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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55 - 함풍제 치세에 태평청국의난과 영불전쟁에 자연재해로 나라가 기울다!
도광제 때 1841년 발발한 아편전쟁에서 영국군이 승리해 장강(양자당) 을 거슬러 올라가 진강을 함락한후
제2의 수도 난징이 위태하자 청나라는 중영강녕조약(中英江寧條約) 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은 끝내는데
'난징조약(南京條約)'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조약으로 자유무역 이라는 영국의 숙원이 해결된 것입니다.
그런데 난징조약 체결을 보고받은 청 조정은 의외로 쉽게 받아들였으니 이전보다 높은 관세를 거둘수 있으며
장강과 주산 열도에서 영국군이 철수한데다가 영국이 할양을 요구한 영토 마저도 전략상·
경제상 가치가 전무한 당시로서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홍콩이 전부였기 때문이었으니 그까짓 섬 하나 정도야?
또한 기존 중국의 대외질서관의 틀 내에서 볼때, 난징조약은 청 조정에게 있어 정신승리... 아니 긍정적으로
해석되었다고 볼수 있으니, 영사재판권과 치외법권에 대해서는 오랑캐인 서양이 중국 고도의
예법(오륜) 을 이해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소한 분쟁에 휘말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난징조약은 천자가 오랑캐 (夷狄) 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지 조약이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다만 난징조약에서
청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오직 배상금 액수와 경제상 요충지인 푸저우 개항 문제였을 뿐이었으나 영국은
부패한 공행에게 뇌물 일정량을 바쳤는데 이것이 폐지된 것을 계산하면 오히려 영국측의 이득이 큰 셈입니다.
영국이 다른 국가들 처럼 청을 예속화하는 조약을 강요하지 않은 것은 장기에 걸친 이득을
계산한 것이기도 했으니.... 인구 4억에 달하는 광대한 시장을 섣불리 건드려 잃는
것보다는 살려두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는 더 큰 이득을 가져다주리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영국이 내세운 아편전쟁의 표면적인 목적은 '영국의 자유무역 권리 수호' 로 아편 무역 유지를 위한 전쟁이
아니었으니, 전쟁후 체결한 조약에는 사달의 핵심이면서도 근본인 아편을 다룬 언급이 존재하지 않으니,
이후로도 아편 무역은 외면상으론 불법이고 청은 단속했으나... 결과적으로 아편 수입량은 폭증하게 됩니다.
서구 열강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어 권리를 얻었으니 1844년 7월 3일 미국과 망하조약을 체결했고, 10월 프랑스
와는 황푸조약을, 1858년 러시아와도 아이훈 조약(愛琿條約) 을 체결하니 아편전쟁은 제국이 늙어서
이빨빠진 호랑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한 사건으로, 향후 100년간 지속될 암울한 시대의 서막이었습니다.
조선도 마찬가지지만 청나라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은 서양문명 및 제국주의를 막아낼 능력이나 세계정세의
이해 부재, 설상가상으로 팔기군/녹영이 중심이 된 국방력의 저하였으며, 관료층은 산업 혁명이나
신기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지난 2천년간의 틀에 갇혀 유연한 사고를 할 기량 따위가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행들이 또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본래 공행이란 청 조정에 돈을 주고 허락을 받아
하는 것이라서 일종의 독점인데, 공행을 폐지하니 너도나도 뛰어들수 있었고 결과적
으로 영국이랑 협력해 아편으로 돈을 번 공행들은 이 전쟁으로 영국에게 뒤통수 맞은격이 됩니다.
청 왕조가 궁극적으로 외국 세력에게 이권을 양보한 이유도 인구 이동과 유랑민 증가에 따른 국내 불안에
대한 경각심 때문이었고, 유랑민 문제는 결국 태평천국이라는 극도에 도달한 사태로 폭발하게되는데,
아편전쟁은 서양열강의 압도적인 힘과 청나라가 얼마나 후진적인가를 여실하게 보여준 전쟁이었습니다.
아편전쟁이 한창이던 1841년 5월 29일, 광저우 삼원리에는 영국군과 청 민중과의 충돌인 삼원리 사건이
벌어졌는데, 6,000여명의 영국군은 광저우 교외 요새 (Western fort) 를 점령하여 주둔하고 있었고
그 서쪽 심해(沁海) 항에 수송선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원래 영국군은 군기가 잘 잡혀져 있는 군대였습니다.
