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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둘레길 길동무 원문보기 글쓴이: 수명산
한남정맥종주 4구간 - 원적산ㆍ 만월산ㆍ성주산
일 자 : 2002년 4월 10일
구 간 : 경인고속도로 ~원적산 ~ 만월산 ~ 성주산 ~ 여우고개
도상거리 : 16km, 산행거리 : 7시간 30분
신기루처럼 나타나 쏜살같이 지나가며 진달래 꽃잎 떨구는 봄,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분명한 것은 도심 속에 가려져 있던 역사 속의 산줄기 한남정맥은 더 이상 추상이 아니라 살아 꿈틀대는 우리의 삶의 울타리였다. 경인고속도로를 통과한 정맥꾼들이 산줄기와 얽힌 수많은 사연들을 찾아 부평 땅에 들어선다.
부평은 예부터 인천지역과는 다른 권역으로 발전하여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주부토근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장제군으로, 고려시대에는 수주, 안남, 계양, 길주, 부평 등으로, 조선시대에는 역시 부평으로 불려진 곳이다.
08시 55분 달성 서씨 중 임진왜란 때 적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군의 묘소가 이곳에 있어 서씨들이 행세하게 되어 부르게 되었다는 산 이름을 딴 서달산길에서 마루금을 이어나간다. 능선에 붙으면서 아카시아 숲을 끼고 이어지는 정맥길 좌우로 울타리까지 쳐놓은 밭들이 차지하고 있다. 송전탑들이 줄줄이 나타나며 군데군데 통나무계단이다. 좌측 아래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기러기 떼가 많았다는 큰 웅덩이의 안하지...
능선분기점인 26번 송전탑과 돌탑이 서있는 봉이다. 정맥은 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각종 시설로 넓고 빤빤하게 되어버린 정맥길, 다시 고개를 돌려 좌측 아래를 보니, 60년대 음성 나환자를 집단 수용하여 양계업으로 생계를 유지토록 해서 양계 마을이라 불렀다는 옛 산골마을이었던 양계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인천을 통과하다보니 생각나는 게 있다. 50년대 입에서 입으로 불렸던 노래, 잠시 소개하고 넘어가자, “인천 해군 경비부 정문 앞에서 손수건 입에 물고 눈에 눈물로 여보세요 보초양반 면회시켜 주오...” 그리고 인천에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인천의 성냥공장이란 노래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이 불려졌었지, 6․25 이후 군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불린 애창곡 중 하나 였다.
삼각점이 있는 164.3봉에서 내려서며 만나는 배드민턴장과 휴식시설, 잠시 올라선 곳엔 철마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어지는 정맥은 돌길로 한차례 가파르게 올라선 곳이 원적산이다.
표지석과 삼각점이 있는 넓은 공터의 원적산이다. 원적산은 조선 시대 서해와 한강사이에 경인 운하를 파서 연결하려 했으나 주변의 산과 고개에 암석이 많아 끝내 실패하자 원한이 맺혔다하여 붙인 이름이란다. 서쪽 기슭에는 조선 시대 초에 세워졌다가 조선말기에 빈대가 많아 폐사 되었다는 원적사라는 절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단다.
휘둘러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특히 고층화된 아파트단지들, 좌측으로 뫼골마을이 보인다. 원적산의 한 가닥 줄기가 동쪽으로 흘러내리다가 이 마을에서 뭉쳐져 아름다운 동산을 이루며 마을이 생기니 뫼의 끝이란 뜻에서 뫼끝말이라 불렀다나...
삼각점이 있는 176봉에 오른다. 아직 엷은 황사와 안개가 가시지 않아 시야를 가리지만 정말 인천이 넓구나 생각이 든다. 좌측 아래로 한일 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골짜기는 생김새가 마치 성을 쌓아 놓은 형국이라서 성안골이라 하던 것이 양성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골짜기까지 밀고 들어온 주택들과 도시 자연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정맥은 너무나 황폐 되가는 듯하다.
