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중 가장 많은 學徒兵 戰死者가 나온 고등학교는 어디일까?」
月刊朝鮮 편집회의 시간에 이 문제가 話題에 올랐다. 누군가 「서울고등학교」(6·25 당시는 6년제 「서울중학교」)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낙동강 방어전선이 있던 경북지역의 「慶北고등학교」도 거론되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전선으로 달려간 중학생 이상 學徒兵. 이들은 조국의 위기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았던 義勇軍들이다.
6·25 전쟁 중 육군본부 작전국장이었고, 그 후 합참의장을 지낸 張昌國(장창국) 장군은 「문교부 통계에 의하면 휴전까지 5만 여 명의 學徒兵이 직접 전투에 참전하였고, 그중 7000여 명이 戰死했다」고 자신의 手記에서 밝혔다.
취재를 위해서 먼저 학교별 參戰者와 戰死者 통계부터 입수해야 했다. 이 정도의 자료는 교육부에 전화 한 통이면 간단하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먼저 張昌國 장군이 자신의 수기에 인용했다는 「문교부 學徒兵 통계」를 찾아보기 위해 교육부 자료실에 문의했다. 돌아온 대답은 『學徒兵 관련 자료 자체가 교육부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제대 군인의 兵籍(병적)을 관리하는 국가보훈처에 전화를 걸었다. 보훈처 관계자는 『병적기록부 원본에 출신학교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학교별 學徒兵 參戰者·戰死者를 통계로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全國에 있는 學徒兵 관련 단체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자료를 가지고 있는 곳이 없었다.
이렇게 정부 有關기관을 통한 취재에 어려움을 겪던 도중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群山 중·고등학교 한국전 학도의용군 戰死者 97명으로 전국 最多」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많은 戰死者를 낸 학교는 낙동강 방어선이 있던 경북지역 학교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全北에 있는 군산 중·고등학교 동창회에 전화를 걸어 자료의 출처를 물어 보았다.
군산中 동창회 관계자는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 6·25 전쟁실에 각 학교별 學徒兵 戰死者 수를 새겨 놓은 동판이 걸려 있다』고 말했다.
직접 전쟁기념관에 가서 확인해 보았다. 전쟁기념관 6·25 전쟁실에는 학도병 코너와 함께 전국 349개 중학교(1950년엔 6년制 중학이 있었고, 고등학교가 따로 없었다), 모두 1976명이 戰死한 것이 기록된 동판이 걸려 있었다.
群山中 출신 學徒兵 63명 戰死
동판에는 學徒兵 戰死者의 이름은 없었다. 군산중학교가 97명으로 전국 最多였고, 다음으로 경북中 53명, 전주북中 52명, 경주中 48명, 제주 서귀포 농업中과 군산 상업中 각 45명, 순창 농림中 37명, 서울中 30명 순으로 戰死者가 수가 기재돼 있었다.
이 자료는 1955년 문교부와 중앙학도 호국단에서 발간한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서 발췌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자료는 1975년 재향군인회에서 발간한 「보병제3사단-학도의용군(남상선 著)」이란 책에 실린 후 많은 사람들이 再인용해 오고 있었다.
이러한 기본 사실을 확인한 후 기자는 전북 군산으로 내려갔다.
군산 中·高 동창회 부회장 金鉉泳(김현영·51)씨는 속옷 가게를 잠시 비워두고 기자를 안내했다. 역시 군산중학교 출신인 文精一(문정일·61)씨는 全北 김제에서 일을 하다 말고 달려와 취재를 도왔다.
文씨는 지난 몇 년간 군산중학교 출신 學徒兵 발굴에 앞장서 온 사람이다. 현재 군산중학교 교정에는 學徒兵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文씨를 비롯한 군산중학교 동창들이 母校 출신 학도병 戰死者와 參戰者 를 발굴하고 이들을 기리기 위해 2003년에 세운 것이다.