하지만 추가 공격이 취소되어 병사들은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고 소규모 분견대가 우란강 (牛栏岗) 마을을
약탈하는 도중에 한 영국군이 중국인 위소광의 아내를 강감했는데 격분한 사람들이 부대를 에워싸니
영국군은 급히 퇴각했는데, 인근 마을 사람들이 당도해 10,000명이 넘었고 삼원리에서 영국군을 포위합니다.
칼, 낫, 망치, 창, 갈고리 등으로 무장했고, 화기는 없으니 숫자만 많지 영국군의 우수한 화기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 같았지만 문제는 그날 폭우가 쏟아졌으니 영국군 주력은 인도군 세포이 였는데,
플린트락 머스킷은 비가 내리면 뇌관 역할을 하는 화약 접시에 물이 들어가 젖어 총을 쏠수 없으니
중국인들은 영국군을 논으로 유인해 분리시키니, 영국군은 세포이 4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당합니다.
Western fort 의 영국군 본진에서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비가 와도 어느 정도는 발사가 가능한,
당시로서는 최신형 무기인 퍼커션 캡 머스킷으로 무장한 해병대를 급파했고 결국 2시간 만에
본진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으나.... 군민들은 본진으로 따라와 포위했으니 이대로 가면
영국군이 대패할 수도 있었으나 영국군 사령관은 광저우 총독 여보순 (余葆纯) 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여보순. 포위를 풀지 않으면 영국군 주력이 도착해 광저우를 초토화시킬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영국군
증원병력이 당도해 분노의 보복이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하고는, 군민들을 협박했으니 며칠전에
천비가조약 (川鼻假條約) 의 연장선인 '광동 협약' 이 맺어져 청이 영국에게 6백만 달러를 배상하도록
결정되었는데 이 엄청난 금액을 광저우 주민들이 배상하도록 할 것이라고 하니 주민들은 포위를 풀었습니다.
여보순은 이후 매국노로 찍혀버렸으며 과거시험 부서의 한직으로 좌천되었고 학생들이 얼굴에 먹물을
뿌리는등 사람들에게 수시로 곤욕을 당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삼원리 사건은, 중국이 말도
안되게 당한 아편전쟁 기간 외세에 대항한 유일한 민중 봉기이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중국인이 어릴때 부터 학교에서 배우니 그 위상은 미국에서의 알라모 전투나 벙커힐 전투 정도 입니다.
결과는 청의 압도적인 대패였으며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과 함께 홍콩을 영국이 식민지로 삼았고 유럽
열강의 국력이 몇몇 식민 거점을 만드는 걸 넘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거대한
제국 조차 박살낼수 있다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본격적인 서양 열강들의 청나라 쪼개기가 시작됩니다.
영국이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아편의 해악으로, 아편 수입을 막으려는 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
때문에 당대와 현재를 막론하고 많은 비난을 받으니, 심지어 당대 반대파 조차 "승리할 것은 자명하지만
그로 인한 위신의 실추가 더욱 더 두렵다." 라고 언급했으며....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광저우 앞바다에
휘날리는 유니언 잭 (Union Jack) 은 악명높은 아편 밀수를 보호하려 펄럭이는 것이다.” 라고 비판했습니다.
인류 5천년사에 모든 전쟁이 다 더럽고 추악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아편전쟁은 인류 전쟁사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전쟁으로 평가받으니..... 보통 전쟁의 이름은 지명이나 국가나 민족, 사람 이름,
혹은 전쟁 기간이 붙기 마련인데도, 이 전쟁은 이름부터 매우 특이하게 아편이 들어간 아편전쟁 입니다.
도광제는 1850년 2월 여름궁전 원명원에서 사망하였는데 10년후 원명원이 제2차 아편전쟁에서 서양
침략군에게 불타버리면서 원명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마지막 황제로 남았으며 넷째 아들(형들이
모두 죽어 맏이) 혁저가 함풍제로 즉위하였으며, 도광제의 시신은 청서릉의 모릉 (慕陵) 에 묻혔습니다.
한편 도광제의 죽음 직후인 1850년 12월에 중국 역사상 최악의 민란인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했고
이후 청나라는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며 서서히 망국의 길을
걸었으니.... 조선의 고종처 럼 여러모로 청나라의 본격적인 쇠락기를 맞이한 황제로 평가받습니다.
