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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문인총연합회 / 회원 동정】
윤승원(수필문학인, 前 대전수필문학회장)
‘조선일보 40년 독자’로서 <역사기록, 조선일보 지면 속의 추억>이란 제목으로 『사이버 전시관 ‘윤승원 에세이 展’』 을 열고 있다. ▲ 1989년부터 2018년까지 조선일보에 게재됐던 에세이, 아침편지, 개인 인터뷰 기사 등 스크랩북에 보관해왔던 50여 편의 글과 기사를 ‘사이버 전시 공간’으로 모았다.
▲ 조선일보에서는 최근에 “조선일보 기사 속 당신을 액자로 간직하세요”라는 알림 기사를 통해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의 주인공에게 기념 액자 제작 서비스를 해주고 있다. ▲ 윤승원 수필작가는 신문에 실렸던 원고 분량이 많아 액자 제작 외에 ‘개인 사이버 전시관’을 열어 보다 많은 독자가 볼 수 있도록 하고, 독자와의 소통기회도 갖고 있다. 코로나 시대에 ‘비대면 사이버 전시관’은 블로그, 카페,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독자와도 공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이 같은 윤승원 수필작가의 ‘사이버 에세이 展’은 조선일보에 이어, 대전일보, 중도일보, 충청투데이, 금강일보 등 충청지역 신문에 실렸던 글과 기사도 ‘사이버 전시관’을 열 계획이다. ▲ 본 전시물은 기간 제한 없이 현재 대전문인총연합회[대전문총] 카페,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올사모] 카페, 페이스북, 윤승원의 다음 블로그 ‘청촌수필’에서도 볼 수 있다.
▲ 수필작가 윤승원의 다음 블로그 전시관 - 《윤승원 역사기록, 조선일보 지면 속의 추억》 - 『사이버 '윤승원 에세이 展'』 일부 노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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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기 :
윤승원 역사기록 / 조선일보 지면 속의 추억 - 『사이버 전시관 ‘윤승원 에세이 展’』
◆ 조선일보에 실린 윤승원 글과 기사로 《사이버 에세이 전시관》 열다
“조선일보 기사 속 당신을 액자로 간직하세요”
― 조선일보 '알림'기사를 읽고 내 글과 기사 찾아보니 ‘개인 전시회(?)' 분량
― 액자 제작과 스크랩북과는 별도로 '한 시대, 한 개인의 의미있는 역사기록'이므로 블로그, 카페,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가족채팅방 독자와도 공유할 수 있도록 『사이버 전시관 '윤승원 에세이 展'』 열다
윤승원 수필문학인, 前 대전수필문학회장, <조선일보 40년 독자>
■ '사이버 전시관'에 들어가며 『평범하지만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수필문학인』 ― 인터넷 블로그 ‘프로필’란 소개 글이다. 80년대 PC통신 시절부터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이런 ‘필자소개’를 내걸고 다양한 형태의 글을 써왔다. 대부분 소박한 삶의 이야기들이다. ‘조선일보 40년 독자’이다. 살아가면서 틈틈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은 인터넷에도 동시에 올라왔다. 일간지 지면에 실렸던 내 글은 한번 읽고 버려지는 ‘하루살이’나 ‘일회용’이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바람처럼 사라질 줄 알았던 내 글이 민들레 홀씨처럼 생생하게 날아다녔다. 보잘것없는 내 글을 자신의 카페나 블로그에 퍼다 옮기는 독자도 있었다. 누군가가 내 글을 공유한다는 것,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조선일보에서 내 보잘것없는 글을 귀하게 대접해 준 덕분이다. 독자의 따뜻한 사랑 덕분이다. |
최근에 조선일보 지면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알림’ 기사를 보았다. 『조선일보 리프린트(Chosunilbo Reprint)』제하의 일종의 광고형 기사였다. 내 눈에 유독 관심을 끈 대목은 “조선일보 속 당신을 액자로 간직하세요”였다.
▲ 조선일보사에서는 신문에 실린 글과 기사의 주인공에게 해당 지면을 액자로 제작해 주는 의미 있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조선일보 지면에 실린 자신의 글과 기사는 개인적인 역사자료로 소장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평소 유익한 기사나 내 글이 실린 지면을 꼼꼼히 스크랩해 온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기사였다. ‘조선일보 리프린트’란 본인 또는 가족, 지인의 인터뷰, 기고문 등 조선일보 지면에 실린 기사를 소중한 추억으로 소장, 보관할 수 있도록 고급 프레임에 담아 제공하는 서비스라고 했다.
◆ '조선일보 속 나의 기사'를 찾아보니....
▲ 조선일보 인물검색 - 스마트폰 검색 화면
▲ 나의 졸저 수필집 《덕담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출간 관련 인터뷰 기사(1997) - 세월이 흐르면서 종이신문 색깔이 바래고 있다.
▲ 아들과 함께 홈페이지를 만들고, 화제가 됐던 글을 책으로 펴내자 조선일보 임도혁 기자가 취재하러 왔다. 기사 보도 이후 TV생방송에도 출연했다. (2000)
▲ 조선일보 기자가 필자의 '직무실적 전국 1위 특진' 기사를 썼다. - 기사 내용 중 '경찰작가가 실무 능력도 인정 받아 특진하게 됐다'는 대목을 보고, 당시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의경으로 복무하던 아들이 가장 기뻐해주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조선일보 칼라판 기사이다. 대단한 벼슬(?)도 아닌데 승진 기사를 써 준 것을 보면, 조선일보에서는 '기사 가치'를 어디에 두었는지 조금 짐작이 갔다. '글을 쓰는 경찰관'에 방점을 찍었던 것이다. (2004)
그러잖아도 나는 조선일보 지면에 실린 나의 기사 스크랩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창간 기념공모전에서 뽑힌 글 등 기념이 될만한 게시물은 가보처럼 소중히 간직해 왔다.
특히 지난 2005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됐던 대형 전시물 ‘아, 어머니 展’ 편지글은 지금도 여전히 서재 방 벽에 걸어 두고 있다. 스크랩북과는 별도로 소장 가치가 있는 개인 역사기록물은 변색이 되지 않도록 문구점에 가서 코팅해다가 거실 진열장에 귀한 보물처럼 모셔두고 있다.
◆ 거실 진열장 속의 조선일보 '코팅 글'과 '기사'
▲ 문구점에서 가서 내 글과 기사가 실린 신문 지면을 변색되지 않게 코팅했다.
▲ 코팅한 기사를 거실 진열장에 보관해 오고 있다. - 진열장엔 이밖에도 조선일보에서 보내온 상품도 함께 진열돼 있다.
▲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됐던 나의 편지글 - 특별 전시가 끝나고 신문사에서는 전시물을 필자에게 돌려주었고, 필자는 '대형 편지글 전시물'을 집안 거실에 보관하고 있다.
▲ 조선일보 기사 스크랩북 - 세월이 흐르면서 스크랩북은 기사를 보관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색이 바래고 이사다닐 때마다 분실되기도 한다.
▲ 나의 편지글이 소개된 조선일보 <만물상>(2005.05.01)
◆ 조선일보 '축쇄판' , 개인 역사자료로 소장
조선일보에서는 전체 기사를 압축한 ‘축쇄판’이 대형 서적 형태로 출간됐다. 내 글이 실린 조선일보 축쇄판 3권을 구매하여 소장하고 있다.
