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추 픽추(machu picchu)는 페루에 있는 잉카 문명의 고대 도시이며, 1911년 미국의 탐험가이자 역사학자인 하이럼 빙엄(1875년-1965년)이 우르밤바 계곡에서 발견하였다. 마추 픽추는 원주민말로 '나이든 봉우리'를 뜻하는데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공중 도시'라는 수식어가 딸린다.
마추 픽추는 현지어로는 ‘오래된 봉우리’를 의미한다. 페루 우루밤바(Urubamba) 계곡에 연한 높은 산의 산턱(해발 약 2,057m)에 위치하여, 산자락에서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종종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공중의 누각’으로 불린다. 그 유적은 3m씩 오르는 계단식 밭이 40단이 있어서, 3,000개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유적의 면적은 약 13k㎡로, 돌로 지어진 건물의 총 갯수는 약 200호 정도 된다.
마추 픽추에는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가 아직 많고, 열대 산악림대의 중앙에 위치하여 식물의 다양성이 풍부하다. 행정상으로는 쿠스코와 같은 지역에 속해 있다. 현재 페루에는 10개소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있는데, 마추 픽추는 그 중 최초로 쿠스코와 동시(1983년)에 지정되었다. 2007년 7월에는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마추 픽추에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쿠스코에서 기차를 타고 인근의 아구아 칼리엔테까지 간 다음, 버스를 타고 산을 올라 매표소가 있는 정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하루 혹은 넉넉히 이틀이 소요되는 일정이다. 다른 하나는 가이드와 함께 마추 픽추 외곽의 산기슭에서부터 고대 잉카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걸어가는 방법이다. 2일 코스, 4일 코스, 5일 코스 등이 있고 현지 여행사에서 예약할 수 있다.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베네수엘라 바르가스주(州) 마이케티아에 있는 국제공항으로, 베네수엘라의 대표적인 국제공항이다. 시몬 볼리바르 대학교. 역시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부근에 있는 공립대학교다. 비단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을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 ‘해방자이자 국부(國父) 볼리바르’ 그를 빼놓고 중남미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1821년 스페인 전투를 이끄는 볼리바르
1821년 6월 24일 카라카스 외곽의 카라보보 평원. 볼리바르가 이끄는 6,500명의 부대가 스페인 군대와 맞섰다. 불리바르는 승리했다. 이날의 승리는 베네수엘라 해방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6월 29일 볼리바르는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카라카스에 입성했다. 남미 해방의 깃발은 여기에서 멈출 수 없었다. 이듬해 1822년 키토 교외 피친차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볼리바르의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에콰도르가 해방되었다.
중남미를 식민 지배한 스페인은 부왕령(副王領) 제도를 통해 식민지를 나누어 통치했다. 부왕은 스페인 국왕을 대신해 식민지를 다스리는 일종의 총독이었다. 19세기 초 중남미의 스페인 식민지는 멕시코(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페루 부왕령, 누에바그라나다(콜롬비아) 부왕령, 그리고 리우데라플라타 부왕령(아르헨티나 지역에 해당)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으로 식민지에 대한 스페인의 통제권이 약화되었고, 이를 계기로 1810년경부터 남미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독립운동의 실질적인 계기는, 경제적 특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본국 스페인 상인과 식민지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부왕 및 본국 세력, 그리고 자유 무역을 추구하며 정치적 지배력까지 확보하려는 크리올료(중남미로 이주한 스페인계 백인 후손. 즉 중남미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주민) 사이의 심각한 대립이었다. 본국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태어난 페닌술라르에게 공공연히 멸시 당했던 크리올료는 식민지 사회에서 상층에 속하면서도 관료제도나 교회조직에서 배제되었다. 1810년 베네수엘라의 크리올료들은 스페인이 파견한 군 사령관을 추방하고 독자적인 대표자 회의를 구성하기도 했다.
