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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봉준호 감독, sf, 한국, 126분, 2013년
남들은 아니래도 내게 설국열차는 봉준호 감독다운 영화다. 서사적 힘과 섬세한 디테일, 그리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봉준호 감독은 홍상수과 김기덕 감독에 비하면 더욱 특별하다. 그의 영화는 흡사 복잡한 프라모델을 완성하듯 짜여져 있다. 점점 거대자본이 필요해지는 것도 이런 특색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는 복잡한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 같다. 속전속결하는 홍상수 감독과 김기덕 감독이 영화를 찍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임한다. 그런 점에서 장인정신을 갖춘 영화감독이라고 부를만하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가볍게 보아지지 않은 매력이 있다.
하지만 뭐랄까? 나는 봉준호 감독을 잘 만드는 괜찮은 감독으로 인정은 하지만, 대가에 올려놓기에는 항상 뭔가가 아쉬웠다. 메시지 때문일까? 괴물이나 설국열차가 사회에 대한 좋은 우화는 될지언정 속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봉준호 감독은 손쉬운 결론을 유보한다. 아니 결론에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이 다소 상투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매력은 장인정신에서 나오며 영화의 대중성은 물론, 어처구니없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응시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영화는 모순 가득한 사회에 대한 우화이다. 설국열차도 그런 경우다. 꼬리칸에서의 반란은 곧 역사에서 반복되어온 혁명의 전형이다. 하지만 성공한 혁명치고 독재로 귀결되고 계급화 되지 않은 경우란 없었다. 근대의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 점에 대해 봉준호 감독은 열차의 자급자족 순환시스템을 위한 주기적 인구정리의 방식으로 혁명을 용인하는 지배자와, 그 모순과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자의 타협, 즉 악과 타협한 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역사와 사회에는 근원적 모순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감독은 낭만적 아나키스트이기도 하다. 결국 구제불능의 열차를 폭파하고 새로운 인류의 삶을 사는 게 낫다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가의 절망과 죽음은 결국 열차로서는 희망이 없다는 결론 아니겠는가?
한편으로 봉준호 감독이 사회의 모순에만 민감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의 심리적 갈등과 모순에 같은 비중으로 민감하다. 그의 관심은 이중구속과 모순상황이다. 검은 두건을 하고 무기를 든 진압부대와 반란인의 전투장면은 느리게 묘사된다. 그 속에서 주인공은 모순과 혼란의 극에 빠져 있고, 관객도 모순에 처한 채 죽여야 사는 전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봉준호의 매력은 이런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지도자 커티스가 동생의 죽음과 기차 2인자의 채포 사이에 갈등하다가 동생 대신 적을 택하는 장면도 그렇다. 봉준호 감독에게 모순에 처한 인간의 상황이야말로 관심인 것 같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모순의 푸가이다.
= 시놉시스 =
새로운 빙하기, 그리고 설국 17년
인류 마지막 생존지역 <설국열차>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기차 한 대가 끝없이 궤도를 달리고 있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빈민굴 같은 맨 뒤쪽의 꼬리칸, 그리고 선택된 사람들이 술과 마약까지 즐기며 호화로운 객실을 뒹굴고 있는 앞쪽칸. 열차 안의 세상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17년 째, 꼬리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긴 세월 준비해 온 폭동을 일으킨다. 기차의 심장인 엔진을 장악, 꼬리칸을 해방시키고 마침내 기차 전체를 해방 시키기 위해 절대권력자 윌포드가 도사리고 있는 맨 앞쪽 엔진칸을 향해 질주하는 커티스와 꼬리칸 사람들. 그들 앞에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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