▲ 조선일보 축쇄판(1989~1990) - 필자의 글이 실린 조선일보 축쇄판 3권 '소장용'으로 구입
나는 내 글이 실린 신문지면을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버릴 수가 없다.
크게 내세울 것 없는 자잘하고 보잘것없는 내 삶의 작은 궤적이지만 일단 신문에 게재됐던 내 인생의 한 단면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많은 독자와도 공유했던 것을 생각하면 소중한 역사기록물로 여겨지는 것이다.
◆ 다시 읽어도 코끝 찡한 추억 【조선일보 / 아침편지】
▲ 조선일보 아침편지 <의경 아들 안경 고쳐 쓰면 돼요>(2004.12.16.일자)
▲ 조선일보 아침편지 <아들 군에 보낸 아버지들>(2005.02.12.일자)
◆ 독자로서 '하고 싶은 말' 당당하게 한다 : 【조선일보 / 편집자에게】
▲ 조선일보 편집자에게 <‘볼일’ 급했던 교통경찰을 위한 변명>(2010.01.27일자)
【조선일보 / 편집자에게】
2012년 1월 19일 조선일보
◆ 편집자에게
가난이 범죄로 이어지는 사회는 안된다
윤승원
추위에 떠는 할머니와 동생들을 보다 못해 한복 한 벌을 훔친 천안의 10대 소년가장의 안타까운 사연이 연초부터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12일 조선닷컴 보도). 부모 없이 할머니와 두 남동생을 돌봐야 하는데 할머니 앞으로 나오는 보조금 10여만 원이 수입의 전부였다고 한다.
영하 10도의 강추위에 보일러에 기름을 넣을 수도 없는 형편으로, 얼음장 같이 차가운 방에서 여름이불 2개를 겹쳐 깔고 지냈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는 한 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한복을 훔쳐 팔아 겨울 이불과 먹을거리를 사려고 했다고 한다.
이같은 소년가장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라면과 성금을 전달한 일선 경찰관들의 선행도 아름답고, 따뜻한 인정으로 잘못을 선처해 주면서 이불까지 선물한 한복가게 주인의 마음씨도 곱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에 이렇게 어려운 처지의 가정이 비단 이들 뿐이겠는가 돌아보게 된다. 정부는 ‘능동적인 복지’를 국정지표로 내걸었고, 각종 사회단체에서는 어둡고 그늘진 곳을 보살핀다면서 모금도 하고 기부도 받는다.
그런데 왜 진작 이런 소년가장의 어려운 형편을 파악조차 못했는지 답답하기 그지없다. 연말 불우이웃돕기 성금은 어디에 쓰이고,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소년가장에게는 왜 온정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가난은 범죄로 이어진다. 흔히 ‘생계형 범죄’라고 하지만 이를 미화해서도 안된다. ‘가난이 죄냐’는 논리로 범죄가 근원적으로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경찰에서는 먼저 지적해 줘야 한다.
물심양면으로 성심성의껏 도와준 경찰관들의 선행은 치하 받아 마땅하지만, 한편으로는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소년이 받았을 ‘마음의 상처’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갑자기 관심의 대상이 된 소년가장과 어린 동생들이 입었을 마음의 상처도 세심하게 헤아려야 한다. 성금과 이불 선물 등 갑작스런 관심이 고맙기도 하지만 심적 부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어렵지만 죄를 짓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엔 얼마나 많은가. ‘절도’로 인해 뒤늦게 밝혀진 온정이 ‘사회를 훈훈하게 한다’는 데만 초점을 맞춰서도 안된다. 가난이 범죄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어른들의 ‘선도(善導)’와 함께 복지 사각지대를 보다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는 점에 정부와 언론에서는 더 큰 비중을 둬야 할 것이다.
前 대덕경찰서 경감
▲ 조선일보 편집자에게 <가난이 범죄로 이어지는 사회는 안 된다>(2012.01.19일자)
◆ 많은 분들이 퍼간 나의 글 : 【조선일보 / 아침편지】
【아침편지】 생각이 달라도...우리는 '적(敵)'이 아닙니다
윤승원
수필가 · 前 대전수필문학회장
어느 모임이든 여럿 모이면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살아온 과정이 다르고 저마다 보고 배운 것도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개중에는 남의 말에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는 이도 있다. 조금 기분 언짢은 말이 오갔어도 다음 모임에서 우리는 다시 만난다.
내가 참석하는 몇 군데 사적인 모임도 각기 다른 성향과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지만 원수지간처럼 싸우지 않고 정기적으로 또 만난다. 왜 그럴까? 서로 피하지 않고 또 만나서 함께 밥 먹고 술 마시는 것은 그래도 무언가 인간적으로 통하는 게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지금 ‘진영 논리’에 빠진 우리 사회는 자신과 의견이나 기본 철학이 다르면 무조건 적대감을 갖는 것이 가장 큰 갈등구조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보좌파와 보수우파, 야당과 여당, 노조와 사용자, 경찰과 불법 시위대 등 ‘극과 극’의 대결구도가 국민통합을 가로 막고 사회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는데, 경륜과 인품으로 존경 받는 사회 원로들의 온당한 설득도, 따끔한 꾸지람도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부자나 부부 간에도 의견이 달라 서운할 때가 종종 있다. 가정에서 특정 사안을 놓고 티격태격 하다가도 서로 등 돌리지 않고 다시 얼굴 마주 하는 것은 무언가 통하는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를 끌어당길 수 있는 마력과 같은 공통분모를 찾아야 한다. 서로 양보해도 좋은 ‘관용의 요소’가 무엇인지 발견해 낼 수 있다면 답은 의외로 간단히 나올 것이다.
당신과 나는 이 나라 국민이란 것, 결코 원수지간이 될 수 없는 동족이라는 것, 아무리 생각이 달라도 우리 사회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발전하며 어떤 경우라도 법을 무시하거나 정당한 법집행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공통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
개인이든 단체든 극도의 이기심이 아니라 세상의 상식과 이치에 부합하는 사안을 놓고선 언제든지 먼저 양보할 수 있는 아량을 갖고 있다는 것,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엔 반대를 위한 반대를 않는다는 애국심을 당신이나 나나 똑같이 갖고 있다는 것,
사회 정의가 아닌 것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한 치 양보하지 않는 뚝심을 똑같이 갖고 있다는 것, 선배와 후배, 스승과 제자, 어르신과 연치 아래인 사람 사이에서는 사회 상규와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깍듯이 갖출 수 있는 상대라는 것을 당신도 알고 나도 인식한다는 것.
새해를 맞으며 이런 요소 몇 가지만이라도 공유하면서 상호 존중할 줄 하는 사회를 만든다면 당신과 나, 우리는 결코 ‘적(敵)’이 될 수 없다. ■
▲ 조선일보 아침편지 <생각이 달라도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2014.01.3일자)
◆ 눈물 겹게 아름다운 추억 만들어 준 지면 : 【조선일보 / 에세이】
2010년 9월 24일(금) 오피니언
[ESSAY] 천국의 어머니와 못난 아들의 첫 해외여행
윤승원 전 대전 대덕경찰서 경감
▲ 윤승원
'유리 깨지지 않게 조심해요' 아내가 어머니 사진을 챙겼다
액자 들고 떠난 첫 해외여행… 사진 속 어머니는
"그래 됐다"며 걸어 나오실 것 같았다
"집안에만 갇혀 계시던 어머니가 난생처음 비행기 타게 되셨네. 근데 여보, 깨지지 않게 조심해서 가져가세요."
