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안의 각설이, 그가 또 왔습니다. 타령이 생각보다 길어져 내게도 지루합니다. 쪽박 들고 걸어온 먼길, 그 구비를 돌 때 마다 묻혀진 먼지가 이리 많은가 봅니다. 오늘도 걸어 내가 이른 곳의 주소입니다. 떼거리로 몰려온 각설이들에게 줄 밥이 있어도 타령은 끝까지 들어 주시던 옛날의 우리 어머니도 이제는 방에서 주무십니다. 그러니 타령도 식은 밥도 일 없다 싶으신 분들, 괜찮습니다, 그냥 넘겨 주세요 ^^
꿍따리 유랑단, 그들의 삶의 이야기에서 사람의 어여쁨과 장함을 보았다.
아름다운 것은 저렇게 아름답구나. 사람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나도 하나의 사람이다. 저들처럼 아름다울 수 있는, 혹은 이미 아름다운 사람이다. 아니다 니는 멀었다 이렇게 한참 그네를 타다가 문득 살인 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 출 20 :3) 이 떠올라 원어 성경을 열어 본다.
살인이라 번역된 단어 ' 라짜흐' 는 산산조각으로 ‘부수다', ‘죽이다’, 특별히 '살인하다’'처형하다, '죽이다', ' 살생하다'를 의미한단다. 특별한 경우에만 '살인하지 마라'로 번역되고 일반으로 직역하면 '죽이지 마라' '부수지 마라' ' 처형하지 마라' '살생하지 마라' 로 읽힌단다. 너무나 익숙햐게 들어왔던 이 계명의 본래적 의미가 인간인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뜻으로만 해석 되어 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새로운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역시 그런거 였나 싶다. 이 구절의 번역 상태를 보니 KJV를 비롯한 많은 영어 성경들은 원어의 느낌을 살려 THOU SHALT NOT KILL. 로 번역하고 있는데 나름의 정확성을 주장하는 한국어판 KJV를 포함한 모든 한국어 성경들엔 하나같이 '살인하지 말라'로 되어 있다.
그럼 사람이란 무엇일까 ? 항상 그리 귀하고 아름답기만 한 건가. 내 안팎 많은 곳에서 내가 사람인 것이 부끄럽고 짐스러운 순간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답을 찾아 이리저리 성경과 사전을 넘겨 보지만 점점 복잡해 지는 생각이 온 땅을 돌고 하늘을 넘어 끝도 없는 우주 밖에서 미아가 된다.
생각을 몰아 다시 나의 땅으로 내려온다.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렸으므로 :
- 멀쩡한 사람 앞에 앉혀 놓고, 사람 속에 들어 앉아서, 사람을 지 속에 품고 앉아서 워째 구만리 장천을 헤매인다냐 ? 산사람 비켜 놓고 왠 죽은 문자덜에 삽질이다냐 ?
그래도 출발은 TEXT로 부터 해야지유 ~ 지는 여적지두 그것 없인 꼼짝 못혀유, 안헐래유우 ~
- 그래 ? 그러든지 그럼. 그런데 네가 언제부터 성경을 알았더라 ?
12 살 부텀유.
- 그럼 12살 전엔 식물인간이었냐 ?
아뉴우 ~ 월매나 잘 뛰어 놀았는디유우
- TEXT 도 없이 워쩧게 그리 잘 뛰어 댕겼냐
긍께 그게 다아 죄 놀음이었지유우. 낭중에 모다 회개 했구먼유우. 아시잖어유우.
- 그랳나 ? 그럼 12살 이후나 20살 이후엔 날라 댕겼겠네 ?
아니어유우. 그냥 살살 기었세유우.
- 왜 ? 길 안내 TEXT는 워쩌구 ?
그거이 쪼매 무서워서유우. TEXT 가라사대 옆길에 낭떠러지가 있대니께 떨어져 뿐지 깨비 활개를 칠 수 가 있어얘지유우.
- 그러니까 살라구 주어진 성경으로 되려 널 죽여 왔다는 거냐 ? 생각 해봐라. 12살 이전과 그 이후의 네 삶을. 어느 곳에 생명이 있었지 ?
...
