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37년 7월 7일,우연을 가장한후 고의로 중일전쟁을 일으켜 대륙을 본격 침공한 일본의 대본영(히로시마)은
개전 1년이 지나도록 눈에 보는 성과가 없자 당황하기 시작한다.즉 전쟁이 오래 갈것을 염려했다.일단 속전속결
계획이 어긋난 것이다.대륙이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이란 이름으로 나뉘어 자국민들 끼리 싸우고 있었고,여러곳
에서 군소 군벌들이 합종연횡으로 활개치는 광활한 땅을 빠른 시일안에 점령할수 없다는 것을 점차 인식하게 된
것이다.당시 일본 상황이 몹시 급하기도 했지만 대륙의 문화와 정세를 오판하고 있었던 것이다.일본은 특히 점
(도시)과 선(철도)으로 연결되는 도시만을 점령해 무차별 약탈,살인,방화로 유린하기 시작했고,이어지는 원성은
아주 높았다.본국으로 부터의 물자 조달도 어려웠다.이러자 군수물자의 현지 조달을 위해 자기들의 권력과 이익
만 추구하는 군벌들 보다 심하게 행패를 부렸던 것이다.
여러번 말한바 있지만 전쟁은 노름처럼 돈많은 놈이 이기고,물자 많이 가진자가 승리하는 것은 당연하다.정신
무장이란 것은 한계가 있고 전쟁을 일으킨자와 가진자들의 헛소리다.즉 전쟁은 돈벌이 사업의 하나인 것이다.
당시 빚더미에 올라 앉아 있던 일본도 결국은 세계의 공황과 맞물려 경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돈벌기 사업의
일환으로 울자겨자 먹기식으로 중일전쟁이란 쌩떼를 부린 것이다.일본이 선제 공격으로 시작한 전쟁이 전선마다
교착상태에 이르고,진흙탕에서 헤매는 기간이 오래 갈 것으로 예측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걱정한 것은 당연히
부족한 자원(돈<물자>과 인력)이었다.자원에는 전장의 인력과 병사(총알받이)와 군수품(물자)이었는데,당시
유일한 국제기구 였던 국제연맹의 말조차 듣지 않고 만주사변(1931)과 상해사변(1932)을 일으키며 연맹을 탈퇴
한 일본은 손을 벌릴곳이 없었다.
2, 결국은 일본의 권력자들은 세균처럼 제살 파먹는 작업에 돌입할수 밖에 없었다.일본 열도는 말할것도 없고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과 반도에서의 정책이 강경으로 일관했다.전쟁 수행을 위해 국민정신총동원령을
내리고,전쟁지원병 제도에 이어 징용,징병제까지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결국 일본 본토의 인력과 자원(돈)으로는
전쟁을 수행할수 없다는 진실이 1937년 후반기부터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이어 전쟁 회의론자들이 등장
했고,시간과 순서만 남았지 패전이 보장된 일본으로서는 이 전쟁(대동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자신이 없었다.우선
전쟁의 가장 중요한 총알인 돈이 없었다.일반 가정내의 가마솥과 놋그릇을 징발한후 녹여 전쟁 물자를 만들어서는
그 어떤 전쟁에서도 이길수 없는 것이다.
또 그동안 일본을 키워줬고 돈도 꿔주면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해 줬던 미국과 영국에 까지 등을 돌렸으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전장의 형국도 만들어 졌다.그동안의 우방이었던 英美를 향해 鬼畜같은 나라와 벌리는 전쟁을
스스로 ' 聖戰' 이라고 떠벌리며 세뇌 시켰지만,이는 마지막 발악이란 것을 어느정도 세상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수 있었다.
