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진어(女眞語)와 영어
한부울
여진인은 코카시안인가?
여진(女眞)이라하는 것에는 두 가지 우리가 아는 역사 원칙이 있다.
하나는 삼한영역 북계(北界) 서북면(西北面)과 동계(東界) 동북면(東北面)에 포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하나는 만주족(滿洲族)의 시원(始原:origin)라는 것이다.
여진족이라는 표현은 10세기 여진족 언어의 "여진"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으며 이 단어의 기원이 현재 학계에서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만큼 역사적으로 실사에 확실한 보장을 받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진어란 실체가 없는 동아시아대륙사를 만들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때문에 좀 과하게 말을 하자면 여진어(女眞語)라고 할 수 있는 실제언어를 옆에 두고 엉뚱한데서 찾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짓은 근세기에 서양세력들에 의해 근대사가 태동하였던 모든 상황들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감안할 때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다.
이러한 사실들을 집어보고자 하는 것은 아무래도 17세기 조선 동계 동북면에서 집거했다는 사실과 서세들이 그곳으로부터 힘이 비축이 되어 시작된 역사가 오늘날 서양사라는 사실에 눈을 뜬 것이다.
예를 들면 실제로 동호(東胡)라고 하는 퉁구스족이 과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동아시아 시베리아지역에 존재하였다고 하는 퉁구스인가에 대한 회의가 근원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동호라 하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호(胡)는 아메리카대륙으로 인식하고 있는 만큼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있었던 종족을 동호라 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실들은 이미 북아메리카대륙에는 서양인들이 오래전부터 포진 했다는 설명이 된다.
물론 서양인이라는 것은 기득권밖에 세력이다.
그러니 지금 아시아대륙 시베리아 동부 전역(全域) 및 흑룡강 유역, 북만주(北滿洲)등에 널리 분포되었다고 하는 언어군(言語群)이란 말은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이다.
현재 조선족사람들이 보는 관점의 여진인들은 조선인을 대함에 있어서 타민족(非我民族)이 아니라 동일한 민족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본질적으로 보면 동일한 민족이나 분업으로 인한 문화상으로 잠시 낙후(落後)하였을 뿐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이 있다.
나는 여기서 잠시 생각한다.
우리민족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종족적 관념인가 아니면 역사적인 관념인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모습이 황인종으로 고체화 되었기 때문에 우리민족이라고 하면 우리얼굴 생김새를 고집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세계삼한역사실체들을 볼 때 조선이나 코리아란 국가 명칭아래 그 구성원들이 황인종뿐만 아니라 코카시안(Caucasian)도 존재했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일상적인 사실들에서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데 본 블로그 글"매독(梅毒,syphilis)이 발병된 조선이 한반도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4"에서보면 성종 13년 임인(1482)윤 8월20일(병술)기사에 성균관을 비방하는 배율시가 벽에 붙자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충여(蟲餘) 즉 벌레같은 사람은 직강(直講) 김석원(金錫元)을 가리킨 것이니, 김석원은 이때 감창(疳瘡)을 앓고 있었으며라 든가..홍경손과 임수겸은 ‘백발(白髮)을 이고 백마(白馬)를 타는 자’라고 기롱(譏弄) 놀림에 있어, 성균관의 벽상(壁上)에 쓰기를, ‘나그네여, 나그네여, 그 말도 또한 희구나. 하얀 사람의 흰 것이 백마의 흰 것과 다름이 없구나.’[有客有客 亦白其馬 白人之白 無異於白馬之白] 하였다는 사실에서 백발을 이라고 하는 것은 가발을 쓴다라고 이해할 수 있어 백발(白髮)의 가발은 통속적인(popular)권위와 위엄의 상징인 풀 보텀드 위그(full-bottomed wig)이고 아래쪽에서 넓어진 장발 "전두가발"이라고 하는데 프랑스 루이14세부터 귀족들에게 널리 사용된 것임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백발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직강 김석원은 매독, 감창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이것이 대신들사이에 지탄에 대상이 되었으며 당시 높은 벼슬의 대신들이 공공연하게 백인 매춘부와 함께 노놀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한가지 예를 더 들자면