제1차 아편전쟁으로 마음고생을 하던 도광제가 1850년 사망하면서 뒤를 이어 4남이자 적자인
혁저(함풍제) 가 제위에 올랐으니 함풍제인데 이미 청나라는 망조기 들었고 아편과 아편
전쟁의 여파로 쇠락해가고 있었으니, 위정자들의 부패와 수탈은 일상이 되었으며, 서구의
경제적 침탈마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혼란을 기회로 역모를 꾸밀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함풍제가 재위에 오른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851년 염군의 난과 5천년 중국 역사상 최대이자 최악의
민란이라 불리는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했는데.... 염군의 난은 청나라 조정이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입증해 보였고, 태평천국의 난은 민중의 마음이 청나라에서 떠났음을 증명했습니다.
무너지는 청나라에 실망한 민초들은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사이비 기독교도이자 흉괴 홍수전에게
모여 대군을 이루었고, 2년만인 1853년에 청나라의 제2의 수도 난징을 점령했으니 홍수전은
천경(天京) 이라 개칭하고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은후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한 천조전무제를
통해 '평등' 을 기반으로 한 국가 비전을 발표하면서 청나라의 질서를 갈아엎겠다는 의지를 드러냅니다.
난징을 점령한 홍수전은 곧바로 수도 베이징을 노렸으니..... 태평천국군이 북상해 톈진 교외
까지 다다르자 기겁한 함풍제는 서둘러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 등에게 각기
상군 (相軍) 과 회군 (淮軍) 등 지역 의용군을 조직케 하여 태평천국 진압을 맡기게 됩니다.
청나라 입장에선 다행히 태평천국도 초창기의 대의가 무색하게 난징 점거 후 극심한 내분과 부정부패에
시달리는데, 특히 홍수전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내부 인사를 숙청한 천경사변 이후 태평천국의
국력은 수직하향했으며 홍수전은 이수성, 진옥성, 홍인간 등에게 조정을 맡긴채 궁녀들과 놀아났습니다.
그나마 반전을 노리며 노력하던 홍인간은 부르주아적 요소를 도입한 자정신편 (資政新篇) 을
실시했으나 내부 반발과 현실의 한계로 실패했고 그 와중에 익왕 석달개는 쓰촨성으로
쳐들어갔다가 금천에서 청군의 습격을 받아 전멸해버리니, 결국 1864년 7월 증국번의
형 증국관이 수도 난징을 함락하고 태평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난은 13년만에 끝나게 됩니다.
청나라가 내적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쩔쩔매는 와중에 외적으로는 영국과 프랑스가 또 전쟁을
선포했으니 "2차 아편전쟁" 으로 1856년에 시작해 부터 1860년까지 5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니 역시 청군이 1차처럼 참패했는데, 그나마 만주족 치하에서 다수 한족을
위시한 중화질서는 붕괴를 맞이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서세동점 (西勢東漸) 의 시대가 개막됩니다.
애당초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이 너무 일찍 끝나버려 원하는 만큼 개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권을
더 많이 챙기지 못한 것에 대해 큰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고.... 무언가 더 뜯어먹을 것이
없나 고민하던 중에 '애로호 사건 Arrow War) ' 을 계기로 청에 억지로 전쟁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1차 아편전쟁 (1839~1842년) 이 끝난뒤, 영국은 대중 (對中) 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기대했지만
영국의 주력 상품인 면제품의 판매는 기대와는 달리 열악하였으니....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청나라 농촌에서 생산하는 면포가 값이 싸고 품질이 좋다. 청의 사회경제적 구조가 여전히
자급자족적인 성격이 강해 수입제품을 꺼려했다. 늘어난 아편 수입으로 은이 유출
되면서 구매력을 잃었다. 제1차 아편전쟁 이후 광동을 중심으로 외국인 배척이 전개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영국의 대중 무역은 여전히 차의 수입과 아편의 수출이었으니 영국은 지속적으로
시장 개방을 확대하라고 청에 압력을 넣었으니..... 결국 1851년 태평천국 사건을 유발하게 됩니다.
영국은 1854년 4월 광저우 양광총독 (兩廣總督) 섭명침에게 모든 내지와 연해도시의 개방, 상선
과 군함의 양자강 자유왕래, 아편무역의 합법화, 내지 통관세의 폐지, 외국사절의 북경상주
등을 내용으로 난징 조약의 개정을 요구하였으나 청나라 조정에서는 조약개정에 응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영국은 무력 사용을 생각하는데 마침 1856년 10월 광저우 앞 주강 (珠江)에 정박하고 있던
해적선 애로호의 영국 국기가 내려지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영국의 수상 헨리 존 템플은
충분한 구실이 된다고 여기고 1857년 2월 의회에 군비와 원정군 증강을 위한 경비를 제출합니다.
