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괴로운 밤에
사형을 받은 날의 최후진술서처럼
하얗고 아득한 원고지가 놓여 있다
밤은 어둡고 별은 시리고
나는 혼자고 지구는 적막이다
눈보라 치는 흰 설원 길에서
가슴에 품어온 불씨 같은 시를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다
이런 시대에 시가
무얼 할 수 있을까
한때는 세상을 바꾸진 못해도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시를 쓰노라 위안했건만
내가 나에게 쓰는 시가
나 하나의 독자인 시가
무슨 부질없는 짓인가
그래도 나는 쓴다
그날의 최후진술처럼
무력한 시를 쓴다
우체통에서 먼지를 쓴 채
받아줄 이 없이 수거되는
편지 같은 시를 쓴다
다들 명석한 자기 확신의 시대에
그들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하고
흩어지는 눈보라 같은 시를 쓴다
그러나 이 밤의 지구에 누군가
흔들리고 고뇌하고 서성이며
간절하게 빛을 찾는 사람이 있어
미약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있어
흰 설원의 백지 위에
고요한 몸부림으로
피를 찍어 쓴다
이런 시대에 시를 쓰는 건
고독하고 괴로운 일이나
아직 나에게는
백 병의 잉크를 채울 만한
심장의 피가 남아 있으니
비명 같은 말들을
모조리 사르고 정화시켜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말로
최후의 유언처럼 쓴다
그러니 시여
나를 두고 너는 가라
강인하게 살아남아서
네가 꼭 만나야 할 그대의
상처 난 가슴에 피어나라
너의 길을 가라
시여
빛의 시여
피로 쓴 시여
-
박노해
카페 게시글
물통(시모음)
시가 괴로운 밤에 - 박노해
푸렁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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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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