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에 관한 시 모음
차례
소나기 / 장석주
소나기 / 이시영
소나기 / 정희성
소나기 내린다 / 이대흠
소나기 / 곽재구
소나기 / 송찬호
소나기 / 정진규
소묘 / 서정윤
소나기 / 문인수
소나기 / 나희덕
마들의 소나기 / 문동만
소나기 / 최승호
소나기의 혼(魂) / 조태일
비(노래) / 김세환
소나기 / 장석주
구름은 만삭이다,
양수가 터진다.
흰 접시 수만 개가 산산이 박살 난다.
하늘이 천둥 놓친 뒤
낯색이 파래진다.
- 장석주,『몽해항로』(민음사, 2010)
소나기 / 이시영
여름비가 사납게 마당을 후려치고 있다
명아주 잎사귀에서 굴러떨어진 달팽이 한 마리가
전신에 서늘한 정신이 들 때까지
그것을 통뼈로 맞고 있다
- 이시영,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 2012)
소나기 / 정희성
날 기울고 소소리바람 불어 구름 엉키며
천둥 번개 비바람 몰아쳐 천지를 휩쓸어오는데
앞산 키 큰 미루나무 숲이 환호작약
미친 듯 몸 뒤채며 雲雨의 정 나누고 있다
나도 벌거벗고 벼락 맞으며 달려나가고 싶다
- 정희성, 『시를 찾아서』(창작과비평사, 2001)
소나기 내린다 / 이대흠
소나기 내린다 저 인사불성의 사내
비 내린다 법도 도덕도 없이 비는
흙의 가슴이며 허벅지며
푹푹 찔러댄다 천년의 여인 흙은
불쑥불쑥 엉덩이를 들어올린다 음탕하게
한바탕 소나기 내린다 저 잡것들
후줄근한 땀방울 없이
눈에 보이는 데서 세상의 가장 은밀한 일을
치러버린다 이윽고
비 그친 뒤 햇살 따스한 날
빠뿌쟁이* 푸른 머리 툭
튀어나온다 그 여인으로부터
*빠뿌쟁이: 질경이의 방언.
- 이대흠,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창작과비평사, 1997)
소나기 / 곽재구
- 연화리 시편 25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를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격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랑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이를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 곽재구,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도서출판 열림원, 1999)
소나기 / 송찬호
도둑을 쫓다 양철 지붕 빈집에 이르렀다
언제 사람이 살다 간 것일까
지붕은 붉은 페인트가 반이나 벗겨진 채
흙벽은 무너지고 문짝은 떨어져 나가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저런 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비 올 때면 양철지붕 빗소리 요란하고
옹색한 살림에 아이들은 많아 바람 잘 날 없었을테니
그래도 말이다 오늘은 그 시끄러운 소리 한번 들어보게
소나기 한줄금 시원하게 왔으면 좋겠다
소나기 오면 그 옛 소나기로 왔으면 좋겠다
어이 도둑놈아, 여기서 담배 한 대씩 태우고 가자
그러고 보니 우리도 참 시끄럽게
살았다 그렇지?
까맣게 그을음 올라앉은 정짓간 천장
거기 쓸 만한 서까래 몇 골라내면
고요히 적막 한 채 지을 수 있겠다
-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소나기 / 정진규
개미들의 행렬이 길다 곧 소나기가 쏟아질 것이다 삽시에 젖어버릴 것이다 부산하다 짐승들은 산등성이를 내닫고 날개들이 하늘을 메운다 지느러미들이 모두 물위로 솟았다 미안하니까 착한 나무들 풀잎들만 제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냅다 손목을 놓고 치달려 간 너와 나의 거리가 그날 이후 좁혀지지 않는다 直前이다 혼자 지나가게 될 것이다 되도록 빨리 지나갈 것이다 다들 떠났다 그게 상책이다
- 정진규,『本色』(찬년의시작, 2004)
소묘 / 서정윤
소나기가 지나가며
이 산 저 산 산 푸르름을 그린다
구름들의 손에 들린
푸른 붓자루,
잠들지 못한 산의 그림자를 지운다.
산은 산으로 살아
산이 생명으로 울어 자라는,
아직도 산은 상처 난 짐승들처럼
소리 지름으로 하늘 한 편에
서로 엉기어 있다.