의회에서는 이처럼 사소한 사건으로 전쟁까지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으니 상원에서는 통과되었으나 하원에서는 부결되자 헨리 수상은 하원을 해산시키고
총선거를 했고 새로 구성된 하원에서는 대중국 전쟁문제를 동의하였으며 1856년
광시에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오귀스트 샤프들랭이 처형되니 프랑스도 합류합니다.
영불 군대는 1856년 12월 광저우를 점령해서 시가지 곳곳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살해했으며 그후
3년 동안 지방관의 괴뢰정권을 앞세워 연합군위원회 (영국, 프랑스) 의 점령행정이 실시 되었습니다.
이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1858년 북상하여 대구포대 (大沽炮台) 를 점령하였고, 북경의 관문인
톈진 까지 점령하자 청 정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톈진조약을 맺게 되는데 러시아와
미국은 전쟁 후반기에 협력을 제의하였으나 실제로 청국에 군사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1858년 6월 텐진 조약의 내용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은 외교사절이 베이징에 상주할 권리를 가진다.
무역을 위해 10개 항구를 개방한다. 외국 상선의 자유로운 장강 통상을 승인한다. 중국 내 외국인
여행을 허가한다. 아편무역을 합법화한다. 개항 항구를 확대한다. 기독교를 공인한다.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 대한 배상금으로 은 200만냥을 지불한다. 영국 상인에게 손실 위로금으로 은 200만 냥을 지불한다.
청나라 강경파들은 1858년 베이징에서 톈진조약 비준을 강행하려고 하는 영프 연합군을 막기
위해 다구포대에 포대와 기병을 추가 배치하였으니, 조약을 체결하려는 영프
연합군과 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청나라 군대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전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 함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철퇴하게 되었고, 잠깐의 승리로 인해 청 정부에서는 강경론이
득세했지만 1860년 6월 영국과 프랑스는 전년도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1859년 소함대의 8배가
넘는 병력과 군함들이 나타나니 발해만의 항구를 점령하고 다구포대에서 떨어진 곳에 병력을 상륙시킵니다.
다구포대와 청정부의 방어군을 격파한 영-프 연합군에 놀란 청 조정은 평화협상을 제의하였지만
영-프 측은 협상을 거절하고 9월 하순 퉁저우 장자완과 바리차오 전투에서 1만 2천의
팔기군이 처참하게 패배시켰는데, 프랑스군 사령관 샤를 쿠생몽토방은 귀국후
나폴레옹 3세 황제로 부터 팔리카오 백작 (Comte de Palikao) 이라는 작위를 수여받습니다.
베이징이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자 패닉에 빠진 함풍제와 조정은 황제의 형제 중 한 명인 공친왕을 남겨
협상하게 하고는 베이징에서 멀리 북쪽으로 떨어진 여름별장 열하로 도망쳤으며 영불 연합군은
10월 베이징에 입했지만, 점령하지는 않고 베이징 근교에 머물면서 수많은 약탈과 방화를 자행합니다.
1860년 황제의 여름궁전 원명원을 약탈후 불태우니 청나라는 러시아 중재로 영프와 기존에 맺던 톈진조약에
더불어 베이징 조약까지 추가로 체결했으며, 러시아 제국 역시 무력시위를 통해 아이훈 조약을
체결하니 청나라는 드넓은 연해주와 아무르 강 이북의 광대한 영토를 러시아 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합니다.
제2차 아편전쟁으로 원명원이 불탄 이후, 함풍제는 열하의 피서산장에 계속 머무르다가 1861년 8월
사망했으며 뒤를 이을 아들 동치제가 고작 6살 밖에 되지 않았기에, 황제는 죽기 직전
8명의 고명대신들에게 국정을 보좌토록 했으니 사람들은 이들을 일컬어 '고명 8대신' 이라 불렀습니다.
함풍제의 두 부인인 동태후와 서태후에게 공동 섭정을 맡겼는데, 성격이 대담했던 서태후가 최고 권력자로
떠올랐으니.... 그러나 서태후가 정치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자 자연스레 고명 8대신들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때 서태후가 공충친왕 혁흔과 힘을 합쳐서 일으킨 친위 쿠데타가 바로 신유정변 입니다.
