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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의 남수문 (*)‘복원’을 마쳤다 길래 답사하러 갔다.
(*)문화재 복원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니, 중건(重建)-다시 지었다 가 옳을 것이다.)
‘수서’ 역에서 잠실-수원 직행 버스를 타니 세곡동, 판교, 고속도로 거쳐
바로 화성에 도착하니, 말이 버스지 내 차 모는 것과 진배없이 시원하다.
창룡문(동문)이 보이자 내려서 동에서 남쪽 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걸었다.
곳곳에 있는 포루(砲樓-포를 쏠 수 있는 누각), 포루(鋪樓-수비병들 숙소)는
대개 문이 잠겨 있으나, 더러 열린 곳에는 큰 대자로 누운 분들이 있다.
화성에만 있는 성곽과 봉수대가 결합된 형식인 봉돈(烽墩),
그 바깥쪽으로 엄청난 규모에 색깔마저 거무칙칙하여, 볼 때마다
화성의 경관을 어지간히도 망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교회를 지나,
남쪽 구간으로 들어서니, 수원천과 복원한 남수문이 발 아래로 보인다.
사진: 복원한 남수문 원경
남수문 유실
남수문은 1922년 7월 대홍수로 유실되었다가 이번에 복원했으니 90년 만이다.
세계의 문화 유산 화성 복원은 진작에 끝났지만, 남수문은 쉽지 않았다.
그 일대가 시장 통이라 토지 보상 금액에,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위 사진은 2008년에 찍은 남수문 일터-당시는 옛터다.
그때 복원 계획에 대하여 듣긴 들었지만 잘 될까? 싶었는데 그래도 해 냈다.
여기에는 청계천 복원이 영향을 끼쳤다
….서울 청계천에 이어 경기 수원시 도심을 가로지르는 수원천
복개 구간을 뜯어내 시민 품으로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수원천 중심부를 덮은 복개 구간을 그대로 방치하면
수원천이 지닌 화성과의 연계성은 물론 도심 속 하천 기능이 단절되는 만큼
복개 구간을 뜯어내고 자연형 하천으로의 완전 복원이 시급하다는 게….
이상은 2005년 어느 신문 기사다.
MB 가 청계천 복원까지는 잘한 편이라고 본다.
(그게 하천이냐? 어항이지! 라는 소리도 있지만)
거기서 의기양양해 4대강을 마구 ‘삽질’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남수문 복원
위 사진은 성곽 안쪽에서 본 남수문이다.
수문은 물도 흘려 보내야지만 또한 성곽 방어 기능도 있어야 한다.
수문 위로 벽돌을 쌓아 벽을 치고 군사들이 다닐 수 있는 길과
길 위쪽으로 총구를 만들어 놓았다.
보기에 상당히 근사하지만, ‘지적질’은 늘 가능하다.
복원된 남수문, 과연 복원일까?
… 복원된 남수문이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남수문과는 다르다.
한 마디로 '복원'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한다.
… 남수문의 아치부터 다리를 지탱하는 교각의 형태 등이 전혀 다르다.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남수문의 교각을 보면, 물살의 흐름에 지탱할
수 있도록 5각으로 돼 있으며 교각과 교각 사이는 공간이 형성돼 있다.
그런데 이번에 복원된 남수문의 교각은 통으로 돼 있다.
그리고 <화성성역의궤>에도 없던 수문 앞에 보를 만들어 전혀 다른 모습의
남수문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렇게 윗부분인 여장만 옛 것과 동일할 뿐이다.
이상은 어느 인터넷 신문에 올라온 기사다.
위 인용문에 나오는 ‘화성성역의궤’를 한번 보기로 하자.
사진: 화성성역의궤 중 남수문 내도 (성곽 안쪽에서 본 그림)
“물살의 흐름에 지탱할 수 있도록 5각으로…복원된 남수문의 교각은 통으로’
‘5각으로’가 무슨 말일까?
위 사진은 아직도 장충단에 머물고(?) 있는 수표교 유적이다.
