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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비라는 붓다와 동시대인으로서 같은 지역을 여행했고 같은 계층의 사람들을 자주 만났지만, 붓다와 만난 적은 없다. 왜 붓다가 오늘날에도 존속하고 있는 종교적 공동체를 조직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인물인, 그의 가장 강력한 최초의 라이벌인 마하비라를 피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 두 사람은 생애나 정신적 지향성에 있어서 적지 않은 유사점을 보인다. (...) 또 두 사람 모두 두드러진 ‘이단적’ 인물이었다. (...) 하지만 그들의 기질은 상당히 대조적이어서 결국 그들의 가르침은 조화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미르체아 엘리아데) |
마하비라와 자이나교의 성립

BC 1500년경부터 인도로 들어온 아리아인의 신앙이 체계화되면서 형성된 힌두교 경전 [베다]는 이후 수천 년간 인도인의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원리가 되었다. 그러다가 BC 6세기경에는 상공업이 발전하고 새로운 문화가 대두하며 기존의 힌두교 전통에 반발하는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로 편력 수도자로 이루어진 여러 개혁가들은 힌두교의 희생제와 일원론적 관념론, 그리고 브라만 권력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낸 두 가지 운동은 자이나교와 불교였다.
자이나교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에는 일단 ‘마하비라’라는 인물을 이야기해야 한다. ‘마하비라’(Mahavira)는 본명이 아니라 “위대한 인물”이나 “영웅”이라는 의미의 경칭이다. 고대의 인물이 대개 그렇듯이 그의 생애도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적으며, 종교 분야의 인물이 대개 그렇듯이 후대에 가서는 점차 신비화되어 그 실제 모습을 알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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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비라의 인격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미르체아 엘리아데) 다만 그의 생애에 관한 자이나교의 전승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마하비라의 본명은 ‘바르다마나’(Vardhamana)이며, 초기 불교 경전에서는 ‘니간타 나타푸타’(Nigantha Nataputta)로 일컬어졌다. BC 599년에 바이살리 인근의 크샤트리아 가문에서 태어났다.(편의상 이 글에서는 ‘마하비라’로 명칭을 통일한다. 아울러 생몰년도는 워낙 이견이 많아 일단 자이나교의 전승에 따랐다.) 군주의 아들이었던 마하비라는 어려서부터 호화롭고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지만, 30세 때 지위와 재산을 버리고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다른 교단의 수행자와 함께 수도했지만 나중에는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으며, 금욕과 불살생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며 12년간 고행을 했다. | |

열반에 드는 마하비라. 자이나교 경전 가운데 하나인 <칼파수트라>의 한 대목. 1472년경. <출처: wikipedi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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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비라는 13년째 해의 여름에 깊은 명상 속에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육체를 비롯한 물질세계, 그리고 모든 욕망에 대한 승리를 거둔 ‘지나’(Jina), 즉 “정복자”가 되었다. 이후로 마하비라의 추종자는 ‘자인’(Jain)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으며, 바로 여기서 ‘자이나교’(Jainism)라는 명칭이 나왔다. 이후 마하비라는 30년간 신도들을 이끌고 가르치다가, BC 527년에 72세를 일기로 해탈하여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는 마하비라의 사후 1세기가 지나 형성된 경전과 후대의 전승에서 말하는 내용이므로 확고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후대의 전승에서는 마하비라를 자이나교의 역대 ‘티르탕카라’(Tirthankara), 즉 “여울[건널 수 있는 길]을 만드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즉 마하비라는 제24대 티르탕카라이며, 그 이전에도 무려 23명의 다른 티르탕카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중 제23대인 파르슈바는 역사적 인물이었지만, 그 이외의 인물은 실존 여부가 불확실하다. 이것은 후대의 자이나교에서 일종의 법통 만들기를 시도한 결과로 추정된다.(가령 불교의 경우도 외부에서는 고타마 싯다르타를 그 창시자로 간주하지만, 내부에서는 그 이전에도 수많은 붓다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경향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오늘날의 자이나교에서는 마하비라를 그 ‘창시자’보다는 오히려 ‘개혁자’로 간주한다. 여하간 마하비라 때에 와서 자이나교가 지금처럼 종교로서의 체계를 본격적으로 갖춘 것은 사실이다. 인도 종교 사상의 흐름에서 볼 때 자이나교 자체는 아주 독창적이거나 새로운 종교까지는 아니었다. 가령 대표적인 교리인 불살생조차도 이전의 힌두교 사상과의 연속성이 두드러진다. 다만 “그러한 신념을 열심히 엄격하게 실천한 면에서는 마하비라와 비교할 만한 인물이 전혀 없었다”(J. B. 노스)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 |
자이나교의 이론과 실천

7세기의 자이나교 철학자 하리바드라는 다음과 같은 우화를 이야기했다. 한 남자가 길에서 야수의 습격을 받고 몸을 피하러 마른 우물 속으로 뛰어든다. 우물 벽에 자라난 갈대를 붙잡아 간신히 추락을 면했지만, 우물 밑에는 또 다른 야수가 입을 벌리고 있다. 벽에서는 흰 쥐와 검은 쥐가 갈대를 갉아대고 있어서 조만간 추락이 확실하다. 그러나 남자는 이런 위험에도 아랑곳 않고 벌집에서 떨어지는 꿀을 맛보며 모든 위험을 잊는다. 훗날 톨스토이가 다시 이야기해서 더욱 유명해진 이 우화(물론 자이나교 고유의 우화까지는 아니다.)는 현세를 부정한 자이나교의 세계 인식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비록 여러 가지 면에서 힌두교에 대한 반발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자이나교 역시 그 바탕에는 힌두교의 세계관이 깔려 있었다. 가령 업과 윤회의 문제를 당연한 사실로 전제한 것이 대표적이다. 자이나교에서는 인간의 행위 하나하나마다 쌓인 업이 마치 티끌처럼 영혼에 달라붙기 때문에, 생애 중에 엄격한 금욕과 고행을 통해서 영혼을 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자이나교가 완전히 새로운 사상을 전개했다고 평가하기는 곤란하더라도, 힌두교에서 제기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독특한 시각의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의의가 있다.(이는 불교도 마찬가지다.)
