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가란 무엇인가?
월암스님(한산사 용성선원장)
경북 경주출생. 1973년 득도.
저서 『간화정로』,『돈오선』,『니 혼자 부처 되면 뭐하노』,『친절한 간화선』 등.
현,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장
정확하게 1970년 양력 9월 5일, 음력 8월 5일이었다. 경주중학교 2학년 2학기가 막 시작된 그즈음, 나는 학교 선배들의 권유로 경주 불교학생회에 가입하여 난생처음으로 분황사란 절에 갔다. 물론 생애 최초로 스님의 법문도 듣게 되었다. 이때 뒷날 은사가 되신 도문 큰스님께서 설하신 첫 구의 게송이 다음과 같다.
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도를 생각하리라.
나는 무엇을 말할까. 도를 말하리라.
나는 무엇을 행할까. 도를 행하리라. 하여
도 생각하는 마음 잠깐인들 잊으리까.
나무아미타불
열다섯 살의 어린 학생이었던 나는 그 게송을 듣는 순간 가슴에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그렇다.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 도를 생각하고, 도를 말하고, 도를 행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출가해서 도를 닦고 살아야 되겠다.”이로부터 나의 행자 생활이 시작되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아마도 전생사로부터 연유된 것이 아닌가 싶다.
출가란 단순히 세속의 집을 떠나 절집으로 옮겨가는 공간 이동이 아니다.『오성론』에 설하기를,“생사를 벗어나는 것이 출가이다.”라고 하였다. 궁극적으로 생사대사의 본분사를 깨닫는 것이 출가란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출가는 욕심으로부터 벗어남이요, 집착으로부터 떠남이며, 애증으로부터 탈출하여 구경에 생사를 여의는 것이다. 출가의 본래적 어의는‘나아간다.’는 것이니, 즉‘집에서 집이 없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집이란 집착이요 욕망이다. 집이 없는 삶이란 집착과 욕망을 여읜 삶을 말한다.
석가세존의 출가를 일반적으로‘유성출가’라고 부른다. 유성(踰城)이란 성을 넘었다는 의미인데, 부처님의 출가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된 위대한 출가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부처님은 성문을 나서면서“내가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다시 이 문으로 들어오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있다.
부처님의 출가는 엄청난 반대가 있었음에도“나는 반드시 출가한다.”라는 결연한 의지에 의해 결행이 되었으며, 아울러 싯다르타 개인의 출가가 아니고 중생을 위한, 세상을 위한 위대한 버림의 출가이었기에 또한“나는 반드시 돌아온다.”라고 선언을 했던 것이다. 세상을 도피하고 개인의 해탈을 목적으로 한 출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중생의 안락을 위해 세상의 평화를 위해 다시 돌아오는 출가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대비 원력에 의한 출가의 정신은 훗날 대승 보살의 머묾이 없는 행(無住行)으로 발전하게 된다. 지혜로써 생사에 머물지 않는 무주생사(無住生死)는 위대한 떠남이요, 자비로써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중생의 고통과 함께하는 무주열반(無住涅槃)은 위대한 돌아옴이다.
한국불교의 새벽 원효 성사는 출가에는 신출가와 심출가가 있다고 하였다. 즉 몸의 출가와 마음의 출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출가에는 삼종의 함의가 있으니, 육친출가, 오온출가, 법계출가이다. 애욕으로 맺어진 혈연과의 세속적 인연을 끊는 것이 육친출가이며, 일체의 육체적 욕망으로부터의 떠남이 오온출가이며, 번뇌와 업인 무명으로부터의 해탈이 법계출가이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는 모두 출가한 장부였다.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열반을 구하고자 욕망의 집을 나와 무위의 경계에 들었다. 출가는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운서주굉 선사는『죽창수필』에서 출가에는 사료간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 출가의 출가란 오욕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출가사문이 되어 생사대사를 해탈하고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재가의 출가는 비록 세속에 머물러 있지만,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보리심에 머물러 생사와 해탈이 둘이 아님을 체득하는 것이다. 셋째 출가의 재가는 비록 몸은 출가하였으나 세속을 그리워하고 탐진치 삼독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유위의 업을 쌓아가는 것을 말한다. 넷째 재가의 재가는 불법승 삼보를 알지 못하고 영원히 생사 가운데 머물러 생사해탈의 무위법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출가자는 출가의 출가자로서 일체 감각적 욕망을 떠나 삭발염의하고 생사해탈과 중생제도의 위 없는 보리심을 내어 한 생각도 물러남이 없이 실천하는 자를 말한다. 그리고 참된 출가의 재가자란 몸은 비록 부모 및 처자와 더불어 세간에 머물러 있지만 마음을 항상 도에 두고 번뇌와 보리, 생사와 해탈이 둘이 아님을 알아 물들지 않는 수행을 하는 자이다. 따라서 혜능 선사도『단경』에서 수행은 절이나 집 어디에서나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절에 있지 않고 집에 있더라도 또한 도를 얻을 수 있다. 절에 있더라도 수행하지 않으면 마치 서방정토에 있으면서 마음이 악한 사람과 같다. 집에 있으면서 만약 수행을 한다면, 마치 예토의 사람이 수행을 잘 하는 것과 같다.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수행하여 청정하게 되면 바로 이곳이 서방정토이다.