面靑而白, 鼻高而長, 鬚些而黑,
즉 눈이 푸르고 얼굴이 희며 코가 높고 길며 수염은 적지만 검고...라는 이 간단한 문장은 영조시대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인물로 1728년 왕권다툼이었던 이인좌의 난(李麟佐─亂) 혹은 무신란(戊申亂)이란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령이 떨어진 황진기(黃鎭紀)의 모습을 나타낸 수배 글인데 "얼굴은 푸르고 희다"라고 읽는 것이 아니라 통속적인 해석은 "눈이 푸르고 얼굴이 희다"라고 해석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황진기 역시 백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조선에는 백인을 쉽사리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백인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백인이 관직의 정점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시대라는 사실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
또 본 블로그 글 "삼한역사 말살의 도구로 사용된 삽화(揷畵)와 사진(寫眞)의 진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8"에서 유태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의 삽화에서 한사람은 갓을 쓰고 한 사람은 망건을 쓴 그림을 볼 수 있고 삽화아래를 보면 분명하게 Caucasian race(1880)이라고 기재 되어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노-코카시안(Sino-Caucasian)란 단어 역시 "Sino" 가 chinese 라는 공식 때문에 동아시아로만 보아야 이유가 없다.
여진과 삼한의 얽힘
여진을 숙신(肅愼) 이두식 표기인 "쥬신"이라고 하여 조선으로 발음한다든지 12세기초 김함보의 후손 아구다 즉 아골타(阿骨打:Aguda)는 여진인부락을 통일하여 금나라(金:1115-1234)를 건립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등은 이와 같은 사실에 공감을 부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여진족추장 금나라(大金:1115-1234) 시조라고 하는 완안함보(完顔函普:941-960)를 우리는 김함보(金函普)라 하고 신라(新羅)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완안(完顔)은 여진어(지금 현재의 만주어)로 왕기얀(Wanggiyan)을 임시로 빌려 가차(假借)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한어로 번역하면 '왕(王)'이라는 뜻이라 하였으니 왕함보가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김(金)을 왕(王)이라 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신라의 김씨(金氏)왕조나 고려의 왕씨(王氏)왕조가 같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여태 반도역사를 보면 혼란투성이로 무엇인가 애초부터 얽히고 설키게 만들어 의문이 풀리지 않던 사실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보면 자연스럽게 풀리는 것인데 신라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전체를 이양하는 과정의 의혹이 자연스럽게 풀리는 것이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신라는 김씨왕조가 주를 이루었고 고려는 왕씨 왕조로 변모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금(金)왕조를 왕(王)왕조라 하는 것은 바로 고려왕조를 이야기 한 것이다.
삼한이라고 하는 마한진한변한(馬韓辰韓卞韓)에서 고려백제신라(髙麗百濟卞韓新羅)까지 변이된 것은 근세기 역사학자에 의한 것이지 결코 나라가 분리된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으며 삼한왕조가 변한 것은 "성씨"가 변한 것일 뿐 아무것도 변할 것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근세기에 라틴어와 한자어가 분리되면서 하나의 역사에서 동아시아대륙사가 생성되었고 하나의 역사사실을 이중적인 역사를 만들면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혼란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금(金)나라는 신라고려(新羅高麗)인 것이다.
그렇다면 몽골 원(元)도 역시 고려 왕(王)씨의 또 다른 변형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여진의 금(金)왕조는 게르만이라고 할 수 있는 거란족의 요(遼,916-1125)를 합병하고 1153년에 수도를 요(遼)의 남경으로 이동하여 이곳을 중앙수도인 중도(中都)라고 불렀던 사실은 이상하게도 게르만의 영향을 받은 영국역사와 일맥한다는 것이다.