원래부터 서태후는 고명 8대신의 일원이던 이혁보국군왕 숙순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또한
베이징에 남아있던 공충친왕 혁흔은 고명대신으로 지명되지 못한 것에 불만이 컸는데,
두사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힘을 합치게 된 것이니 혁흔은 서양 열강들과 조약
체결 뒤 열하로 황제를 조문하러 갔는데.... 이때 서태후와 비밀리에 연락해 쿠데타를 계획합니다.
9월 14일 산동도감찰어사 동원순이 두 태후들이 수렴청정을 하도록 상소를 올렸으나 고명 8대신들이 일언
지하에 거부하면서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고 10월 26일 황제의 시신이 베이징으로 운구되었는데,
동태후와 서태후는 먼저 입궁한뒤 나중에 따라들어오는 숙순 등 8대신들을 모조리 체포해 숙청
하니 신유정변으로 서태후는 권력을 완벽히 틀어쥔후 동치(同治) 라는 새로운 연호를 지어 쓰도록 합니다.
서태후와 동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했으나 동태후는 정치에 눈이 어두웠기에 사실상의 권력자는
서태후였으니, 11월 1일부터 서태후가 자금성 양심전에서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황제가 성인이 되면 즉각 수렴청정을 중단할 것이라 단언했으나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부터 서태후는 매일같이 고관대작들을 불러 정사를 논의했으니 양궁 태후들이 내외비
를 낭독하고, 황태후들이 칙령 초안을 작성하면 두 황태후의 검토를 거쳐 직인을
찍는 식이었는데.... 서태후는 능수능란한 여걸로 마구잡이로 국정을 처리하진 않았습니다.
그녀는 관리들의 정책 비판도 타당하다 싶으면 수용하는 쪽이었고, 상벌을 엄격히 했으며 관리들
임명도 신경쓰는 편이었고 또한 역대 왕조에서 수렴청정한 여인들의 기록을 모아 그
경험과 교훈을 요약해 읽어보기도 했을 정도이며 같은 해 중국은 서구화와 근대화를 시작합니다.
정변으로 확고한 청나라의 1인자가 된 서태후는 혁흔과 함께 무너져가는 청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서양기술
을 도입하는 근대화 노력을 시작했으니.... 중국의 사상에 서구의 기술만을 도입하자는 '중체서용'
사상이 주를 이루었고, 양무파(洋務派) 는 완고한 지주 계급의 저항을 무릅쓰고 대대적인 개혁에 나섭니다.
서구 열강들과의 전쟁과 반란 진압에서 청나라 군대의 낙후함을 뼈저리게 느끼던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장지동 등의 인물들이 양무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니 이들은 서구의
발전한 무기를 도입해야 한다고 믿었고, 유럽의 강력한 함선과 총포 등을 들여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구의 기술이 연속적으로 도입되어 근대적인 은행, 우편 및 기타 인프라 시설들이
건설되었고, 외국어 인재 양성 기관인 경사동문관을 설치해, 유럽, 미국, 일본 등지로
수많은 유학생들을 파견했으니...... 이같은 청나라의 근대화 노력을 "양무운동" 이라고 부릅니다.
이홍장과 관리들은 중국 최초의 기선 회사이자 민간 기업인 '윤선초상국', 강남 제철소, 한양 제철소 등을
설립해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으니 1862년에는 중국 최초의 자체 설계 증기기관이 만들어져 중국
산업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고 동시에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등 3개의 대함대가 창설됩니다.
양무운동은 일시적으로 청나라 산업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불러왔고 이 중흥기를 '동치중흥 (同治中興)'
이라 부르는데, 1865년 일어난 염군의 반란은 셍게린첸의 만주 기병과 몽골 기병대의 공격을 받아
전멸당했으며, 좌종당과 이홍장이 근거지를 끝장내며 몇년간 지속되던 화북의 혼란을 종결지었는데
좌종당은 1862년부터 1878년까지 둥간의난, 야쿱 벡의 난을 진압하고 러시아로부터 일리 일대를 되찾습니다.
