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조가 신(안숭선)에게 이르기를, '전조[고려]로부터 5백년을 내려오면서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풍습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고, 혹 전임(前任)수령이 전에 있던 고을을 지나면, 향리(鄕吏)가 관복을 갖추어 전송하고 맞이하여, 당시[고려]의 그 풍속의 후함이 이와 같았는데, 지금[조선]은 그렇지 아니하여 시임 수령이 조그마한 혐의가 있어도 도리어 고소를 더하여 그 허물을 들추고, 심한 자는 그들의 수령을 욕하니... 소신의 말을 듣지 않으시니, 다른 날 반드시 후회하실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세종실록 52권, 세종 13년 6월 14일 병오 4번째기사』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옛날 고려 전성기에 동서 여진(女眞)의 무리와 글안(契丹)·발해(渤海)의 인민들이 계속 투항 귀순해 온 것은 모두가 위엄과 덕망(威德)의 소치였으며, 역대의 군왕도 그 성의를 권장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능히 양계(兩界)의 땅을 확장시키고 나아가서는 옛날 숙신(肅愼)의 봉강(封疆)까지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저 파저강 일대의 작은 종자들은 비록 중국의 작호(爵號)를 띠고 있으나... 사실상 중국에 매여 있는 사람에 불과하고, 글안(契丹)·발해(渤海)의 인민과 더불어 비할 바는 아닙니다."
『세종실록 73권, 세종 18년 윤6월 19일 계미 2번째기사』
"양성지가 이르기를... 신이 전조[前朝: 고려]를 보건대, 원(元)나라를 섬긴 뒤에도 살례탑(撒禮塔)·차라대(車羅大)·홍다구(洪茶丘)의 침략하는 군사가 없는 해가 없었사오니, 이것들은 예절과 신의로써 상대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모름지기 (고려처럼) 한번 대승(大勝)하여야 옳을 것이옵니다. 저들이 우리의 병력이 서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후에야 감히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여 봉강(封疆)을 가히 지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