아내가 거실에 걸려 있던 어머니 사진 액자를 꺼내 비단 천 보자기에 싸면서 한 말이었다. 그렇다. 어머니의 첫 해외여행이다. 돌아가신 지 20여년 만에 어머니 액자 사진이나마 가슴에 안고 비행기에 오르니, 가슴이 아려온다.
사실 해외여행은 이 못난 자식도 처음이다. 올 초 경찰공무원으로 명예퇴직하기까지 30년 넘게 가족들과 여행은커녕 가까운 주변조차 다녀올 겨를이 없었다.
뜻밖에도 '뉴칼레도니아' 여행 기회가 생겼다. 바로 어머니의 고생스러운 삶을 소재로 쓴 '아, 어머니 전(展)' 편지글 사연이 일간지에 당선돼 상품으로 '2인 왕복항공권'을 받은 것이다. 아내의 양보로 아들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무려 10시간이나 걸려 한밤중에 칼레도니아에 도착했다. 이 섬은 전체의 60% 이상이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천혜의 관광지였다.
도착하자마자 5성급 호텔방 탁자 위에 어머니를 모셔놓았다. 마치 환생(還生)이라도 하신 듯 우리 부자(父子)를 바라보시며 살포시 웃으시는 어머니는 지금 당장에라도 사진을 뚫고 걸어 나오실 것만 같았다.
▲ 뉴칼레도니아 '르메르디앙' 호텔 탁자 위에 모신 어머니
어머니는 "밖에 나가 식사를 하자"고 해도 "그래, 됐다. 너희만 잘 먹으면 난 안 먹어도 배부르다"고 하시곤 했다. 자식사랑이 지극했던 어머니는 내가 군 복무하는 동안 시골집을 혼자 지키시면서 엄동설한에도 군불을 지피지 않고 사셨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면 장독대에 나가 그 눈을 고스란히 맞으셨다고 한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그만 방에 들어가시지요"라고 하면 "자식은 엄동설한에 총대 메고 눈밭에 서 있는데 어미가 어떻게 따뜻한 방에서 자겠느냐"고 하셨다고 한다. 내가 제대하여 어머니 소원대로 가정을 이뤄 귀여운 손자도 안아보게 하는 등 잠시 기쁨을 드렸으나 1989년 여든 가까운 나이로 돌아가셨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말로만 듣던 남태평양의 이 아름다운 섬나라를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니, 부럽고 행복한 나라임엔 틀림없었다. 이 나라는 사람이 적어 그런지 빨리 서두르는 '조급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버스운전사가 '볼일' 급하다는 나를 위해 무려 5분 이상 기다려주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이 그리 힘들어 아등바등 조바심 내며 바삐 살아왔던가.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럽던 70년대 후반 경찰에 들어와 거의 매일같이 '시국 치안'에 험한 경찰생활을 했다. 폭력이 난무하는 시위 현장에서 밤을 새우며 어머니가 제때 진지를 드시는지, 자식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 좀처럼 챙겨볼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30여년을 쫓기듯 직장생활을 해왔다. 어머니 정성과 사랑에 만분의 일이나 효도를 했던가를 생각하면 후회감에 가슴이 저려왔다.
"비행기 타고 올 때 한국인 여승무원이 한 말이 생각나요. '모녀간에는 여행하는 것을 봤어도 아들과 함께 여행하는 분은 처음 보았어요'라고 했잖아요. 제 친구들도 아버지랑 해외여행 떠난다니까 모두가 놀라는 거예요."
평소 과묵한 아들이 이처럼 살갑게 아비 듣기 좋은 말만 하는지, 기특하고 대견스러웠다. 아들은 자기도 의경으로 복무했지만 경찰공무원으로 퇴직한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할머니의 고생스러운 삶을 이야기로 쓰셔서 이렇게 여행에 나섰지만, 이번 여행은 30여년 동안 경찰관으로 고생하신 아버지의 '퇴직기념 여행'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난 네가 더 자랑스러워. 넌 대한민국 경찰 중에서 가장 바쁘다는 서울 종로에서 의경으로 근무했잖아. 시위 진압에 동원되어 길바닥에서 모래 섞인 밥을 먹었다는 네 얘기를 듣고 내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아느냐." 슬며시 아들의 손을 잡았다. 아들이 의경으로 복무하는 동안 시위현장에서 행여 다칠까 봐 애간장을 녹이던 아비의 심정으로 쓴 글들을 모아 '아들아, 대한민국의 아들아'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우리 부자간의 해외여행은 신문사에서 용케도 알고 '위로여행'을 보내 준 것만 같구나!" 아들과 나는 이제껏 속에 담아 두었던 가슴 저린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뉴칼레도니아에서 만나는 사람은 모두 친절하고, 상냥하고, 삶의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하긴 이처럼 꿈에 그리던 낙원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아들은 "그래도 나는 한국이 좋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부대끼며 사는 게 오히려 정신건강에 좋다고 하잖아요. 잘만 승화시키면 국가발전의 원동력도 되고요." 20대 후반인 아들은 이미 성숙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제야 아내가 왜 함께 가자는 여행을 볼일이 있다는 핑계로 아들에게 양보했는지 짐작이 갔다. 아내인들 해외여행을 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경찰 생활하면서 아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못했으니 이제라도 함께 여행하며 '정을 나누라'고 했던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 액자 사진을 닦고 또 닦고 반들거리게 손질하여 고운 비단 보자기에 애지중지 싸준 아내의 손길이 고맙기만 했다. 천국의 어머니도 다 내려다보고 계시겠지.
2010. 9. 24.
▲ 조선일보 에세이 <천국의 어머니와 못난 아들의 첫 해외여행>(2010)
[ESSAY] 九旬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
윤승원 대전수필문학회장
- 청양 칠갑산 아래 사는 장모님은 자식들이 가져온 선물보다 큰절 받는 걸 더 좋아하셔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살라는 그분의 꼿꼿한 가르침을 좀더 오래 누릴 수 있었으면 -
충남 청양의 칠갑산 아래 산골 마을에 아흔이 다 되신 장모님이 사신다. 어르신에게 유일한 벗은 TV이다. 온종일 틀어놓는 TV의 높은 볼륨 탓에 대화가 불편할 정도다. 하지만 나는 TV 볼륨을 줄이지 않는다.
TV 소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은 도회지에서 사는 나의 예민한 귀 탓이지, 시골 노인의 귀에는 상관이 없다. 혼자 적적하게 사시는 노인 귀에는 이렇게 큰 음량이 익숙해 생활에 아무런 불편이 없으니, 문안드리는 사람이 굳이 TV 볼륨을 줄여 드릴 필요가 없다.
이곳은 TV 소리마저 없으면 절간이나 다름없다. 사람이 사는 집인지, 빈집인지 모를 정도이다. 일찍이 홀로되신 장모님은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호랑이처럼 무섭게 살지 않았으면 살아가면서 별의별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 혼자 살아가니 나약한 면을 보여서는 안 되는 처지였다. 그 많은 전답을 혼자 관리하려면 장정(壯丁) 못지않은 완력과 기세도 필요했다.