참된 수행은 출가나 재가에 상관이 없다. 연꽃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로움으로 스스로를 단장하듯이 바른 수행은 시끄럽고 복잡한 경계 속에서도 한 생각 일어남이 없이 적멸하고, 적정한 가운데서도 적정에 떨어짐이 없이 언제나 활발발한 삶으로 창조적 생산에 기여한다. 그러므로 경에서는“탐욕 가운데서 선(禪)을 수행함은 불꽃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쌍림의 부대사는 출가 수행하여 다시 대승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입가(入家)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 출가하였으니 다시 입가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제 입가에 대해 간략히 말하자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집에 들어가고, 으뜸가는 진리의 집에 들어가고, 현재의 색신이 바로 법신인 집에 들어가고, 생사와 열반에 머묾이 없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곧 대승이다.
출가와 재가가 이미 둘이 아님에 입각해서 생사를 위해 출가하고 열반을 위해 다시 입가할 뿐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출가의 재가자요, 재가의 재가자이다. 즉 출가의 재가란 몸은 출가하여 도량에 머물지만 마음은 항상 명리를 탐닉하여 속인과 다름없는 삶을 사는 명자사문을 말한다. 이러한 출가는 아예 불법을 모르는 범부보다 더 못한 경우가 된다.
그리고 재가의 재가란 영겁의 세월 동안 윤회 속에 갇혀서 오욕락에 빠져 해탈을 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설사 부처님 계신 때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불법에 뜻이 없으면 말법의 시대이며, 말세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불법을 믿고 실천하게 되면 신심이 견고한 시대가 된다. 진정한 출가란 인위적으로 사물을 다스리면서 억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면 수행에 방해되는 모든 반연은 저절로 소멸되게 된다. 마치 아침 해가 떠오르면 모든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구마라집은『주유마경』에서 말하기를 진정한 출가란“재가로 있되 탐욕이 없고, 출가하되 출가상이 없다. 지금 출가자의 입장에 있으나 마음에 번뇌의 집착이 있으면 아직 출가자라 할 수 없다. 일체의 경계에 집착함이 없는 것이 진정한 출가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비록 백의를 입은 재가자라 하더라도 능히 무상보리심을 발하면 바로 출가이며 계행을 구족하게 된다.”라고 하여 백의출가(白衣出家)를 설하고 있다. 스승 구마라집의 백의출가를 계승한 승조법사는『유마경』의 불이법문(不二法門)에 의거하여 승속의 차별성이 없음을 강조하고 나아가 무위출가(無爲出家)를 주장하고 있다.
출가의 의미는 무위(無爲)에 있다. 이러한 무위의 도가 어찌 공덕과 이익이 있고 없음을 논할 수 있겠는가.
