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세계자전거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김용준
Good bye 부킷팅기!
부킷팅기에서 미낭카바우 문화의 절정을 만끽하고 거기다 멋진 친구들까지 많이 사귀었기 때문에 이곳을 떠나는 것은 오래 사귀어 온 친구와 작별인사 하는 것처럼 아쉽게 느껴졌다. 사실 더 있고 싶었지만 준 집에게 계속 신세지는 것도 미안했고 인도네시아 비자기간도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 체 뒤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출발했다.
미낭카바우 문화는 부킷팅기를 중심으로 넓은 지역에 걸쳐 생생히 살아있었다. 우선 무슬림 문화와 미낭카바우 건축문화가 만나 만들어진 이슬람 사원은 독특한 형태와 건축미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내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사원 지붕사면에 높게 솟은 철탑은 물소 뿔을 형상화한 것으로 미낭카바우를 상징하는 지표 같은 것이었다. 전통가옥 뿐만 아니라 관공서, 무슬림 사원, 심지어 상업은행까지 이런 물소뿔을 형상화한 철탑이 설치되어 있었다.
부킷팅기는 제주도와 같이 화산폭발로 만들진 지형이었기 때문에 마치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감싸 안은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주기적인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며 계단식 논이 자주 눈에 띄었다.
룰루랄라~ 편안히 주변 풍경을 즐기며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차가 밀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꽉 막힌 차량으로 도로는 가득 차 버렸다. 무슨 일이지? 시골길인데도 불구하고 차가 밀리는 것을 보니 뭔가 사고가 났구나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장애물 경주를 하는 것 마냥 꽉 막힌 차들을 뚫고 앞으로 가보니 찌그러진 버스가 도로 한편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가까이서 확인해 보니 적어도 버스승객이 있었다면 중경상을 입었을법한 커다란 사고였다. 10개월이 넘게 여행 다니는 동안 수많은 교통사고를 목격했지만 정도가 가장 심한 교통사고였다. 버스는 몇 바퀴는 굴렀는지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고 버스승객들의 소지품은 사고현장 곳곳에 널 부러 있었다. 이런 사고를 목격할 때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교통사고를 경험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다시 상기시키곤 한다.
부킷팅기에서 40km쯤 달렸을까 파란하늘이 땅 위에 내려 앉아 만들어 낸 것 같은 예쁜 싱카라 호수가 나타났다. 파란하늘 물감을 뿌린 것처럼 호수는 맑고 깨끗했으며 아름다웠다. 화산폭발로 생긴 칼데라호수고 물이 깨끗하다는 면에서 토바호수와 공통점은 있었지만 훨씬 작은 크기나 수온이 높다는 점에서 조금 달랐다. 하지만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풍경은 매혹적이었다. 또한 싱카라 호수 주변을 따라 길이 잘 나 있었기 때문에 자전거 타기도 편하고 쉬웠다.
멋진 호수를 만났으니 그냥 갈 수 없는 노릇....수영을 즐기고 있던 아이들 사이에 껴 한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후 들어 검은 구름이 정말 구름같이 몰려오더니 엄청난 비와 바람을 뿌려댔다. 어찌나 강하게 몰아치는지 잠시 피해있던 식당 안에까지 비가 들이차 자전거뿐만 아니라 온 몸이 젖고 말았다. 오전에 새파랗게 맑던 하늘이 오후 들어 검은 구름을 몰고 와 비를 사정없이 뿌리고 있으니 이런 날씨를 두고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비유하면 딱 적당하지 않을까? 아무튼 이런 돌풍만큼은 텐트치고 자는 밤에만 몰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날 오후 들어 몸에서 이상 경고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목이 간질거리고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후 들어 기침을 자주 하기 시작했고 그 덕에 자전거 끌고 오르막 올라가기에도 숨이 벅찼다. 반갑지 않은 손님, 감기가 찾아 온 것이다. 고민 끝에 몸에 무리가 오기 전에 가던 길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일단 밤을 보낼 장소는 해가 지면 찾아보기로 하고 식당에 앉아 밀린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식당 주인아저씨께서는 멀리 한국에서 수마트라 시골까지 찾아 온 자전거여행자가 신기해 보였는지 많은 관심을 보이셨다. 이것저것 물어 보셨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대답하기 쉽지 않았고 많이 답답하셨는지 결국에는 마을에 영어 할 줄 아는 친구 분을 데리고 오셨다.