거친 농사일에 자식 키우는 일까지 억척스럽게 일인다역(一人多役)을 해내신 분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외로운 분이었다. 일찍이 남편과 사별해 경험했듯이 뜻하지 않은 불행을 이겨내려면 보이지 않는 신령(神靈)도 믿어야 했다.
이때부터 일진(日辰)이며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엄격히 따지면서 '가리고 삼가는 일'이 많아졌다. 먹는 것, 물건 사는 것, 심지어 장거리 출타할 때도 '좋은 날'을 따져야 했다.
30여 년 전 내가 이곳 깊은 산골 마을로 장가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대문 앞에 우람하게 버티고 서 있는 가시 달린 나무였다. 악귀(惡鬼)를 쫓는다는 '엄나무'였는데, 장모님의 수호신(神)이었다. 그 나무는 세월이 흐르면서 태풍에 쓰러졌지만 뿌리는 아직도 죽지 않고 새순을 피워 올려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아내는 그 산골 마을에서 '콩밭 매는 아낙'이었다. 대중가요 '칠갑산'의 노랫말에 등장하는 것처럼 아내도 '홀어머니 두고' 내게 시집왔다.
찬바람이 불면 아내는 김장을 한다. 우리 식구 먹을 양만 하는 게 아니라 시골에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가 드실 김치도 담근다. 요즘은 손쉽게 택배로 부쳐도 된다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지난 휴일 김장 단지를 승용차에 싣고 청양으로 달려갔다. 허리가 활처럼 휜 장모님이 이것을 보시더니, 사위한테 '큰절' 받으시는 것도 잊으시고 김장 단지가 놓일 장소부터 지시하신다.
그래도 나는 큰절이 먼저다. '호랑이 장모님'한테 큰절부터 올리지 않으면 나중에 혼쭐이 난다. 장모님은 사위나 손주들에게 선물을 원하지 않는다. 큰절이면 그만이다. 왜 그러실까?
아내한테 들은 이야기다. "친정어머니는 일찍이 혼자되시어 아버지 몫까지 대신해 오신 분이고, 자식들 교육도 그렇게 엄격히 하셨어. 객지의 자식과 손주들이 찾아뵙고 올리는 큰절도 어머니에겐 그래서 각별한 의미가 있지."
그러면서 "자식이나 손주들이 오랜만에 찾아뵙고 큰절을 하지 않으면 어쩐지 인사받은 것 같지 않아 서운하다고 하신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 뒤로 나는 처가에 가면 무조건 '큰절'부터 올린다.
또 하나 신경 써야 할 일이 있다. 작별 인사하면서 장모님께 용돈을 드릴 때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언젠가 대문 밖까지 나오셔서 배웅해 주시는 장모님께 용돈을 드리는데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셨다.
그래서 치마 주머니에 찔러 드리는데 그냥 드리기가 뭣해서 "고기나 사 드세요"라고 말씀드렸다. 예부터 어르신들께 용돈을 드리면서 자식들이 흔히 하는 방식대로 내 딴엔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말씀드린 것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아내를 통해서 책망하시는 말씀이 들렸다. "왜 용돈을 주면서 꼭 '고기를 사 드시라'고 했느냐"는 것이다. "그냥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주었으면 초파일에 절에 가서 '사위 무사 기원 등(燈)'을 달려고 했는데, 사위가 '고기 사 드시라'고 한 말 때문에 임의로 기원을 드리지 못했다"는 말씀이었다.
결코 융통성이 없어서 그러신 게 아니다. 노여움으로 하신 말씀도 아니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장모님이 사위에게 서운한 마음으로 하신 말씀 같지만 실은 그 말씀이 '바른 가르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깊은 사랑'이다.
이제 내게는 다른 어르신이 안 계신다. 장모님 한 분이 유일한 어르신이다. 남달리 정직하고 올곧게 살아오신 분,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살라고 늘 강조하는 그분의 엄격한 가르침이 나의 느슨한 의식에 바늘처럼 꽂힌다. 그 꼿꼿한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누리고 싶다. (2011.11.30. 조선일보)
▲ 조선일보 에세이 <구순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2011)
▲ 조선일보에 실렸던 나의 에세이 <호랑이 장모님...>이 대전문학관 기획전시실에 전시물로 걸리기도 했다. '한국문학시대' 문학대상 수상자 작품 전시였다.
◆ 잊지 못할 사연 만들어 준 : 【조선일보 / 아침편지】
【아침 편지】 '훈장'만큼 자랑스러운 두 아들의 예비군 모자
윤승원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입력 2013.02.15 03:03
윤승원
"부대 배치되어 터진 옷을 바늘로 꿰매는데, 실을 이빨로 끊다가 그만 이가 왕창 나갔어요. 이를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무섭기만 한 고참들이 빨리 의무대로 가보라고 윽박질러요. 그래서 다급하게 의무대로 달려가는데, 경례를 붙여야 할 데가 어찌나 많은지, 치료는커녕 경례만 붙이다가 꿈을 깨었어요."
둘째 아들이 난데없이 간밤 꿈 이야기를 꺼냈다.
마치 '현실 경험'처럼 생생하게 펼치는 아들의 엉뚱한 꿈 이야기에 속으론 웃음이 나왔지만, 사병 만기 전역한 지 4년이나 된 녀석이 아직도 '군대 꿈'을 꾸는지 안쓰럽기도 했다.
"아버지도 가끔 군대시절 꿈을 꾸곤 하지.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군대 꿈'은 평생 꾸는 꿈이란다." 나의 위로 아닌 위로에 아내가 거들었다. "요즘 인사청문회를 보면 이런저런 사유로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의혹을 사는데, 그럴 때마다 화가 나요.
대한민국엔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 더 많은데, 왜 온전히 병역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을 고위직에 발탁하는지…." 아내의 푸념에 이내 착잡한 심경이 됐다.
'군대 꿈'을 꾼 아들도 논산훈련소에서 신병 교육을 받다가 폐렴에 걸려 펄펄 끓는 고열에 죽을 고생을 했다. 긴급 연락을 받고 특별면회를 하면서 병상에 누워 있던 자식을 부여잡고 얼마나 울었던가.
아비도 힘든 군대생활을 했다. 고된 훈련도 훈련이지만 고참들의 구타가 예사이던 70년대, '참고 견디는 게 군대'려니 체념하면서 33개월을 인내 하나로 버텼다. 그동안 일부 '백' 있는 집안의 친구들은 온갖 방법으로 병역 면제받을 궁리를 했다.
어떤 친구는 남들이 군 생활할 때 외국 유학을 다녀와 남보다 일찍 성공적인 인생행로를 걸었다. 그래도 억울하지도, 부럽지도 않았다. 달랑 '병장 만기 전역증' 한 장 손에 쥐었지만, 그것이 '대한민국 남자의 자격증'이라고 믿었기에 군대 고생쯤은 거뜬히 상쇄할 수 있었다.
요즘도 거실 벽에 걸려 있는 두 아들의 '예비군 모자'를 볼 때마다, 30여년 공직을 마치면서 받은 옥조근정훈장 못지않게 자랑스럽게 바라보곤 한다. 자식들이 이 모자를 쓰고 훈련을 받으러 나갈 때마다 아내는 군화를 말끔히 닦아 준다.
온당치 못한 방법으로 병역을 면제받은 자식을 둔 부모들은 결코 누릴 수 없는 광경일 것이다. 간밤에 아들의 꿈을 이렇게 풀이해 줬다.