동치제는 성년이 된 이후 어머니 서태후로 부터 권력을 가지고 오려고 시도했으나, 고집 센 서태후가
이를 거부하자 실의에 빠져 향락과 여색에 탐닉하다가 1875년 죽었으니 광서제가 새 황제로
즉위했는데, 얼마 뒤인 1883년에는 프랑스가 청나라의 봉신국이던 베트남 응우옌 왕조를 침공합니다.
청나라와 베트남 국경에 군벌 유영복은 흑기군을 이끌고 프랑스에 맞서 싸웠으니 유영복은 그해 5월
하노이에서 프랑스군을 밀어붙였고 프랑스군 사령관 리비에르가 전사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프랑스가 증원군을 파병하자 베트남은 청에 공식 원군을 요청했으나 이홍장은 딱히
베트남에 손댈 생각이 없었기에 간명조약을 체결해 프랑스의 베트남 통치를 사실상 승인해버립니다.
그러나 간명 조약이 체결된 직후, 프랑스는 조약의 허점을 이용해 바로 청을 후려치니 푸저우의 마미
조선소에 폭격을 가해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뒤 복건함대를 모조리 수장시키자 청나라는
다시 프랑스와 재대결할 수밖에 없었으니 프랑스는 곧 랑선 지방을 점령했으며 광시성까지 위협합니다.
청나라는 몇 안되는 용장 풍자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광시성을 방비토록 했는데 풍자재는 의외로
분전하며 프랑스군을 꺾는데 성공했고, 흑기군과 힘을 합쳐 생각외로 우월한 교환비를 냈으니
프랑스에서는 패전의 가능성이 전해지자 충격받은 쥘 페리 총리 내각은 총사퇴 까지 했을 정도입니다.
이대로라면 은근히 괜찮은 결과를 낼 수도 있었겠지만..... 청나라 조정이 베트남을 포기하고 정전, 철병하라는
악수를 두면서 모든게 꼬여버렸으니, 1885년 여름 이홍장이 톈진조약을 맺어 조공국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버라는데, 청나라에서는 프랑스 보다는 동쪽
조선을 지키려고 일본과 싸우는게 승산이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남북에서 양면 전쟁은 무리니까?
프랑스와 전쟁후 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 청나라는 타이완을 성(省)으로 승격했지만
청나라 시련은 끝나지 않았는데, 영국이 1885년 미얀마 꼰바웅 왕조를 점령하니 청나라는 영국주재 외교관
증기택을 시켜 무단 침략에 항의했지만 이빨 빠진 호랑이 조차 되지 못한 청나라가 압도적인 국력 차의
영국을 꺾을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1886년에는 어쩔수 없이 영국의 미얀마 정복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서제 재위기에는 자연재해도 많이 일어났는데 광서 4년인 1875년에 하남, 섬서, 산서, 직예, 산동에 심각한
가뭄과 기근인 '정무기황 (丁戊奇荒)' 이 몰아닥쳤으니 특히 산시성에서는 1백만명이 굶어죽었고 개중
타이위안현에서만 95만명이 죽었으며 기근으로 죽은 청나라 백성은 950만 명에서 2,000만명에 이르렀습니다.
청나라 전체 인구 2~ 4%가 증발해버린 어마어마한 타격이었으며 2천만명의 난민들이 생겨났고 치안은
극도로 불안정해졌으니 중국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기근은 쉽게 보기 힘들어 230년만에 최악의
기근이라 칭했을 정도였는데 어찌나 상황이 심각하던지 서양 언론에서까지 다루었으니
뉴욕 타임스는 1876년 6월에 보도하며 청나라의 부패한 행정력과 낙후된 인프라에 책임을 돌립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887년 9월 30일에는 허난성 정저우에서 황하의 둑이 터져 상상을 초월하는
물이 쏟아져나왔고 200만명이 물에 휩쓸려 사망했으니 자연재해로 인한 인명피해
2위를 차지한 초대형 재해로 근대 중국을 넘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앙 중 하나로 꼽힙니다.
터진 둑의 입구는 100m에 가까이 넓어졌고 기존 황허의 흐름이 바뀔 정도였으며, 황허에서 나온 물이 인근
지아루강과 화허로 흘러들어갔고 허난, 안후이, 장쑤 3개성 20~ 30개 현이 물에 침수됐으니 청나라는
필사적으로 터진 둑을 틀어막았고 1889년에 성공적으로 치수를 완료하며 재앙은 일단락됐지만 둑을
재건하는데 무려 1,100만 냥의 은이 소요됐고 이는 청나라 1년 재정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거금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