文씨는 『충혼탑 건립에 3년이 걸렸다』며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충혼탑을 세우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2000년 우리 학교 출신 한 명이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들렀다가 그곳에 출신학교별 學徒兵 수가 새겨져 있는 동판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학교가 97명이라는 전국 最多의 學徒兵 戰死者를 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곧바로 동창회에 보고되었고, 동창회는 충혼탑을 건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군산중학교 동창회는 먼저 學徒兵 戰死者의 기초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文씨의 설명이다.
『먼저 學徒兵 戰死者 명단을 확보하고 우리 학교 출신인지 확인했습니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에 하나 學徒兵이 아닌 사람이 들어가거나 반대로 이름이 빠지면 잡음이 생기게 되니까요. 學徒兵 출신 선배들이 참여한 가운데 「參戰者·戰死者 확정을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해서 작업을 해 나갔습니다』
군산중학교 동창회 측은 전북지역 學徒兵 戰死者 명부에서 母校 출신자를 추려낸 다음, 이들을 6·25 전쟁 당시 학적부와 대조했다. 다행히 군산중학교에는 1950년 전쟁 당시 학적부와 전쟁 후 작성한 「학교 미등록자 명부」가 남아 있어서 명단 확인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學徒兵 戰死者로 판명된 명단을 최종적으로 전쟁기념관에 있는 6·25 戰死者 명부와 대조하는 작업을 거쳤다. 지방 신문에 여러 차례 충혼탑 건립에 관한 신문광고를 내어 母校 출신 學徒兵들 본인과 가족들의 신고를 받아 명단 누락을 최대한 막으려고 애를 썼다.
이런 노력으로 최종 인정된 군산중학교 출신 學徒兵 戰死者는 모두 63명. 전쟁기념관 동판에 기재된 97명보다 오히려 줄어든 숫자이다.
文精一씨는 『숫자가 줄어든 것은 다른 학교 출신 戰死者 유족들이 증언을 잘못해 군산중학교로 표기된 경우가 많았고, 여전히 어느 학교 소속인지 확실히 밝히지 못한 명단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군산중학교는 충혼탑 건립 과정에서 戰死者의 구체적 이름을 확인하는 것 외에 參戰者 240명의 명단도 정리할 수 있었다.
군산중학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學徒兵 참전으로 인해 복학 시기를 놓쳐 졸업하지 못한 생존자를 찾아내어 명예졸업장을 주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모병관의 지원 호소
군산중학교 취재를 통해 중앙학도 호국단이 1955년에 작성한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이란 자료 외에, 1957년 작성한 「전몰학도 명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이 학교별 戰死者 수만 기록한 데 반해, 국회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는 「전몰학도 명단」 명부에는 戰死한 1394명의 學徒兵에 대한 이름과 주소, 출신학교 등이 자세하게 기재돼 있다.
군산중학교는 이 명부를 1차 자료로 삼아 母校 출신 學徒兵 찾는 작업을 해온 것이다. 이 명부에 기록된 戰死者 1394명은 1957년 포항市 용흥동산에 새워진 학도의용군 충혼탑에 봉안된 위패의 수와 일치한다. 따라서 이 명단은 중앙학도 호국단에서 포항에 충혼탑을 세우기 위해 파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學徒兵 戰死者가 기록된 이 두 자료를 가지고는 각 학교별 學徒兵 戰死者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실제로 서울 용산中 같은 경우는 서울 수복 이후 한날 한시에 재학생 100명이 포병대에 學徒兵으로 지원했다. 그 절반 가량이 훗날 전투에서 희생되었다. 그러나 學徒兵 희생을 기록한 위 두 자료에는 용산高 戰死者가 10명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당시 같이 입대했던 용산中 동문들에 의해 확인된 戰死者 명단만 35명이나 된다.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1955년)」 자료에는 경북中과 서울中의 戰死者가 각각 53명, 30명으로 기록된 데 반해, 「전몰학도 명단(1957년)」 자료에는 두 학교의 戰死者가 각각 1명과 7명이라고 되어 있는 등 큰 차이가 난다.
그러나 戰死者의 수가 이처럼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는 경우는 몇 개 학교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두 개 자료를 같이 놓고 보면 학교별 學徒兵 戰死者 비율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도움이 된다.