자이나교에서는 이 세계의 사물을 생물(지바)과 무생물(아지바)로 구분했다. 생물 중에서는 오감을 모두 지닌 인간이 가장 발달했고, 오감 중에 촉각만 지닌 식물이나 사대(四大: 地水火風)가 가장 저급하다고 보았다. 영혼은 불멸의 존재이지만, 물질계를 벗어난 상태에서만 순수하다고 보았다. 절대적인 유일신의 존재는 부정했지만 유한한 존재인 신의 존재는 인정했으며, 불교와 마찬가지로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을 성취하는 것을 급선무로 보았다. 심지어 단식을 통한 자살까지도 해탈을 성취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인정한 점은 논란의 여지도 있어 보인다.
그래도 해탈을 성취하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은 금욕과 고행이었다. 마하비라의 가르침은 후대에 ‘다섯 가지 서약’(五大誓約)으로 요약되었다. 첫째, 어떤 생물도 죽이지 않는다(불살생). 둘째, 어떤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셋째, 어떤 탐욕도 지니지 않는다(무소유). 넷째, 어떤 음욕도 품지 않는다. 다섯째, 어떤 집착도 갖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 서약에는 구체적인 세부 실천 항목들이 따라붙는데, 워낙 엄격하다 보니 수도자가 아닌 일반 신도는 차마 지킬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가령 다음과 같은 일부 내용을 보면 극단적이다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다.
“승려들은 대지의 육신을 해치지 않기 위해 땅을 파지 않는다. 그들은 물의 육신을 해치지 않기 위해 수영과 목욕, 또는 빗속에 걷는 것을 피한다. 불의 육신을 해치지 않도록 불을 켜거나 끄지 않는다. 공기의 육신을 해치지 않기 위해 갑작스런 운동을 하지 않는다. 길가에 자라고 있는 식물을 해치지 않기 위해 걸을 때에도 극도로 조심하고 있다. 그들은 보통 작은 식물들이 밟히지 않도록 옆으로 치우기 위해 앞길을 [빗자루로] 쓸고 간다. 그리고 공중에 있는 생명체를 들이마셔 파괴하지 않도록 코를 헝겊으로 가리고 있다.”(존 M. 콜러) | |
자이나교 수도사는 채식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무화과처럼 작은 씨앗이 많이 들어있는 과일은 먹을 수 없었으니, 그런 씨앗 하나하나가 생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벌꿀도 먹을 수 없었고, 심지어 물을 마실 때에도 혹시나 그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생명체를 죽이지 않을까 우려해서 헝겊에 걸러 마셨다. 라다크리슈난의 지적처럼 “사실 엄격한 의미에서의 아힘사[불살생]는 실천할 수 없다.” 따라서 일반 신도를 위해서는 올바른 믿음(正見)과 지식(正智), 그리고 행위(正行)라는 세 가지 보물(三寶)을 통해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더 완화된 교리가 제시되었다.