여진(女真)
可能源自3,000多年前的肃慎,汉至晋时期称挹娄,南北朝时期称勿吉(读音“莫吉”),隋至唐時期称黑水靺鞨,辽至金时期称“女真”、“女直”(避辽兴宗耶律宗真讳)。辽朝女真有生女真、熟女真之分。到明朝后期仍然自稱為女真,清朝时改为“满州族”。
“女真”在明朝初期分为建州女真、海西女真、野人女真三大部
勿吉有七部: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车骨部,曰拂涅部,曰号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
여진을 여직(女直)이라고도 하고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可能源自3,000多年前的肃慎), 한(漢)나라 때는 읍루(汉至晋时期称挹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南北朝时期称勿吉), 수(隋)·당(唐)나라 때는 말갈(隋至唐時期称黑水靺鞨)로 불리었던 민족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10세기 초 송(宋)나라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하여 명(明)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淸)나라때는 만주족(清朝时改为“满州族”)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최종 정리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에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만주(滿洲)를 어디라고 했던 것인가?
바로 중앙아메리카대륙 목구멍이라고 분명하게 하였다.
후금(後金)이라 하는 것도 목구멍과 옷깃이란 요해처(要害處)라 하였고 이것을 영어로 "내로우넥(Narrow Neck)"이라 한다는 사실까지 밝혀었다.
이것은 줄기찬 연구에 의해 얻어진 결과이다.
요금시대(辽金:961-1279)에 걸쳐 여진(遼至金时期称“女真)이라고 불리었다는 것을 알 수있는데 요조(遼朝)때 거란족(契丹:Khitan:907-1125)이 흑룡강(黒龍江)유역의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여진족(女眞)이라 불렀고 동북지방의 생여진(生女眞)은 고려 함경도일대에 걸쳐 거주한 동여진(東蕃)을 말하는 것이며 서남지방에 있던 숙여진(熟女眞)은 고려의 북서부에 있던 압록강 유역양안(兩岸)의 서여진(西蕃)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생여진을 금방 새롭게 생긴 종족이라는 것이며 숙여지는 옛날 부터 존재한 종족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조선 동북면에 있었던 여진은 어쨌거나 17세기부터 새롭게 생성된 종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 진출한 청교도 생성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고려(高麗)초기에 여진(女眞)이 고려를 상국(上國)으로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여진을 고려는 회유하여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歸化人)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고려에서 여진인들을 특별대우를 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당시 여진인은 활·말·화살·모피 등 전쟁도구를 조공(朝貢)하였고, 의료·식량·농기구·그릇 등 생활필수품을 주로 수입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상업이 발달한 나라에서 생필품을 생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경공업발달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여진으로부터 고려가 원자재를 공급받고 대신 생필품을 공급하여 유익하게 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물론 산업구조면에서는 볼 때 산업기반 시설을 이용하여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바로 고려라는 것도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그 만큼 경공업이 발달이 된 고려는 선진국이었던 것이 틀림이 없다.
이것은 근세기에 유럽서양인들이 북아메리카대륙에 정착하면서 인디언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그들은 식량과 농기구를 얻어 농사를 지울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직접적으로 사냥을 하여 모피를 얻는 일은 여진인들이 하였고 그것을 다시 재생산 가공기술이 축적된 고려에게 조공으로 바쳤다는 사실은 모든 상거래 중심은 고려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숙종(肅宗:1054-1105,재위:1095-1105)때 하얼빈(哈爾濱)에서 일어난 완안부(完顔部)추장이며 금(金)을 건국한 태조(太祖) 아구다(阿骨打)의 숙부(叔父) 영가(盈歌:1053-1103)가 여진족을 통합, 북간도(北間島)를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하였다는 사실과 1104년(숙종 9) 영가의 뒤를 이은 조카 오아속(烏雅束:1061-1113)은 더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한 여진부락을 다스렸고 동시에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하였으며 때문에 고려(高麗)에서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보내어 