"흔히 '앓던 이가 빠지듯…'이란 표현이 있잖니. 네 꿈은 앞으로 일이 술술 잘 풀릴 조짐이나 암시라고 보면 돼!" 길몽이라는 아비의 위로에 아들도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아내도 한마디 거들었다.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 ‘훈장’만큼 자랑스러운 두 아들의 예비군 모자(2013.02.15.일자)
◆ 또다른 사연 이어지다 : '조선일보 아침편지'가 만들어 준 사연
▲ <조선일보 아침편지>에 실린 글이 계기가 되어 국방부 정훈교재 촬영팀에서 우리 가정을 방문했다. 과분하게도 '애국가족'이란 이름을 붙여 <3부자(父子)의 애국심>을 담은 정훈교재 촬영을 했다. 이 같은 잊지 못할 사연은 필자의 에세이집에도 촬영장면과 함께 수록했다.
【조선일보 / 아침편지】
【아침 편지】 아버지의 라디오, 아들이 준 라디오
윤승원 前 대전수필문학회장
입력 2018.01.05 03:10
윤승원 前 대전수필문학회장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아들이 보내준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라디오였다. 외양이 60년대식이다. 재난 대비 필수품이라고 했다. 비상용 전등도 달렸다. 전기나 배터리 없이 태양광 또는 자가발전으로 작동한다. 다이얼도 손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이 구식 라디오를 보면서 선친이 생각났다.
라디오는 아버지의 유일한 친구였다. TV는 구경도 할 수 없던 시절이다. 가장 좋아하셨던 프로그램은 민요와 만담이 어우러진 민요 노래자랑이다. 김용운·고춘자 만담을 즐겨 들으셨다. 근엄하셨던 어른 사랑방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날은 민요와 만담이 전파를 타는 날이었다. 그다음으로 즐긴 프로그램은 엄익채·한국남·안의섭(두꺼비) 박사 등이 나오는 '재치 문답'이었다. 시사 토론도 즐겨 들으셨다.
아침 밥상머리에서 아버지는 간밤에 라디오로 들으신 토론을 언급하시곤 했다. "방송에 나와 '의견 제출'하는 사람은 모두 식견이 밝은 훌륭한 사람이다. 방송국에 나가 국민을 일깨우는 일이야말로 매우 가치 있는 일이며 최고의 출세"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개혁적 마인드'만이 한 맺힌 보릿고개를 이겨내는 힘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막내인 나는 아버지 임종까지 라디오 주파수를 잘 맞춰드리고, 머리맡에서 책과 신문을 읽어드렸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곁에서 "우리 아들 효자여" 하며 힘을 북돋아 주셨다.
선친이 돌아가신 후 내 글이 신문에 나오고, 아버지가 즐겨 들으시던 KBS 서울중앙방송국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기도 하였다. 저세상에서 이를 아신다면 동네 어르신들 모아 막걸리 한 통 정도는 턱을 내셨을 것이다. 생시에 딱 한 번 그러신 적이 있다.
잡지사에서 내게 보내온 원고료(우체국 소액환)를 찾아서 드렸더니, 몇몇 유지에게 '귀한 돈으로 사 온 술'이라며 막걸리를 대접하셨다. 자식이 쓴 글이 중요한 게 아니라 소액환이 어떤 것인지, 시골 노인들 앞에서 자랑거리가 됐다.
'자식이 글을 써서 돈으로 바꿔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뉴스거리였다. 나는 방송 출연도 했다. 그간 20회 넘게 나가서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또 경찰관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영혼은 영생(永生)'이니 저 세상에서 선친도 다 들으셨을 것이다.
아들이 보내온 라디오는 선친이 즐겨 듣던 만담도, 재치 문답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바른 말 고운 말'과 '일기예보'는 변함없이 나오고, 잠 안 오는 심야에는 '흘러간 옛 노래'도 구성지게 나오니 곁에 두고 듣는다.
▲ 아버지의 라디오 아들이 준 라디오(2018.01.5일자)
◆ 전국에서 걸려온 독자의 전화, 그 숨겨진 사연 : 【조선일보 / 에세이】
【에세이】 폐지 수거 할머니의 특별한 추석 선물
윤승원 前 대전수필문학회장
추석 명절에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난생처음 받아 보는 귀하고 값진 선물이었다. 이런 귀한 선물을 날름 받아야할지, 다시 돌려 드려야할지, 죄송한 마음만 들었다. 허리가 활처럼 휜 팔순의 할머니가 힘겹게 4층 계단을 올라와 주고 가신 것은 달걀 한 판이었다.
“이집 아저씨한테 너무 고마워서요.” 달걀을 아내에게 건네주면서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었다. “아니, 뭘 이런 걸 가져오셨어요. 할머니나 드시지요.” 아내가 화들짝 놀라면서 받지 않으려고 하자, 할머니께서는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라 죄송하지만 그냥 받아주세요. 이집 아저씨는 신문지며, 헌책이며, 꼭 저를 위해 모아두셨다가 내주시는 분이거든요. 어찌나 고마운지, 보답할 게 마땅치 않아서……”
할머니는 오히려 자신이 들고 온 선물이 보잘 것 없어서 죄송하다는 말씀만 하셨다. 문 앞에서 아내와 할머니가 주고받는 소리를 듣다가 내가 내다보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깜짝 놀라시면서 “아이고, 아저씨도 집에 계셨네요.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요.”
사실 고마운 것은 나였다. 내 집에서 나오는 각종 폐품을 쓰레기 치워주듯이 가져가주시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한 건물에 아들 내외도 함께 사니, 우리 집에서 나오는 택배상자도 많고, 신문도 지방지와 중앙지 2부나 구독하니, 다른 집보다 폐지가 많이 나오는 편이다. 게다가 헌책도 바깥에 그냥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할머니가 가져가시기 편리하게 1층 현관문 안쪽에 가지런히 놔드렸다.
할머니가 내게 특별히 고맙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니다. 폐지를 바깥에 버리면 자칫 비를 맞을 수 있고, 차량으로 순식간에 수거해 가는 또 다른 사람도 있어, 할머니가 꼭 가져가시도록 출입문 안쪽에 모아드린 것뿐이었다. 할머니는 유난히 허리가 휘어 무거운 폐지를 들고 계단을 통해 나르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마주칠 때마다 거들어 드리려고 하면 극구 마다하신다.
나는 할머니를 뵐 때마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가 절로 나온다. 종이상자도 건물 안에 오래 놔두면 곰팡내가 나는데, 곧바로 치워주시니 얼마나 고마운가. 심지어 빈 쌀부대에서 나오는 몇 톨의 쌀도 주어가시고, 빈 고구마 상자에서 나오는 흙가루까지 말끔히 닦아주신다. 그러니, 정작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할머니가 아니라 나다.
그러나 죄송한 일이다. 추석 명절을 맞아 내가 먼저 선물을 준비하여 할머니께 드렸어야 하는데, 나는 왜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고물상에 폐지를 갖다 주고 할머니가 받는 돈이 얼마인데, 이런 귀한 선물을 사오신단 말인가. 손자에게 용돈 주셔야 할 귀한 돈을 어찌 이렇게 쓰신단 말인가.
몇 천금의 돈보다, 그 어떤 값비싼 고가의 선물세트보다 나를 감동시킨 할머니의 추석선물.
