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주묘엄, 제망중중의 스승님들
10월 화엄법회는 긴 추석 연휴 한 중간에 있었다. 마침 유튜브 염화실TV 화엄경은 전날 81권 보현행원품까지 다 읽으셔서 3년만에 화엄경 일독이 끝났다.
10월 화엄법회에 가려고 문수선원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안에서 다시 시작하는 화엄경 세주묘엄품의 첫장을 들었다.
“두 번째 화엄경 공부를 이렇게 여러분들과 유튜브를 통해서 또 방송하게 되니까 이런 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어디에도 없는 일을 이렇게 하니 제가 흥분해서 말도 왔다 갔다 하고 입에 침이 튀고 그렇습니다. 모두들 이해하시고 아 저 스님 오늘 두 번째 강의한다고 너무 흥분했나 그렇게 아시기 바랍니다.”
기쁨이 고스란히 큰스님의 음성 위에 실렸다.
모든 것이 충만하고 모든 것이 새로웠다.
*
회장스님이신 정오스님과 재무스님이신 대선스님을 만나 화엄전에 인사가기로 했다.
*
“오늘 저희 은사 스님 49재여서 불국사 주변에는 차량이 얼마나 많은지 골목 골목마다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쪽은 내려오다 보니 한가하더라고요. 한쪽이 붐비면 한쪽이 한가한 것은 정해진 이치죠.”
법회 전에 회장스님이 대중스님들께 말씀하셨다.
*
화엄전에서 큰스님께서는 도수치료 중이셔서 회장스님만 방에 들어가셔서 인사하셨다.
회장스님은 <불교상용의식해설>이라는 책을 우천 이성운 거사님과 함께 엮으셨다고 했다. 지난번에 내신 <예식의궤>의 해설판이라고 하셔서 얼른 청해서 한 권 받았다.
앞서 발간되었던 <예식의궤>에서도 지적하셨던 잘못 행해지는 의례문을 ‘올바르게 바로잡기 위한 논의의 시작, 장기적으로는 개정의 토대가 되길 바란다’라고 <법보신문>에 실린 기사문도 나중에 보내주셨다.
*
용학스님이 QR코드를 설명해 주시다가 구글 렌즈를 다운받으라고 하셨다.
“구글 렌즈가 내시경이예요. 안을 보는 렌즈, 네이버 렌즈도 그렇거든. 그게 제7식이라고, 저 안에 저장이 되어 있잖아요. 근데 안에 저장된 것을 이 눈으로는 못 보니까 눈을 돌려서 안으로 봐야해요.”
“눈을 감고 나의 형상을 생각해 보세요. 보이죠?”
우리에게도 이미 그런 눈이 있다는 걸 간단한 실험으로 보여주셨다.
의욕이 넘쳐서 이런 이치를 빨리 배우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할까 여쭤보았다.
“가장 고요한 게 뭘까? 가장 고요한 것은 시끄러운 데서 조용할 수 있는 사람이죠.”
참선을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 같았다.
*
이 글을 쓰는 10월 25일 아침, 유튜브 화엄법회에서 큰스님께서 힌트를 주셨다.
“화엄행자 여러분, 부처님의 법문으로써, 화엄경 한구절 한구절을 음미하고 생각하고 사경함으로써 뜨거운 번뇌의 열기를 식힙시다. 우리에게는 화엄경의 무기가 있습니다. 춥던 마음은 따뜻해지고 더운 마음은 시원하게 해주는 것이 부처님 법문입니다.”
책장을 넘기기가 아깝다 하시면서도 세주묘엄품이 벌써 4권으로 들어섰다.
다시 읽어보니 모든 좋은 게송이 세주묘엄품 속에 다 들어있다고 하셨다. ‘부처님은 복전이요 공덕의 바다다’ 경전의 이 말씀은 마중물이고 그것을 깊이 새기고 사유를 한다면 실질적인 내 공부가 된다고 하셨다.
*
매일 아침 8시, 유튜브 염화실TV를 접속하고, 언제나 새롭게 우리를 기다리시는 스승님께 삼배를 올리고, 법문을 기다리는 도반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 문득, 스스로가 매일 아침 대중의 힘으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아버렸다.
*
정오스님이 주신 책 59페이지에는 ‘지극한 마음으로, 화엄의 끝회 오십삼 제위 선지식과 일생에 능히 광겁의 과를 원만히 한 선재동자’부터 시작하여 ‘홀로 닦은 성인 내지 천이백 제대아라한 성중의 시방삼세 제망중중의 무진해회의 상주일체 스님들께 머리 숙여 공양합니다’라는 본문이 나오고 ‘이렇게 대승과 초기 불교의 성현들을 일일이 일곱 부류로 나누어 공양을 올린다’라고 하면서 설명이 이어져 있었다.
그다음 줄, ‘유원 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차공양’ 여기에 밑줄을 그었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반갑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품이 여래출현품이다.
화엄경을 인과로 나누면 오주인과(五周因果)가 있다.
소신인과(所信因果) 차별인과(差別因果) 평등인과(平等因果) 성행인과(成行因果) 증입인과(證入因果) 이 다섯 가지다.
또 화엄경을 4분으로 나눴을 때는 거과권락생신분(擧果勸樂生信分) 수인계과생해분(修因契果生解分) 탁법진수성행분(托法進修成行分) 의인증입성덕분(依人證入成德分)으로 나눈다.
1회차 여섯 품의 설법을 흔히 소신인과(所信因果) 믿을 바의 대상에 대한 인과라고 한다. 부처님의 인이 무엇이고, 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부처님의 의보와 정보를 낱낱이 잘 설명해 놓았다. 신해행증(信解行證)으로 본다면 1회차 설법을 신(信)이라 하고 거과권락생신분(擧果勸樂生信分)이라고 한다.
2회차에서부터 7회차까지의 설법은 오주인과중에 차별인과주와 평등인과주다. 이 부분을 수인계과생해분(修因契果生解分)이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7회차 법문까지 오는 동안 차별인과 법문은 다 배웠고 이제 평등인과를 공부하고 있다.