아프다는 이름의 친구 분은 중학교 체육선생님으로 영어를 잘 하셨다.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아프와 이런 저런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한참을 나눴다. 아프는 감기 기운에 몸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몸이 회복 될 때까지 밀린 여행기 쓰면서 자기 집에서 쉬다 가라며 직접 초대해 줬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하늘이 무너져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고 하던데 아프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고 말하며 함께 집으로 향했다.
아프는 두 아들과 4살짜리 딸을 둔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사진 맨 오른쪽은 이웃사촌) 미낭카바우는 모계사회이기 때문에 딸이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특권뿐만 아니라 나중에 부모를 돌봐야 되는 책임도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아프가 안고 있는 늦둥이 딸을 애지중지 키우고 있었다.
아프 가족의 따뜻한 대접으로 감기 기운은 어느새 저만치 몸 깊숙이 사라졌고 하루만 머물려고 했던 계획은 밀린 여행기도 쓰고 사진도 정리하며 어느새 이틀, 삼일로 늘었다. 지난 삼일은 정말 꿀 맛 같은 휴식이었으며 다음 여행을 위한 에너지를 100% 완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섬나라이며 면적이 한반도의 수십 배나 되는 거대한 나라, 인도네시아를 2달 만에 자전거로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애초에 수마트라 한 달, 자바 한 달 이렇게 계획을 잡았었다. 그리고 어느새 아프 집에 머무는 동안 여행 기간을 계산해 보니 수마트라 들어온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아프로부터 이곳에서 자카르타로 직행하는 버스를 집 바로 앞에서 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국에 버스를 타고 자카르타로 가기로 했다.
몸이 나을 때까지 물신양면에서 힘껏 도와 준 아프와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곧이어 버스를 출발했다.
여행 시작하고 버스 타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버스 안에는 에어컨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통로까지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 사우나처럼 푹푹 쪘다. 거기다 버스 안에서 승객들이 줄담배까지 펴대니 죽을 것만 같았다. 앞으로 자카르타까지는 3000km....무려 2박 3일에 버스 안에서 꼼짝 말고 있어야 되는데 걱정이 구름같이 몰려왔다.
그런데 버스 안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더 문제는 버스 고장이었다. 어찌나 자주 고장이 나는지 자카르타를 향하는 동안 적어도 5번은 넘게 차가 멈췄고 한번은 2시간이 넘게 움직이지 못하고 길 위에 멈춰서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40시간 가까이 버스 안에서 고행의 나날을 보낸 끝에 다다음날 새벽 4시쯤 수마트라섬과 자바섬을 잇는 항구에 도착했다.
새벽 4시 반,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배는 자바섬을 향해 떠났다.
수마트라여 안녕! 비록 짧은 체류허가기간 때문에 수마트라 일부 구간만 여행할 수 있어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팔색조같이 다양한 색깔과 문화를 간직한 수마트라이기에 고농축 된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신 것처럼 짧지만 굵게 인상 깊은 경험을 해 만족스러웠던 지난 한 달이었다.
자바는 한반도 면적보다 작지만 무려 인구는 1억 2천만으로 인도네시아 전체 인구의 60%가 몰려 사는 섬이다. 인구 밀도도 높지만 그만큼 인도네시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모두 몰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마트라에서 자바까지 배로 약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느덧 일출과 함께 자바 섬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수마트라의 넓은 황무지와 달리 해안가에는 촘촘한 공장지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버스는 자바 섬 도착과 동시에 날씬하게 뻗은 고속도로를 따라 자카르타를 향해 출발했다. 도로 상태는 수마트라 꼬부랑길과 달리 쭉쭉 빵빵 이었지만 버스 상태는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 들어와서도 버스 고장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고장은 지난 몇 번의 고장과 차원이 달랐다. 갑자기 버스 왼쪽 하부에서 허연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승객들의 집단 탈출이 시작됐다. 어떨 결에 이들과 함께 버스 밖으로 탈출했고 설마 불이 나는 것은 아니겠지 조마조마 하며 사태를 지켜보니 다행이도 연기의 주범은 과부하가 걸린 배터리에 있었다.
잠시 눈을 부치고 일어나니 어느새 버스는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자전거가 아닌 버스로 입성하는지라 왠지 경기 도중 반칙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어쩔 수 있나 체류기간이 정해져 있는데.....편안하게 맘을 고쳐먹고 자카르타에 입성했다. 복잡하고 공기오염이 심한 도시라고 들었지만 첫인상은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달리는 길 만큼은 넓고 반듯했으며 삐까뻔쩍한 고층빌딩들이 자주 보였다.
