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항구의 동춘 끝을 지나고
해명 나루 지나고
작은 통통배
용화산 뒤편을 휘돌아 가니
첫개라는 어촌이 있었다
인가가 몇 채나 되는지 희미해진 기억
푸른 보석 같은 물빛만은
지금도 눈에 어린다
친지 집에서는 내가 왔다고
큰 가마솥 그득히 홍합을 삶아 내어
둘러앉아서 까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던 홍합
그때처럼 맛있는 홍합은
이후 먹어 본 적이 없다
내 나이 열두 살이나 되었을까?
어린 손님은
큰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잠은 작은집에서 잤는데
아제씨는 어장에 가고 없었다
호리낭창한 미인 형의 아지매는
병색이 짙어 보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두런거리는 소리가 났다
집 안에 불이 밝혀지고
발자욱 소리도 들려왔다
덩달아 파도 소리도 들려왔다
알고 보니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것
날이 밝고 보다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폐결핵인 아지매의 약으로
고양이 새끼의 탯줄이 필요했고
아지매는 고양이를 달래고 달래어
탯줄을 얻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다행이냐고도 했다
첫개라는 어촌의 하룻밤
홍합과 아지매와 고양이
얼마 후 나는
아제씨가 상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중에서-----
경남 남해안에 자리 잡은 통영은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이 통합되어 통영시가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거가대로를 경유하면 편리하게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26년 12월 2일(음력 10월 28일) 경상남도 충무시(지금의 통영)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박금이.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김행도 씨와 결혼해서 이듬해 딸 김영주를 낳았다. 1950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가정과를 졸업한 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6.25 전쟁통에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가 죽고, 연이어 세 살 난 아들을 잃게 된다. 이후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부터 한국현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대하소설 「토지」연재를 시작하여, 1994년 8월 집필 26년 만에 「토지」전체를 탈고하였다.
1980년 지금의 박경리문학공원 자리인 원주시 단구동 742번지에 정착하여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1992년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소설창작론을 강의하였고, 1995년 같은 대학교 객원교수로 임용되었다.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창립하고, 이어서 1999년 토지문화관을 개관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토지문화관은 문학인들에게 창작공간을 제공하고, 다양한 학술 문화 행사를 기획, 개최해 왔다. 2008년 5월 5일 폐암으로 타계하여 고향인 통영시에 안장되었다.
박경리 선생님께서 마지막 거주하시던 원주의 집을 방문하여 한참동안 머무셨던 책상과 침실 주방을 천천히 보았습니다.
달력이 2008년 5월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고향 통영을 찾아 홍합을 드셨던 그리고 아지매와의 슬픈 사연이
긴 여운을 남기는군요.
비록 흐린 주말이지만,
여유롭고 평온한 날 되시길 빕니다.
=적토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