용도와 갓끈을 걸어놓는 용도의 단추인 관자가 달려있다
백사모 (나라에서 국상이 났을때 쓰던 관모)
흑사모 (관리들이 관복을 입을 때 쓰던 모자)
사모 : 사모(紗帽)는 과거 중국, 한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문무백관들이 관복을 입을 때에 함께 착용하던 모자로 검은 사(紗)로 만들며 뒤에 뿔이 2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주변국의 영향을 받아 관백으로서 사모를 착용 하였다고 전해진다 현대 한국에서는 흔히 전통 혼례식에서 신랑이 쓰는 예모(禮帽)로 용도가 변경 되었다 혼례 때에는 서민에게도 사모의 착용이 허용되었다. 사모는 뒤가 높고 앞이 낮은 2단 모정부(帽頂部)를 이루며 뒷면에는 각(角)을 달고 있다. 겉면은 죽사(竹絲)와 말총으로 짜고 그 위를 사포(紗布)로 씌우는데, 사모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형태의 변천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뒤에 좌우로 끈을 드리운 것과 같은 연각(軟角)이었다 이것이 명종 때를 전후하여 양 옆으로 뻗은 경각(硬角)이 되었으며 중기 이후로는 모체(帽體)가 대단히 높아지고, 양각도 폭이 넓어지며 수평으로 되었다 말기에 오면 모체가 다시 낮아지고 양각의 폭은 그대로 넓으나 길이가 짧아지고 앞으로 굽어진다 사모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 열전에 보이는데 1387년(우왕 13) 5월 설장수(偰長壽)가 명나라 태조로부터 사모·단령을 하사받고 돌아와 그 해 6월부터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착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1417년(태종 17) 12월 예조와 의례상정소의 상계에 의하여 갓 대신 사모를 쓰고 등청하게 되었다. 1426년(세종 8) 2월 관복제정 때에는 평상복에 사모를 착용하게 하였고, 이로써 조선 말기까지 가장 많이 쓰인 관모가 되었다시복(時服)에도 사모를 착용 하였고 공복에 쓰던 복두(幞頭)도 사모로 대신하게 되었으며 고종 때 실시한 복장개혁 때에도 대례복·소례복에 사모를 착용하게 하였다
복두 : 각이 지고 위가 평평한 관모로 사모(紗帽)와 같이 두 단으로 되어 있으며, 뒤쪽의 좌우에 각(脚)이 달려 있다. 복두는 중국에서 생겨난 관모로서 절상건(折上巾)·파두(帕頭)·연과(軟裹) 등의 별칭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건에서 비롯되었다. 후주(後周) 무제(武帝) 때 머리를 감싼 데서 복두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때는 각을 연백(軟帛)으로 만들어 드리웠으며 수나라 때 만들기 시작하였다. 당나라 때는 증(繒)대신 나(羅)를 사용하였으며 관형화(冠形化)되어 백관과 사서인(士庶人)의 상복(常服)에 쓰게 되었다. 형태는 사각(四脚)으로 양각은 머리 뒤로 매고 양각은 턱 아래로 매어 벗겨지지 않게 하였다. 일이 없을 때는 머리 위로 올려서 매었다. 뒤에 사각이던 것이 양각으로 되었으며, 연각(軟脚)이던 것이 점차 경각으로 되었다. 오대(五代) 이후부터 각은 점차 평직(平直)으로 변하였고 송나라 때에는 군신이 모두 전각복두(展脚幞頭)를 쓰게 되었다. 이때의 복두는 모체(帽體)가 낮고 각이 길었는데 특히 제왕의 것은 몹시 길었다. 모든 의식 때나 한가히 지낼 때 널리 썼으며 형태가 매우 다양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 진덕여왕 때 당나라의 복식제도를 따르게 되면서 처음으로 쓰게 되었다. 이때의 복두 형태는 7세기 중엽 사마르칸드 아프라시압궁전을 방문한 신라 사절을 묘사한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복두 위에 우리 나라 특유의 새의 깃털을 꽂아 장식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복두 한가지로 되어 귀족·관인은 물론 평민까지도 착용하였다. 단, 계급에 따라 재료에 차이가 있어서 흥덕왕 9년(834)의 복식금제에 6두품은 세(繐)·나·견(絹)을, 5두품은 나·시(絁)·견을, 4두품은 시와 견을, 평민은 견을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금제는 또한 복두 재료의 사용이 독자적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는 개국 초에는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쓰다가 광종 때 백관의 공복을 정하였다. 