버스는 도심 외곽도로를 따라 1시간을 더 달려 도시 동쪽에 위치한 터미널에 최종적으로 도착했다. 사실 터미널이라기 하기보다는 커다란 시장같이 생긴 주차장이었다.
버스는 기대와 달리 도심 동쪽에 내려 주었다. 웜샤워를 통해 알게 된 리키라는 친구가 도심 서쪽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도심을 가로질러 30km 이상을 달려야만 했다. 덥고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공기 오염이 심한 가운데 복잡한 도심을 뚫고 가야된다고 생각하니 완전 멘붕상태에 빠졌다.
자카르타의 맨얼굴은 처음에 느꼈던 인상과 달리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교통체증과 대기오염이 심각했다. 도심을 가로 지르는 동안 수많은 교통체증과 마주했고 오토바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과 경적소리 때문에 자전거 위에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도심을 흐르는 하천은 관리부족으로 악취가 심하게 났고 오물이 넘쳐흘러 쓰레기 섬이 하천 한가운데 만들어져 있었다. 한 때는 동방의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는데 이 단어를 떠올리기에 현실은 거리가 멀었다.
리키는 중국계 인도시네아인으로 컴퓨터 프로그램 회사를 다니는 회사원이었다. 중국계임에도 불구하고 리키는 중국어를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중국학교 설립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 중국이름도 쓰지 못하게 하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강력한 중국문화 배타정책 때문에 지금은 현지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이 인도네시아 사회에 깊숙이 흡수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리키는 자카르타 도착 기념으로 메라박이라고 우리나라로 치면 계란말이 비슷한 인도네시아 음식을 대접해 줬다. 메라박은 양도 엄청 많고 맛도 엄청 맛이었다. 메라박과 맥주 한 캔으로 리키와 함께 자바섬 입성을 자축하며 자카르타 첫날밤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다음날 자전거를 끌고 자카르타 주요 관광지를 둘러봤다. 자카르타는 ‘지구 최대의 교통지옥’이라 불리며 매연과 쓰레기로 가득한 도시라 솔직히 자전거 타는 게 썩 내키지 않았지만 전철도 없고 대중교통 구축이 잘 안 돼 있었기 때문에 자전거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처음으로 향한 곳은 코타(kota)라는 곳으로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자카르타 최대 중심가이자 식민지 영사관이 있던 곳이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자카르타는 동방의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독립 이후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며 도시는 우후죽순으로 커졌고 역사적 명물과 유적들은 도시의 확장과 난립 속에 사라져 갔다. 그리고 지금 남은 것이라곤 식민지 시절 동양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듯 불안하게 서 있는 서양풍 관공서 건물과 작은 광장 그리고 항구뿐이었다. 지금까지 여행하며 동남아 주요 관광지를 가면 외국인 관광객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자카르타 코타는 달랐다. 광장 앞에는 외국인 보다는 주로 내국인 관광객이 많았다. 그만큼 자카르타는 해외 여행객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며 매력적인 관광지로 어필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 곳곳에는 악취가 진동했고 식민지 시절 지어진 유럽풍 건물들도 관리가 소홀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자카르타 시 관계자들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이곳을 잘 보전하고 관광지로 잘 꾸미기 보다는 손 놓고 있다는 느낌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자카르타 코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동인도회사의 물자를 나르던 순다켈라파(sunda kelapa) 항구가 그대로 남아 있다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방문해 봤다. 과거 500년 전에는 수많은 범선들이 드나들며 향신료 같은 서양에 값비싸게 팔 수 있는 물자를 바쁘게 선적하고 있었겠지만 현재는 농산물이나 목재 같은 1차 산업 물자만 정박해 있는 선박에 옮겨지고 있었다. 항구는 방파제를 따라 거의 2km 넘게 가까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알록달록한 원색으로 칠해진 나무배들이 항구에 정박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주변은 하역작업으로 분주히 돌아가고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과거에 이곳에서 유럽에서 값비싸게 팔릴 수 있는 물자를 싣고 거대한 항해를 준비하는 선박들이 끝없이 정박해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순다 켈라파는 관광지로써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역사적 의미나 항구에서 분주히 일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코타지역과 항구를 돌아 본 후 자전거를 타고 도심을 관통해 자카르타의 랜드마크, 모나스로 향했다. 