원만한 평등인과주에서 평등인은 보현행품이 되고 평등과는 여래출현품이 된다.
오늘 공부하는 부분들은 이치, 진리, 여래, 여래출현에 대해서 극명하게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래의 신업이 뭐다, 구업이 뭐다, 하는 내용들 다음으로 의업으로서 그중 제8번째를 공부한다. ‘과연 평등과는 무엇인가’를 공부하는 입장이다.
평등한 과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 마음 자체가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는 것이다. 절대평등, 무차별이 평등이지 않는가. 그것이 화엄의 일심(一心)이다. 같은 말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절대평등을 여래(如來)라고 한다. 그것을 잘 나타내는 부분이 평등인과주이고 여래출현품이 여기에 속한다.
소신인과, 차별인과, 평등인과를 지나면서 여래가 출현했으면 반드시 바깥으로 실현해서 보현행원을 세속에 심어나가야 된다. 그런 방편을 이세간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세간품은 행(行)을 이룬다고 해서 성행인과주(成行因果周) 또 4분 중에 탁법진수성행분(托法進修成行分)이라고 한다.
이세간품 다음으로 마지막 입법계품은 의인증입성덕분(依人證入成德分)이고 증입인과주(證入因果周)라고 한다.
*
오늘 공부할 부분과 지난 시간에 공부했던 부분들에는 익숙한 부분들이 많으실 것이다.
금강경을 읽다가도 만났거나, 화엄경 입법계품에서도 보아서 익숙한 구절들이 나온다. 사실 익숙해서 익숙한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절대평등의 진리를 잘 나타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하고 수월하게 잘 들리는 것이다.
*
엊그저께 명절 끝나고 오늘도 지장재일이라서 상당히 바쁘신데 지금 우리가 이 모임에 왔다. 어차피 우리가 ‘화엄포로’가 되어서, 내지는 더 적나라하게 무(無)자 비(比)자 ‘무비포로’가 되어서 어디 도망갈 수도 없고 문수경전연구회라는 이름하에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
공양에는 법보시로 책을 공양하는 수도 있고 음식을 공양 올리는 수도 있고 내지는 여러 가지 권력이나 재력이나 재능 같은 것을 남들에게 보시하고 기부하는 것도 있지만, 어른스님께서 이 화엄회상이라고 하는 것을 저희들한테 남겨주셨다. 화엄경 십회향품에 보면 60가지 회향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회향이 눈 코 손톱 발톱 해서 피와 뼈와 살을 다 남에게 주는 것도 아름다운 보시지만 ‘법회를 할 수 있는 모임’을 보시하는 것이 가장 큰 보시라고 나와있다.
오늘 이렇게 참석하신 분들에 대해서 고맙다는 생각도 들고, 고맙다기보다는 어른스님께서 화엄법회라고 하는 모임을 만들어서 주셨는데 이 법회에서 이탈하면 ‘포로’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것 같다.
어른스님께서는 유튜브로 화엄경을 강의하시면서 어제까지 화엄경 입법계품 81권 보현행원품까지 다 끝내셨다.
오늘부터 또다시 해가 떠서 세주묘엄품부터 다시 시작하셨다.
몇 년 전에 어른스님이 80화엄경 강설집 출간을 다 마치시고 조계종 총무원 주최로 범어사에서 봉정식을 할 때 제가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라는 라디오 프로에 나가서 어른스님 대신 대담을 했었다.
“어른스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라고 묻길래 “태양이 휴가 가는 거 봤냐”고 대답했다.
어른스님은 그런 분이다.
오늘은 찡긴 휴일 아닌가, ‘낑긴 휴일’ 이런 날은 오고 가는 데도 조금 불편하실 텐데 어른스님의 원칙대로 법회를 연다.
원근불구하고 특히 먼 곳에서 오신 스님들께 너무 감사드린다.
특별히 오늘은 제가 새벽에 샤워하다가 알아진 거라든지 중간에 알아진 거라든지 드릴 수 있는 내용들을 다 선물로 드리고 싶다.
또 여러분들께 유인물 하나 드린 것이 있는데 그 QR코드를 누르면 뒤에 49페이지가 더 붙어 있다.
아름다운 간경 목소리도 나온다.
QR코드에 카메라를 나중에 갖다 대보시고, 우리는 본문 화엄경 하다가 이 부분을 연결해서 하겠다.
6조 혜능스님의 금강경 서문 중에 나오는 것이 오늘 우리 여래출현품 하는 대목에 그대로 찍혀서 나온다.
여러분들께서 스스로 산삼을 찾으시려면 또 얼마나 힘드시겠는가? 먼저 가본 심마니로서 이렇게 유인물로 하나 찾아서 갖다 드리는 것이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一
如來出現品 第三十七之二
三. 普賢菩薩의 說法
4. 如來의 意業
(1) 如來意業의 十種譬喩
아. 劫火의 焚燒
復次佛子야 譬如三千大千世界劫火起時에 焚燒一切草木叢林과 乃至鐵圍大鐵圍山하야 皆悉熾然하야 無有遺餘하나니
佛子야 假使有人이 手執乾草하야 投彼火中하면 於意云何오 得不燒否아 答言하사대 不也니이다
佛子야 彼所投草는 容可不燒어니와 如來智慧는 分別三世一切衆生과 一切國土와 一切劫數와 一切諸法하야 無不知者니 若言不知인댄 無有是處니 何以故오 智慧平等하야 悉明達故니라
佛子야 是爲如來心第八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니라
“또 불자여, 비유하면 삼천대천세계에 겁말(劫末)의 불이 일어날 적에는 모든 초목과 숲과 내지 철위산과 큰 철위산이 모두 타 버리고 남는 것이 없느니라.
불자여, 가령 어떤 사람이 손으로 마른 풀을 잡고 저 불구덩이에 던진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타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아닙니다.’라고 하리라.
