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누군가 울고 있다 [제2편]
지금 어디선가 울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데
그 사람은 나 때문에 울고 있다.
지금 어디선가 웃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까닭 없이 웃고 있는데
그 사람은 나 때문에 웃고 있다.
지금 어디선가 걷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정처 없이 걷고 있는데
그 사람은 나에게로 오고 있다.
지금 어디선가 죽어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까닭 없이 죽고 있는데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엄숙한 시간」 전문
시인만큼 모순에 찬 존재는 찾아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시인들은 늙으면서 젊고, 지혜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보스럽다.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없는 척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늘 과도한 관심을 퍼붓는다.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때 묻은 어른이고 동시에 천진한 아이다.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크고, 가장 무능하면서도 가장 유능하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거부한다. 사물들의 작은 변화에 깜짝 놀라면서도 항상 태연하다. “나는 육체의 시인이다./또 나는 영혼의 시인이다./천국의 기쁨이 나와 함께하며, 지옥의 고통이 나와 함께한다/나는 최초의 것을 나 자신에게 접목시키고 점점 더 증가시키고……이후의 것을 새로운 언어로 번역한다.” 시인들은 분열과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분열과 모순으로 대응하며 그것을 태연하게 수용하고 견딘다. 한 위대한 선각의 통찰에 따르면, 이들 창조하는 자의 뛰어남은 타인의 고통과 비참에 대한 비범한 공감 능력에서 비롯한다. 시인은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나 때문에 울고 있다.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나 때문에 웃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시인들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하며 가장 늦게까지 울고, 세상의 고통과 비참의 원인에 자신이 연루되었다고 믿으며, 그것에 대한 통렬한 윤리적 책임감을 뼛속까지 새기는 자다.
시인은 세상의 모든 “영혼의 갈망과 입맛에 응답하는 겸손한 자다.” 시인은 영원 앞에서 자신을 개방하는 자다. 아니, 영원함이 시인에게 스스로 개방하는 것이다. 이것이 위대한 시인으로 나아가는 전제 조건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 영원함이, 모든 시대와 지역과 과정, 생명체와 비생명체에 유사성을 부여한 시간의 구속이며, 그 알 수 없는 막막함과 오늘의 유영하는 형태 속의 무한함에서 일어나 인생의 유순한 닻에 묶여 현재의 시점을 과거로부터 앞으로 존재할 것들로의 길로 만들어 스스로 한 시간의 파도와 이 파도를 이루는 60명의 아름다운 아이들의 흐름을 표현하는 것에 헌신하는 그 영원함이 열려 있지 않다면, 그를 일반적인 흐름에 통합시켜 그의 발전을 기다리자……” 우리는 시인을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은 예감과 전조들로 채운 시간이다. 기다림은 기다림의 보람이 다 무산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릴 때까지 기다림이 기다리는 시간들을 다 삼킬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시인과 시는 오직 기약없는 기다림 속에서 도래한다.
장석주 「은유의 힘」
2024. 3. 21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