3, 세뇌를 위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총독부는 반도 조선에 황국신민화정책을 본격 추진(1937년 이후)한다.이들은
반도의 자원과 인력을 착취하기 위해 '國體明徵(국체명징),內鮮一體(내선일체),忍苦鍛鍊(인고단련)' 이란 3대 강요
정책을 본격화 했다.여기서 말하는 국체명징이란 것은 반도이자 조선이 '일본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나라 임을 만방
에 분명히 알리는 행위와 정신을 말하는 것이고,인고단련은 전쟁에 대비하는 학생과 국민들의 체력단련과 정신단련'
을 말하는 것이다.문제는 터무니 없는 내선일체라는 同祖同根論이었다.즉 일본과 한국인은 그 조상이 같아 근본적
으로 한민족이란 뜻을 조선인들에게 주입 세뇌 시키는 작업이다.이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 후에도
滿鮮과 일본은 뿌리가 같다고 5족협화의 선동으로 동조동근론을 써 먹었다.아무튼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내선일체
를 통해 반도 조선인들을 일본인들로 만들어 침략자의 적대시 함을 버리게 함과 동시에 본토인들 처럼 전쟁의 소모
품으로 이용하고 싶어했다.물론 여기엔 한국의 친일파들 활약과 공로가 아주컸다.
4, 문제는 內鮮一體의 이면 그림이다.총독부는 열도와 반도인들은 조상이 같은 한몸이자 동조동근을 일본의 입장
에서,또 일본을 우위에 놓고 말하고자 했다.그래서 일본인들이 신봉하는 '神社參拜,궁성요배,황국신민서사 암송,
일본어 상용화,창씨개명' 등을 통해 皇國臣民化 작업을 했으며,그것도 중일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그런데
중일전쟁이 교착상태에 이르자 더욱 서두르고 더 강력하게 실시했다.서두르다 보니 무리수를 쓰게됐고 본토에서
부터 전열의 이탈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사실 타민족의 臣民化 작업도 돈이 많이드는 사업이다.당연히 많은 학교
가 필요했다.그런데 이때 쯤의 일본은 돈이 없었다.그러자 열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크게 성장했다.어린 학생들을
세뇌시키는 학교에서의 황국신민화작업은 더욱 요란했고 철저하게 시행되었다.이어 조선총독부는 面 단위까지
신사 건립을 장려했고,가정에는 가미다나(家棚:시렁에 설치한 신사제단=축소신사)까지 보급했다.힌 옷까지 못
입게 했으며 장날의 장터에서 면장과 면서기들이 조선인들의 상징인 힌옷을 입은 사람들 뒤에서 먹물을 뿌리기도
했다.
친일파들은 이런 가붕을 설치한 집이 많았으나 기독교계의 반발이 심하자 가정의 신사(가붕) 설치는 자율에 맡겨
흐지부지 하게됐다.서울 남산 중턱의 조선신궁신사,부산 용두산공원신사,대구 달성공원신사,진해 제황산신사,전주
다가공원신사 등은 모두 총독부가 설치한 관폐사이자 국폐신사(총독부가 운영의 일체 비용을 대는 신사)였다.그런
데도 내선일체와 동조동근론에 동의하는 자가 적고,의미가 부여되지 않자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일본 군국주의자들
과 총독부는 마지막 최후의 강경 수단으로 거액을 들여 지금의 충남 부여를 내선일체의 발상지로 지정하면서 내선
일체의 큰 상징인 '扶餘神宮' 짓는다는 계획을 총독부 령으로 발표를 한다.
5, 이 계획은 1938년(소화13년) 11월 19일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每日新報에 자세히 실려있다.이때의 신문 기사내용
을 간추려보면
"충남 부여를 내선일체(동조동근)의 발상지로 지정해,1939년 부터 약 28만평 부지에 총공사비 200만엔(혹은 300만
엔)이나 소요되는 대규모 부여신궁(국폐사)신사 건설사업을 벌리기로 했다"
란 기사가 실려있다.
그러면 반도의 충남부여가 일본인들이 내선일체와 동조동근론의 발상지로 생각하고 지정한 근거는 어디서 나왔나?