산이, 산이
자신의 치유만으로 바쁘고
아직도 푸르름으로 자라지 못할 때
푸른 소나기가
이 산 저 산 그리며 지나고 있다.
- 서정윤,『나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요』(현대문학, 1991)
소나기 / 문인수
강원도 영월에 소나기재가 있다.
어린 단종이 청령포 들어가는 길에
이 고개에 이르자 마침 소나기를 만났다.
그로부터 소나기재가 되었다. 통곡의 원조,
소나기에도 이렇듯 그 발원지가 있구나.
생각하면서 나도 오늘 우연히
소나기 맞으며 소나기재를 넘었다.
빗길에 빗길에 소나기재를 넘는데, 누가
내 차에 하얗게 부서지며 올라타다가
눈앞을 가리며 막아서다가
그 슬픔 건네다줄 배가 없는지 누가
이 땅, 하늘의 목젖 저 소나무재 꼭대기에
자욱하게 서려 서 있는 것 보았다.
- 문인수,『쉬!』(문학동네, 2006)
소나기 / 나희덕
노인도 아기도 벌거벗었다
빗줄기만 걸쳐 입은 노인의 다리가
마른 수숫대처럼 여위었다
늘어진 성기, 주름진 사타구니 아래로
비는 힘없이 흘러내리고
오래 젖을 빨지 못한 아기의 눈이
흙비에 젖어 있다
옥수수가 익으려면 아직 멀었다
연길 들판, 소나기 속으로
늙은 자연이 어린 자연을 업고 걸어가는 오후
- 나희덕,『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 2004)
마들의 소나기 / 문동만
북서울오토바이 집에는 빵꾸를 때우는 스무살이 있다
피자배달보다 오토바이가 좋아서 왔다는 스무살이 있다
노랑머리 애인이 가끔 놀러 온다
열 받으면 그녀는 툴툴거리는 낡은 선풍기를 발로
걷어차버리기도 하고 쭈그려앉아 제 입술로 불붙인
담배를 물려주기도 하는데,
그녀가 예뻐 보일 때는
땀 많은 애인 머리칼을 걷어올려주는 그 찰나
기름투성이 스무살이 타이어를 주물거리다
불에 구운 풋콩처럼 검게 익은 손가락으로
그녀 볼에 기름 곤지를 찍을 찰나
그 키득대고 깔깔대는 소리가 덜 여문
덜 여문 수작인데,
여기는 바람 한점 없는 칠월의 기름밭
보는 사람만 젖는 소나기 내린다
- 문동만, 『그네』(창비, 2009)
소나기 / 최승호
머리털 빠지는 산성비가 쏟아지길래
하까다 우동집 앞에 서서 비를 피했지.
우동집 식탁들은
불어터진 시간을 먹는 얼굴들로 꽉차 있더군.
비가 그칠 듯
그치지 않아
우산 파는 집을 찾아 길을 떠났지.
머리가 뭐길래
손바닥으로
비대해진 머리를 가리고
흠뻑 쏘다니다 마침내 우산을 샀지.
우산을 쓰고 나오니까
하필 그때 비가 그치더군.
당신은 그게 다야 그게 다야라고 말하겠지만
슬픔엔 짠 슬픔도 있고
싱거운 슬픔도 있다네.
- 최승호, 『세속도시의 즐거움』(세계사, 1991)
소나기의 혼(魂) / 조태일
이렇게들 살다가 저렇게들 살다가
사람은 그렇게들 살다가
자손들일랑 땅에 남겨두고
보이지 않는 혼(魂)이 되고
혼은 거듭 살아서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마른 하늘로 목이 타면
구름 속으로 사알짝 끼어 들었다가
땅 위의 일들을 그리워하다가
언짢아하다가 드디어
구름을 충동질하다가
벼락 한 방이면 작살날 애들이
번개 한 방이면 눈멀 애들이
꼴도 좋게 육갑지랄들 한다, 어쩌고
한바탕 칭얼대다가 까무러치다가
구름 속에서 그렇게 살다가 보채다가
죽어서 쏜살같이 소나기가 되고
소나기는 거듭 살아서
땅 위에 길게 꽂힌 깃발이 되고
참 오랜만에 듣는 소문이 된다.
믿어 의심치 못 할 아우성이 된다.
- 조태일, 『국토』(창작과비평사, 1975)
주제별 시 모음 .「소나기 추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