긴 이름 콘테스트에 나가면 수위를 다툴 법한 그의 전체 이름은 다음과 같다. 시몬 호세 안토니오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볼리바르 이 팔라시오스 폰테 블랑코(Simon Jose Antonio de la Santisima Trinidad Bolivar y Palacios Ponte Blanco). 다 읽자면 숨 가쁜 그 이름만큼이나 그의 삶은 숨 가쁜 삶, 늘 치열하게 한 시대의 고뇌의 중추를 날카롭게 건드리며 그 중추의 아픔을 제 아픔으로 삼는 삶이었다. 출생은 유복했다. 유력한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그러나 늘 이등시민일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크리올료였던 그는 일종의 본국(本國)인 스페인 사람들에게 이등시민 취급을 받았던 것. 경제적 여건이 아무리 넉넉해도 정치적으로는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안고스투라에 거점을 마련, 1819년 2월에 독립운동세력을 결집시켜 의회를 구성한 볼리바르(왼쪽),
1824년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볼리바르
가족사도 불행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외조부 댁에서 살다가 외삼촌 집에 맡겨졌지만 엄한 성격의 외삼촌과 갈등했고, 결국 결혼한 큰 누나 집에 살게 되었다. 큰 누나 집에서 볼리바르는 가정교사 시몬 로드리게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로드리게스는 계몽주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볼리바르는 가정교사를 통해 유럽의 자유, 평등, 계몽, 해방의 사상과 만날 수 있었다. 역시 누나가 소개한 인문학자이자 교육자 안드레스 배요도 볼리바르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볼리바르는 18살 때 결혼했지만 열 달 만에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실의에 빠진 그는 유럽을 여행하며 나폴레옹 전성기의 유럽 상황을 목격했다.
1807년 귀국한 볼리바르는 1810년부터 남미를 스페인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연이어 실패를 겪고 1814년 왕당파에게 참패한 뒤 검거령을 피해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볼리바르는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독립한(중남미 최초의 독립국) 아이티 공화국과 영국인들의 지원을 받아 다시 독립 운동에 나섰다(아이티는 노예제 폐지를 대가로 바라면서, 영국은 새로운 시장의 필요성 때문에 볼리바르를 지원했다). 1817년부터 남미 독립운동세력, 영국인, 스코틀랜드인, 독일인 등으로 구성된 혼성 부대를 이끌고 베네수엘라의 안고스투라에 거점을 마련한 볼리바르는, 1819년 2월에 독립운동세력을 결집시켜 의회를 구성하고 혁명정부수립도 공표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대세를 바꿀만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한 상태였다.
'대(大)콜롬비아'구상 실현을 위한 분투
1819년 5월 26일 볼리바르는 2,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누에바그라나다(콜롬비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난관은 비 때문에 허리까지 물이 차오른 초원저지대였다. 천신만고 끝에 초원저지대를 통과한 6월 중순, 이번에는 안데스 산맥이 막아 섰다. 추위, 고산병, 험준한 계곡, 물 부족에 시달리며 안데스를 넘었다. 7월에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볼리바르는 8월 7일 보고타 근처 보야카에서 결전을 치렀다. 눈부신 승리였다. 보고타에 입성한 볼리바르는 임시정부 대통령에 추대됐고, 이때부터 그는 ‘해방자’ 칭호로 일컬어졌다.
