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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의 〈노예 의지에 관하여〉 읽기
1.
아들아, 코로나19 사태로 온 세상이 마치 가라앉는 듯, 사라지는 듯한 시련의 시기를 보내고 있구나. 이 와중에 너는 전보다 더 독일어와 철학 공부에 매진하는 것 같더라. 외부 세계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너의 글은 회를 거듭할 때마다 발전하는, 그야말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것 같다. 퍼트남의 《이성, 진리, 역사》를 지금 네 나이 즈음에 읽다가 관두었는데, 그때 네 글을 먼저 읽었다면 훨씬 수월했겠다 싶더구나.
무엇보다 ‘합리적 수용 가능성’이 함축하는 모순, 즉 수용되지 않은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너의 탁월한 주장에 십분 동의한다. 권력과 폭력, 재력에 의한 위계질서를 상정하지 않는 진리 이해는 현실 체제를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고 말아. 합리적으로 각각의 의견이 고루 반영된 결정이라 하더라도, 이미 그 이면에 강자, 시쳇말로 말빨 좋은 자들의 입, 주먹깨나 쓰는 자들의 힘, 가진 사람들의 돈의 위력이 위세를 떨쳤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거든.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가 그런 사람이었다. 마르틴 루터와의 자유의지 논쟁에서 그가 신학의 정치성이랄까 사회적 맥락을 도외시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번에 내가 얘기하려는 자유의 문제도 관계라는 조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치 사회적 환경을 제외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지. 설사 그것이 순수 철학이고 인문학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일체의 관념은 물적 토대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해. 그럼 그 이야기를 해볼까.
2.
희림아, 이 논쟁은 학문도 사람의 됨됨이와 뗄 수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단다. 성격은 온화하고, 정치적으로는 온건하고, 신학적으로는 중도인 에라스무스는 모든 주장에 대해 늘 거리를 두고 의심하지. 스스럼없이 자신을 ‘회의주의자’라고 밝혀. 루터는 기질적으로 화끈하기 그지없고, 조증과 울증을 왔다 갔다 하는 종잡기 어려운 사내였고.
히틀러 연설 영상을 볼라치면,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곤 해. 루터가 설교할 때 저렇지 않았을까? 에라스무스에게 “이 책과 비교해 볼 때 당신의 책은 미안하지만 매우 천박하고 싸구려 같다. 그와 같은 쓰레기 같은 책”(147쪽)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야. 이러니 에라스무스는 질려서 나가 떨어졌을 게 뻔해. 잠자는 시간을 빼고 스무 시간을 읽고 쓰고 교정하는 일로 보내고, 외부의 시련이 닥치면 책 속으로 숨어드는 이 사람에게는 루터와 그 시대 자체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세상이었을 거야.
네덜란드 신학자 헤이코 오베르만은 루터를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인간’이라고 했는데, 따지고 보면 루터는 하나님과 악마 양쪽과 투쟁했었어. 숨어계신 하나님, 보이는 것으로 축소할 수 없는 하나님의 뒷모습 또는 이면으로 인해 얍복강 나루터의 야곱처럼 하나님과 다부진 씨름을 벌였지. 그러고 보면 진정한 신학함에는 기도와 묵상뿐 아니라 시련 또는 고난이 필수적이야.
동시에 (루터 자신도 포함하여) 인간 안의 악마적 모습, 가톨릭으로 대변되는 전통과 체제, 제도 안에 내재된 악마들, 그 자신보다 너무 멀리 나아가서 오히려 두려운 신비주의자들과 아나뱁티스트들 안에서 악마를 보았고, 몸서리치며 싸우고 또 싸울 수밖에. 남보다 빨리, 깊이, 오래 보고, 자주 보았다. 그러니 거친 쟁투를 마다할 수 없었고, 괴물과 싸우는 사이에 그 안의 마성적 본능이 튀어나왔을 거야.
두 사람과 흡사한 경우가 바울과 바울의 스승 가말리엘 아닐까 해. 바울은 한때 광적인 신앙과 광기 어린 폭력을 자행했었지. 스데반의 순교에 앞장섰거나 강력한 지지자이었고, 그의 서신에서 ‘저주’의 말을 종종 읽는 것도 그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 바울은 ‘진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라고 완강하게 주장할 거야. 자기 존재 전부를 판돈으로 내걸지 않는다면, 그가 보기에는 장난이거나 인생을 너무 가볍게 사는 가여운 자들인 게지.