이때 군산中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전국 최다 學徒兵 戰死者가 발생한 것일까? 당시 군산중학교 4학년이던 崔榮九(72)씨는 국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었던 1950년 7월14일자로 입대했다. 이즈음 인민군은 대전을 공격하고 있었다.
군산中 전교생의 20% 지원·參戰
『어느 소령 모병관이 사병 몇 명을 데리고 군산에 왔습니다. 7월10일경 학생들을 군산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18세 이상은 지원입대하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때 군산中 전교생이 2500명 가량 되었는데 4학년 이상을 위주로 거의 500명 정도가 입대했을 겁니다. 신체검사도 없었고, 17세가 되지 않은 사람도 많았어요』
崔씨는 『18세 이상 입영하라니까 입영 대상자라고 생각해서 입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병역법은 만 20세 이상이 입영 대상이었다. 재학생은 26세까지는 軍 입대 연기가 가능했다. 특히 미군과 체결된 협약에 의해 한국군은 10만 명 이상의 軍을 보유할 수 없었다. 이미 10만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우리 정부는 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징병 업무를 담당하던 병무국과 각 지역 「병사구 사령부」를 해체한 상태였다.
정부는 6·25 開戰 후 후퇴를 거듭하다 7월 중순부터 병력 동원이 가능한 지역인 전라북도와 경상북도에 「병사구 사령부」를 설치하고 모병에 나서게 된 것이다. 곧바로 호남 일대가 敵에게 유린당하고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다.
군산중학교의 崔씨를 비롯 군산 상업中, 군산 영명中, 군산사범학교, 전주남中, 전주북中 등 전북지역의 많은 학생들은 기차로 군산역을 출발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훈련을 제대로 받을 겨를 없이 이들은 곧 낙동강 방어선인 포항전투와 하동전투 등에 투입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강제 입대를 피하기 위해 급급해할 때 병역의무가 없는 15~18세 미만의 학생들이 자원하여 전선에 뛰어들었다.
학생들은 전쟁 발발 직후인 6월27일 서울에서 학도위문대를 만들어 각종 국군 지원활동을 시작했다. 국방부가 수원까지 후퇴하자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학생들은 「비상학도대」를 조직하여 한강 노량진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인천지역에서는 6월27일 全인천학도의용대가 조직되어 주요 관공서의 경비와 치안활동을 담당했다.
애국심과 자부심 강했던 중학생 정부가 대전까지 피란을 내려온 7월 초, 비상학도대 외의 다른 한 무리의 학생들은 「의용학도대」를 조직했다. 7월19일 대구에서 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는 통합, 「대한학도의용대」로 개편하여 활동했다. 당시 국군 10개 사단 중에는 대한학도의용대를 통하여 출정한 학도의용군이 없는 부대가 없을 정도였다.
學徒兵들은 개전 초기에 안동, 낙동강, 다부동, 안강, 영천, 포항 등 국군의 최후 교두보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거나 방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대구농림중학생으로 참전했던 柳亨錫씨는 『당시 중학생들의 의식수준과 긍지는 오늘날의 대학생보다 한 수 위였고, 당시 우리 사회 최고 엘리트였다』고 말했다.
오늘날의 대학생 수보다 그 당시의 중학생 수가 훨씬 적었고, 인구비례에 의한 비교에서도 적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는 것 자체가 지금의 대학에 입학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사람이 도시의 경우 약 50%, 농촌의 경우는 80%에 가까웠으므로 이를 감안하면 국민학교 졸업생에 대한 중학생의 비율은 20% 수준을 밑돌았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이 보장되었다. 당시 국민학교 교사, 군·면 공무원의 약 50%를 넘는 수가 국민학교 졸업자였다. 농촌학생들은 중학교에 입학을 해도 6년을 마치고 졸업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개는 3학년 수료 후 취직을 했다.