불자여, 그 던진 풀은 혹 타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래의 지혜로 세 세상의 일체 중생과 일체 국토와 일체 겁과 일체 모든 법을 분별함은 하나도 모를 것이 없느니라. 만일 모를 것이 있다고 말하면 옳지 아니하리라. 왜냐하면 지혜가 평등하여 모두 분명히 통달하는 까닭이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 마음의 여덟째 모양이니,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
겁화(劫火)의 분소(焚燒)
*
여래 의업의 여덟 번째 겁화의 분소, 큰불로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린다는 대목이다.
가지고 계신 교재 제3권 여래출현품 279페이지(민족사刊 제3권)가 되겠다.
지난 시간에 부처님 여래 의업의 일곱 번째 모양 제 7상까지 했고 오늘은 의업 중에 제 여덟 번째 모양이다.
신업과 구업은 어찌 보면 냉정한 사판(事判)의 세계라고 봐야 되고, 지금 하고 있는 의업은 이판(理判)의 세계다.
우리가 업을 지을 때도 안에서 이판이 먼저 동한다. 이판이 먼저 동하고 탐진치가 먼저 동하고 난 뒤에 나중에 구업이 나오고 몸으로 하는 행동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는 역차순으로 신업을 먼저 하고 그다음에 구업을 하고 오늘은 의업을 한다. 그 일곱번째 단계는 지난 시간에 약왕수(藥王樹) 나무가 있는데 이름이 무진근(無盡根) 다함이 없는 뿌리라고 한 바가 있다.
오늘 이렇게 나눠드린 유인물의 QR코드는 하나뿐이지만 이것은 찍고 찍고 아무리 남에게 찍어주어도 줄어들지 않는다, 무진근이다, 이렇게 비유할 수가 있다.
그러면 지금 겁화의 분소라. 이것은 부처님께서는 무불통지(無不通知)라 부처님을 다른 말로는 ‘무불지(無不知)나 이사(已捨)라,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시지만 이미 다 버렸다’라고 한다.
아는 것에서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고 아는 것마저 놓아 내리신다. 부처님을 ‘생각없이 아신다’ 해서 ‘무념이지(無念而知)라’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한다. 무념으로 다 아신다.
무념이 염불의 완성이라고 한다.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에 갔을 때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 아미타불을 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서는 부처님의 진지 아주 깊은 지혜를 불에 비유하는 대목이 되겠다.
*
부차불자(復次佛子)야 : 또 불자여,
비여삼천대천세계겁화기시(譬如三千大千世界劫火起時)에 : 비유하면 마치 무엇무엇과 같다. 삼천대천세계에, 온 세상이, 겁화기시에, 겁의 말에 불이 나서 완전히 소멸해 버릴 때에
분소일체초목총림(焚燒一切草木叢林)과 : 일체의 초목과 총림과 빽빽한 숲과 내지는 큰 나무, 풀과 나무 정도뿐만 아니라 산덩어리까지 녹여서 다 없애치워 버린다.
내지철위대위원산(乃至鐵圍大鐵圍山)하야 : 대철위산과 풀도 타버리고, 나무도 타버리고, 온통 빽빽한 그 큰 숲이 다 타버리고, 아름드리나무도 다 타버리고, 돌도 녹아버리고, 쇳덩어리도 녹아버린 이 겁말의 마지막 시절에
개실치연(皆悉熾然)하야 : 모두 다 치연해서, 태워서
무유유여(無有遺餘)하나니 : 조금도 남기는 것이 없다.
천수경에는 이런 대목을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 여화분고초(如火焚枯草) 멸진무유여(滅盡無有餘)라’고 한다. 익숙한 구절이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가사유인(假使有人)이 : 가령 어떠한 사람이
수집건초(手執乾草)하야 : 손으로 빼짝 마른 풀을 가지고
투피화중(投彼火中)하면 : 저 불 속에 던져 넣는다면
어의운하(於意云何)오 : 어떻게 생각하느냐?
득부소부(得不燒否)아 : 그 활활 타는 불에 빼짝 마른 풀숲이 타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
답언(答言)하사대 : 답하되
불야(不也)니이다 : ‘아닙니다’ 이렇게 얘기를 한다. 다 타버릴 것이다.
*
불자(佛子)야 :불자야
피소투초(彼所投草)는 : 그 던진 바 빼짝 마른 풀은
용가불소(容可不燒)어니와 : 그 불이 혹시 안 탈 수도 없지만, 불에 안 타면 안 탔지
여래지혜(如來智慧)는 : 부처님의 지혜로
분별삼세일체중생(分別三世一切衆生)과 : 삼세의 일체 모든 중생과 또
일체국토(一切國土)와 : 일체의 국토와
일체겁수(一切劫數)와 : 일체의 시간과
일체제법(一切諸法)하야 : 모든 업이 벌어지는 일체제법을 분별하여, 일체 모든 법을 분별해서
무부지자(無不知者)니 :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나니
약언부지(若言不知)인댄 : 만약에 모두 다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모르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무유시처(無有是處)니 : 그것은 옳지 않다. 줄 긋겠다. 여래의 지혜는 무부지자라. 우리 마음은 모든 것을 안다.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
하이고(何以故)오 : 왜냐하면
지혜평등(智慧平等)하야 :지혜가 평등하여,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늘 상존한다.
실명달고(悉明達故)니라 : 다 분명하게 통달한 까닭이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여래심제팔상(是爲如來心第八相)이니 : 이것이 여래심, 여래 마음, 여래 의업의 제8상이니 여덟 번째 모양이니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응여시지(應如是知)니라 :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자. 風災의 大風
復次佛子야 譬如風災가 壞世界時에 有大風起하니 名曰散壞라 能壞三千大千世界하야 鐵圍山等이 皆成碎末이어든 復有大風하니 名爲能障이라 周帀三千大千世界하야 障散壞風하야 不令得至餘方世界하나니라 佛子야 若令無此能障大風이면 十方世界가 無不壞盡인달하야 如來應正等覺도 亦復如是하야 有大智風하니 名爲能滅이라 能滅一切諸大菩薩의 煩惱習氣어든 有大智風하니 名爲巧持라 巧持其根未熟菩薩하야 不令能滅大智風輪으로 斷其一切煩惱習氣하나니 佛子야 若無如來巧持智風이면 無量菩薩이 皆墮聲聞辟支佛地어니와 由此智故로 令諸菩薩로 超二乘地하야 安住如來究竟之位니라 佛子야 是爲如來心第九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니라
“또 불자여, 비유하면 바람의 재앙이 세계를 무너뜨릴 때에 산괴(散壞)라는 큰 바람이 불어서 삼천대천세계와 철위산들은 다 부서져 가루가 되고, 또 능장(能障)이라는 큰 바람이 불어서는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돌며 산괴(散壞) 바람을 막아서 다른 세계에 이르지 못하게 하느니라.