- TEXT는 그런 것이 아니여. 네가 오해하고 잘못 적용 했구만. 그것은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퍼렇게 살아 있고 살리는 것이다. 이 세상 어느 한 사람도 TEXT 없이 세상에 던져 진 이는 없다. 네가 경으로부터 출발하겠다면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것의 문자엔 시공의 때가 많이 묻어 있음을 기억해라. 안그래도 그래서 원어 성경을 보고 있다고 ? 아니다 얘야. 네가 알듯이 원어 정본도 아직 없거니와, 네가 설사 사도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직접 들어도 마찬가지다. 너와 그들 사이의 육신의 벽 그것은 그대로 거기에 있다. 시공의 때 그것은 주 예수와 너 사이에도, 아니, 심지어 너의 인식과 영혼 사이에 조차 벽으로 존재한다. 영원의 진리는 시공이나 혹은 그에 따라 변해온 겉의 문자에 묶이지 않는다. 문자 이면으로 흐르는 메세지를 캐내 보라. 불에 닿으면 타 없어질 책, 그것을 읽는다 해도 정수의 진리를 알 수는 없다. 너는 그 안에서 그저 네가 아는 것 만을 읽을 수 있으리라. 경의 기록은 지금 네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네게 확인 시켜 줄 뿐이다. 그렇다고 멈추라는 것은 아니야. 그래도 가라고 네가 가고 싶은 길로. 가다가 피로써 알아진 것들을 통해 결국 진정한 TEXT가 무엇인지, 녹슬지 않고 때 묻지 않는 영생의 말씀이 무엇인지 너는 직접 살과 피로 알게 되리라. 죽어 거룩히 박제된 사자보다 차라리 천방지축이라도 살아 숨쉬는 개를 따라가라.
나는 개와 함께 사는 나의 사람을 찾아 나의 에덴으로 내려 온다. 어둠도 있고 빛도 있다. 때 따라 보이는 짐승들이 다르다. 밤낮 시간에 맞춰 육식의 포악한 야행성 짐승들과 유순하여 내가 보기에 어여뿐 눈물 많은 초식 동물들이 뛰어 논다. 그래, 반쪽짜리 동산은 동산이 아니지. 아름다움도 추함도 유순함도 포악함도 동산의 모습이다. 그것을 그런 모양으로 지으시고 내 생각과는 달리 모두 좋았더라 하시는 이가 계심을 기억한다. 바람 따라 시절 따라 바뀌는 내 입맛 내 판단으로 섣불리 동산에 불 지르지 말자.
내가 죽이지 말고 살려 줘야 할 대상은 누구지 ? 내 안애서 쉽게 살의를 불러 일으키는 존재들, 홍수로 날아간 가인도 막지 못하여 내게로 유전 되어버린 살인자의 피를 들끓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사자를 먹이는 소인가. 소 잡는 사자인가. 부셔 버려선 안되는 그것이 무엇인가. 날마다 죽노라며 바울이 시시때때로 십자가에 매단 놈은 또 누구인가. 십자가에서 행해지는 것도 죽임인데. 하늘도 둘, 나무도 둘이더니, 사람도 둘, 죽음도 둘이구나... 그것들이 하나로 모아져 빛이 되야 하는 거죠?
어쨓건, 꿍따리 유랑단을 통해 본 사람의 모습은 강물과 같은 흐름이었다. 기쁨과 보람 넘치는 삶을 행한 소망이고 의지었다. 부서진 먼지로부터 떨치고 일어서는 용기가 사람이었다. 먼지가 뭉쳐져 두발로 서고 결국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는 것 그것이 사람이고 하나님의 전능이었다.
허나 일전에 본 김길태도 사람이다. 사람은 벽돌로 한곳에 머물지 않고 바람으로 불다가 강물로 흐른다.
살인에도 종류가 많다. 지나 가는 사람 돌로 쳐죽이기. 저 사람 모자라다 불쌍하다 손가락질하며 쯧쯧거리기. 그러나 무엇보다 괴로운 건 에덴 동산, 내 안과 밖에 펼쳐진 다양한 생명의 모습들을 분별하고 심판하여 내 멋대로 장애로 판정하고 짓밟아 뭉개는 거다. 나무되기 글른 떡잎 가려내고, 헛되 뵈는 희망의 싹도 잘라내고 그렇게 돌로 가두는 것이다. 새로부터 하늘을 빼앗는 것이다. 나든 너든 이제는 끝이다, 안된다 부정으로 외면하고 심판하여 하나의 존재인 삶의 욕구를 지옥 보내는 거 그것이 살인이고, 살인은 결국 하나님을, 그분의 아름다움을 죽이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모습인 사람이 어찌 우리네 인간의 형상으로만 그려져 있을까. 유대인의 선민 의식이나 인간만의 존엄성 의식이나 모두 하나의 근원 무지로부터 왔다. 너와 나를 가르는 무지로부터.