그래도 자이나교의 핵심인 불살생의 원칙은 여전히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가령 농사를 짓더라도 해충이나 가축을 죽이는 일이야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이나교 신도들은 점차 농업 이외의 사업, 특히 상업으로 진출해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막스 베버도 자이나교가 이런 면에서 “프로테스탄트 금욕주의와 지극히 흡사하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자이나교는 비록 평신도라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도덕을 실천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자이나교가 비록 소수이지만 오늘날까지 인도에서 명맥을 유지한 까닭을 특유의 도덕성과 경제적 역량에서 찾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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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와라에 있는 자이나교 사원의 내부. 자이나교 특유의 정교한 사원 건축 양식은 인도 미술 및 건축 분야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출처: Wikipedia> | |
자이나교의 역사와 영향

마하비라의 사후에 자이나교의 공동체는 분열을 겪었다. 전승에 따르면 BC 3세기에 자이나교의 장로인 바드라바후를 따르는 수행자들과 그 제자인 스툴라바드라를 따르는 수행자들 간에 교리상의 갈등이 벌어졌다. 이후 전자의 세력은 ‘공의파’(空衣派, Digambara), 후자의 세력은 ‘백의파’(白衣派, Svetambara)로 일컬어졌다. 공의파는 심지어 옷도 입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엄격한 금욕 수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백의파는 최소한의 편의는 인정해야 하며 외양에만 집착하는 것이 도리어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양측은 여성의 승단 생활 여부 등의 세부 문제에 관해서도 뚜렷한 견해차를 드러냈다.
마하비라가 사망한 지 1세기 뒤인 BC 4세기 말에 파탈리푸트라에서 경전 수립이 처음 시도되었고, 이후 수백 년이 더 지나서야 59종의 정경이 성립되었다. 불교와 자이나교 사이에는 종종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되지만, 정작 초기 불교에서는 자이나교를 이른바 ‘육사외도’(六師外道) 가운데 하나로 언급하며 일종의 라이벌로 간주했다. 그런가 하면 힌두교의 전통에서 인도 철학사를 집필한 철학자 라다크리슈난은 이렇게 지적한다. “업과 윤회의 문제에서 보이는 이들 두 종교 간의 유사성은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인도 철학파들의 공통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종교학자 J. B. 노스는 자이나교와 불교가 업과 윤회의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들고 나옴으로써, 이전까지만 해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인도 종교 사상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의의를 평가한다. 존 M. 콜러는 자이나교의 기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록 불교도와 힌두교도도 불살생을 인생의 근본적인 규칙으로 인정하고 있다 해도, 자이나교도는 이 원리를 가장 완전하게 발전시켰고, 가장 엄격히 적용해 왔다. (...) 그러나 인도인의 삶에 대한 가장 커다란 기여는, 도덕적인 덕과 정교한 논증에 대한 자이나교도의 모범일 것이다.”
“불교와 달리 자이나교는 인도 서민의 종교도, 지배자의 종교도 되지 못했고, 인도 아대륙의 바깥으로 확대되지도 못했다.”(미르체아 엘리아데). 동시대에 시작되어 한때 인도 전역은 물론이고 해외로까지 뻗어 나갔던 불교와 비교해 보면 자이나교의 세력 한계는 뚜렷하다. 현대의 자이나교도는 2001년 기준으로 약 8백만 명으로 집계된 바 있지만, 인도의 전체 인구를 고려해 보면 결코 다수라고는 할 수 없다. 불교와 달리 오늘날까지 인도에서 명맥을 유지한다는 점이 특징이지만, 종종 ‘힌두교도 겸 자이나교도’를 자처하는 신도가 있을 정도로 그 고유성은 많이 감소했다는 지적도 있다.
초창기의 자이나교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도 마우리아 왕조의 창시자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일 것이다. 그는 훗날 왕위에서 물러나 사망할 때까지 자이나교 수행자로 편력을 떠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찬드라굽타의 손자가 바로 젊은 시절에 벌인 전쟁의 참상을 뒤늦게 반성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자비를 베푼 군주 아소카 왕이다. 일각에서는 여러 가지 증거 상으로 아소카가 불교도가 되기 이전에 자이나교도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아소카의 유명한 관용 정책에서는 불교 못지않게 자이나교의 영향력도 없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20세기의 인물 중에서 자이나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마하트마’ 간디다. 물론 그는 정통 힌두교도이긴 했지만, 이슬람교나 불교나 기독교 같은 타 종교에 대해서도 항상 존중하는 자세를 취한 바 있다. 어린 시절의 간디는 자이나교의 세력이 두드러진 뭄바이 인근에서 자라났고, 종종 집안을 드나들던 자이나교 성직자들로부터 이런저런 도움과 조언을 얻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따라서 간디가 고수한 철저한 채식주의와 비폭력(이것 역시 ‘아힘사’[불살생]의 수많은 번역어 가운데 하나다) 사상 역시 자이나교에서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 |
참고문헌: J. B. 노스, [세계종교사 (하)], 1986; 존 M. 콜러, [인도인의 길], 1995; S. 라다크리슈난, [인도철학사 2], 1996; 미르치아 엘리아데, [세계종교사상사 2], 2005; 김미숙, [불살생의 이론과 실천: 인도 자이나교의 수행론], 2007
- 글 박중서 / 출판기획자, 번역가
-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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