이때 제정한 복두는 중국 오대의 평직으로 된 것을 받아들여 전각복두를 사용하였다. 초기에는 각의 길이가 어깨 너비를 넘었는데 말엽에는 길이가 짧아졌다. 고려시대에도 왕으로부터 문무백관·사인에 이르기까지 통용하였으며, 말기에 이르러서는 양반집 종들도 쓰게 되었다. 이는 고종 39년(1252)에 왕이 최항(崔沆)의 종에게 복두를 쓰는 것을 허락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복두는 고려에서 가장 성행하였다. 특히 장위복(仗衛服)주 03)으로 사용된 것은 매우 화려하고 종류도 다양하여 전각복두·금화곡각복두·권착복두·상절각복두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세자와 백관의 공복으로 『경국대전』에 제정되었으나 공복착용이 사라지면서 그 용도가 점차 국한되어 의식 때 이외에는 별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게 되자 쓰지 않게 되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관례복이나 급제관복으로 한말까지 유지 되어왔다 특히, 서리 계급에서는 유일한 관모였으며, 악공복으로도 사용되어 오늘날에도 국악 연주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과거에 장원급제하면 복두에 어사화를 꽂고 삼일유가를 하는 풍속이 있었다.
익선관 : 고려 말·조선과 명나라와 베트남에서 사용하던 왕관 및 관모. 중국에선 청나라에게 남명이 멸망하면서 폐지 되었다 조선의 경우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폐지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후에도 황룡포를 입은 고종이 익선관을 계속 쓴 어진이나 사진 등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완전히 폐지된 것은 아니고 양장이나 군복과 함께 전통적인 관복으로서 혼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도 이왕이 간혹 익선관을 쓰기도 했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본격적으로 익선관이 폐지된 건 일본 제국 패망 이후 이왕가가 신적강하를 당하면서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형태는 모체(帽體)가 2단으로 턱이 지고 앞보다 뒤쪽이 높으며 뒤에는 매미날개 모양의 소각(小角) 2개가 윗쪽을 향해 달려있다. 모(帽) 위에는 앞면의 청사변(靑絲辮)이 뒷면의 두 절각(折角) 사이를 얽게 되어 있다 겉감은 자색의 사(紗) 또는 나(羅)로 만든다 원래 중국 기원이며 단령 위에 쓰는 관모이나 애초의 발생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부터이므로 복두(幞頭)와의 차이는 불분명하다 정식으로는 당태종이 삭망(朔望)·시조(視朝)의 상복(常服) 관으로 제정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당제(唐制)를 차용한 통일신라시대부터 착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나 확인할 수는 없다 당제의 경우는 당태종의 착수포(窄袖袍)에 육합화(六合鞾)를 신은 화상이 있으나 그 때 관모의 형상은 사모(紗帽)이다. 당시는 평건책(平巾幘)·절상두건(折上頭巾)과 통용하였다. 송대(宋代)에 와서는 절상건(折上巾)·착포(窄袍) 시사(視事)의 복으로 오사모(烏紗帽)와 통용하였다 익선관과 오사모는 그 제도가 같되 황제나 왕이 쓰는 익선관은 오사모의 양대(兩帶)를 위로 치켜올린 형태인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도 이 제도를 채용하여 왕의 상복은 오사고모(烏紗高帽), 즉 오사절상건(烏紗折上巾)에 착수(窄袖) 상포(湘袍)를 입었다. 대(帶)는 자라(紫羅) 늑백(勒帛)에 간수금벽(間繡金碧)하였다 이 경우도 모대(帽帶)를 절상(折上)하였으므로 익선관이었다고 보아진다 당시의 요제(遼制)도 상복으로 당의 제도를 따라 황제가 평건(平巾) 천집포란(穿執袍襴)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익선관을 말하는 것 같다. 