당시 중학생들은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해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에 대한 봉사심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군산중학교 출신 崔榮九씨는 3사단 18연대에 소속되어 낙동강 전선 중 포항지구 전투에 투입되었다. 9월15일 인천상륙작전후 그는 부대와 함께 청진까지 올라갔다가 중공軍에 밀려 후퇴했다. 그는 1951년 9월 철원전투에서 복부와 대퇴부에 수류탄을 맞고 쓰러진 후 후송되었다가 이듬 해 7월 제대했다.
1950년 8월9일 미국 국방부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래 한국軍의 사상자 수를 3만7000명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개전 초 육군 병력 약 9만5000명의 39%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1950년 가을 총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아군은 약 20만 명의 추가 병력이 필요한 상태였다. 당시 모병이 가능한 지역은 경남북 일대. 정부는 경남북 일대 곳곳을 다니며 18~30세까지는 눈에 보이는 대로 강제로 입대시켰다.
전황이 급해지자 대구나 부산 등 대도시에 피란 온 학생과 현지 학생들의 지원도 줄을 이었다. 학교 배속장교의 권유에 따라 입대한 경우도 있었다. 배속장교는 전쟁 전 학교에서 학도호국단 교육을 맡아 기초 군사 훈련을 가르쳤다.
광복 후 학교內 좌우익 갈등으로 폭력사태가 빈발하자, 정부는 1949년 1월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창설했다.
학교 배속장교의 연설에 감동
전쟁 당시 안동 농림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林一宰(69)씨는 『안동농中 배속장교의 연설을 듣고 參戰을 결정한 친구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전쟁이 나자 박종수라는 배속장교가 강당에 전교생을 모아 놓고 「펜을 총으로 바꿔 들고 참전하자」는 연설을 했습니다. 안동농中 학생 120명이 악대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하며 집단으로 입대했어요. 당시에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뜻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林씨는 이때 입대하지 않고 영천 쪽으로 피란 왔다가, 경북 북부 출신 학생 60여명과 같이 6사단에 자원입대했다. 전황이 급할 때 입대한 學徒兵들은 군복도 없이 운동화에 학생복 차림으로 전방으로 투입되었다. 林씨는 『8월에 입대했는데 군번은 9월에 가서야 나왔다』며 『훈련받을 시간이 없어 전선 아래서 일주일간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았다』고 기억했다.
安奉根(69)씨는 경북 군위중학교 2학년으로 당시 15세였다. 1950년 8월3일경 학도호국단 소집을 받아 학교에 집합했다.
배속장교가 전황의 위급함을 알리면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학생들이 전선으로 나가서 싸워야 하지 않겠느냐』며 學徒兵으로 지원할 것을 권유하였다. 소집된 학생 100여 명 중 12명이 부모 허락을 받은 뒤 지원을 했는데, 부모가 허락하지 않은 학생도 있었다.
당시 군위중학교는 신설학교라 4학년이 제일 상급 학년이었고, 12명은 대부분 학도호국단 대대장·중대장·소대장 등 간부였다. 2학년으로 지원한 학생은 안봉근, 권도문, 김상향 등 5명이었다.
8월5일, 학교에서 성대한 환송식을 열었고, 연도에 많은 학부모와 주민들이 나와서 열렬히 환송해 주는 가운데 트럭을 타고 경북 선산군 장천면 오상중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제1사단에 입대하였다.
국군이 후퇴하면서 낙동강 방어전이 펼쳐지고 다시 再반격하기까지 당시 대구·경북지역에 있던 학생들의 입대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보자.
張聖坤(71)씨는 대구 인근 고산고등공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7월15일 학교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그곳에 가니 학생들을 무조건 차에 싣고 가 대구 계성국민학교에 내려 놓았다. 이유도 몰랐다. 모인 학생은 700명 정도 되어 보였다.