불자여, 만일 능장이란 큰 바람이 없었더라면 시방세계가 모두 파괴되었을 것이니라. 여래 응공 정등각도 그와 같아서 큰 지혜 바람이 있으니 이름이 ‘능멸(能滅)’이라, 일체 모든 대보살의 번뇌와 습기를 멸하고, 큰 지혜 바람이 있으니 이름이 ‘교지(巧持)’라, 근기가 성숙하지 못한 보살들을 교묘하게 붙들어서 능멸이란 큰 지혜 바람으로 하여금 모든 번뇌와 습기를 끊지 못하게 하느니라.
불자여, 만약 여래의 ‘교지’라는 지혜 바람이 없었다면 한량없는 보살이 성문이나 벽지불 자리에 떨어지련마는 이 지혜로 말미암아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이승(二乘)의 지위를 초월하여 여래의 구경(究竟)의 자리에 머물게 하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 마음의 아홉째 모양이니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
풍재(風災)의 대풍(大風)
*
부처님의 지혜를 앞에서는 불로 한 번 비유하고 여기서는 바람을 가지고 또 한 번 비유한다.
그다음에는 뭐가 나오겠는가? 물로 또 비유할 것이다.
여러분들께서 배워서 아시겠지만 능엄경에서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은 ‘5음이 여래장이다, 6입이 여래장이다, 12처가 여래장이다, 18경계가 여래장이다, 지수화풍공견식(地水火風空見識) 7대(七大)가 여래장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또 일체 천하 만법이 마음밖에 법은 없다, ‘심외(心外)에 무법(無法)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한다.
여기서는 어떤 비유를 한다 하더라도, 허공 정도라면 부처님의 진리에 대해서 조금은 나타낼 수 있겠지만, 바람이니 불이니 하는 것들은 견강부회하는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풍재의 대풍이라.
앞에서는 겁화를 가지고 이야기하였다.
보통 긴 시간을 겁이라고 하고 짧은 시간은 찰나라고 이야기한다.
겁화라고 이름을 붙여놨을 때는 금방 반짝해서 촛불처럼 1초만에 타는 불이 아니다. 굉장히 긴 시간 왕창 긴 시간을 ‘세월아, 네월아’ 해서 영원토록 타는 불이라고 보시면 된다.
바람 역시 그렇다. 잠깐 한 점의 바람이 살짝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고 태풍이 비람풍(毘藍風)이라고 해서 끝까지 모든 것을 거꾸러뜨릴 정도로 위력도 세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분다. 온 세상이 무너진다, 그래서 ‘겁화다 거풍이다’ 이런 식으로 비유해서 겁을 준다.
그다음에 한번 보겠다.
*
부차불자(復次佛子)야 : 또 불자야
비여풍재(譬如風災)가 : 비유하자면 풍재가, 바람의 재앙이
괴세계시(壞世界時)에 : 세계를 파괴할 때에, 무너뜨릴 때에
유대풍기(有大風起)하니 : 그 큰바람이 있으니
명왈산괴(名曰散壞)라 : 그 이름이 산괴다.
모든 것을 밀가루 흩어버리듯이 확 흩어버리고 나무 부러뜨리듯이 파괴해서 바위를 박살내듯이, 산괴해서 바람이 불어서 모든 것을 풍비박산을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이 산괴라는 바람이
능괴삼천대천세계(能壞三千大千世界)하야 : 삼천 대천 세계를 능히 다 무너뜨려서
철위산등(鐵圍山等)이 : 아무리 바람이 불고 나무는 흔들려도 산부동이라고 우리 시에도 있지 않은가. 태산부동이라고 하는데 여기는 태산이고 나발이고 그냥 바람이 불어서 먼지처럼 다 날려서 다 부숴버린다는 것이다. 그 단단한 철위산등이
개성쇄말(皆成碎末)이어든 : 부숴져 가루가 된다.
산괴라는 바람은 다 부순다.
*
나중에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육조스님 서문에도 이런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
여기하고 저 뒤에 나오는 대목들이 육조스님의 금강경 서문과 같다. 육조스님이 화엄경을 보고 베낀 것은 아닌데 마음의 심리를 꿰뚫어버렸기 때문에 화엄의 이치가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서로가 다른 경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죽착합착(竹着合着)이라, 딱 들어맞지 않는 구절이 없다.
여기 앞에 나온 산괴(散壞)라는 바람, 흩을 산(散)자에 파괴할 괴(壞)자라고 하는 바람은 마치 우리 마음에 무명풍(無明風) 무명 바람이 일어나서 여래공덕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일심의 진여자성을 철저히 짓밟아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짓밟히지 않으려고 중간에 막아주는 바람이 있다. 능장이라는 바람이다.
무명번뇌를 막는 바람이다.
육조스님은 어땠는가? 고양각(羖羊角)이라는 놈이 있어서 금강을 파괴시키고 깨뜨려버린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는 또 빈철(賓鐵)이 있어서 빈철은 그 번뇌의 우두머리인 고양각을 깨뜨려버린다고 하였다.
금강경 서문에 보면 고양각은 우리 진여자성을 훈습시켜서 부처를 중생으로 만들어 버리지만, 빈철은 다시 반야낭지로써 고양각, 무명번뇌, 오온개공을 깨뜨리고 아집을 잡아먹고 업장을 다시 녹여서 우리 본래면목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도 큰바람이 하나 또 일어난다.