거의 100여m 가량을 뚝 잘라놓은 절개지를 내려와 폭 20m의 6차선도로의 원적산길에 내려선다. 부평구 산곡동과 서구 가좌동을 가르는 이 고개를 철마산 관통도로라 부른다고 한다. 신호를 기다려 횡단보도를 가로지르고 새사미아파트로 들어서면서 오른쪽으로 절개지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가파르게 오른다.
삼각점과 깃대가 서있는 165m의 철마산에 오른다. 역시 막힘이 없어 조망을 즐길 수 있다. 이어지는 정맥은 키 작은 솔밭 사이로 진달래가 꽃잎을 떨구고 있다. 우측으로 가좌동인 건지골을 내려다본다. 옛날 이곳 한 작은 마을에 물이 말라 버린 연못에 가재가 많았다나, 그리고 고려 때 이 연못에서 큰 가재 한 마리가 나와 마을 이름을 가재올이라 불렀는데 한편으로는 마른 우물이 있던 곳이라 해서 건지골(건지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산불지역이다. 나무들의 시체가 애처롭다. 이어 좌우로 내려설 수 있는 십자로 안부 이곳이 장고개 같다. 5일장에 간 아버지를 기다리던 고개라 하여 장고개라 불렀다고 전해오고 또 마장뜰의 끝이라 장끝고개라 붙여졌다는데 원적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내려 호봉산으로 이어지며 그 맞닿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고개 동쪽 밑에 한 20호의 마을이 있어 이를 장끝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끝마을 너머로 현재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옛 모습은 볼 수가 없지만 일본군 포병대가 있던 곳이라 해서 부르는 병참, 장고개를 지나 군부대 철조망과 과수원 사이로 정맥길은 이어간다. 이어 만나는 쉼터에는 사랑게시판이 설치되어 있다.
마을주민들이 이야기로 꽃피우고 있는 쉼터 삼거리인 송전탑이 있는 능선분기점이다. 연이어 넓은 산책길로 변한 정맥길은 송전탑이 서있는 봉을 넘는다. 좌측에 있는 도시 자연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호봉산을 바라보며 내려서면서 만나는 비포장길...
산곡동과 십정동을 넘나들던 구르지고개라는데 확인할 수는 없다. 계단길을 오른다. 송전탑과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120봉을 통과한다. 봄비가 내리더니 정맥엔 어느새 완연한 초록세상이다. 신록에 함성이 골짝을 메우고 능선으로 울러 퍼지고 있다. 키 작은 갈참나무와 떡갈나무 숲, 다시 만나는 능선분기점에서 내려서면서 멀리 만월산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6차선 도로 경원로인 십정동고개에 내려선 정맥꾼들은 횡단보도를 건너 우측으로 백운공원을 끼고 2차선도로를 따라 이어나간다. 이곳이 정맥능선인줄 꿈에도 모르고 60년도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을 시작으로 늘 통과하던 경인선철도 위로 육교가 설치되어있다.
경인 철도 백운역에서 서쪽 동암역 사이의 고개를 열우물 고개라 하는데 이 고개 너머 산 중턱에 현재도 마을 형태가 남아있는 벽촌 마을은 혼자서 며칠간이면 우물을 팔 수 있어 몇 집 안 되는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모두 우물을 파서 한 마을에 우물이 열 개도 넘어 열우물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대동우물이 있어 물량이 많고 아무리 추워도 물이 따뜻하여 열이 나는 우물이라 해서 열우물이라 했다고도 한다. 육교 끝지점에서 정맥은 왼쪽으로 계단길을 오른다. 입산금지 현수막과 연두색 울타리, 오른쪽으로 출입문을 통과하며 능선에 붙는다.
첫 봉에 오르고 연이어 산불초소와 넓은 공터가 있는 봉(11:00)을 넘는다. 우측으로 바짝 접근한 아파트 단지, 정맥은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서는데 온통 황토색으로 변한 능선에는 경작하지 말라는 경고판이 설치되어 있다.