여기서 3일간 기초 군사 훈련을 받은 후, 수성구에 있는 대구농림학교로 이동해 단발 장전식인 9·9식 일제 소총을 지급받았다. 다시 3일 후 학생들은 6사단에 배속되어 곧바로 戰線인 안동에 투입되었다. 이곳에서야 M1 소총이 지급되었다. 훈련받을 때와는 다른 총이라 총에 탄약을 장전할 때 많은 학생들이 손을 다쳤다. 영천 근방 신령전투에 30명의 學徒兵이 갔는데, 그를 포함하여 3명이 살아왔다. 이후 그는 9사단에 투입되어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學徒兵으로 지원해 육군본부(이하 「육본」) 상황실에 근무하면서 신병배치 업무를 담당한 대구中 學徒兵 출신 金五榮(71)씨는 당시 『또 녹았다 5사단, 보충하나마나 8사단』이란 말이 육본의 유행어였다고 말했다.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 전국 학교에서 두 번째로 많은 戰死者(53명)를 낸 것으로 기록된 경북中 학생들은 거의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學徒兵으로 입대했다. 따라서 당시 참전했던 경북中 學徒兵 출신들은 경북中 학생들이 얼마나 어떤 경유로 參戰해서 얼마나 戰死했는지 정확한 파악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북中 32회 한윤석(금년 7월 작고)씨는 경북중학교 學徒兵 역사를 정리하던 중에 지난 7월 세상을 떠났다. 32회는 1950년 당시 경북중학교 6학년생들로 18세였다.
韓씨는 주소가 파악된 32회 全동문에게 學徒兵 참전에 관한 설문지를 보냈고, 이 가운데 53명이 회신을 보내왔다.
설문지에는 자신의 學徒兵 참전사항뿐 아니라 戰友에 관한 사항도 기록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53명의 회신紙에 의해 32회 재학생의 戰死 및 실종자 중 15명의 명단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동문들은 32회에서만 약 20명의 戰死者가 나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慶北中 교장 아들도 학도병으로 자원
경북中 32회 졸업생 명단을 보고 있자니 그들의 화려한 경력이 먼저 눈에 띄었다. 전쟁을 무사히 넘긴 졸업생들은 대부분이 대학총장, 장관, 의사, 변호사, 박사, 교수, 회장이 되어 있었다. 32회 學徒兵 가운데는 盧泰愚 前 대통령을 비롯 鄭鎬溶 국방부 장관, 權五琦 前 부총리, 정신과 전문의 李時炯 박사의 형 李暾炯씨 등이 있다.
당시 慶北中 조기순 교장의 아들 조문기씨는 學徒兵으로 지원해 6사단 2연대에 배속되었으나, 초산에서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탈출했으나 국군에게 붙들려 인민군이 수용된 거제도 수용소에 갖혀 있다가 반공포로 석방時 석방되었다.
대구 중구에서 정형외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진홍씨는 대구의과大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1950년 평남 덕천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송환되었다. 2001년 그는 33개월의 포로생활을 그린 「돌아온 패자」란 책을 냈다.
이 책에서 그는 『포로가 되었다 돌아왔을 때 사상검증을 받기 위해 남해 孤島(고도) 용초도에 수용되자 「내가 혼자 조국을 사랑했구나」 하며 슬퍼했다』고 했다.
지난 11월5일 경북大 의대 교정 앞에 있는 學徒兵 추모비 앞에서 박진홍 원장을 만났다. 이 추모비는 전쟁 당시 대구의과大 학생 신분으로 學徒兵에 참전해 戰死한 10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석에는 꽃바구니가 하나 놓여 있었다. 朴원장은 그 모습을 보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잘 잇지 못했다. 그는 일 년 내내 누군가 꽃을 가져다 놓는다고 했다. 꽃에 쓰인 이름을 보니 「하용마」라고 되어 있었다. 당시 45명의 지원자 중 한 명이라고 한다.
경북中 31회 출신인 그는 6·25 전쟁이 났을 때 대구의과大 1년에 재학 중이었다고 한다.
『전선이 위급하자 의과大 학생 45명은 중앙 강당에 모여 혈서를 쓰고 곧장 길 건너 지금의 경북大 부속병원 자리에 있던 3야전병원에 가서 입대했습니다. 이후 7사단에 배속되어 영천전투에 투입되었어요. 평남 덕천전투에서 7명이 포로가 되었는데 나를 포함해 두 명만 돌아왔습니다』
1954년에 복학을 했지만 학교에서는 1학년 등록금을 다시 내야 했다.