이 세상 모든 풍파와 산전수전 다 겪으신 할머니. 폐지수거라는 남달리 궂은일을 하시면서도 항상 단정한 옷매무새에 살짝 입술화장까지 하시고, 연치가 나보다 훨씬 높으신 데도 늘 먼저 인사하신다. 어른으로서의 예의와 기품을 늘 잃지 않고 당당해 보이시는 할머니. 할머니는 그러고 보면 나의 느슨한 의식과 세상을 살펴보는 안목의 부족함을 일깨워주신 스승이다.
나도 뒤늦게 작은 선물하나 준비했다. 그러고는 바깥에서 부스럭 소리만 나도 내다보았다. 그러나 할머니가 보이질 않았다. 소리 안 나게 살그머니 다녀가시니 좀처럼 뵙기가 어렵다. 식탁에 올라온 달걀프라이를 먹으면서도 할머니 생각에 잠긴다. 고마움과 죄송스러운 마음이 교차하는 추석 명절이었다. ■
▲ 폐지수거 할머니의 특별한 추석 선물(2018.10.5일자)
【에세이】 식당 문 닫고 새 길 모색하는 젊은이에게
윤승원
前 대전수필문학회장
그의 식당 앞을 매일 지나간다. 흔히 볼 수 있는 한식집이다. 식당 앞에 쌀 포대나 대파, 양파 자루가 쌓여있을 때는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식사시간인데도 한산했다. 메뉴를 여러 번 바꾸었지만 손님이 늘지 않는 듯 했다.
그는 얼마 전까지 내 집에서 월세로 살았다. 단칸방에서 부부가 지냈다. 하지만 방세가 밀려 버티지 못하고 나갔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한 달이라도 밀리면 즉각 독촉하라고 했다. 하지만 30대 후반 젊은이가 휴일도 없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면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심하게 독촉하기 어려웠다.
오토바이로 음식 배달을 하는 그는 궂은 날이면 더 고생했다. 우비를 입어도 옷이 흠뻑 젖는다. 헬멧을 벗으면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의 얼굴은 늘 까칠했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2년 넘게 그와 한 지붕 밑에 살면서 고단한 모습만 보았다.
어쩌다 그와 마주치면 “죄송해요. 방세가 많이 밀렸죠. 요즘 장사가 잘 안돼서요. 하지만 조금씩이라도 입금할 게요.” 그는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집주인이 듣기 거북한 언사를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뵐 면목이 없어요. 방을 뺄게요.” 그는 “아내와 잠시 헤어지고 어머니와 살림을 합치기로 했다”고 했다. 젊은 부부가 아기를 갖지 않은 게 궁금했는데, 비로소 짐작이 갔다. 어려운 생활형편 때문이었다. “아내는 떨어져 살면서 다른 직장에 들어가고, 식당 홀 서빙과 주방 일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도와주기로 했어요. 저는 주로 배달을 하고요.”
그가 이사 가고 나서 우편물이 쌓였다. 우편물을 갖다 주기 위해 그의 식당에 들렀지만 문이 잠겨 있어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답이 왔다. “밀린 방세 오늘 오후에 조금 넣을 게요” 우편물 찾아가라는 문자를 ‘밀린 방세 독촉 문자’로 오해한 듯싶어 오히려 내가 미안했다.
이튿날, 밀린 방세 300여만 원 중 20만원이 입금됐다. 며칠 후 식당 앞에서 마주친 그는 “요즘 장사가 조금 되네요. 찾아오는 손님 기다리는 것보다 배달이 나은 것 같아요”라고 했다. 아, 이렇게라도 하면 형편이 나아지겠구나. 빨리 사정이 나아져 떨어져 사는 아내와도 다시 합쳐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겠구나 싶어 그를 위로했다.
그 얘기를 들은 아내가 말했다. “방세 너무 독촉하지 마세요. 내 돈 떼어 먹고 도망간 사람이 있으면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말이 있어요. 불쌍한 사람 도와 준 거라고 생각하면 그게 적덕(積德)인 거죠. 일부러 기부도 하고, 불우 이웃돕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남을 도울 일이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니, 방세 못 내고 나간 사람에게 감사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형편이 풀린다던 그의 식당에 갑자기 ‘임대’ 현수막이 내걸렸다. 버티지 못하고 폐업하기로 했단다. 아내는 “착한 젊은이인데, 참 안됐네요. 더 좋은 일자리를 찾을 거라고 믿어요”라고 했다. 나는 힘든 생활전선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에게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했다. 절실함이 기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후 그의 전화를 받았다. “식당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했어요. 새 장사 시작하려고요. 밀린 방세는 꼭 갚을게요. 그동안 베풀어주신 따뜻한 정과 용기 주신 말씀 잊지 않을게요.” 남달리 성실하고 심성 착한 그 젊은이가 새롭게 모색하는 사업이 부디 성공하길 기원한다. ■
▲ 식당 문 닫고 새 길 모색하는 젊은이에게(2018.11.30일자)
◆ '구식 할아버지'의 신문 기사 스크랩,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제 모든 것이 간편하고 손쉬운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면 방송, 신문 등 모든 미디어와 사회 관계망 소통이 손바닥 안에서 이뤄지고, 해결되는 시대이다.
종이 신문을 가위로 오려 스크랩북에 보관해 오면서 그것도 부족해 장구한 세월 변색 되지 말라고 문구점에 가서 '코팅'까지 해다가 무슨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애지중지 간직하는 구식 할아버지. 나의 이런 모습이 훗날 손자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지고 인식될까.
올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손자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태블릿 PC를 장난감 가지고 놀 듯 능숙하게 다뤘다.
조선일보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소장용 아크릴이나 고급 액자형 기사 서비스를 주문하려고 내 이름이 실린 글이나 기사를 찾아보니, 목록을 적기도 어려울 만큼 많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그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조선일보에 어떤 글을 써왔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신문에 게재됐던 한두 개 기사나 기고 글을 ‘아크릴 액자’로 만들어 집안 벽에 걸어 두고 가족과 함께 보는 것도 좋지만 그것은 독자의 범위가 극히 제한적이다. 더구나 나의 경우 조선일보에 실렸던 글과 기사가 스크랩북이 넘쳐나도록 많다.