지저분한 솔밭길에 나지막한 봉을 넘으면서 쓰러져있는 철망 울타리를 통과하며 내려선 곳은 의외로 출입문이 굳게 잠겨있는 고물수집상 앞마당 이였고 개 한 마리가 요란하게 짖어 대는 민가를 빠져나오면서 확인하니 안타깝게도 정양사가 정맥을 가로막고 있다.
경인로인 46번 국도에 내려선다. 원통이 고개라고 부르는 이 고개는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주 교통로였다. 이 고개의 본래 이름은 원통현으로 두 가지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조선 건국당시 부평평야를 새 도읍지로 선정하려고 골짜기를 세어보니 당시의 풍수설에 의하면 나라의 도읍지가 되려면 적어도 산골짜기가 100개가되어야 하는데 99골짜기뿐이라서 도읍지가 되지 못하여 원통하게 되었다 하여 원통이고개라 하였고, 다른 하나는 조선 중기에 김안노가 경인운하 공사를 할 때, 당시의 토목기술로는 이 원통의 고개의 암벽을 파내지 못해 공사를 중지했기 때문에 원통하다 하여 원통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나...
정맥은 횡단보도를 건너 팬더아파트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다가 능선에 붙는다. 하얀 산불초소를 통과하면서 한차례 가파르게 오른다. 이어 만나는 이정표(부평삼거리, 약산사), 약산사는 중학생 였을 때 소풍 온 기억이 새롭다. 그 때도 하얗게 벚꽃이 만발했었지...
쉼터의 그늘집이 있는 봉에 오르면서 뒤돌아보는 정맥능선, 이어 아기자기한 돌길을 따라 진달래 곱게 피어있는 바윗길을 올라선 곳이 삼각점이 있는 만월산(△187m) 정상이다. 조금 내려선 곳엔 만월정이란 팔각정이 있다.
만월산은 토질이 붉고 산의 형상이 기러기가 나는 형상이라 하여 주안산 이라고도 불렸다고 하며 동쪽에서 만월을 바라본다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 만월산이다. 이 산에 전해오는 전설로는 주안산 중턱에 주안사지가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제9 불자조에 의하면 주안사 재주안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주안사의 창건 연대는 확실치가 않으며, 이 절은 약 150년 전까지 남아있던 법당의 건물이 당시의 주지가 선행을 하지 않고 나쁜 짓과 말을 하였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뱀이 나타나서 이 절을 망쳐놓았다는 전설이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일본 중이 나와서 주안산 줄기에 산의 기운을 죽이는 부적을 붙였다는 부적바위가 있다고 한다. 주중인데도 많은 인근주민들로 길을 메우고 있다.
바람이 능선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정표(만월정, 만월산약수터, 부평농장)를 통과하고 이어 올라선 156봉인 산불감시초소와 송신탑이 있는 봉에서 허기를 메운다. 항상 만찬을 준비하는 김수남씨, 우린 모두 정맥에 미친 사람들이야...
중식을 끝내고 내려서며 다시 만나는 이정표, 부평농장 쪽으로 나무계단을 따라 한차례 내려선 곳이 부평삼거리와 구월동을 잇는 2차선 도로인 구산로다. 정맥의 줄기는 옹벽위로 높게 설치한 안전망으로 가로막혀있어 한참을 돌아 내려섰다가 올라서야 하고 SK 농장주유소가 있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능선에 붙으면서 지금까지 넓은 등산로를 달려왔는데...
나지막한 봉을 올라서는 길은 지저분하고 잡목숲을 헤쳐야 하고, 문이 잠겨있는 빈집 한 채가 능선을 차지하고 있다. 연이어 공장지대와 만월산터널건설현장 사무소를 뒤로 봉우리를 올랐다가 내려서며 만나는 콘크리트포장길, 이 길이 부평공설공동묘지 외곽도로다. 넓게 차지하고 있는 공동묘지, 정맥은 일방도로인 콘크리트도로를 따라 이어나간다.
정맥은 쉼터직전 능선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능선에 붙는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며 송전탑을 겨냥하며 나간다. 능선 좌측에는 군 경고판이 자주 정맥꾼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학교림을 가리키는 입간판을 지나며 만나는 봉우리가 성지문화사에서 발행한 1:30,000 도로지도에 광학산(201m)으로 되어 있는 세 번째 철마산이다.