반면, 사도행전 5장의 가말리엘은 에라스무스를 너무 닮았어.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온 사도들을 심문하는 자리에서 그는 아주 나지막하게 말하지. “이 사람들의 이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망할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소. 도리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봐 두렵소.”(행 5:38-39, 새번역)
저기에 가말리엘을 지우고 에라스무스를 집어넣어도 쉽사리 눈치 채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에라스무스는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도와 중용을 추구해. 어떤 것에도 영혼을 다해서, 진심을 다해서 확고하게 진리라고 말하기를 꺼려하지. 바울과 루터가 진리를 위해 생사를 걸어야 한다고 할 때, 가말리엘과 에라스무스는 그들이 진리를 거칠고 과도하게 말한다고 여기며 움찔 뒤로 물러서는 셈이야.
에라스무스는 루터에게 너무 지나치지 말라고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말을 건네지. 루터가 주장을 조금 완화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순수하게 학문적 논쟁을 촉발한 것이었어. 그래서 대화와 토론을 하자는 의미로 ‘담론’(diatribe)이라는 용어를 제목에 붙였고. 이에 루터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Here I stand)라고 외치던 그 결기 그대로 타오르는 불같이 확고부동한 주장(453쪽)을 한단다.
3.
논쟁의 포문을 연 에라스무스의 입장을 보자. 그는 루터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노예의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한 발언에 대해 굉장히 우려했다고 해. 루터가 가톨릭의 공로주의와 율법주의를 시대의 핵심 의제로 삼은 반면,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가톨릭 양쪽의 극단주의를 경계하지. “지금 세상을 뒤흔드는 천둥 번개가 발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과장된 견해의 갈등에 기인합니다.”(142쪽)
그가 보기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고 그 주인이 누구이든 노예로서 갖는 의지밖에 없다면, 그것은 첫째, 성서의 가르침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것이고, 둘째, 인간의 악함을 너무 과도하게 부풀린 것이지. 그리고 셋째, 신론에 있어서 하나님이 악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떠맡을 공산이 커진다는 거야. 인간이 선을 선택할 (칸트가 말한 대로)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없고, 책임이 없다면 죄를 물을 수 없고, 결국 도덕과 윤리는 완벽하게 증발하고 말지. 에라스무스는 성서론, 인간론, 신론 또는 신정론의 측면에서 루터가 생각을 순화해주길 원했지.
루터도 절대 양보할 수 없었어. 자존심 문제만은 아니거든. 그의 신학적 주적은 가톨릭주의, 즉 공로 사상, 공적주의였어. 인간의 행위 중 적어도 일부분이 구원에 효력을 미친다는 가르침이 교회를 부패시켰고, 교황의 절대무오를 낳았다고 본 거지. 인간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네가 퍼트남을 비판한 것처럼, 좀 더 많이 가진 자, 많이 아는 자의 입지가 공고해지고 말아.
그러니까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에서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면서 싸우고자 했던 공로 사상을 보았고, 자칫하면 그 사상이 개혁 운동 진영에까지 파고들 일말의 가능성을 민감하게 느꼈던 거야. 그렇게 되면 개혁 운동이 수포로 돌아갈 공산이 컸기 때문에, 루터는 심할 정도로 인간이 선한 일을 할 수 없다고 외치는 거지. 인간의 공로 사상이 또다시 교황의 절대 권력을 행사할 빌미를 제공하니까.
그런 점에서 내가 보기에 에라스무스는 순수한 건지, 아니면 순진한 건지 아쉬움이 들어. 개혁 운동이 한창 전개되는 상황에서 앞장서 싸우는 루터의 신학을 정조준한다는 것은, 에라스무스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루터의 종교개혁을 약화할 가능성이 다분하지 않았겠니.
4.
이제 아빠는 두터운 책 전체를 다루기보다 ‘신적 필연성’에 집중하려 해. 하나님의 필연성과, 인간의 의지와 상반성에 대한 논변 말이야. 그밖에 예지와 예정의 상관성이라든가, 우연과 필연, 그리고 이 의제와 관련된 신구약성서 곳곳에 흩어져 있는 본문들에 대한 루터의 해석은 건너뛸까 해. 우리 대화와 지면에도 버거울 테니까.
개혁자 루터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분명하게 인정한단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선택하는 일체의 것들에 자유로운 행위를 한다는 거야. A와 B라는 최소한 둘 이상의 선택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고를 수 있으며, 그에 따른 책임도 오롯이 그에게 있다는 거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신의 주권과 필연을 강조한들 인간은 말 그대로 개돼지에 다를 바 없겠지. 그저 본능에 충실한 동물 말이야. 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동물과 견주어 볼 때 본능적 욕망에 제한을 받지만 절대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 아니겠니. 이것을 라인홀드 니버가 말한 자기 초월성이라고 해도 되겠지. 이를 확보하는 수단이 철학자는 이성, 신학자는 이성과 함께 은총이라고 할 테지만.