그 뒤 원대(元代)의 몽고복(蒙古服) 채용에 이어 명나라가 들어서자 당송제(唐宋制)를 복구한 의제를 따랐다 명나라는 1405년(永樂 3)에 오사모·절상건으로 하였다가 다시 익선관에 황반령(黃盤領)을 입고 옥대를 띠고 피화(皮鞾)를 신었다 명나라의 황태자복은 오사절각향상건(烏紗折角向上巾)인데, 이를 익선관이라 하고, 친왕(親王)·군왕(群王)·세자도 같다고 되어 있다 조선 국왕에 내린 익선관은 이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에 의하여 친왕복(親王服)을 보냈으므로 이 익선관이 조선 국왕의 상복관이 되었는데 아래에는 곤룡포를 입어 한말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 제도는 오사모와 같은데, 양대를 위로 꺾어 올리는 전통적인 관모이다
면류관(冕旒冠)은 동양의 군주들이 사용한 왕관의 일종이다. 모자 위에 직사각형 판때기를 얹고, 판때기의 앞뒤에 몇 가닥의 류(旒)를 늘어뜨린 뒤 류에다 구슬을 꿴다. 류 가닥의 수는 군주의 위상에 따라 달라진다. 류가 12가닥이면 황제, 류가 9가닥이면 왕, 류가 8가닥이면 태자 또는 세자, 류가 7가닥이면 상대부(上大夫), 류가 5가닥이면 하대부를 의미한다.
제관 (제복을 입을때 쓰는 관모)
금관 (조복과 함께 입을때 쓰는 관모)
양관 : 조선시대 백관(百官)이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에 착용하던 관모(冠帽)로 검은색 모(帽)에 둘레가 있어 앞면 둘레는 너비가 그다지 넓지 않으나 뒷면 둘레는 위로 치솟아 두 작은 각(角)을 이루게 하였다 또한 앞면 둘레의 가운데 부분에서부터 치켜올린 뒷면 둘레의 가운데 부분에 이르기까지 반월형(半月形)의 면지(面地)를 장식하였다 이 면지에는 밑에서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금색사로 종선(縱線)을 베풀어 이를 양(梁)이라 하였다. 양관이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양관의 둘레에는 당초모양문(唐草模樣紋)을 수식하였으며, 또 목잠(木簪)이라 하여 머리에서 관이 벗겨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관을 가로지르는 계(筓) 곧 비녀가 있었다. 이 목잠의 좌우 양끝에는 앞면 둘레와 뒷면 둘레를 관의 양옆에서 연결시킨 나머지 끈을 감아 늘이고 끈 끝에는 남색 술을 달아 장식하고 있다. 조복에 착용하는 양관에는 그 둘레 전부에 수식한 당초모양문에 도금 하였으며, 목잠에도 이금(泥金)하였다. 이는 면지의 금색 종선 곧 양과 함께 마치 금관을 연상시켜주므로 이를 가리켜 금관조복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이 양관의 제도는 중국 명나라의 것을 본뜬 것으로 『삼재도회 三才圖會』의 문무관 양관을 보면, 위의 무(武)가 높고 앞의 양이 낮으며 아주 호화찬란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것은 무가 낮고 양이 높아, 중국의 것과 같게 해야 한다는 심심치 않은 논의와 함께 중국 것을 모방하여 양관에 지나치게 도금하는 풍조가 한때 유행하기도 하였다.제복에 착용하는 양관도 그 모양이 조복의 것과 같다. 다만 이것은 제복에 착용하는 것이니 만큼 화려함을 피하여 앞면 둘레의 당초모양문의 전면 중앙 부분과 목잠의 구멍 둘레만을 금칠하고 그밖에는 모두 흑색으로 하였다. 그러나 조복의 양관과 그 모양이 같아서 제복에도 이를 공용하였기에 이에 대한 시비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연호도 광무(光武)라 개칭하고, 1900년 칙령 제15호로 문관 대례복 제식(制式)을 구미식 관복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조복은 그 양관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제복과 그 양관은 선성(先聖)의 유제(遺制)라 하여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는 그대로 존속하였다
사진 : Google & 국립민속박물관
첫댓글 다음 시간에시간 우리나라 여자 장신구를 소개 하겠습니다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