『그 생각하면 지금도 나라에 섭섭합니다. 우리는 1학년 등록금을 내고 갔는데 당시 참전했던 이들은 등록금을 전부 새로 내야 했어요. 그때 심정을 뭐라 표현하겠습니까』
―의과 대학생이 공부도 중요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지원했습니까.
『아, 낙동강까지 밀려 왔는데 우리가 안 지키면 누가 지키냐는 생각밖에 없었지, 뭔 생각을 해요. 애국심이 가슴에서 끓어 오른 거지. 기사에다 「애국심」이란 단어는 쓰지 마소, 6·25 北侵이라고 주장하는 세상에 사람들 웃습니다. 허허』
대구商中 야구부의 참전 대구에서 경북中 다음으로 많은 21명의 학도병 희생자를 낸 대구商中은 6·25 이틀 전에 전국고교야구를 제패했다. 청룡기 깃발을 들고 왔던 야구부 주장 朴相浩(23회)군도 참전하여 2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戰死했다.
낙동강 방어 전선으로 달려가는 學徒兵들이 줄을 잇고 있을 때, 포항과 맞닿은 경주 쪽 사정도 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金三洙씨는 당시 경주중학교 5학년으로 17세였다. 「無名전몰학도 학교 명단」에는 경주중학교가 48명의 戰死者를 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밖에 경주 문화中, 경주 공업中에서도 많은 學徒兵 戰死者가 났다.
『1950년 7월15일, 경주시내 중학생들이 소집통지를 받고 경주역으로 집합했습니다. 소집은 학교에서 했는지, 학도호국단이 했는지 그때는 잘 몰랐어요. 경주중학교 학생이 200여 명이었고, 경주 문화중학교 학생과 경주공업중학교 학생이 약 100명 해서 전부 300명이었습니다.
우리는 시국과 관련하여 학도호국단 교육이 있는 것으로 알고 열차를 타고 대구로 이동하였습니다. 나중에 보니 학도호국단의 열성 간부가 학생들을 소집하여 學徒兵으로 지원하게 만든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金씨 일행은 대구시 신천동에 있는 잠업시험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인근 범어동(당시 달성군 경산면)에 있는 동도국민학교에서 입대했다. 이때 함께 입대한 학생은 약 600명이었고, 「제25연대 학도연대」라는 이름으로 일주일간 교육을 받았다.
일주일 교육이 끝난 후, 안강전투에 참전하는데 희망자는 선착순으로 집합하라는 지시를 받고 경쟁적으로 집합하여 일부가 출정하였다.
결사대와 같은 學徒兵들의 용감함은 제3사단 학도의용군 부대장이었던 남상선씨가 지은 「학도의용군」에도 잘 기록되어 있다.
<제3사단 學徒兵들이 안동 방어를 할 때 적의 탱크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작전참모인 박경원 소령이 부대원들을 모아 놓고 누군가 결사대로 나설 것을 요구하는 비장한 연설을 했다. 그때 모두 고개를 떨구고 있었으나, 서울 중앙대학에 재학 중이던 주정만이란 학생이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하고 나섰다>
이후 學徒兵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결사대 지원병으로 나섰으나 탱크 육탄 저지 계획은 사단장이 실행에 옮기지 않아 취소됐다.
終戰 후 학교에 복귀하지 못한 경우 많아 金台得씨는 당시 경주 문화중학교 5학년으로 17세였다. 그는 金三洙씨와 같은 방법으로 대구로 이동했다. 이때 문화중학교 학생과 경주공업중학교 학생 93명은 따로 대구 계성중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로 갔다. 거기서 부대를 편성한 후 오후 늦은 시간에 모 소령 인솔하에 열차를 타고 김천으로 이동했다.