모나스는 광장 한 가운데 엄청난 크기로 세워졌기 때문에 멀리서 금방 눈에 띄었다. 무려 높이는 132m에 달했고 탑 끝에는 32kg 금으로 도금 된 횟불 조각이 설치되 있어 더더욱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모나스는 인도네시아 독립을 기념해 인도네시아 초대대통령인 수카르노가 1961년 준공을 시작하였고 14년이 지나 1975년 30년 독재자 수하르토 정권 아래서 완공되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오를 수 있지만 오후 2시까지만 개방 돼 올라 가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사진만 찍고 탑 주변을 자전거로 한 바퀴만 돌아 본 후 서둘러 자카르타 관광을 마무리 하고 리키집으로 향했다. 서둘러 빠져 나온 이유는 세계 최고의 교통지옥 자카르타 러쉬아워를 경험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모나스를 빠져 나왔을 때 시계는 벌써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도심은 점차 오토바이와 차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여행 시작하고 그동안 수많은 대도시를 구경했지만 교통지옥 과 매연 때문에 정말 자카르타만큼은 다시 오기 싫은 도시로 기억될 것 같았다. 이틀 간 리키집에 콕 박혀 늘어지게 낮잠도 자고 다음 여행 계획을 세우며 휴식시간을 보낸 후 자카르타를 떠나는 날이 찾아왔다. 따뜻한 안식처를 제공해 준 리키는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님이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업무일로 바빴다. 결국에는 떠나는 날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지만 언젠가 길 위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기약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이놈의 교통지옥은 자카르타를 떠나는 마지막까지 따라와 좋지 않은 추억을 남겨줬다. 매연과 교통 혼잡을 뚫고 한참을 달리는 도중 개인택시가 자전거 앞 패니어를 살짝 치고 가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여행 중 처음으로 당하는 사고였다. 서둘러 일어나 자전거와 몸 상태를 확인해 보니 다행히 자전거에는 이상이 없었고 발가락과 오른쪽 무릎이 살짝 까져 있었다. 천천히 달리고 있어서 망정 있었지 빨리 달리고 있었다면 큰일 날 뻔했던 사고였다. 비록 조그마한 사고였지만 안 좋은 경험을 하고 나니 여행자에게 특히 자전거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카르타는 절대 피해야 할 도시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확고해 졌다. 하루 종일 차량 그리고 매연과 씨름한 끝에 자카르타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진 보고(bogor)에 도착했다. 자카르타에서 60km나 떨어져 있어서 더 이상 복잡한 도로와 작별인사를 할 줄 알았지만 정말 꿈같은 생각이었다. 이곳에서도 트럭에서 나오는 매연과 끝없이 싸워야만 했다. 정말 1억 2천만이 사는 세상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장면이었다. 워낙 인구도 많고 도로 기반도 좋지 않기 때문에 차량서행은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라 여겨졌다. 다음날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됐다. 자카르타를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꼭 넘어야 할 산이 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었다. 고개 이름은 푼착패스(punchack pass)로 1200m가 넘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음 목적지 반둥(bandung)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고개였다. 자전거를 끌다시피 하며 오전 내내 오르막과 사투를 벌어다 보니 어느새 서늘한 날씨가 몸을 감싸 안았고 주변은 온통 차 밭으로 변해 있었다. 푼착 패스 끝자락에 올라서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십 명의 자전거라이더들이 가게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럭셔리한 산악자전거가 일렬로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들이 진치고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수십 개가 넘는 자전거동호회 스티커가 커다란 유리에 빈틈없이 붙어있었다. 알고 보니 푼착 패스를 중심으로 차밭 사이로 난 오프로드가 모세혈관처럼 이어져 산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고 바로 이 오프로드 다운힐을 즐기기 위해 산악자전거 라이더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음식점은 동호회인들에게 출발에 앞서 간단한 식사와 모임 장소로 이용되는 곳이었다. 