한 시대를 살아온 한 가장이자 국가 공무원으로서 소중한 ‘역사의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액자와 스크랩북과는 별도로 블로그, 카페,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가족채팅방 등 신세대 아이들도 접근하기 쉬운 공간에 『사이버 전시관』을 만들어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 조선일보 윤승원 글과 기사 일부 목록(1989~2018) ■ 아침편지 ○ 의경 아들 안경 고쳐 쓰면 돼요(2004.12.16.일자) ○ 아들 군에 보낸 아버지들(2005.02.12.일자) ○ ‘훈장’만큼 자랑스러운 두 아들의 예비군 모자(2013.02.15.일자) ○ 생각이 달라도 우리는 敵이 아닙니다(2014.01.3일자) ○ 아버지의 라디오 아들이 준 라디오(2018.01.5일자) ■ 에세이 ○ 천국의 어머니와 못난 아들의 첫 해외여행(2010.09.24일자) ○ 九旬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2011.11.30.일자) ※ 대전문학관 작품 전시('한국문학시대' 문학대상 수상작가 작품 전시 2018.3.6~6.30) ○ 폐지수거 할머니의 특별한 추석 선물(2018.10.5일자) ○ 식당 문 닫고 새 길 모색하는 젊은이에게(2018.11.30일자) ■ 조선일보 편집자에게 ○ 아예 종군기자가 돼 달라(2009.05.21.일자) ○ ‘볼일’ 급했던 교통경찰을 위한 변명(2010.01.27일자) ○ 가난이 범죄로 이어지는 사회는 안 된다(2012.01.19일자) ■ 조선일보를 읽고 ○ 경찰우대 사실과 달라(1990.2.10.일자) ○ 팔매질 경감 순직 시위대 나무라야(1990.09.18일자) ○ 안전띠 단속 지적 감사 도로교총 법규 지켜야(1990.06.19일자) ○ 부상전경위문 감동적(1991.07.20일자) ○ 투캅스 외화 표절 느낌(1994.04.18일자) ○ 신고자 신변 공개 보도관행 개선을(1995.06.20일자) ○ 조작극 의혹 씻어야(1995.11.07일자) ○ ‘치안부재’ 다 경찰 탓인가(1996.01.27.일자) ○ 시민, 경찰 신뢰 필요(1998.01.07일자) ○ 주민등록증 이름 한자 써야하나(1998.07.23일자) ○ PC통신 루머 제재 필요(1998.11.06일자) ○ ‘뇌사의경’ 읽고 마음아파(1998.11.22.일자) ○ ‘폭탄형 화염병’에 경악(2001.04.02일자) ■ 나의 발언 · 제언 · 의견 ○ 시위현장 공통색 붉은색에 거부감(1989.07.6.일자) ○ 심야토론 참여자 제한 말고 개방을(1989.8.19.일자) ○ 강력사건 화면 끔찍한 장면 많아(1989.12.21.일자) ○ 불법부착 광고물 단속규정 강화를(1990.1.10일자) ○ 심야토론회 과감한 개선 필요(1990.01.14.일자) ○ 음식점 불결 여전 개선책 없는가(1990.02.4일자) ○ 분수 넘치는 扶助풍토 개선 돼야(1990.02.14일자) ○ 택시가 손님을 골라 태우다니(1990.02.24일자) ○ 외국풍 자동차명 부끄럽게 생각돼(1990.03.13일자) ○ 고스톱은 망국병 다른 취미생활을(1990.03.30.일자) ○ 장식용 서예작품 판독 불가능 많아(1990.04.18일자) ○ 경찰 멀리하는 주민, 거리 줄이는 노력을(1998.01.03.일자) ○ 허위제보로 경찰력 낭비(1998.01.21) ○ ‘닭장차’ 표현 이젠 그만 쓰자(2005.05.24일자) ○ 죽창, 화염병 수준 처벌 필요(2005.09.16일자) ■ 조선일보 기사 · 월간조선 기사 ○ [사람과 삶] 수필가로 정식 등단한 ‘문학경찰’(임도혁 기자 1997.01.30일자) ○ 3번째 수필집 낸 형사, 대전북부서 윤승원 씨(임도혁 기자 2000.08.14일자) ○ 정보과 형사 중 1위 윤승원 씨 특진(임도혁 기자 2004.08.31일자) ○ 어느 평범한 경찰관 아내의 한마디(월간조선 2009. 3월호) ○ 의경 아버지 항변(월간조선 2005.02월호) ■ 조선일보 주최 공모전 수상 기사 ○ 광복 60주년 기념 『아, 어머니』전 우수상(2005.04.25.일자) ※ 조선일보 <만물상> / <아, 어머니> 소개(2005.05.01.일자) ○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기념 ‘조선일보에 얽힌 사연 공모’ 최우수상(2010.03.5.일자) |
※ 이 중에서 조선일보 알림 기사(“신문 기사 속 당신을 액자로 간직하세요”)처럼 액자로 만들어 보관하고 싶은 글을 꼽으라고 한다면 다음 몇 가지를 들고 싶다. 독자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 등에서 독자들이 많이 퍼가거나 공유한 글이다.
■ 조선일보 / 에세이
○ 천국의 어머니와 못난 아들의 첫 해외여행(2010.09.24.일자)
○ 九旬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2011.11.30.일자)
○ 폐지 수거 할머니의 특별한 추석 선물(2018.10.5.일자)
○ 식당 문 닫고 새길 모색하는 젊은이에게(2018.11.30.일자)
■ 조선일보 / 편집자에게
○ 가난이 범죄로 이어지는 사회는 안 된다(2012.01.19.일자)
■ 조선일보 / 아침편지
○ ‘훈장’만큼 자랑스러운 두 아들의 예비군 모자(2013.02.15.일자)
○ 생각이 달라도 우리는 敵이 아닙니다(2014.01.3일자)
○ 아버지의 라디오 아들이 준 라디오(2018.01.5.일자)
◆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직장 동료'를 위한 '대변'으로 '숨통 트여주기' : 【조선일보를 읽고】
◆ '조선일보 40년 독자'로서 특별히 어떤 지면이 가치있게 느껴졌나?
조선일보 40년 독자로서 국민의 정치성향과 이념에 따른 보수언론에 대한 호불호 평가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영향력이 큰 조선일보와 내 고장 지방지를 두루 구독하고 있는 나는 조선일보의 특징과 장점도 잘 알고 있다. 독자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하는 점이 내가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내가 구독하는 종이 신문은 내가 살아온 한 시대의 추억을 넘어 고단하고 힘들었던 내 삶의 애환과 고뇌를 고스란히 담은 그릇과 같다. 종이 신문에 투영된 나의 작은 행보와 그림자는 실로 생애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돌이켜보면 카메라에 담아온 추억의 앨범보다 이런저런 형태의 글로 내 생각을 진솔하게 그때그때 종이 신문에 담아 온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일간지 지면의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
일반 국민이 아닌 현직 경찰관 시절에 나는 지면에 내 이름 석 자가 나오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남모르게 긴장도 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고 긴장되는 글쓰기였지만, 내게는 글쓰기가 어떤 의무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경찰 관련 기사는 대체로 좋은 기사보다는 비난 기사가 더 많았다. 일선 경찰관들은 흔히 ‘동네북’이라는 자조 섞인 푸념을 했다. '언론에 자주 두들겨 맞는다'는데서 나온 억울함이 배어 있는 말이었다.
큰 사건 사고가 터지면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도 경찰관들은 자주 했다. ‘불미스러운 일에는 경찰이 꼭 낀다.’는 국민의 곱지 않은 시선도 경찰에겐 숙명처럼 늘 따라다녔다. 커 가는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경찰 아빠'는 되지 못하더라도 '욕먹지 않는 경찰'이 되고 싶었다.
글쓰기란 그런 면에서 부단한 자기 성찰과 미래 희망적인 꿈도 꿀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현직 경찰관으로서 민감한 주제의 시사 문제나 정치적인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세웠다.
내 생활에서 가장 무난한 글감으로는 <가족 이야기>, <고향 이야기>, 그리고 <평범하지만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이야기>이다. 이런 소재의 글을 쓰면 누가 시비(?)를 걸어 올 이유가 없다.
나는 PC통신 시대부터 그림을 그리는 중학생 아들과 함께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했다. 여기에 <평범하지만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수필문학인>이라는 프로필(자기소개 글)을 올렸다.