『열차 안에서 군복과 M1 소총이 지급됐어요. 모자는 학생모자를 그대로 썼어요. 학생복은 집으로 보낸다면서 주소를 써 내라 했고, 편지지와 봉투를 주면서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손톱과 발톱을 깎아서 넣으라고 했어요. 그때서야 戰線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통곡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柳亨錫씨는 당시 대구농림중학교 2학년인 16세 때 입대했다. 7월20일경 영천군 신령면에 피란을 갔다가 그곳에서 입대했다. 그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이왕 죽을 바에야 軍에 가서 싸우다가 죽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훈련을 마친 후 그는 9월1일 팔공산에 있는 제1사단에 배치되었다.
『전방에 있을 때, 나는 배낭에 영문법과 수학, 한글맞춤법 책과 함께 많은 참고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공부했습니다. 1954년 6월 일등중사로 만기 제대했으나 스무 살이 넘어 중학교에 다시 들어갈 수 없었어요. 두 형님이 戰死하여 家系가 기울어진 뒤라 학교 다닐 형편도 못 됐고요. 당시 4급 공무원(주사) 채용시험에 합격하여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學徒兵 중에는 제대가 늦거나 부상 등으로 복학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대구 계성중학교 4학년 때 學徒兵으로 입대한 尹漢壽(당시 16세)씨도 그런 경우다. 그는 1사단 포병사령부에 근무하다 1954년 5월 제대했다. 제대 후 6학년에 복학하고자 했으나 학교에서는 5학년부터 다니라고 했다. 그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1년을 더 다닐 수 없어 복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는 대구市의 임시서기로 취직했다.
1951년 2월 대통령이 學徒兵의 복교령을 내렸지만 실제 일선에 있던 學徒兵들은 이런 명령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校長들의 훈화가 영향
敵 치하에 들어간 서울의 학생들은 괴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서울중학교 3학년이던 咸景浩(함경호)씨도 그런 학생 중에 한 명이었다. 서울중학교는 戰死者가 30명으로 서울지역 중학교 중에서는 가장 많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용산 50년사」에 기록된 용산중학교 출신 學徒兵 戰死者는 35명).
咸景浩씨의 증언이다.
『6·25 다음날 교장선생님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훈화를 하셨습니다.
「영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주말에 곤충채집을 나갔던 생물선생이 들어오자 학생 한 명이 달려와 전쟁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은 아무 말 없이 곤충채집통을 둘러 멘 채로 모병소에 가서 학생들과 나란히 차례를 기다렸다」
교장선생님은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우리 젊은이들이 이 어려운 위기를 맞아 모두 궐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는 당시 어린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제주 서귀포 농업中(現 서귀포 산업과학高) 졸업생인 양정보 前 위미초등학교 교장은 「서귀포 농업中 60년史」에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서귀포 농업中은 45명이 戰死해서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學徒兵 戰死者를 낸 학교다.
<1950년 7월 어느 날 서귀포 농업중학교 이기휴 교장선생님께서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는 분노에 찬, 울음 섞인 목소리로 우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조국의 생명은 위태롭다. 위태로운 조국의 운명을 구하는 힘은 오직 피끓는 젊은 학도에게 있으니 학생제군들이여, 용열 지원하라!』 하는 한마디에 서귀포 농업중학생들은 앞을 다투어 지원하게 되었다>
서울 학도포병대 서울중학교 재학 중이던 咸景浩씨는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미처 피란을 가지 못했다. 그는 서울 수복 때까지 숨어서 살았다고 한다. 좌익 학생들에게 잡히면 꼼짝없이 인민군 의용군에 입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咸씨는 『서울이 수복되자 앞으로 몇 달 간은 수업도 제대로 될 것 같지 않고 넉넉잡아 3개월이면 전쟁이 끝날 것 같았다. 그 사이 뭔가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입대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당시 용산중학교에는 北進 중이던 7사단 18포병대대가 머무르며 新兵(신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18포병대대는 미국으로부터 포를 공급받았으나 이를 운영할 우수한 두뇌와 체격을 갖춘 新兵이 부족했다. 원래 있던 장병들은 다른 부대 창설로 모두 전출 간 상태였다.