루터는 하나님의 필연성을 ‘강제적 필연성’과 ‘불변의 필연성’ 두 가지로 구분해(196쪽). 강제적이란 것은 마치 목덜미를 움켜쥔 채 억지로 끌고 가는 거야. “만약 의지가 강제를 받는다면, 그것은 의지가 아닐 것이다.”(198쪽) 필연성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폭력적인 신론이 되고, 무기력한 인간이 되고, 책임질 수 없는 윤리가 되고 말아. 오히려 “강제는 무의지”(198쪽)의 다른 이름일 테니까.
나는 하나님의 의지가 비강제적이라는 주장을 열렬히 환호한단다. 니그렌의 《아가페와 에로스》를 읽고 나눈 대화에서 이미 말했던 거야. 사랑이란 자신의 의지를 사랑하는 대상에게 강청할지언정 강요하진 않아. 상대방이 나의 사랑을 받아주기를 바라지만, 그 사랑을 거절할 권리와 자유가 그에게 있다는 점도 인정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사랑이신 까닭은 우리 인간이 당신의 사랑을 냉담하게 거절하고 심지어는 십자가의 반역을 저지를 자유마저도 허용하셨다는 것이지. 그 연장선에서 하나님의 의지도 비강제적이라는 결론을 얻게 돼.
헌데, 비강제를 비폭력으로 좀 더 밀고나가는 건 어떨까? 그렇다고 물렁물렁하진 않아. 신의 필연은 비강제적이지만 불변한다는 점에서 기필코 관철되는 것이거든. 강제하지 않는다면, 신은 어떻게 당신의 의지로 세상을 만들어가고 고쳐나가는 걸까? 그것은 인간의 행위를 골똘히 관찰하면 알게 돼. 무릇 인간이란 남이 시키는 일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안달이지. 일시적으로는 외부 압력에 굴하고 따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이 이끌리는 것을 하고 말잖니.
마침 하려던 일도 누군가 그걸 시키면 싫다고 돌아서는 게 사람 심리 아니겠니. 그래서 하려던 일, 원하는 일을 끝내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인간 편에서 보면 “자발적으로 준비된 의지를 갖고”(197쪽) 행동한다는 것이고, 신의 입장에서는 불변의 필연성인 것이지.
5.
그런 점에서 루터는 인간에게 자유의지의 ‘유무’가 아니라 실제로 자유의지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 그 ‘정도’ 또는 ‘수준’을 따져 보자는 거지.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수많은 인문 사회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제 아무리 그럴 듯하게 역설하고 증명해도, 한갓 ‘관념 속의 돈’(칸트)이요, ‘상상 속의 자유’(루터)에 불과해. 그런 자유가 무슨 소용 있겠니.
에라스무스가 보기에, 성서 곳곳에 인간을 향한 신의 명령이 부지기수로 널려 있어. 그는 인간이 제 스스로 선택할 수 없고, 결정할 수 없고, 실제로 행할 능력이 없다면, 왜 힘을 다하라는 말을 성경이 했겠냐며, “행위에 대한 여지가 없는 곳에, 형벌이나 보상은 없”(115쪽)다고 단언해. 그렇기에 신의 은총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요구한단다.
에라스무스의 생각에 동의하는 나로선 사실 루터가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더구나. 루터의 말을 직접 들어볼까. “모세가 ‘선택하라’고 해서 인간들은 그것을 선택했는가?”(262쪽) 모세오경을 비롯한 구약 전체는 목이 곧은 백성들의 지치지도 않는 불순종의 역사다. 선택하라고 해서 하나님의 의지에 부합한 것을 선택했다면, 창세기 3장은 아예 쓰이지 않았을 것이고, 가룟 유다의 배반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급소를 찌르지. “내가 이미 말했던 것처럼, 당신이 하는 말들은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262쪽) 루터는 거창한 당위와 무력한 존재를 구분하지 않는 에라스무스를 답답해한다.
그러므로 인간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고 해도 선택하지 않아. 제 욕망을 따라 움직이지. 신학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간단히 순종했다면 성령의 역할은 축소될 것이고, 애당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지. 그래서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논증에는 그리스도가 설 자리가 없다(161쪽)고 한 거지.
6.
아들아, 내가 지금까지 에라스무스에 가까운 생각을 했다는 것, 이제는 개종에 가까운 생각의 전향을 했단다. 어떻게 설명하든 간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동시에 설명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무턱대고 인간이 자유롭다고만 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공허한 외침일 뿐이라는 점을 숙고하게 되었어.
그러면서 예전부터 품었던 의문이 풀리는 계기가 되었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파스칼의 《팡세》를 읽으면서 가졌던 것인데, 두 사람은 ‘습관’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사용하더라. 루터도 다르지 않고. 아빠 혼자 인덱스를 만들어볼까 생각도 했다. 하나님에 이르는, 하나님에 다다르는 여정에서 몸에 밴 습관이 그토록 중요할까?