그 누구도 현직 경찰관인 나의 글쓰기에 대해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방송과 문학전문지에 글을 응모할 때마다 당선작으로 뽑혔고, 글이 쌓이면 개인 문집도 펴냈다. 그럴 때마다 언론사 기자들의 취재 대상이 됐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직 경찰관이 글을 쓰면 주어진 직무에는 소홀하지 않을까’하는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직무성적 전국 1위’로 특진하자 조선일보 임도혁 기자는 “경찰작가로 유명한 윤 아무개가 실무능력도 인정받아 특진하게 됐다"고 기사를 썼다. 그 뒤로 ‘글쓰기와 직무는 별개’라는 인식을 동료들에게 심어주었다.
현직 경찰관으로서 지면에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는 동료 경찰관을 대변(?)해 주는 글을 쓸 때마다 호응이 좋아 따뜻한 동지애를 느꼈다.
조선일보에서는 유독 '건강한 사회를 위한 제언'이나 '불합리한 제도 개선'을 위한 독자의 의견을 지면에 적극 반영해 주고, 기고자의 순수한 뜻을 그 어느 매체보다 성의 있게 존중해 주었다.
특히 <조선일보를 읽고>, <조선일보 편집자에게> 등의 지면은 내가 선호하는 지면이었다. 독자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과감하게 원고지에 써서 신문사 지면에 개진한다는 것이 좋았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 하는 일선 경찰관'으로서는 그야말로 숨통 트이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의 발언>이란 지면도 좋고, <아침편지>, <에세이> 등의 지면은 내 생활 속에서 얻어진 순수한 수필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매우 가치 있는 지면이었다.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꽃밭 가꾸듯 아름다운 내면의 정서를 가다듬을 수 있는 매력도 있었다.
◆ 뜻하지 않은 '독자의 반응'과 '영광스러운 일'도 생겨
반응도 좋았다.
<아침편지>에 실린 나의 글은 국방부 정훈교재 담당팀의 눈에 띄어 ‘애국가족’이란 이름이 붙었다. 정훈교재 제작팀이 우리 가정을 방문, 나와 두 아들의 '애국심'을 담아갔다. 우연히 어떤 기회에 예비군 훈련을 받고 온 한 젊은이를 만났는데, 뜻밖에 나와 두 아들의 인터뷰 영상이 '예비군 정훈교육 영상 교재'에 등장하여 반가웠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다.
조선일보 창간 기념으로 공모한 글이 우수작으로 뽑혔다. 내 글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대형 전시물로 전시됐다. <아, 어머니 전>이었다. 아내와 함께 새벽 열차를 타고 가서 특별 전시관의 첫 입장자가 됐다. 나의 글이 대형 전시물로 만들어져 수많은 관람객이 읽고 있는 장면은 그야말로 필자로서 꿈을 꾸는 듯 황홀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일보에 얽힌 사연’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천국의 섬’이라는 뉴칼레도니아 왕복 항공권을 상품으로 받았다. 아들과 함께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한평생 여행 한 번 못하고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 액자를 가슴에 품고 뉴칼레도니아를 여행한 일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신문 지면의 또 다른 장점은 내 개인적인 특이 사연이 후속 기사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첫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쓴 나의 <여행후기>가 <조선일보 에세이>란에 실려 또 한 번 분에 넘치는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추석을 맞이하여 폐지 줍는 할머니로부터 ‘달걀 한 판 특별 선물’을 받고 쓴 나의 졸고 에세이는 독자의 분에 넘치는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폐지 수거 할머니의 뜻하지 않은 추석 선물>제하의 나의 졸고 에세이가 조선일보에 실리자 이른 아침부터 전국에서 축하와 격려 전화가 이어졌다.
※ 나의 연락처를 모르는 어떤 독자는 내 핸드폰 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대전시청 민원실'과 '대전문학관' 등에 전화했다고 한다. 낯선 독자의 전화를 받은 관계 당국에서는 내게 전화를 걸어와 "연락처를 알려주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필자의 양해를 구한 뒤, 비로소 낯모르는 독자와 통화가 이루어졌다.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내게 각별히 전화를 주신 충청도 어느 지역의 유지이신 그 분과는 지금도 인연이 계속되고 있다.
◆ 저 세상 부모님과 먼저 가신 형님들께 내 삶의 이야기 보여 드리고 싶어
이제 어느덧 칠순 나이로 접어들면서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있다. 저 세상 부모님과 너무 일찍 가신 형님들에게 나의 글을 보여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을 늘 격려해 주시고 기쁘게 생각하셨던 부모님과, 내 글이 신문과 방송에 나오면 한밤중에도 정이 철철 넘치는 전화를 주셨던 먼저 가신 두 형님의 뜨거웠던 사랑이 한없이 그립다.
나는 ‘영혼은 영생(永生)’이란 말을 좋아한다.
저 높은 곳에서 생시와 똑같이 이 자식을 내려다보시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너무 일찍 가신 형님들에게 보여드리고자 신문 스크랩을 다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조선일보 리프린트’ 소장용 액자를 주문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 그림으로 말하면 ‘개인 전시회’ 분량 정도는 넉히 돼 보인다. 목록에서 빠뜨린 글도 많은데 그렇다.
한 가정의 거실 장식장이나 서재에 액자나 스크랩북으로 보관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사이버 전시관'을 만들고 디지털화하면 자식, 며느리, 손자도 언젠가는 보게 되겠지. ■
2021. 04. 21.
윤승원 스크랩 정리 記
첫댓글 윤선생의 주옥 같은 글의 역사가 잘 정리되었습니다. 윤선생은 참으로 사회의 목탁이고, 등불과 같은 분이십니다. 많은 글이 조선일보만이아니라 대전신문 등등 더 많이 있을 것입니다. 윤선생의 차분한 글쓰기, 남을배려하는 통찰력, 사회의 리더로서 존경을 금할 수 없습니다.
천천히 두고두고 잘 보겠습니다. 이런 정리를 하여주심에 더욱 경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정 박사님으로부터 또다시 과분한 격려를 받습니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되어 방대한 분량의 신문 스크랩을 일부만 옮기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정 박사님 말씀하신 대로 조선일보만이 아니라 저의 고장 충청지역 일간지에 썼던 글까지 합하면 더 많은 분량이 될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저의 글쓰기 기본 정서는 저의 남다른 능력이 아니라 생시에 걱정을 많이 하시면서도 지극한 사랑 베풀어 주신 부모님과 형님들 덕분입니다. 충남 청양이라는 시골 동네에서 유년시절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글을 쓸 때마다 나타나곤 했습니다. 정 박사님이 과분하게도 '등불'이란 표현을 해 주셨습니다만, 저의 부모님과 형님들이 저의 등불이 돼 주셨기에 이런 졸고나마 조심스럽게 쓰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정 박사님도 제게는 '등불'과 같으신 사회적 스승이시고요. 오늘도 따뜻한 정을 듬뿍 담아 주신 댓글에 감동합니다. 감사합니다.
윤 선생님의 일대기라고도 할 수 있는 글들을 잘 보았습니다. 너무 감동적이네요. 감사합니다.
삶을 기록하지 않고도 그냥 아무 일도 없는듯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고보니 박 교수님 말씀대로 한사람의 일대기를 기록한 자서전 한 편을 조선일보에서 제공해 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아 보려면 수필 한 편만 읽어보면 드러난다고 하는데 저는 만인이 보는 조선일보에 맨몸을 다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따뜻하게 봐주시고 격려해 주시니 박 교수님 인품이 저는 존경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