승조는『유마경』에서 설한“보리심을 발하면 이것이 출가이다.”라고 한 것은 장자의 아들들이 비록 출가해서 도를 이루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출가할 수 없음을 알고 유마거사가 그들의 출가의 모양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발보리심이 곧 출가이니 출가의 겉모습에 집착하지 말라.”고 방편을 사용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출가의 근본은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다. 따라서 승조는 출재가를 막론하고 무위의 인(因)이 있으면 무위의 과(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일곱 살의 어린 사미 수다야에게“그대의 집은 어디인가?”라고 물으니,“삼계가 모두 공하거늘 세존께서는 어찌하여 우리 집의 위치를 물으십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주굉선사는 말하기를,“머리를 깎고 염의를 입는 것으로 출가라고 말하지 말라. 이것은 두 조각 대문의 집에서 나온데 불과하다. 삼계화택의 집에서 나온 후에야 대장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오히려 미흡하다. 삼계의 중생과 함께 삼계를 벗어나야만 비로소 대장부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출가란 세속을 떠남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본래 집(집착, 욕심)이 없는 무위의 집에서 보면 집을 떠남도 없고, 집에 머물러 있음도 없다. 출가라 하더라도 떠난 바 없는 떠남이요, 재가라 하더라도 머문 바 없는 머묾이다. 즉 출가에 있어서 몸이 출가했느냐, 마음이 출가했느냐의 차이가 있지만, 몸과 마음이 텅 비어 공한 입장에서 보면 출가의 모습도 재가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중생의 입장에서 출가란 범부의 집에서 여래의 집으로 나아감이니, 즉 업생(業生)을 청산하고 원생(願生)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 된다. 즉 범부의 생각에서 성현의 생각으로 바꿔지는 것이 출가이니, 생각에서 생각을 여의고 모습에서 모습을 떠나서 구함도 없고 머묾도 없음이 진정한 출가이다.
경전에 보면 출가하였지만 수행과 교화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생존수단으로 출가한 자를 일러‘적주비구(賊住比丘)’라고 하였다. 『잡아함경』에 설하기를,“적주비구란 진실한 수행에는 마음이 없고 이득이나 생활 방편으로 또는 부처님 가르침을 도둑질하기 위해 불교 교단에 출가한 자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겉모습만 출가했을 뿐 행동은 속인과 다를 바 없는 엉터리 출가자를‘속승(俗僧)’이라 불렀다.
누구든 가사를 입고서
세속적인 탐욕을 제거하지 못하면
아직 가사를 입을 자격이 없다.
누구든 모든 더러움을 버리고
착함이 잘 정립되어 있으면
가사를 입을 만하다.
출가하여 아직 나가 있고 나의 것이 남아 있다면 가사를 입을 자격이 없다. 가사란 무소유의 상징이다. 부처님은 자신이 열반에든지 천년이 지난 뒤의 승가의 타락에 대해 이렇게 예견하고 있다.“미래 세상의 비구들은 수염과 머리를 깎았으면서 살림을 즐겨 해 왼쪽에는 아들을 안고 오른쪽에는 딸을 안을 것이다. 또 젓대나 퉁소를 들고 거리를 나다니면서 구걸을 할 것이다.”이러한 적주비구나 속승들에 대해서는“마치 쌀겨를 키질하여 바람에 날려 버리듯이 그들을 날려버려야 한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 본질을 놓고 보면 출가와 재가의 차별이 없다고 하지만 현상에 나아가 보면 엄연히 출가를 권청해야 함이 옳은 도리이다. 동진 출가하여 도를 구하고자 하는 이가 만의 하나도 되지 않은 요즘, 자못 불법이 쇠멸될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선남선녀들의 출가를 권장하여 불법문중이 흥성케 하여 정법이 오래 머물기를 발원해야 한다.
『출가공덕경』에 설하기를,“만일 어떤 사람이든 신심을 발해 출가하도록 도와주고 권장하면 그 공덕이 한량이 없으리라.”하였다.『본연경』에서는“다만 하루 동안만이라도 출가를 행하면 이십 겁 동안을 삼악도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하였다. 출가의 정인(正因)을 갖추어 무상대도를 이루면 구족이 승천하는 과보를 받는다고 하였다. 한 자녀를 기필코 출가시켜 무루의 복락을 수용하여 해탈의 도업을 성취하도록 하자.
- <불교와 문학> 2023년 가을호 中
|
첫댓글 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의 加被와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I return to Buddha, Law, and Seung Sambo.
I pray with all my heart that the holy and merciful Buddha's skin and mercy light will be reflected. Thank you.
Holy Father.
Avalokitesvara Bodhisattva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_()_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