조선의 고대사를 말해주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신구당서엔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즉 어느 정사서의
기록에도 없다.단지 반도에서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1938년에 반도조선사를 만들었다는 일본인들의 역사서이자
정사서라고 말하는 '日本書紀' 기사의 일본 역사가 해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즉 일본서기 권제27,제38대 천지왕2년
(663년) 9월조 기사를 활용했던 것이다.이때의 기사를 일본서기에서 간추려 보면(원문은 각자 찾아 보시길),
'9월 신해삭(계해삭) 정사(7일) 백제의 周留城(州柔城)이 마침내 唐 에 항복하였다.이때의 국인들(일본인)이 서로
말하길 "州柔가 항복 하였다 이일은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수가 없는 일이다.百濟란 이름은 오늘로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墳墓가 있는 곳을(부여) 어떻게 갈수가 있겠는가? ~중략~
기사를 적극 활용한 것이다.즉 반도의 충남부여가를 총독부가 만들어 놓은 3국시대 백제의 마지막 왕도이자 도읍지
로 지정한 것에 그대로 일본서기 기사를 강제 대입시킨 것이다.즉 억지를 부린 것이다,일본서기 기록에도 반도의 충남
부여가 삼국사기 기록에 의한 백제 의자왕이 패망한 그 부여이자 백강 지역이 아니라고 일본서기 기록자체가 말해주는
데도 말이다.바로 역사는 이런것이다.역사가 강자의 기록이자 해석이란 말이 바로 이런 말에서 나왔다.해석학이기도
한 역사는 당대의 권력자(정치권력의 하수인인 해석권력을 가진자들)의 해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돌아
가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강제 설정은 반도의 각처에 뿌려진 의병들의 聖地 처럼 몇십년 세월이 흐른 뒤에는 슬그머니
없어지거나 또다른 역사의 정설이 되기도 하는 절차를 밟는다.많은 역사적 사실들이나 유적들이 그렇다.
6, 아무튼 내선일체와 동조동근론을 앞세워 조선의 정체성을 말살하려 했던 근본 저의에는 반도에서 조선의 색체를
없에는 것이고,조선의 정체를 모르게 하려는 의도였다.그런후 반도의 젊은이들을 일제가 벌린 이러 저러한 전쟁에
총알받이로 적극 동원하려는 의도였다(근로정신대,보국대 징발,공출,징병등에 적극활용).그러나 부여신궁(신사) 건설
계획은 근로봉사대 연인원 약 2만명을 동원했고,또 동원하여 1943년에 완공키로 했으나 전선이 넓어지고 일본의 패전이
임박해 옴에따라 완공이 불투명해 졌다.특히 영미와 전쟁을 벌리면서 태평양과 인도차이나에서의 전황이 극도로 불리
해지고,또 본토의 미공군들의 맹폭이 임박해지자 내선일체 발상지이자 동조동근의 본부라고 외쳤던 부여신궁 공사는
자연스럽게 중단됐다.
이전과 이후에도 있었지만 역사의 연구와 진행 방향은 해당시대의 현재란 정치상황과 맞물려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역사는 모두 해당 시대의 현대사라고 말하기도 한다.만약에 당시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거나 1945년 이후
몇년지나 패망 했더라면 1939년 총독부 시행으로 1943년 완공하려 했던 충남부여의 내선일체 동조동근의 발상지
였다는 상징물로의 부여신궁은 요한하게 낙성식을 했을 것이고,지금도 그 유허지가 남아 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부여에는 거창한 정양문이 있는 알수없는 백제 황제의 궁전만이 거액을 들여 지어놓고 있다.만약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 했다면 지금의 충남 부여군민들이 사는 그땅은 아마도 현재의 무지한 일본인들이 조상의 무덤을 찾는다고 왕래
하는 앞마당과 뒷마당이 됐을 것이다.역사는 바로 이런 겁니다.
첫댓글 강자가 거짓 으로 엮은 역사가 미치는 폐해를 벗어 나기가 쉽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요.그러기에 대륙조선사 연구회 회원들이 다다익선으로 모여서 나름의 성과를 얻어내야 하지 않겠는지요.처음에는 친목으로 그 다음은 공부로 이어져 한국사에서 동양사로 이어 세계사로 그리고 지구 전체의 인류사로 이어지는 끝없는 공부를 해야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