커다란 짐이 달린 자전거를 낑낑 거리며 올라오는 모습에 모두를 신기해 보였는지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이것저것 물어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한 무리의 자전거그룹이 가게 안으로 초대해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대접해줬다. 중국에서부터 인도네시아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사실에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놀라워하며 고맙게도 가지고 있던 간식과 과일까지 연신 퍼줬다. 푼착패스를 내려와 적당한 캠핑장소를 찾으려 했지만 워낙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어서 쉽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현지인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고 텐트치기 적당한 평지를 가진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한 번에 오케이 승낙을 받았다. 더구나 텐트에서 자면 위험하니 자기 집에서 자라며 활짝 안방 문까지 열어줬다. 친절한 미소와 대접까지 너무 고마웠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집주인이 한국에서 자전거타고 온 여행자가 자기 집에 있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낸 덕에 이웃주민들이 찾아왔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들이 쏟아내는 질문을 저녁 내내 받을 수밖에 없었다. 편안한 밤을 보내려고 했던 계획은 무참히 깨지고 만 것이다. 어쨌든 깨끗이 샤워도 하고 안전한 곳에서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인데 이들 덕택에 한시름 놓고 12시가 넘어 잠에 들 수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찾아 온 동네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눈 후 반둥을 향해 출발했다. 오후 들어 800m 고지대에 자리한 반둥에 도착했다. 반둥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자카르타 시내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높은 인구밀도와 부족한 도로기반시설은 교통체증과 혼잡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심한 매연 때문에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오잉! 이런 깜찍한 쇼가 다 있나. 반둥 시내를 코앞에 나두고 신호등에 잠시 걸렸는데 횡단보도 앞에서 눈 깜짝 할 사이 원숭이 쇼가 벌어졌다. 주인 잘못 만나 원숭이가 참 고생이 많구나...1분 정도 지속된 쇼는 즐겁기 보다는 서글펐다. 푼착 패스에서 만난 자전거 동호회 회원 중 한 분이 고맙게도 반둥에 사는 친구 분을 소개시켜 준 덕분에 쉬다갈 수 있는 장소를 구할 수 있었다. 반둥시내에 들어서자마 적어 준 주소를 찾아 가 보니 예상 외로 등산용품 파는 가게가 나타났다. 가게 앞에서 전화를 하자 중년의 남성이 나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성함은 파이모로 모험을 즐겨하시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자전거 여행은 기본이고 등산, 거기다 암벽등반까지 1년에 한 번씩은 해외로 나가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분이셨다. 이미 20대 중반부터 시작된 자전거 여행은 그 이후로 20년 동안 이어져 지금은 세상에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곳을 돌아보신 자전거 여행의 고수 중에 고수시며 여행 선배님이셨다. 최근에는 3년 전 남미를 자전거로 여행했던 기록을 엮어 직접 책을 출판 하셨을 정도로 여행과 모험에 관해 타에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불타는 열정을 가진 분이셨다. 특히 책 출판뿐만 아니라 여행 중 찍은 영상을 편집해 지금까지 3장의 dvd까지 만들어 시중에 유통시키는 등 홍보에도 적극적이셨다. 이런 적극적인 홍보는 기업의 스폰을 따는데 도움이 됐고 다음 여행을 위한 금전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됐다고 하셨다. 파이모를 보며 그냥 여행 다니며 블로그에 여행기만 쓸게 아니라 다양한 홍보방법을 만들어야 봐야 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파이모가 일하는 에이거라는 브랜드는 인도네시아 등산용품 브랜드로 다양한 아웃도어 제품을 팔고 있었다. 파이모는 특별히 20% 디스카운트 해줄 테니 원하는 제품이 있으면 구입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고민 끝에 1년 가까이 동고동락한 샌들과 이제 그만 작별인사를 고하고 새 샌들로 갈아타기로 했다. 산이며 바다며 들이며 아시아 곳곳을 누비며 동고동락한 샌들과 헤이지려니 아쉬웠다. 하지만 어느새 샌들 밑창은 달고 달아 커다란 구멍이 났고 샌들 안은 발 냄새에 찌들어 버려 심한 악취를 풍겼다. 거기다 곳곳이 실밥이 풀려버려 심하게 망가진 샌들을 더 이상 신을 수 없었다. 파이모의 여행담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파이모의 따뜻한 가정에서 더 있고 싶었지만 자바 중부지방 족자카르타에서 열리는 마리아뽈리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페달을 재촉해야만 했다. 가족과 감사의 작별인사를 나눈 후 떠나려는 순간 파이모는 가다가 맛있는 점심 사 먹으라며 100,000루피화(10,000원)를 두 손에 꽉 쥐어 주셨다. 