교각을 물 흐르는 방향 정면이 아니라 비스듬히 세워 놓았다.
이렇게 해야 거센 물 ‘흐름에 지탱’ 하기 쉬운 것은 뻔한 이치로,
옛날 다리들이 다 그렇고, 위 의궤 ‘남수문내도’도 그렇게 그려 있는데,
이번 복원에 그 점이 무시되었다는 뜻이다.
사진: 남수문-성곽 안쪽에서-근경
교각 아래 쪽은 5각으로 되어 있다.
저 정도면 된 것 아닐까? 어차피 복원이라기 보다 중건인 마당에.
사진: 1907년의 남수문
보(洑)
사진: 남수문의 보
지적 기사에 보(洑)에 대해 당국에 물어 본 내용이 이어진다.
… 화성사업소 담당자는 '홍수에 대비해서'라는 대답으로 일축했다.
<화성성역의궤>와 같이 복원을 할 경우 장마 때 떠내려 오는 나뭇가지 등
부유물들이 교각을 쳐 붕괴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물길은 통하고 부유물만 걸러 내는 시설로 얼마든지 방지할 수 있다.…
다른 방법이 있다니 있겠지만,
나는 무엇보다 그 복잡한 문제를 풀어 내고
남수문을 다시 세운 것을 평가하고 싶다.
(서울의 수표교는 아직도 장충단 공원에 있는데…)
홍수 방지에 다른 방법이 있다지만, 당국은 확실하게 하고 싶지 않았을까?
9개의 홍예(虹霓)
홍예(虹霓)란 ‘무지개’로, 건축에서는 아치를 말한다.
건축에 있어 기술의 정수는 아치와 돔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로마의 판테온,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 르네상스 시기 이름난 성당들,
다 ‘돔’이 건물의 중심인데, 돔은 아치에서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치-홍예가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서양의 석조와 달리 목조로 짓다 보니 큰 나무로 들보 쓰면
기둥 간격을 충분히 넓힐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 건 아니고, 홍예가 나오면 유심히 보게 된다.
사진: 남수문-성곽 바깥 쪽에서. 남수문의 홍예는 9칸이다.
서울 도성의 청계천이 흘러 나가는 수문-오간수문은 수문이 5개 인데,
(오간수문이란 이름 자체가 다섯 칸 수문이란 뜻이다.)
화성의 수문은 9칸이라고, 수원 사람들 상당히 뿌듯해 한다.
오간수문 옛날 사진:
오간수문 자리는 동대문(흥인문)과 동대문 운동장 사이다.
그 엄청난 교통량을 옛날 식 다리로는 감당이 되지 않으니
복원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조형물과 옛 사진을 붙여 놓았다.
청계천과 수원천은 거의 같은 넓이로 보이는데,
홍예 다섯에 비해 아홉이면 간격이 그만큼 좁다는 뜻이다.
사진: 준천도 중 오간수문-수문이 다섯 칸이다.
왼쪽 위로 동대문이 보이고, 오간수문 위에 막차가 쳐 있으니,
영조(英祖)가 준천(濬川) 공사에 친림(親臨)한 것이다.
그런데 수문에 쇠창살이 있다.
수문도 성곽이니, 수문을 통해 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한번 달아 놓고는 그 뒤로 여닫는 작동을 하지 않아,
영조 때 준천하면서 그거 여느라 애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화성 수문에도 쇠창살이 있었다.
사진: 화성성역의궤의 남수문 외도-성곽 바깥에서 본 그림.
쇠창살이 보인다.
보(洑)가 있으니, 이건 복원해도 괜찮을 것 같으나,
역시 문제가 될 듯 하여 그만 둔지도 모르겠다.
추어탕
남수문 사진 이리저리 찍다가, 시장기를 느끼고 팔달문 안쪽
시장통을 뒤지다가 골목 안 허름한 추어탕 집을 찾아 들어갔다.
옥호는 ‘남원골’이나 주인 내외는 경기도 말을 쓴다.