인간만이 존엄하다면서도, 이미 온전한 나를 장애로 판단하고 빙벽을 올라라한다. 온전이 거하는 저 산위로 가라 한다. 꿍따라 유랑단은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나는 이미 온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빙벽을 올라야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셔도 부서질 수 없는 나는 이대로 온전하므로 내가 즐거이 원하는 빙벽을 나는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단지 땀의 연습이 필요할 뿐이다. 십자가에 매달 놈은 게으름이구나. 해서 각자 속에서 우러나오는 삶에의 소망을 따라 날아 오른다. 무너진 하늘 아래에서 솟아날 바늘 구멍을 찾아 낸 낙타처럼.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들 속에서 사람으로 일 하시는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인 꿍따리 그들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에덴 밖에서 최초로 일어났던 그 살인이 지금 나의 동산, 내 안의 근원 밖, 짐승 가죽 내 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금 뿐 아니라 예전에도 그랳다. 골짜기 마다 살인의 추억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아기들을 죽여 던졌나. 그 추억들이 지금도 내 가슴을 오려내는 것은 그것들이 아직도 지나간 과거사가 아니기 때문인가.
하지만 전능한 나는 일어나 명령한다. 불어라 바람아, 지금도 흐르는 비린내 나는 피의 강물을 말려라. 저지른 모든 살인들을 추억으로 돌리고 나 이 강을 건너 꿍따리 유랑단과 함께 나의 하늘로 나아 간다.
첫댓글 꿍따리 유랑단을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것 같아요. 저는 TV 에서 봤어요. 클론의 멤버였던 강원래씨가 단장인 독특한 유랑단입니다. 대단한 예술적 능력을 가졌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신체적 장애를 갖게된 다양한 분들이 모여 전국을 돌며 그들만의 감동적 공연을 펼치는 극단입니다. 올 공연은 8월로 마감 됐나봐요. 세계적 극단으로 크는게 꿈이래요. 저는 내년에 기회가 되면 가보고 싶네요.
가나안 입성시에 하나님은 거기 생육하던 짐승들을 일시에 없애시지 않았고 이는 거기 들어가는 그 백성들에 대한 배려에서 였다고 합니다. 갑자기 다 없애버리면 황량함을 감당 못할까봐 서서히 몰아 내셨다고 하는...요즘들은 기괴한 취미로 이상한 파충류까지 끼고 비비고 사는 동물 애호가들이 느는 추세이고 보면 인간이 문명이 개화되었다하여 거기서 쉼을 얻는 것이 아니요 차라리 개네들하고 교제하는게 낫기에 ..들 그러는게 아닌가 합니다, 세상과 만나는 꿍따리 유랑단원들의 스토리에서 짠한 의지를 느꼈습니다. 짐승들이 나서서 반려자가 되어 외로움을 달래며 사는 인간 상태가 참...사람끼리 뭐가 소통이 안되니깐..
..그러지 싶습니다. 직접보라!는 선각의 충고가 생각나게 합니다. "안된다 부정으로 외면하고 심판하여 하나의 존재인 삶의 욕구를 지옥 보내는 거 그것이 살인" 이라는 말씀에 동감입니다. 모든 삶의 충동들은 마침내 힘이 들어가지 않은 민들레의 가벼움으로 승화되어 우리네 삶의 동산은 건강한 생태계로 유지되고 가끔 마실가서 서로의 정원에 드리워진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이 새로운 창조 앞에 경이로운 신비함을 느끼리라 예감해 봅니다. 살인의 추억들은 마침내 개혁되어 살려내는 현실로 우리들을 위로 올라가게 하기만을...
그런 유랑단이 있었군요~ 님의 유랑단 단상을 읽으면서 상념에 젖어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