오아속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처음에는 실패하였고, 다시 추밀원사 윤관(尹瓘:1040-1111)을 보내 겨우 화맹(和盟)을 맺게 되지만 정평(定平)·장성(長城)외의 여진부락은 완안부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노르망디 지역을 잃었다가 다시 찾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윤관은 다시 기병(騎兵)의 양성과 군량(軍糧)의 비축 등을 건의하여 기병(騎兵)인 신기군(神騎軍),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승려부대 항마군(降魔軍)으로 조성된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고 훈련시켜 1107년(예종2)에 윤관을 도원수(都元帥)로, 오연총(吳延寵:1055-1116)을 부원수로 하여 군병(軍兵)17만으로 함흥평야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청(北靑)까지 진출하였으며 함주(咸州)를 중심으로 9성(九城)을 쌓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이야기로서 위 노르망디 지역쟁탈전을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프랑스가 고려라고 생각하면 의미가 배가 됨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남방(南方)의 민호(民戶)들을 옮겨 9성(城)에 이주시켰으며, 특히 길주성(吉州城)안에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와 진국보제사(鎭國普濟寺)를 창건하고 윤관은 개경(開京)으로 개선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9성(城)을 쌓은 뒤 방어자체도 어려웠지만 여진족이 9성(城)을 돌려달라고 애원하여 9성(城)을 쌓은지 만1년(年)만에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는 사실에서 무엇인가 이때부터 꼬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 뒤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1115년 국호를 금(金)이라 칭하였으며 1117년 고려(高麗)에게 감히 형제관계를 요구하였으며 1125년 요(遼)를 멸망시킨 뒤에는 고려(高麗)에게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송(宋)나라와의 교류관계도 끊을 것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지만 결국 1234년에 몽고(蒙古)에 의해 멸망하게 되면서 만주(滿洲)에서 부족단위로 할거(割據)하거나 압록강(鴨綠江), 두만강(頭滿江)연안에서 빈번히 소란을 피웠다는 사실에서 여진의 주요 역사를 말할 수 있다.
여진어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여진어는 무엇인가?
초기 여진문자는 1120년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명에 따라 완안희윤(完顔希尹)에 의하여 발명되었다고 하며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게르만언어라고 할 수 있는 거란 문자에 기반한 것으로서 거란문자(게르만)는 다시 한자에 기반하였다고 한다.
여진 문자는 금나라가 멸망하자 급속히 사라졌고 여진어는 입 말로만 살아남게 되었다고 한다.
16세기(중세영어기간)말까지 100년간 영어가 사용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매우 같다고 할 수 있다.
여진족은 몽골어와 중국어를 이용해서 문자생활을 한 것이 같고 다시 만주어가 문어로 정리되기 시작하면서는 만주어를 이용한 문자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근세영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과 비교가 가능할 것 같다.
여진문자(女眞文字,Jurchen script)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서 쓰였던 표어문자(表語文字, logogram)의 한 갈래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문을 염두에 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한문을 표어문자라고 하거나 상형문자를 바탕으로 둔 것이라고 하는 것처럼 로마자 역시 페니키아 문자와 이집트 상형문자에 형태적으로 다다르고 있음을 알 수 있어 굳이 영어가 표어문자가 아니라는 말은 할 수가 없다.
특히 여진어는 거란 문자의 영향을 받았고, 또한 여러 글자 또는 부호가 결합되어 하나의 글자를 이루는 제자원리(製字原理)에서 한자를 본으로 삼았다 하였으며 한족 한문화에 맞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려 했던 북방민족왕조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으나 이러한 설명을 다 믿을 수는 없다.
한간에는 라틴어와 한문을 읽고 쓸 수 있었던 중세의 엘리트들이 지식을 독점하면서 당시의 사회를 암흑의 시대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볼 수있는데 이것은 이들 언어가 가진 특수성에서 한정된 부류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된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때문에 통용어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한문은 동양, 라틴어는 서양식으로 분리되기전 통용어는 과연 어떤 언어였을까?