*
부유대풍(復有大風)하니 : 맞대응하는 큰바람이 또 일어나
명위능장(名爲能障)이라 : 그 이름을 능장이라고 한다. 능히 모든 걸 가로막아 버린다. 어떤 걸 가로막느냐?
이 산괴바람이 큰 돌개풍이 불어서 철위산마저 부숴버린 그 바람을 바람대 바람으로써 막아버린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데 이와 같은 것으로써 무명번뇌를 일으키는 바람이 있고 무명번뇌를 막는 바람이 있다.
이 대목은 이해하기가 상당히 힘이 든다. 잘 이해하지 못하신다. 그다음 대목도 힘이 든다. 좀 머리 나쁜 사람은 이대목을 한 3년은 봐야 된다.
주잡삼천대천세계(周帀三千大千世界)하야 : 삼천대천를 빙 돌면서, 이 능장이 모든 세계에 와서 멀리 간다고 하는 것은 대자비심이 있기 때문이다.
명절에 일가친척을 다 돌아보는 사람은 자비로운 사람이고, 홀로 계신 부모님도 안 찾아보면 아주 무자비한 놈,불효자다.
장산괴풍(障散壞風)하야 : 아까 그 모든 걸 부숴버리고 흩어버리는 산괴바람을 가로막아서
불령득지여방세계(不令得至餘方世界)하나니라 : 그 바람으로 하여금 다른 세계에 더 못 가도록 바람대 바람으로 맞바람으로 막아버린다. 맞불을 내서 막아버린다.
그래서 서장에는 뭐라고 했는가?
우리가 수행할 때 열심히 화두 정진을 하면 화두가 화두끼리, 생각과 생각이, 양쪽에서 말 두 마리가 달려와서 중앙선에서 부딪쳐서 ‘노서입우각(老鼠入牛角)에 포복절단(葡匐絶斷)’하듯이, 늙은 쥐가 쥐틀에 갇혀서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가듯이, 내가, 내 생각이, 화두가 잡념이 일어나는 걸 잡아서 바로 박치기 해서 쫙 뻗쳐서 생각이 앞뒤로 못 가도록 한다, 라고 나와있다.
그런 대목이 이런 대목이라고 보아진다.
서장에는 그 대목이 상박이라고 나와 있다.
상박(相撲) 서로 박치기 해버린다.
니죽고 내죽고 한다.
박치기한다는 말, 화두를 철저하게 잡는 것을 여문자(如蚊子)가 마치 모기가 쇠로 만든 철우(鐵牛)의 쇠대가리 위에 앉아 있다가 뚫고 침을 내려도 하취부득처(下嘴不得處)라 침을 아무리 찔러도 내릴 수가 없으니까 화신투입(和身透入)이라, 온몸으로 소의 대가리, 쇠로 된 대가리를 뚫고 모기가 돌진해서 들어간다고 하는 말과 같다.
화두를 들 때 그렇게 공부하라고 우리가 서장 같은 데서 배우지 않았는가. 이런 대목들을 장산괴풍(障散壞風)이라고 하는 것에 비유한다면, 우리 마음속에 아주 악질도 있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진여를 훈습하는 이 능장대풍(能障大風)도 있다는 뜻이다. 그 부처님의 의업, 마음은 그렇다. 중생이 문드러지도록 놔두지 않는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약령무차능장대풍(若令無此能障大風)이면 : 만일 능장이라는 큰바람이 없다면
시방세계(十方世界)가 : 시방세계가
무불괴진(無不壞盡)인달하야 : 모두 파괴되고 말 것인데, 파괴되는 것을 막는 것도 있다. 좋은 것이 나타나서 아예 나쁜 것으로 밀리지 않게 한다.
코로나가 오면 또 백신이 나온다. 백신이 나와도 코로나는 변이가 된다. 저도 살려고 백신을 뚫고 또 다른 변이종이 나온다. 코로나에 변이종이 나오면 또 백신을 만든다.
여러분도 참새 잡는 이야기를 알 것이다.
멍청하게 저 같은 바보 동생이 하나 있었다.
“형아 돈 십원 줘.”
“뭐하게?”
“고무줄 사게.”
“고무줄 사서 뭐하게?”
“새총 만들게.”
“새총 만들어서 뭐하게?”
“새 잡지.”
“새 잡아 뭐하노?”
“새 팔지.”
“새 팔아서 뭐하노?”
“고무줄 사지.”
“고무줄 사서 뭐하노?”
“새총 만들지.”
새총 만들어서 뭐하노? 새 잡지. 새 잡아서 뭐하노? 새 팔지.새 팔아서 뭐하노? 고무줄 사지. 고무줄 사서 뭐하노? 새총 만들지.
이와 같이 계속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이 인생 같다.
가사 아래서 이런 글들이 결집이 됐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기도 하고, 어른 스님 원력으로 우리의 인연 공덕으로 해서 화엄경을 보는 것도 참 기적 같은 일이다. 인연이라고 하기는 뭐한 부처님하고 인연 있는 불유연(佛有緣)이라. 부처님하고 인연있는 사람들이라.
여래응정등각(如來應正等覺)도 : 여래응정등각께서도, 부처님께서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또한 그와 같아서
유대지풍(有大智風)하니 : 부처님에게도 이 지혜 바라밀이 있는데
명위능멸(名爲能滅)이라 : 이름이 능멸이라. 뭐든지 다 멸해 버릴 수 있는 바람이다.
능멸일체제대보살(能滅一切諸大菩薩)의 : 일체 모든 보살의
번뇌습기(煩惱習氣)어든 : 번뇌 습기를 다 멸해버린다.
그냥 다음 대목으로 넘어가면 이해가 잘 안되기 때문에 여기서 먼저 힌트를 드리고 가겠다.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이 정신을 가지고 가야 된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비슬지라거사(鞞瑟胝羅居士) 이런 데를 보면 불반열반제(不般涅槃際)라, 보살은 절대 어디에 들어가지 않는다?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큰스님들께서 돌아가셔도 특히 극락에 머무르시면 안 된다. 속환사바, 인도환생하시고 속환사바 사바세계로 빨리 돌아와야 된다.