이산을 이곳 사람들은 만수산이라고도 한다. 동쪽이 옛날 비루왕국의 비루가 넘었다는 비루고개, 서쪽은 만수동, 남쪽은 장수동, 북쪽은 일신동으로 만수산 아래 마을이 장수촌이며, 수명이 만수 한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 같다.
능선분기점인 철마산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정맥능선은 한동안 원형의 가시철망을 따라 이어진다. 꽃잎을 떨구는 진달래, 깃대가 서있는 봉을 통과한다. 이정표를 만나고 곧이어 우측으로 만수동을 가리키는 갈림길이다.
옛날부터 인천은 장수하는 곳이라 이름이 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헌종 원년에 인천에 100세 노인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평균 연령이 40여세 였으니 보통사람의 두 배 이상을 산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인천에는 장수하는 노인이 많은데, 특히 만수동 지역이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동명에 오래 삶을 나타내는 숫자가 들어 있다나...
깃대가 있는 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잘게 깬 자갈이 갈려있다. 비포장도로에 내려섰다가 능선에 붙고 다시 내려서는 비포장길, 부대철조망이 가로막는다. 왼쪽으로 철조망을 따라 이어나간다. 부대 안에서 젊은 장교가 출입금지구역이며 위험하니 뒤돌아가라고 종용하지만 눈 딱 감고 통과를 한다.
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이후 정맥길을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까 막게 모르고 있었다. 정맥은 용봉산인 170봉에서 왼쪽으로 수현마을 앞 도로를 내려섰다가 비루고개를 가로질러야 하는데 젊은 장교가 막는대도 굳이 고집을 부리며 통과하고 내려선 2차선 도로(보세이고개) 여기서 잠시 들어섰던 능선에서 다시 내려와 오른쪽으로 엉뚱한 곳으로 점점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누가 산행을 인생사와 흡사하다고 했나, 자칫 한 발짝의 실수가 거머리산(123m)을 넘었고 다시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고 되돌아 와 보니 벌써 50여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변명 같지만 디지털카메라를 준비하고는 사진을 찍을라. 녹음기에 녹음할라 앞사람 놓치지 않으려고 정말 힘께나 든다. 어떨 때는 무엇 때문에 이 짓을 하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어떻든 간에 되돌아와 잡목숲을 헤치고 비루고개(14:20)와 인접한 도로에 내려서지만 여기서 정맥꾼들은 정맥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개판 1분전이 되어버렸다. 비루고개는 별고개라고도 부르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조 인조(임오년) 1642년 중국 사신이 서울에 특사로 왔다가 궁중에 머무는 동안 조선공주와 사랑을 하게 되었단다.
이 사신은 공주와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할 날이 되어 서로 이별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사신이 한양에서 새벽에 귀국 길에 올라 본산(현 수산동) 뱃터에서 중국가는 배를 타려고 할 때, 궁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공주가 몰래 궁궐을 빠져나와 중국사신을 따라 가려다가 나라의 법이 엄하여 눈물을 흘리며 별래현까지 특사를 배웅하였는데 이 두 사람이 이 고개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게 되어 이 곳을 별류현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후 별류현이 별고개, 성현, 박촌으로 부르게 되었다나...
별고개에 대한 또 다른 유래는 이 고개를 비루가 넘어 문학산에 미추홀 왕국을 세웠다고 해서 비류고개라고도 하며 백제시대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가족과 이별한 고개라 하여 별이고개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맥꾼들도 또 하나의 추억거리를 만들고 말았다.
다행이 한남정맥에서 처음으로 합류한 조삼국선배와 둘은 조선배가 준비한 자료를 확인하며 송전탑을 겨냥하여 오르고 이어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왼쪽으로 나있는 굴다리를 통과한다.
서울외곽도속도로가 통과하는 이고개를 이조 중종 때 권신 김안노가 굴포천을 개굴하다 원통현의 암반으로 좌절하고 다시 물줄기를 돌려 안하지고개와 무네미고개를 파 보았는데, 모두 지하에 암반이 깔려 실패로 끝나고, 이 때, 이 고개로 물을 넘긴다하여 물넘이고개라 한 것이 무네미고개로 부르게 되었다.