고전 산스크리트어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을 언어학자들은 밝혔고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음차(音借)한 경우가 많다는 것은 산스크리트어를 기본으로 한문과 라틴어가 생성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근세기에 서양을 지배한 라틴어와 동양문화를 지배한 한문은 근세기 전 하나의 역사에서는 같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영어와 한문이 전혀 다른 계통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 여진문자는 거란문자 즉 로망스언어군(Romance languages)과 같이 1119(태조 5)년에 완안희윤(完顔希尹)이 만든 대자(大字)와 희종(熙宗)이 만든 소자(小字)가 있으며 대자가 먼저 만들어지고, 소자가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도 로마자 알파벳의 대문자와 소문자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게일어(Gaelic)는 대문자로 쓰인다는 것을 보면 영어도 대문자가 먼저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도 여진어와 비교된다 할 수 있다.
좀 더 깊숙하고 정확한 것은 언어연구학자들에게 맡겨야 할 이야기지만 세계삼한역사연구에서 생성된 의혹에서 영어가 여진어와의 비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가 차고도 넘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현재 남아있는 여진문자는 명대(明代)에 편찬된 화이역어(華夷訳語)등이 있는데 해독이 아직까지 불명확한 것으로 남아 있고 전반적인 제자원리나 규칙성등에서 충분하게 세세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여진어란 실체를 근원적으로 규명할 수 없다는 의혹을 낳고 있는 것이다.
영어기원
그렇다면 이제부터 영어기원은 어떠한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영어의 기원을 보면 인도유럽어족 게르만어파 서게르만어군의 앵글로프리지아어(Anglo-Frisian languages)에 속하는 언어라고 명시되어 있다.
즉 거란문자라고 할 수 있는 게르만어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영어는 라틴어와 프랑스어의 어휘에서 많은 영향 받았으며 라틴어는 영어의 15%에서 30%에 달하는 어휘의 근원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
중세 이후 노르웨이어, 스웨덴어와 같은 북 게르만어군의 어순이 영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과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 섬에 도착했을 당시부터 노르만 침공이 있기 전까지의 브리튼 섬에서 쓰인 게르만 계통 언어라는 것이 정설이다.
오늘날 영어의 직계조상인 고대영어(Old English:Anglo-Saxon)는 5세기 중반에서부터 12세기 중반까지 지금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남부에서 앵글로-색슨족에 의해 쓰이던 언어를 말한다고 되어 있다.
바로 금(金)나라 때인 것이다.
중세영어(1100-1500)는 11세기 말부터 15세기 말에 이르는 4세기경에 사용하던 것이다.
이 언어 역시 노르만 프랑스어(Norman French)방언이 앵글로 노르만어(Anglo-Norman)로 발달되었다 하며 그 후 프랑스어가 200년 동안 영국 상류사회에 언어였다고 한다.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영국초기역사
그렇다면 초기의 영국역사를 한번보자.
영국 앵글로 색슨(Anglo-Saxons)왕조의 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1003-1066)가 후사없이 타계한 후 고드윈(Godwin)백작의 아들 헤럴드2세(Harold II:1022-1066)가 즉위하였다.
이때 노르만 왕조(Norman dynasty:1066-1154)의 시조(始祖)이자 잉글랜드의 국왕 윌리엄1세(William the Conqueror:1028-1087)로부터 도전을 받았으며 헤럴드2세(Harold II)가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와 먼 인척 관계에 있었다는 이유 등으로 윌리엄1세는 디브쉬르메르(Dives-sur-Mer)에서 700여 척(隻)의 전함(戰艦)을 건조하여 침략을 시작하였고 노르만(Norman)정복은 초기의 침공과 같이 노르드인(Norsemen:Norway)들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이들은 윌리엄1세(William the Conqueror)의 지휘 하에 유럽의 정상들과 로마교황에게 승낙을 얻어 1066년1월에 영국 남해안 페븐지(Pevensey)에 상륙하였으며, 1066년 1월부터10월14일까지의 헤이스팅스(Hasting)전투에서 헤럴드 2세(Harold II)가 패배하면서 죽고 윌리엄1세(William the Conqueror:1028-1087)는 1066년 12월 25일 영국 왕에 즉위하게 되는 역사부터 시작된다.