그동안 따뜻한 배려만으로 감사하니 주시는 마음만 받겠다고 한사코 고사했지만 베풀어 주는 정성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할 수 없이 받아 들였다. 따뜻한 안식처만 제공해 준 것뿐만 아니라 금전적으로 도움을 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파이모가 고마웠다. 반둥에서 보르부드르라는 세계 7대 불가사이가 있는 족자카르타까지 약 400km, 18일까지 도착해야만 했기 때문에 5일 간 딴 곳에서 시간 보내지 말고 열심히 달려야만 했다. 면적이 넓고 인구가 적은 수마트타 섬에는 버려 둔 황무지가 많았지만 자바 섬은 많은 인구를 부양해야만 하기 때문인지 계단식 논이 촘촘히 경작돼 있을 정도로 땅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가도 가도 논 경작지가 이어졌고 듣기로 자바 섬 토질이 워낙 좋은지라 일 년에 삼모작을 해도 다음해에도 벼가 쑥쑥 잘 자란다고 한다. 족자카르타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벼 전시장이라 할 만큼 끝없이 촘촘히 심어진 황금들판과 초록들판이 번갈아 가며 반복해서 등장하며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반둥에서부터 아이들이 희한한 분장을 하고 행진하는 모습을 길에서 자주 봤는데 어떤 영문인지 궁금해졌다. (아시는 분 계시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자바 여행을 시작한 이후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어른, 아이고 할 거 없이 정말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하다는 것이었다. 물건을 사거나 길을 물어 볼 때나 이곳 사람들에게서 낯선 여행자에 대한 경계심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언제나 그 선한 얼굴로 웃으며 따뜻하게 대해줬다. 이런 자바 사람들 모습에서 커다란 여유와 삶에 대한 긍정적 낭만을 읽을 수 있었다. 자바를 관통해 처음으로 인도양(indian ocean)과 만났다. 해변에는 집체만한 파도가 넘실대고 있었다. 서핑하기에는 좋아 보였지만 해수욕하기에는 꽝이었다. 집채만 한 파도가 넘실대는 해변을 지나자 자전거 끌고 올라가기에도 벅찬 30도 경사 오르막이 시작됐다. 그래도 날씨가 시원해서 다행이지 더웠다면 길 위에서 그대로 퍼지지 않았을까... 7월 인도네시아 자바섬 날씨는 정말 자전거여행하기 최상이었다. 더워도 30도 이상 절대 넘어가는 날이 없었고 추워도 23도 이하로 절대 내려가지도 않았다. 거기다 비도 안 오고 항상 맑은 날씨가 지속되는 정말 그야말로 천상의 날씨였다. 아마 앞으로 여행하면서 이런 아름다운 날씨는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할 거 같다. 넘실대는 파도와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해안선은 자전거 끌고 오르며 지쳐 버린 몸을 달랠 수 있는 보약과 같았다. 잠시 이어졌던 산악지대를 벗어나자 자전거의 ,자전거에 의한, 자전거를 위한 완벽한 길이 나타났다. 조용한 도로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마저도 들을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해 줬고 높고 넓게 뻗은 나무들은 도로가에 시원한 그늘을 선물했다. 뿐만 아니라 놀라 운 것은 그 동안 쉽게 볼 수 없었던 자전거 군단을 자주 만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조용한 도로가 주는 여유 덕분에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아이들과 반갑게 인사 할 수도 있었다. 손을 흔들며 인사하면 아이들은 그 수줍은 웃음으로 띄며 반갑게 인사를 받아줬다. 여행을 하며 느끼는 거지만 각 나라마다 존재하는 거대한 역사유적지를 돌아보거나 미각을 홀리는 전통음식을 맛보는 것보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작지만 소소한 일상이 자전거 여행자가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낭만이며 추억이 아닐까 생각한다. 6시부터 학교에 등교하는 아이들의 부지런함이 아침을 깨우는 알람으로 작용했다. 이날 해가 떨어지기 전 90km 정도 떨어져 있는 족자카르타에 도착해야만 했기 때문에 빨리 일어나게 해 준 아이들의 부지런함이 고맙게 느껴졌다. 평소 달리는 속도보다 2~3km 정도 더 빠르게 달리다 보니 생각보다 빨리 족자카르타에 도착했다. 물론 평지가 계속 이어져 생각지도 않게 지형의 도움도 받았다. 어쨋튼 마리아뽈리가 열리는 전 날에 딱 맞춰 족자카르타에 도착하니 다행이었다. 드디어 인도네시아 포콜라레 도착! 도착해 보니 회원 몇몇 분이 모여 내일부터 있을 마리아뽈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들과 함께 기념사진 찰칵! 앞으로 있을 마리아 뽈리도 참석하고 한동안 쌓인 피로도 풀며 한동안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포콜라레는 1943년 이탈리아 트렌토에서 시작된 카톨릭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 현재 전세계 186개국에 전파돼 있으며, 500여만 명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공동체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에 방문해 주세요 ―> http://www.focolare.or.kr/ ) 블로그- http://eletto02.tistory.com
|
출처: 세계자전거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김용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