그걸 전통적인 언어로는 ‘죄성’, 현대에서는 ‘중독’, 무난하게는 ‘습관’인 거고. 구원론에서의 노예 의지론이 아빠 생각에는 뇌과학으로 말하면 ‘뇌’라는 신체 조건의 한계에 기인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는 거야. 뇌과학 연구의 결론과 루터의 노예 의지론이 잘 연결된다는 거지. 어쩌면 내가 우겨넣은 것일지도.
인간의 의식이 뇌와 직결된다는 결정적 사례가 ‘피니어스 게이지’(Phineas Gage, 1823-1860) 사건이야. 미국 철도 공사 감독관인 게이지는 우연한 폭발 사고로 쇠막대가 얼굴을 뚫고 뇌를 관통하는 사고를 당해. 그 뒤로, 전에는 그토록 성실하고 유능했던 게이지가 몸은 그대로인데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괴팍하기 그지없는 성격으로 바뀌고 말아. 변덕이 죽 끓듯 하고 고집도 세지고 말이야.
과학자들은 뇌의 특정 부위가 인격, 의식, 영혼 등 뭐라고 명명하든 간에 그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어. 다시 말해,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무언가를 욕망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알고 보면 뇌라는 신체의 특정 기관에서 일어난 일의 외적 발현이라는 거야.
그런데 의식, 자유와 같은 고차원적인 기능들은 뇌/육체라는 자리(locus)에서 생겨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야. 비물질적 사유와 언어가 물질 없이 발생할 수 없지만, 물질적인 것으로 축소될 수는 없다는 얘기지. 뉴런을 아무리 조사하고 연구한들, DNA를 탐구하고 탐사한들 언어와 사랑, 사유가 나올 수 있을까?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동일한 조직과 구조의 뉴런과 DNA와 염기서열에서 왜 다른 언어와 관점이 나오는 걸까?
루터의 글에서 참으로 기이한 대목을 보았어. 인간은 영, 혼, 육으로 이루어진 전인적 존재인 동시에 전적으로 육체라는 주장이었어. 종교적 의미의 육체이지만 그 신체가 영적인 것도 규정한다는 거지. 그는 딱 잘라 말해. “인간이 단 하나의 부분이나 가장 뛰어난 부분 또는 지배적인 부분이 육이라는 사실, 아니 전인적인 인간이 육”(372쪽)이다. 하나님의 영이 없이는 인간은 결코 육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
그래서인지 루터는 인간은 마치 주인 없는 짐승 같다는 비유(198쪽)를 들어. 고삐를 누가 잡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거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래서 비강제적 필연성으로 이끄는 주인을 만난 동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는 거지. 사탄이 올라탄다면, 사탄의 의지가 곧 자기 것이 되고, 자신이 선택하는 바는 그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사탄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가 되는 거지.
인간의 의식과 자유는 뇌라는 신체, 물질이라는 하부구조가 선차적으로 존재해야 가능한 것이지만, 그것이 동물적 욕망에 따른 결정이 아니라 신의 절대 은총에 의해 거듭날 때 인간은 동물적 본성으로부터 자유롭고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게 루터의 결론이야.
인간은 자유한가? 자유하지 않아. 자기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글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어둔 카페에서 특정 회사의 담배를 피우며 모 회사의 커피를 마시는 것이 개인의 자율적인 선택이라고 믿지만 그것은 환상이라는 거지. 그것은 광고와 홍보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거지. 어떤 것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난 나만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결정일 수 없어. 인간은 신체라는 존재, 그리고 사회라는 관계 안에서 자유롭다는 거야. 개인적 차원에서 자유를 말한다면, ‘신체적 한계 안에서의 자유’이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관계적 한계 안에서의 자유’를 지니고 있어.
7.
그러고 보니 글쓰기라는 것도 마찬가지구나. 분량의 한계 안에서 글을 쓰는 거니까 말이야. 요청받은 분량에 맞추어 쓰는 게 실력이고 모자라거나 넘치게 쓰는 건 실력 부족이지. 축구든 권투든 주어진 시간과 정해진 룰 안에서 경기를 해야 하는 법이지. 끝나는 벨이 울렸는데도 링 밖에서 주먹을 휘두르면 폭력이지. 패배는 기본이고, 심한 경우에는 선수 자격도 박탈당할 거야.
아빠의 글이 지면과 분량의 한계를 자꾸 벗어날 것만 같아 여기서 마무리해야겠구나. 네가 어떤 텍스트를 선택할지, 그 텍스트가 말하는 자유와 그에 대한 네 생각은 어떨지 궁금해하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너의 글을 기다린다. 무엇보다도 우리 건강하자.
김기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