남원은 그냥 브랜드 인 듯.
요즘 추어탕 보통 9천원 정도 받는 것 같은데, 여기는 7천원이다.
한 구석에 요즘도 저런 게 있나? 싶을 정도로 만든 달력이 걸렸는데,
‘중년 나이트’ ‘부킹 전문’ ‘대형부킹룸 50실 완비’ 따위 글이 쓰여 있다.
그냥 나이트도 아니고 중년 나이트라!
뭔가 후지고 축축한 느낌이다.
부킹룸! 그것도 대형이라는데, 그 안에서 대체 뭔 짓들 할까?
추어탕 먹고 기운 차려서 나도 함 가 봐?
따위의 공상을 하며, 나온 음식을 먹으니 맛은 그저 그런 정도다.
천변(川邊)
추어탕을 먹고 나서 수원천을 따라 화홍문(華虹門) 쪽으로 걸어 갔다.
수원천 천변(川邊)을 따라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다.
수원천의 옛이름은 버드내-유천(柳川)인데, 광교산에서 발원하여
화홍문을 통해 성(城)안으로 흘러 들어와 남수문에서 밖으로 나간다.
얼마간 걸으니 극장같이 생긴 절이 나타난다.
부조(浮彫) 된 상(像)은 관세음보살 인 듯.
조계종이라는데, 생긴 건 월남 같은 데서 본 기분이 들 정도로 이질적이다.
건축술이야 요즘이 화성을 세운 정조(正祖) 때에 비해 월등 발달했겠지만,
주위와 조화를 이룬다는 생각 쪽으로는 꽝이다.
화홍문(華虹門)
얼마 걷지도 않아 화홍문이 벌써 나타난다.
수원성 남북 종심이 동서에 비해 짧다는 이야기다.
화성 둘레 4.24km 를 원주율-파이로 나누면 대략 1.3km 남짓인데
자로 재진 않았지만 남수문-화홍문 간격은 육, 칠백 미터 정도 아닐까 한다.
사진: 화홍문 원경-성곽 안쪽에서
수원 사람들이 그렇게 뿌듯해 하는 홍예 수를 세어 보니 일곱이다.
물이 들어오는 쪽은 7, 나가는 쪽은 9개 수문을 세운 것이다.
화(華)는 화성, 홍(虹)은 무지개다.
화홍문(華虹門) 현판은 정조 때 예서의 대가 유한지(兪漢芝) 의 글씨다.
(현판이란 말을 몰라 그런지, 간판이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좀 갑갑하다.)
문(門)은 기술적, 미적 어느 면으로 보나 걸작-마스터피스 다.
대한제국 때 발행한 지폐에 화홍문이 들어 갈 정도다.
수원 팔경 중 하나에 화홍관창(華虹觀漲)을 꼽으니,
화홍문 무지개 수문에 장쾌한 물보라가 친다는 뜻이다.
남수문과 마찬가지로 1922년 대홍수로 화홍문도 파괴되는데,
1925년 차재윤 씨 등이 모여, 1932년 5월 화홍문 복원을 이루어 내니,
우리나라 역사상 민간이 돈을 모아 문화 유산을 복원한 최초의 사례다.
사진: 화홍문-성곽 바깥쪽에서.
왼쪽 위는 방화수류정 인데 이 또한 빼어난 모습이다.
방화수류정 (訪花隨柳亭)이란 ‘꽃을 좇고 버드나무를 따라간다’는 뜻이다.
위 사진을 찍을 때 화성 홍보에 나오는 사진을 염두에 두었다.
따라 하느라고 했지만 솜씨 차이는 어쩔 수 없다. 카메라도 똑딱이고.
(그러나 차이는 기종보다 주로 실력차이에서 온다. 나는 또 이것까지 알고 있다.)
사진 : 화성 홍보 사진 중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스캔.
문(門)은 수문뿐 아니라, 개울을 건너는 다리도 되고,
성곽의 일부로 방어 시설이니 대포와 총을 쏘는 구멍이 나 있다.