이제 볼리바르는 스페인 식민지인 베네수엘라, 누에바그라나다(콜롬비아), 키토(에콰도르) 등을 하나의 연방으로 묶는 대(大)콜롬비아 구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1807년 귀국하기 직전 볼리바르는 짧은 기간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남미가 독립을 쟁취한 뒤 미국처럼 합중국이 되어야 한다는 구상을 그 때부터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미의 어느 특정 지역, 개별 국가 단위의 독립이 아니라 남미 전체의 독립을 추구했던 것도 대콜롬비아 구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1819년 12월 군사 지도자들과 의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볼리바르의 구상이 승인되었고, 볼리바르는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미국의 연방 정부를 모델로 삼은 대(大)콜롬비아 공화국의 탄생이었다
모든 정치적 권한과 거액의 연금을 스스로 포기하다
1823년 9월 리마에 입성하여 이듬해 12월에 최종적으로 페루를 독립시키고 상(上)페루(불리비아) 지역도 해방시킨 때가, 볼리바르의 일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였다 (볼리비아라는 국호는 볼리바르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영광의 정점은 곧 내리막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1825년 보고타로 돌아온 볼리바르는 자신의 대콜롬비아 구상이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베네수엘라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독립은 쟁취했으나 독립 이후의 국가 건설에 대해서는 각 지역이나 계층, 신분에 따른 이해관계가 대립했던 것. 크리올료들이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어 지역마다 대립했고, 유럽 국가들은 강력한 통일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견제했다. 1826년 볼리바르의 제창으로, 새로 독립한 남미 여러 나라의 평화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연맹을 결성할 목적으로 파나마 회의가 열리기도 했지만, 각국 간의 대립과 이해관계가 얽혀 1830년 해체되었다.
모든 정치적 권한과 거액의 연금을 스스로 포기하고 카리브 해안의 별장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 볼리바르
다양한 이해관계의 대립 속에 볼리바르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미수에 그치는 사건도 일어났다. 볼리바르는 주동자를 국외 추방하고 나머지 관련자를 석방하는 관대한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1830년 4월 27일, 볼리바르는 대통령직과 후계자지명권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권한을 포기하겠다는 서한을 의회에 보냈다. 거액의 연금을 평생 지급하겠다는 의회의 제안도 거절했다. 그리고 보고타를 떠나 카리브 해안의 산타마르타로 떠나 자신에게 호의적인 인사가 제공한 별장에 칩거했다. 결핵이 심각하게 악화된 상태였다. 1830년 12월 17일, 47세를 일기로 볼리바르는 세상을 떠났다. 입관을 준비하던 프랑스인 주치의는 볼리바르가 입고 있던 셔츠(그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셔츠였다)가 심하게 해진 것을 발견했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바보"인 '광복군'이자'독립군'
시몬 볼리바르. 그는 자신의 신념에 더 없이 충실했던 한 사람의 ‘광복군’이었다. 그는 해방자로서의 숭고한 명예만을 원하고 권력과 부를 초개처럼 여겼던 한 사람의 ‘독립군’이었다.
“저는 아주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 스페인 국왕 폐하의 대리인으로 파견된 오만불손한 총독들을 저는 뼛속까지 경멸했습니다. 우리가 해방을 쟁취하기만 한다면 우리 공화국의 통치자로 왕을 추대하자는 의견에 결연히 반대할 생각입니다. 설사 저 자신에게 왕이라는 직함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그보다는 차라리 해방자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기억되길 바랄 것입니다. 해방자라는 칭호야말로 동료 시민들이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칭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소망하던 모든 것들을 이루어낼 수 없었던 점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충직한 군인처럼 저는 죽는 그 순간까지 내 원칙을 사수하였습니다. 세상에는 가장 멍청한 바보가 세 명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두 번째는 돈키호테 그리고 바로 나 볼리바르입니다. 아메리카를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혁명을 위해 싸운 인간은 결국 바다에서 쟁기질을 했을 뿐입니다.”
<시몬 볼리바르> “미국 역사가 단 한 명의 조지 워싱턴을 배출하는 동안 남미 대륙은 그에 버금가는 인물을 이렇게나 여럿 배출했단 말인가!”
역사 저술가이자 전기 작가로도 이름이 높은 저자는 남미 역사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질타한다. 볼리바르를 불세출의 영웅으로 부각시키기보다는 비교적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야기 라틴아메리카사> 2억5,000만 년 전 남미 대륙의 형성에서부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는 남미의 역사를 중요한 사건과 인물 중심으로 서술한 책이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요령 있게 정리하고 서술한 책이어서, 남미 역사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알맞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