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의 설화 · 민요
이 고장에는 자연물에 관한 설화, 지명전설, 사찰연기설화, 풍수설화 등이 전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풍수사(風水師)의 묘지설화」 · 「우물터의 은행나무전설」 · 「곡성바위전설」 · 「아기장수설화」 · 「부내복종(府內福鍾)의 명당이야기」 등이다. 「풍수사의 묘지설화」는 옛날 어느 풍수사가 세 아들을 불러놓고 자기가 죽거든 마을 동쪽에 있는 연못에 수장(水葬)을 하여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차마 아버지의 시신을 수장할 수 없어 토장(土葬)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막내 아들이 형들 몰래 석관(石棺)을 만들어 아버지의 유해를 유언대로 연못에 수장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수장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막내 아들은 정승이 되었다고 한다. 「우물터의 은행나무전설」은 500여 년 전의 일이라 한다. 어느 날 장항읍에 있는 전망산(前望山) 기슭의 어느 우물에 중이 나타나 물을 얻어 마시다 우물물에 끌려 들어가 빠져죽고 말았다. 사람들이 우물을 메우고 장사를 지내주었더니 며칠 후 그곳에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나와 쑥쑥 자랐다. 점을 쳐보니 중의 장삼에 은행이 들어 있어 그것이 싹이 난 것이라고 하였다. 은행나무가 고목이 되고 그 속에 큰 구멍이 났는데 한밤중에 작은 아이가 나막신을 신고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전한다.
현재에도 병이 나면 그 환자의 밥그릇을 나무 부근에 버리는데, 그렇게 하면 병이 바로 낫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나뭇가지를 베면 마을에 질병이 돌고, 잎이 무성한 해에는 풍년이 들며, 잎이 무성하지 않은 해에는 흉년이 든다고 한다. 「곡성바위전설」은 다음과 같다. 서천역에서 서쪽으로 4㎞ 쯤 가면 마서면 한성리가 있고, 그 한성리 해변 갈목촌에는 가난한 어부가 딸을 데리고 살았다. 어느 날 어부가 파도에 밀려 부상을 입자 대신 딸이 배를 타고 나갔다가 물에 빠져죽었다. 그 날이 음력 8월 15일이었다. 그 뒤부터 8월 15일이 되면 갈목촌 앞바다에 없던 바위가 물 위로 솟아오르면서 처량한 여인의 곡성이 들린다고 전한다. 「아기장수설화」는 비인의 월명산 4층바위에 얽힌 이야기로, 옛날에 늦도록 자식을 두지 못한 부부가 월명산 아래에서 백일기도 끝에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 용골대 · 망골대라고 이름을 붙여 두 아들을 정성껏 키웠는데 무척 빨리 자라서 몇 개월 만에 칼싸움을 할 정도였다. 어느 날 두 아들이 잠든 사이 자세히 살펴본 부부는 겨드랑이 밑에 날개가 있음을 발견하고 역적이 될까 두려워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두 아들이 언덕 밑에서 놀고 있을 때 돌을 굴렸는데 망골대만이 돌에 깔려 죽고 용골대는 그 길로 집을 나가 중국으로 건너가 청나라 장수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용골대는 인조를 무릎 꿇린 장수가 되었고 그 부모는 그 소식을 듣고 월명산에 숨어 있다 죽고 말았다. 4층바위는 용골대 형제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바위로 높이가 4층이나 된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
「부내복종의 명당이야기」는 종천면 종천리의 들이 부내복종의 명당자리라는 이야기이다. 조선 때 청나라에 간 사신 하나가 청나라 도학자로부터 명당의 지도가 그려진 부채를 선물로 받았다. 금싸라기 석 되가 나온다는 명당이 그려진 부채를 가지고 바다를 건너오던 사신은 바람결에 부채를 바다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얼마 후 종천을 지나다가 부채 속의 명당자리를 생각하고 땅을 파보았으나 금싸라기는 나오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이지함(李之菡)이 종천에 와 백일기도 끝에 현몽한 산신령의 계시대로 명당을 찾아 지장풀로 표시를 해두었다. 표시를 해둔 것에 노한 산신령은 그 일대의 지장풀을 모두 묶어버려 결국 이지함도 부내복종의 명당 터를 찾지 못하고 말았으며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다. 이 밖에도 죽산의 삼형제바위에 얽힌 「효자설화」, 부자간의 사랑이 얽힌 「유부도(有父島) · 유자도(有子島)전설」, 중이 죽은 뒤에 자라났다는 「전마산 은행나무설화」 등이 전한다. 이 고장에 전래되는 민요는 기능요가 중심이며 다른 지방에 비해 그 양이 매우 적다. 농업노동요로는 논농사 노래가 주로 불리는데 각 작업과정마다 노래가 있다. 「모내기노래」는 “에헤이 어허여라 상사듸요/ 노다가소 자다나 가소/ 저달이 떴다지거든 노다나가소/ 어허여라 상사듸요.”라고 하기도 하고, 간혹 사설에 “헤에당상 가래로세”라는 어업노동요인 「고기푸는 노래」의 뒷소리가 섞이기도 한다.
「지슴매는 노래」는 「모내기노래」의 사설과 넘나드나 “아하 하아 하여/ 어허 어어 어허/ 에헤이여 이여으여/ 으헤헤.”와 같이 풍부한 여음으로 불린다. “에헤여/ 아가달가 우지마라/ 어하에이/ 검불 걷어서 군불 땐다/ 에허야 나는 좋네/ 어허야 나는 좋네.”라고 부르는 「벼타작노래」는 「바심노래」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농업노동요는 대부분이 작업장에서 선후창 방식으로 불리나 현재는 농업기계화 추세로 차츰 기능을 잃고 있다. 이밖에도 어린이들이 새를 보면서 부르는 「새쫓는 노래」, 부녀자들이 여러 가지 노동을 하면서 부르는 「시집살이노래」 들이 있으나 이것 역시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어업노동요는 서면 마량리에서 다양하고 희귀한 것들이 약간 불린다. 「노젓는 노래」나 「그물당기는 노래」는 여음 위주의 선후창 방식으로 불리는데 별 특징이 없다. 「고기푸는 노래」는 ‘에이야 슬비야’나 ‘에이야 가래야’와 같은 뒷소리를 사용하는 평범한 것이나 “……선주네 아주머니/ 열두폭치마가/ 열두폭치마가 나왔다/ 술동이를/ 뒤짚어이고/ 걸어오다가/ 오작오작/ 걸어오다가/ 넘어졌으니/ 우습구나.”라는 재미있는 앞소리로 부르기도 한다. 배가 출항하기 전에 배를 깨끗이 닦으면서 “(앞) 어이야 이여자자/ (뒤) 어이야/ (앞) 물퍼부어라/ (뒤) 어이야/ (앞) 여기도붓고/ (뒤) 어이야/ (앞) 저기도붓고……”와 같이 선후창으로 부르는 「배 닦는 노래」나 ‘에여─ 다려라’를 선후창으로 반복하는 「그물싣는 노래」는 이 지방에서나 들을 수 있는 독특한 노래들이다.
의식요로는 장례의식요인 「상여노래」가 “(앞) 인자가면 원제나 오실련/ 오실렴어(려면) 일러주오/ (뒤) 헤헤이 헤어 헤어/ 에허 이이허 허이어……”라 불리는데 앞소리도 여음으로만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밖에도 비기능요로 「댕기타령」 · 「사랑타령」 · 「범벅타령」 등이 불리고 「낙낙새」 · 「메뚜기」 · 「풍뎅이」 등의 동물을 소재로 한 동요와 유희요 등이 불린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10-2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