또한 평상시는 성민(城民)들이 편히 쉬는 장소이기도 하다.
용연(龍淵)
화홍문 문 바깥에서 방화수류정쪽으로 걸어가면 연못이 나온다.
연못은 용연(龍淵)이고, 방화수류정 아래 언덕은 ‘용머리 바위’다.
방화수류정과 용머리바위, 섬의 나무와 꽃 사이로 보름달이 떠올라
물 위에 비치는 모습-용지대월(龍池待月)은 수원 팔경의 하나다.
말은 그런데, 보름달이 아닌 대낮에 내가 찍은 사진은 까칠하기만 하다.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던 장소이기도 하다.
정조(正祖)가 화성 건설을 결심하고 예정지를 돌다가 이곳에 와서 보다가,
‘광교산과 팔달산 정기가 여기 용머리 바위에서 만나고 있다.
산과 들이 만나고 물이 돌아 유천(柳川-곧 수원천)에 이르며
장안문(長安門; 곧 북문)을 잡아 당겨 화홍문과 이어져
앞과 뒤로 마주 응해 화성 전체를 제압하는 웅지이니
방화수류정을 지으라’ 고 명했다고 한다.
정조 대왕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지 모르나
대왕은 의외로 풍수지리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세자의 융릉을 택할 때도 윤선도의 풍수 이론을 참고했었다.
윤선도 하면 국문학의 대가로 알겠으나, 풍수 쪽 ‘이바고’ 또한 상당했다.
그런데 용연 못은 원형이다.
보통 우리나라 연못은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연못은 네모나고, 그 안에 섬은 둥글게 만든다.
그런데 이 용연은 왜 못이 둥글까?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썰(說)이 있다.
….용연이나 (*)곤신지는 사도세자를 위하여 만든 못이다.
(* 곤신지(坤申池) 는 사도세자 융릉(隆陵)의 못으로 또한 둥글다),
사도세자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다.
이무기와 용의 차이는 여의주가 있고 없고 다.
따라서 못을 여의주 모양으로 둥글게 만들었다…..
그러니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사도세자에게,
여의주를 물려 주려고 못을 둥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인데….믿거나 말거나… 아님 장난이고.
그러나 아주 장난만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화홍문 바깥에서 용연 쪽으로 올 때 계단이 있는데
거기에 괴수 조각이 하나 있고, 용 또는 이무기 같이 생겼다.
사진: 용연으로 오는 계단의 괴수 조각.
이거 이무기일까? 용(龍)일까?
여의주가 없는 거로 보면 이무기니,
그럼 용이 되지 못한 사도세자 인가?
용연에 물이 차면 이 이무기를 통해 화홍문 쪽으로 물을 뿜으라!
그러면 폼이 날 것이다!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보름날 용연의 달은 네 개이니,
하늘의 달, 물위의 달, 술잔에 뜬 달, 님의 눈동자에 있는 달.
하아…’님의 눈동자에 있는 달’ 이라..
이거 죽인다.
안타깝게도 나는 평생 이런 달을 보지 못하였다.
아니 볼 생각 따위를 하지 않았다.
집사람한테 당신 눈동자에 비친 달을 보고 싶소! 하면
드디어 미쳤군! 하지 않을까?
요즈음 다들 눈이 나빠 놔서, 눈동자 대신 안경이나
콘택트 렌즈에 비친 달을 볼지도 모르겠다.
못 안의 섬 왼쪽에 두루미 한 마리가 있다.
사진: 두루미. 이거 두루미? 새 종류에 관해 약해 놔서.
사진: 용연과 방화수류정 원경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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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복원이 아닌 보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군요
시멘트 페인트 이러한 소재로 복원이라 할수있을지
자료수집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 일가님들 성곽답사 코스로 둘러 봐야겠군요
세계문화유산 !! 멋진 설명까지 곁들이신 복원현장 구경시켜주시어 감사합니다 !! 꾸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