18포병대대 모집 공고를 보고 서울 일대의 중학생들이 모병소 앞에 몰려들었다. 18세 이상이란 나이 제한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나이를 올려 지원했다.
이날 선발된 인원은 30여 개 학교 350명이었다. 용산中 100명, 덕수상업中 30명, 서울공업中 25명, 경동中 25명, 한양공업中 20명, 서울中 11명이었고, 경신中·배재中이 각각 10명 등이다.
용산중학교 출신 學徒兵 지원자가 많았던 것은 이 학교에 잠시 포병대대가 주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광복 후 용산중학교에는 北에서 내려온 학생이 많았던 것도 한 원인이라고 한다. 계속해서 咸景浩씨의 증언이다.
이때 입대한 咸景浩씨는 『砲(포)를 쏘려면 각도 계산을 해야 했기 때문에 포병부대 新兵은 머리가 좋아야 했다』며 『삼각함수와 기초수학 등을 묻는 구두시험을 보고 선발됐다』고 말했다.
『이날 입대한 학생들은 정식 군인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크리스마스까지는 전쟁이 끝나고 복학한다」고 믿었습니다. 10월19일 입대해서 곧바로 기초 훈련 없이 北進을 시작했습니다. 군번도 없었습니다. 군번은 11월에 나왔어요. 어떤 날은 砲陳地(포진지)를 하루에 세 번이나 이동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砲를 한 번 이동하고 설치할 때마다 砲 참호와 포탄 참호, 개인 참호 등을 파야 하기 때문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특히 18포병대대의 고참들이 전부 이북에서 온 「서북청년단」 출신이라 군기가 매우 셌다고 한다.
서울지역 출신 학도병들은 敵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고, 공산군의 만행을 목격하고 체험한 후 입대한 학생들이라 후방의 학도병들과는 또 다른 특징이 있었다.
서울 학도포병대 350명 가운데 약 130명이 평남 덕천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戰死했다. 18포병대대는 덕천전투 때 중공군에 포위되어 많은 戰死者가 발생한 것이다.
咸景浩씨의 증언이다.
『1950년 11월26일, 중공군 포위망에 꼼짝없이 걸려 들었습니다. 2군단 전체가 포위당했기 때문에 어디로 집결하라는 등의 향후 대책도 없었습니다. 이때 김남학, 이공준, 김중호, 경재천 등 4명의 서울중학교 출신들이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해 戰死했습니다』
咸씨는 같은 분대에 있었던 용산중학교 출신 학도병 이우용씨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 친구의 큰형이 인민군에 학살당하고, 둘째 형은 지리산 공비토벌 중에 戰死했습니다. 제대 후 이우용씨 어머니에게 아들이 戰死했다는 이야기를 차마 전해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친구의 어머니가 어떻게 알고 나를 찾아와서는 내 옷을 붙잡고 흔들면서 「왜 우용이는 못 데리고 나왔냐」고 울부짖는데 그때 나도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어요』
학교로 돌아간다는 희망 學徒兵 戰死者들에게는 대부분 자식이 없다. 유가족이 잘 파악되지 않아 母校에서 명예졸업장을 주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우리 學徒兵들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 끝나면 학생으로 돌아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학생이라는 자부심으로 철모보다 「中」자가 달린 학생모 쓰기를 더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각 학교 동창회는 순국한 學徒兵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보였으면 합니다. 그들에게 명예졸업장을 추서하고 최대한 예우를 해야 합니다. 學徒兵에게 무관심한 현실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學徒兵에 관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6·25 전쟁 첫날 육군사관학교 생도 2기 333명 중 277명이 포천전투에 투입되어 첫날 86명이 전사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는 휴교했고, 정부는 장교 양성을 위해 육군종합학교를 세웠다.
육군종합학교에서는 1950년 9월부터 1951년 8월까지 7000여 명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들은 일선 소대장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이들 가운데 1377명이 戰死하고 2556명이 부상당했다. 2명 중 1명이 죽거나 다친 것이다.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한 사람들 대부분은 당시 중학교 학생들, 즉 學徒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