서울외곽순환도로를 뒤로 능선에 붙으면서 길고 지루한 훈련교장을 통과하며 올라선 곳이 210m(지도상에는 205.6m)의 거망산이다다. 군부대 철조망가로 작은 공터의 정상에는 묘지목이 서있다. 철조망 안에 봉을 이루고 있는 거마산은 산의 모양이 마치 큰 말과 같다 하여 붙여졌다는데 장수천의 발원지이며 이조 말 산이 깊고 험하여 도둑들의 소굴이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이 거망산은...
부천시에 접어든다.복사꽃이 많이 피는 고을이다하여 복사골이라 부르는 부천, 부천에 복숭아나무가 처음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 때인 1900년대 초였으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1903년 인천역장을 지낸 일본사람 다케하라가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1925년 경부터는 재배면적이 크게 늘어 부천의 복숭아는 이 때부터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성주산을 바라보며 7분 정도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내려서는 정맥길은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다. 지도상에 와우고개로 표기되어 있는 포장도로는 군부대 정문으로 고갯마루를 벗어나 있고, 군인아파트와 소신여객 6번 시내버스 종점인 듯 정류장에는 버스 한 대가 출발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잠시 내려서다가 오른쪽으로 산길로 들어서면서 곱게 피어있는 개나리,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며 오르다가 만나는 철조망, 정맥은 성주산 정상까지 철조망을 따라 길게 이어나간다.
성주산(217m) 정상 아닌 정상이다.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하고있고, 성주산에서 오를 수 있는 제일 높은 곳이니 정상이랄 수밖에, 부천시와 시흥시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부천의 주산으로 와우산이라 부르다가 일제 때부터 성주산이라고 표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가 앉아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나....
잠시 초병인 젊은 군인들과 산줄기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준다. 소래산으로 갈라지는 능선분기점에서 정맥은 왼쪽이다. 완만하게 내려서는 길은 마치 고속도로를 벗어나 항로 같다고나 할까... 조금 내려선 곳에 이정표( 소래산, 심곡본동, 하우고개)가 서있고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서다 만나는 체육시설이 있는 쉼터, 정자와 구름다리가 놓여있는 하우고개다.
하우고개는 조선시대 시흥 뱀내장에서 김포 황어장으로 가던 유일한 길인 하우고개는 장꾼들의 추억이 어린 곳이란다. 산의 형태인 와우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란 설과 의성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그리고 산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의 하우고개.
통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다가 이정표(산불감시탑, 여우고개)를 만나면서 오른쪽으로 팍 꺾으며 내려서면서 보니 뾰쪽한 소래산이 정겹게 다가온다. 군데군데 산벚꽃들이 만개되어 있는 완만한 능선길, 140봉 능선분기점이다. 이정표(소사본동, 여우고개)를 통과하면서 아카시아 숲길이다. 다시 갈림길을 만나면서 여우고개를 가리키는 이정표는 표기가 잘못되어있다. 정맥은 한미목장 쪽인 직선길을 따라 가다가 통나무계단을 내려선 곳이 여우고개다.
39번 국도가 지나는 부천시와 시흥시를 가르는 여우고개다. 벚꽃이 아름다운 여우고개는 한자로 여우(如牛)고개라 한 것으로 보아 산의 형세가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이므로 소와 같다하여 여우고개라 했다는 설과 여우는 여위다에서 변화된 것으로 보아 여윈고개 즉 좁고 작은 고개라는 뜻이 있는 고개인데, 이 고개는 호현이라고도 하며 이곳에 나무가 많고 후미진 곳이어서 여우가 많이 출현하였다 하여 붙여진 뜻하며 예전에 여우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실패한 종주였지만 산이 가르쳐준 교훈, 힘들었던 시간도 지금 이 시간 소중하고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첫댓글 잠시들러 좋은 정보와 함께 구경 잘하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