그러니까 ‘번뇌를 다 멸해서 골치 아픈 일이 하나도 없다면’ 보살이 아니다. 그것은 빼짝 마른 성문 연각 이승이다. 이승의 해탈 상태로 넘어가 버리잖는가? 해탈 성불로 넘어가기 때문에 보살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처럼 사바중생, 지옥중생이 다 성불을 하거나 지옥이 텅 빌 때까지 그 번뇌를 계속 뭉치째 끌어안고 같이 살아가야 보살이고 부처님이다.
기신론 같은 데서는 번뇌라고 하는 것과 마음의 해탈이라고 하는 것을 절대 분리하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 늘 같이 있다.
이래서 원효스님께서는 ‘이 대목은 상당히 알기 힘들다. 좀 모자라는 사람들은 번뇌를 없애고 해탈을 얻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틀린 말이다. 번뇌와 해탈, 생사생멸과, 불생불멸의 열반이, 생사열반(生死涅槃)이 상공화(常共和)다. 항상 같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증지소지(證智所知)요 비여경(非餘境)이라. 오직 유불궁진(唯佛窮盡)이라. 부처님만 알지 다른 사람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라고 하셨다. 이 대목이 바로 그 대목이다.
말인즉슥 생사와 열반이라고 하지만 열반은 곧 불생불멸이고 생사는 유생유멸 생멸법이지만,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다.
이렇게 해 놓고 그다음 대목으로 넘어가야 된다.
우리 어릴 때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운동을 잘하고 힘이 체력적으로 좋은데, 힘도 없고 코를 찔찔 흘리는 놈이 옆에 와서 막 침 뱉고 두드려 패면 어떤가? 같이 엉겨 붙어 싸우면 이겨도 창피스럽고 져도 창피스럽다.
‘저게 한번 두드려 차버리면 날아가 버릴 게’ 하고는 씩 웃고 만다. 그래도 코찔찔이는 대든다. ‘야 인마 한 판 붙자. 뭐가 무섭노?’
돼지하고 호랑이가고 싸우는 이야기가 있잖은가?
돼지가 똥 바르고 오니까 호랑이가 ‘냄새난다. 절로 가라’ 그러자 돼지는 ‘야 뭐가 겁나노?’ 라고 한다. 호랑이가 ‘내가 인마 겁나서 피하나?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버서 피한다’ 했다는 이야기가 금장요집경에도 나온다.
지금 여기서 그렇다. 보살은 힘이 없어서 참는 것이 아니고 힘이 있는데도 참는 것이다. 씩 웃으면서 참는다.
돈이 없어서 없는 체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사업을 벌리면 돈은 챙길 수 있지만 그런 것을 할 여가가 없다.
마음은 언제나 벗어나 있고 얼마든지 끊을 수 있지만 참는다.
번뇌를 다 끊을 수 있지만 중생들하고 화광동진(和光同塵) 입니입수(入泥入水)다. 서장 같은 데는 그렇게 해 놓았다. 타니대수(拖泥帶水)라. 진흙에 들어가면 같이 진흙에 들어가고 똥물에 들어가면 같이 중생들하고 똥물 속에서 뒹군다. 보살이 자기 혼자서만 깨끗하게 돌아서서 있지 않는다.
입법계품에는 가장 고요한 최적정바라문(最寂靜婆羅門)이 나온다.
‘어떤 것이 가장 고요합니까?’
‘시끄러운 현실 그대로에서 시끄러움을 못 느끼면 그 이상 고요한 것이 없다’
‘현실 그 자체가 고요다’
그렇게 해서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이 번뇌를 싹 쓸어버릴 수 있는 바람, 능멸할 수 있는 바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번뇌를 안고 산다는 것이다
유대지풍(有大智風)하니 : 또 부처님에게는 대지풍이 있는데
명위교지(名爲巧持)라 : 이름이 교지라고 하는 바람이다. 앞의 지혜 바람은 능멸이고 쓸어서 없애 버리는 바람이었다. 또 하나의 바람인 교지는 아주 교묘하게 버티는 바람이다. 교묘하게 버티는 것을 우리는 묘유(妙有)라고 한다. 완전히 쓸어버리는 것은 진공(眞空)이라고 한다. 진공의 바람이 있지만 묘유의 바람으로 부지시킨다. 누구 때문에 그 바람이 부는가? 이름도 안 좋은 사람이 다음에 나온다. 성숙이가 이름이 좋은데 근기가 미숙한 사람 미숙보살을 위해 바람이 분다.
교지기근미숙보살(巧持其根未熟菩薩)하야 : 근기가 탁월한 사람들은 교묘한 방편으로 유지시켜 줄 필요가 없지만, 팔이 부러지든지 다리가 부러지든지 하면 깁스를 해줘야 될 것이 아닌가?
천년 자란 고목에다가 부목을 갖다 댈 필요는 없는데 어린 묘목, 미숙한 묘목에는 부목을 갖다 대줘야 된다.
그래서 여기도 근기가 성숙하지 못한 중생들을 아주 알맞게 교지하여 그 사람의 능력에 딱 맞게 교묘하게 잘 유지시켜 준다.
능력에 안 맞게 전봇대 가지고 이쑤시개 하고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능력에 맞게 해줘야 한다.
코끼리 힘에 맞게 짐을 실어주고, 당나귀 힘에 맞게 짐을 실어주는 것이다. 쪼맨한 스피츠 강아지한테 ‘니도 개 아이가, 짐 실어라’ 하면서 스피츠도 짐승이라고 말만큼 실어주면 죽어버린다.
미숙한 사람들한테는 그 근기에 맞춰서 힘을 실어줘야 된다.
우리 같이 좀 모자란 사람한테 화엄경 공부하라고 해놓으니 머리 터져 죽을 지경이 아닌가.
교지기근미숙보살이라, 근기가 성숙하지 못한 보살들을 교묘하게 잘 유지시켜 줘서 그들로 하여금 번뇌를 싹 쓸어버리는
불령능멸대지풍륜(不令能滅大智風輪)으로 : 큰 지혜 바람으로 하여금
단기일체번뇌습기(斷其一切煩惱習氣)하나니: 모든 번뇌와 습기를 끊지 못하게 하느니라.