이것을 영국 앵글로 색슨(Anglo-Saxons)왕조가 끝나고 노르만 왕조(Norman dynasty)가 시작된 것이라고도 한다.
요나라가 끝나고 금나라가 시작된 이야기와 비교된다.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점령함에 따라 잉글랜드의 왕조는 노르만 왕조가 된 것이다.
이때 언어는 노르만 프랑스어(Norman French)방언이 앵글로 노르만어(Anglo-Norman)로 발달되었다.
그 후 프랑스어가 200년 동안 영국 상류사회에 언어가 되었으며 노르만 정복 후 100여년간 영어로 된 문학작품이 없었다고 하였을 정도로 모든 분야에서 프랑스 차용어가 들어와 정착하였고 결국 영어는 라틴어에서 발달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의 로망스(Romance)화 되었다는 것이다.
월리엄 1세의 둘째아들 윌리엄 2세 루퍼스(William II Rufus:1056-1100,재위:1087-1100)영국 노르만 왕조의 제2대왕이고 형인 윌리엄 2세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자 헨리1세(Henry I,1068-1135,재위:1100-1135)가 제3대왕이 된다. 그러나 헨리1세의 외아들이 배가 암초에 부딪쳐 익사하자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5세(Henry V,1086-1125,재위:1111-1125)의 황후로 있던 딸 마틸다(Matilda,1102-1167,재위:1135-1141)를 후계자로 세우게 된다.
본
블로그 글 "고려와 스코틀랜드, 원과 잉글랜드 그리고
로마노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5"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Heinrich IV,1050-1106,재위:1084-1105)와 고려 15대국왕 숙종(肅宗,1054-1105,재위:1095-1105)이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인리히 5세(Heinrich IV,1086-1125,재위:1111-1125)와 고려의
예종(睿宗,1079-1122, 재위:1105-1122년)이때 예종은 여진정벌에 힘써 1107년에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등으로 하여금
30만의 별무반 중 17만 7천명을 주어 여진정벌을 단행하여 섬멸하고 이듬해에는 천리장성 동북지역에 9성을 설치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1135년 헨리1세가 죽으면서 재가한 마틸라와 그녀의 남편 조프루아 5세(Geoffrey V, 1113-1151)를 군주로 세우지만 그녀의 사촌인 블루아 백작 가문의 에티엔이 런던에 들어가 잉글랜드를 장악해 잉글랜드 왕 블루아의 스티븐(Stephen of Blois, 1092-1154,재위:1135-1141)이 되자 마틸다는 잉글랜드에 상륙해 스티븐과 왕위 계승전쟁을 시작하였으며 이 전쟁으로 스티븐의 치세는 내내 내란으로 점철되어버렸으며 이 시기를 역사적으로는 무정부시대라고 부르지만 결국 마틸라가 스티븐을 이어 계승하며 후임자는 그의 아들 헨리 2세(Henry II, 1133-1189,1154-1189)가 승계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노르만 왕가(Norman dynasty:1066-1154)의 군주가 아니라 플랜태저넷 왕가(Plantagenet)의 군주라는 신분때문에 영국시민들로부터 믿음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바로 그의 부친은 프랑스의 명문 귀족 앙주(Anjou)백작이며 플랜태저넷 왕가(Plantagenet)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것 역시 고려와 여진의 특수한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헨리2세의 세째 아들인 리처드 1세(Richard I, 1157-1199,재위:1189-1199)는 제3차 십자군(1189-1192)과 이슬람의 술탄 살라딘(Saladin,1138-1193,재위:1174-1193)과 연관이 있으며 강화협상 중 사라센(Saracen)포로 2,700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지르기도 한 인물로 잘알려져 있고 생애 대부분 전쟁터에 보냈으며 그 용맹함 때문에 사자심왕(獅子心王)이라고 불렸으며 노르망디(Normandy) 앙들리(Andely) 절벽에 난공불락의 성(城) 샤토 가이야르(Chateau Gaillard)를 건설했다는 인물이기도 하다.