잘못 들으면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보살은 ‘번뇌를 안고 살아간다’는 정신이 있어야 된다.
그 대목을 이해하시려면 화엄경 십지품(十地品) 원행지를 보면 된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기 직전에 원행지(遠行地)에 어떤 마음이 일어나느냐? 충분히 능력이 됨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화도 내기도 하고 여러 가지를 하면서 열반을 취하지 않는다, 이런 뜻이 되겠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생사도 목적이 아니고 열반도 목적이 아니다. 우리에게 목적은 중생제도다.
영가 증도가 첫 구절이 무엇인가? ‘무명실성(無明實性)이 즉불성(卽佛性)이요 환화공신(幻化空身)이 즉법신(卽法身)이다’ 이런 구절이 이 대목과 똑같다.
그것은 우리가 알기는 좀 힘이 들고 부처님이라야 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대목은 여래의 의업이다.
부처님의 입장에서 들여다보는 것이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약무여래교지지풍(若無如來巧持智風)이면 : 만약에 무(無), 없다면, 뭐가 없다면? 여래의 솜씨 좋은, 유지시켜주는 지혜 바람이 없다면, 능멸지풍만 있고 교지지풍이 없으면
무량보살(無量菩薩)이 : 한량없는 저 보살이, 보살수행자는 번뇌를 안고 사는 것이다. 번뇌를 안고 살아도 번뇌에 휘말리지 않는다. 잘못하면 번뇌를 싹 끊어버리고 나 혼자 성불해버리는
개타성문벽지불지(皆墮聲聞辟支佛地)어니와 :성문이나 벽지불 이승의 자리에 떨어지고 만다.
그 앞에 능멸이라는 지혜 바람만 있다면 번뇌가 다 끊어져서 성문 그러니까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나 연각, 벽지불 정도에서 마치겠지만, 보살에게는 중생이 있다는 것이다.
유차지고(由此智故)로 : 이 지혜를 말미암은 까닭으로
영제보살(令諸菩薩)로 :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초이승지(超二乘地)하야 : 모든 대승으로 하여금 소승, 중승의 지위를 초월해서 마침내 일승, 불승의 지위에 가게 한다. 안주하게 한다.
안주여래구경지위(安住如來究竟之位)니라 : 여래의 구경지위에 넘어가게 한다. 이런 대목을 혼자 공부하려면 상당히 이해하기가 빡빡하다. 같이 더불어서 이렇게 공부를 해야 좀 쉽게 넘어간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여래심제구상(是爲如來心第九相)이니 : 이것이 여래심, 여래 마음의 제 아홉 번째 모양이니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모든 보살마하살이
응여시지(應如是知)니라 : 마땅히 이와 같이 알지니라. 알아야 한다.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듯이, 앞에 나왔듯이 ‘나쁜 곳으로도 영원히 밀리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 삼사십 년 전에 새마을호를 타면 뒤에 보면 이렇게 써놓은 글귀들이 붙어 있었다.
‘오는 만큼 가기도 하고 가는 만큼 오기도 하고, 얻은 만큼 잃기도 하고 잃은 만큼 얻기도 한다’ 어릴 때 중 되기 전에 기차에서 그런 글귀를 보았는데 ‘참 누가 말 잘해놨네’ 했었다. 나중에 보니 불교 것을 쏙 다 베낀 글이었다.
경전의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과 같은 말이다.
생멸이 불생불멸이고 불생불멸이 생멸이다.
그래서 오고감에 무심하다.
사람이 돌아가시고 나면 무엇을 하는가?
상래(上來) 시식풍경(施食諷經)이라.
앞에 영가를 다 초청해서 시식하고 풍경이라 경전 잘 읽고 했는데 ‘염불공덕(念佛功德)에 그래 영가야 그대야 이망연야(離妄緣耶) 불이망연야(不離妄緣耶) 그만큼 밥 먹여주고 떡 먹여주고 염불 실컷 해줬는데 망상을 떠났느냐, 못떠났느냐. 망상을 떠났으면 조용히 극락으로 사라지시고 천당불찰(天堂佛刹)로 임성소요(任性逍遙)하시고, 불리망연즉(不離妄緣則) 망상을 버리지 못했으면 어떻게 하는가? 군더더기 소리같지만 한마디 더 할게. 차청산승(且聽山僧) 말후일게(末後一偈) 한 번 들어볼래?’
말후일게가 무엇인가?
사대각리여몽중(四大各離如夢中)
육진심식본래공(六塵心識本來空)
몸도 없고 마음도 본래 없다.
일체 유위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여몽환포영이 쉽게 와닿지 않는다. 소대에 가서 바싹 다 태워버렸는데도 그걸 부여잡고 아무 것도 없는데 내 혼자 집착만 남아서, 계속 중음신으로 떠돌더라도, 그 집착을 안고 자고 한다.
이망연야(離妄緣耶) 불이망연야(不離妄緣耶) 이망연즉(離妄緣則) 천당불찰(天堂佛刹)에 임성소요(任性逍遙) 할 것이고, 만약에 떠나지 못했다면 마지막으로 이 산승(山僧)이 지극한 마음으로 말후일게(末後一偈) 이제 진짜 마지막으로 한 구절 읽어줄 테니까 제발 부디 다 털고 가시오.
사대각리여몽중(四大各離如夢中)이라
지수화풍 본래 없고
육진심식본래공(六塵心識本來空)이라
사판도 없고 이판도 없고 본래 없다.
부처님 가신 길을 알고 싶으냐?
욕식불조회광처(欲識佛祖回光處)냐?
일락서산(日落西山)에 월출동(月出東)이로다
여기 아홉 번째 모양에서 우리가 쭉 얘기를 하듯이 우리가 법회 전에 읽은 법성게에서는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이라고 해놓았다.
이러한 까닭으로 시고(是故)로 행자(行者)가 수행자가 환본제(還本際)라 본래면목으로 본지풍광으로 돌아갈 것 같으면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이라, 망상을 쉬려고 해도 쉴 망상이 없다.
없는 망상을 우리는 굳이 쉬려고 바득바득 노력하지 않는가.
그런데 여기 보살은 망상이 본래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본래 찾을 마음도 없다는 걸 알아버렸고 부제망상불구진이다.
진짜를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망상을 없애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덜떨어진 우리는 경전을 그만큼 봐도 안 되는 것이다.
잠시 여러분들 오늘 나눠드린 유인물 한 번 보겠다.
***
<유인물>
經是聖人之語라 敎人聞之하고 從(超)凡悟聖하야 永息迷心이니라
此一券經은 衆生性中에 本有언마는 不自見者는 但讀誦文字하나니
若悟本心하면 始知此經이 不在文字하리라.
但(若)能明了自性하면 方信一切諸佛이 從此經出하리니
경(經)은 성인(聖人)의 말씀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범부로서 성인의 깨달음에 이르게 해서 영원히 미혹된 마음을 쉬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 한 권의 경은 중생의 성품 속에 본래 있건마는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은 다만 문자만을 읽고 외우는 까닭이다. 만약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비로소 이 경이 문자에 있지 않음을 알 것이다. 다만 능히 자기의 성품을 환하게 알게 되면 비로소 모든 부처님이 이 경으로부터 나오심을 믿을 것이다.
화엄경 여래출현품 如來意業 참고자료
육조혜능대사 금강경 서문 중에서
***
경시성인지어(經是聖人之語)라 : 경(經)이라고 하는 것은 성인(聖人)의 말씀이다. 육조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경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교인문지(敎人聞之)하고 :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종범오성(從(超)凡悟聖)하야 :범부가 성인의 깨달음에 이르게 해서
영식미심(永息迷心)이니라 : 영원히 미혹된 마음을 이망연야(離妄緣耶) 불이망연야(不離妄緣耶) 하게 하는 것이다.
*
차일권경(此一券經)은 : 그런데 이 한 권의 경은 화엄경이 80권은 무슨 80권인가, 80권이 전부 한 권이다. 금강경이 600권이 되어도 한 권이다.
왜 한 권이냐?
중생 성품 속에 있는데 무슨 한 권 두 권 백 권 천 권이 있겠는가.
중생성중(衆生性中)에 : 중생 성품 속에
본유(本有)언마는 : 본래 있건마는 그러니까 청량국사는 화엄경 소초를 지으면서 그렇게 해 놓았다.
삼승원융관을 논문으로 쓰시면서 만약에 수행자가 자기 마음속에 여래장이 있는 것을 스스로가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보살야라. 보살 수행자가 아니다.
보살 수행자가 아니다. 뭔가 얍삽하게 사는 사람이다,라는 말이다. 여우 족제비지 사자는 아니다.
불자견자(不自見者)는 : 우리가 스스로 이 경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단독송문자(但讀誦文字)하나니 : 다만 문자만 달달달달 외우고 아까 소신인과다 차별인과다 평등인과다 성행인과다 증입인과다 그런 것을 했지 않은가.
쓸데없는 그런 것만 달달달달 외워서 제 머릿속에는 화엄경 도표가 완전히 문신이 새겨지도록 새겨져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어떻게 화엄경을 아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어차피 저는 강사이니까 그런 것을 쓰기도 하고 마련도 하고 또 준비도 하지만 그걸 가지고 화엄경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자나깨나 경전을 보면서 ‘저 새도 화엄경이 되어야 되고, 지나가는 바람도 화엄경이 되어야 되고’ 입법계품 비로장누각에 보면 이런 것이 나온다. 요즘 씩 웃은 부분이다.
어른스님이 요즘 미륵보살장 하고 입법계품 마지막 강의를 하시는데, 강의는 스님이 하시고 소득은 저한테 있다.
그렇게 몇십 년 안 풀리던 것이, 비로장누각편을 보면서 ‘아 이 뜻이었구나’ 하면서 씨익 웃는 것이다.
해안(海岸)국에서, 바닷가 있는 데서, 대장엄(大莊嚴)동산이라고 있는데 거기에 비로자나장엄장(毘盧遮那莊嚴藏) 대누각(大樓閣)이 있고 미륵보살이 계신다.
‘아 비로장누각이 바로 우리 여래장, 아뢰야식이로구나’
그 안에서는 온갖 것이 중중무진으로 우리 기억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비추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하나도 서로가 서로를 비췄다고 하는 실상이 없다. 실상은 무상이다. 모양은 없고 전부 꿈속에서 실상처럼 그렇게 비로장누각에서 선재가 무한한 것을 봤구나. 나 역시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로구나’하고 씨익 웃는다.
화엄경 세주묘엄품을 지나서 여래현상품을 지나서 보현삼매품에 오면 보현보살이 드디어 어디에 들어가느냐? 비로자나여래장신삼매에 든다.
‘그것이 바로 미륵보살의 비로장누각이자 누각이라 해도 되고 여래법신이라 해도 되고 실질적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마음이라 해도 되는구나’
이걸 육조스님께서는 이렇게 해놓았다.
중생 성품 속에 본래 있건마는 사람들이 모르니까 비로장누각이다, 삼매다, 각양각색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엉뚱하게 우리는 문자만 읽고 외우는 까닭으로
약오본심(若悟本心)하면 : 그러나 본래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시지차경(始知此經)이 : 비로소 이 경이
부재문자(不在文字)하나니 : 문자에 있지 아니함을 알 것이다. 육조스님께서 그렇게 했다.
단능명료자성(但(若)能明了自性)하면 : 다만 자기의 성품을 환하게 알게 되면, 요지일체법, 자성무소유인 줄 알게 된다면
방신일체제불(方信一切諸佛)이 : 비로소 모든 부처님이
종차경출(從此經出)하리니 : 이 경으로부터 나왔다.
이 경은 책, 글자로 된 경전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
|
첫댓글 🙏🙏🙏
불시복전공덕해
생사열반상공화ᆢ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