친형인 사자심왕 리처드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존(John,1166-1216,재위:1199-1216)은 실지왕 존(John Lackland)이란 별명이 붙어있는데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프랑스지역의 땅(노르망디)을 프랑스의 필리프2세(Philip II,1165-1223,재위:1180-1223)에게는 빼앗기는 군주로 남는다.
물론 기록된 숫자차이가 있지만 이것은 1107년(예종2)에 윤관을 도원수(都元帥)로 하여 군병(軍兵)17만으로 함흥평야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청(北靑)까지 진출하였으며 함주(咸州)를 중심으로 9성(九城)을 쌓았다는 것과 비교될 수 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으며 그 후 존왕은 1215년에 폐위되는 독일왕 오토4세(Otto IV,1175-1218,재위:1209-1215)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를 꺾으려 했지만 실패한다는 것이 영국역사이다.
그렇지만 조선은 그곳을 지속적으로 관리했다는 것도 우리는 알 수 있다.
결어
이상에서 여진역사와 영국역사를 비교해 볼 때 헨리1세는 금나라 2대 금태종 완안성(完顔晟:1123-1135)으로 볼 수 있으며 헨리2세를 금나라 5대 금세종 완안옹(完顔雍:1161-1189)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현 한반도 역사를 기준으로 해석하면 앵글로 색슨왕조(Anglo-Saxons)를 서여진(西女眞:西蕃:熟女眞)으로 노르만족을 동여진((東女眞:東蕃:生女眞)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여진이라고 했을까?
나는 당시 삼한에서 볼 때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5세(Henry V,1086-1125,재위:1111-1125)의 황후이면서 영국노르만 왕조 3대왕 헨리1세(Henry I,1068-1135,재위:1100-1135)의 딸 마틸다(Matilda,1102-1167,재위:1135-1141)의 영향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여왕을 지칭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여자가 왕이 된다는 것은 삼한에서 보았을 때 매우 희귀하게 보았을 경우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여진(女眞), 여직(女直)이라고 불리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1426년(세종 8년) 함길도 주민 중 여진어(女眞語)에 능통한 사람 세 명을 골라 사역원(司譯院)에 배속시킨 것이 여진학(女眞學)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이때는 11세기 말부터 15세기 말까지로 되어 있는 중세영어를 보급할 때일 것이다.
사역원에서 여진어의 통역과 교육을 맡아보던 정9품 문관 벼슬을 여진학훈도(女眞學訓導)라 하였다.
대자(大字)가 먼저 만들어지고 나중에 만들어진 소자(小字)를 소자지학(小字之學)이라 하여 별도과목으로 한 여진어(女眞語)공부를 한 것을 보면 조선에서 여진어를 정책적으로 알고자 했음을 알 수 있고 공을 들였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근세기에 조선이 해체되면서부터 여진어도 똑같은 신세로 전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여진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변신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한다.
고려시대때 호희(胡戱)라 하여 거란, 여진, 몽고등지에서 들어온, 노래와 춤을 곁들인 놀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이 호(胡)는 북아메리카대륙을 칭하는 것이라고 이미 밝혔던 사실에서 바탕을 둔다면 여진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 있었던 종족임을 알 수가 있다.
또 고려시대때 생여진 즉 동여진(東女眞)에서 귀화한 주한(周漢)이 전하여 준 여진(女眞)문자가 바로 소자문서(小字文書)라 한 사실도 지속적으로 이 소자(小字)가 삼한인들에게 알려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언어적으로 세부화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언어발달을 들 수 있고 이러한 언어발달이 있었음에도 갑자기 아무런 이유없이 사라진 언어로 처리된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근대사의 함정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 후 17세기 중엽에 중국 청나라가 이 여진어(女眞語)를 청학(淸學:滿洲語學)으로 개칭 고쳐 불렀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청나라를 청교도(淸敎徒:Puritan)라고 보기 때문에 청학 즉 만주어학은 바로 근세영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 결과들을 우리가 그냥 엉뚱한 비교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에서 분리된 동양사와 서양사라고 할 때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가 아님을 우리가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끝말을 맺는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