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선덕여왕조에 국사(國師)였던 자장 율사가 창건, 근세의 고승인 한암 대종사(조계종 초대종정), 탄허 대선사(초대역경원장) 등 큰스님들이 주석하셨던 오대산 월정사, 심심산골인데다 법당 앞의 구층석탑처럼 그 이미지가 너무나 아름답고 고결해서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이제 그곳이 참으로 가깝게 다가온다. 2년 전 정념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래 대중과 더불어 함께하는 수행, 복지, 문화 도량으로 환골탈태한 덕분인지 모르겠다.
월정사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어 수많은 대중에게 환희를 안겨준 주인공 정념 스님을 생각하니 불현듯 “도인 하나가 만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스님에게서 오늘날처럼 변화가 빠른 시대의 도인상(道人像)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겨울인데도 햇살도 따사롭고 바람결도 부드럽고, 전나무 숲도 한층 푸르렀다. 그 품에 깃들기도 전에 성스러워지고 평화로워진다. 수많은 도인을 배출한 영지(靈地), 천년 고찰다웠다.
세상의 흐름을 깊게 들여다보고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수행자가 급변하는 시대상을 통찰하지 못하고 관행적이고 타성적으로 지내다보면 화석화되기 마련입니다. 불교가 진리 그 자체라 할지라도 과거만 붙들고 있으면 지속적인 생명력을 가질 수 없지요.”
사람들의 생각도 변하고 삶의 양식도 변하는 시대에 수행자들이 새롭고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천년고찰은 생동하는 수행도량이 아닌 일개 관광지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 얼마나 아찔한 일인가 싶어 스님의 안목이 더욱 귀하게 다가왔다.
“사회적인 경험도 부족하고, 둔한 사람입니다. 교구본사 주지소임을 맡으면서 지역사회를 유심히 바라보게 되고, 월정사의 위상이랄까, 한국불교의 역할 등 여러 가지 면모를 두루 살펴보게 되었지요. 대중들과 좀더 적극적으로 함께하는 도량으로 변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스님들과 종무원들과 논의하여 변화의 몸짓을 작게나마 시도했을 뿐입니다.”
스님은 부족한 게 많다고 하셨지만, 일찍이 92년부터 상원사 주지 소임을 맡아 중창불사를 하고 선원을 개원, 전국에서 으뜸가는 수행도량으로 일구는 등 수행력과 행정력을 진작부터 인정받았기에 49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교구본사 주지를 맡게 된 것이다. 여러 스님들의 기대처럼 스님이 부임한 이후 월정사는 달라졌다.
수행(‘출가 열풍’을 불러일으킨 단기출가학교, 한암대종사 수행학림 개최, 한암대종사 수행일화집 발간 및 학술세미나 개최, 한중 오대산 수행 교류, 미얀마 마하시 수도원과의 자매결연 및 수행 교류, 명상센터 건립 추진, 탄허 대종사 선서 전국 휘호대회, 범일 국사 선양사업), 문화(산사영화제, 천년의 숲길 걷기 대회, 지역화합을 위한 월정사 주지배 평창군 족구대회, 월정사 주지기 축구대회, 오대산 불교문화축전, 평창군민 노래자랑대회, 오대산 사진전, 청소년 백일장 및 사생대회, 전나무 숲길 도로 포장 제거 추진, 월정사 탑돌이 복원, 박물관 문화대학 운영), 복지(사회복지법인 설립 추진, 자원봉사네트워크 구축, 지역 사회의 소년소녀가장 및 우수 학생에 대한 장학사업, 승려노후복지사업, 등) 3대 영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을 전개, 지역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
“세상의 큰 흐름은 연기적(緣起的) 구조 속에서 같이 변해 가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선지자, 예언자적인 역할을 해야 하겠지만 현실과 어느 정도 맞춰 가면서 올바른 방향으로 끌어주는 게 중요하겠지요. 수행자가 대중과 더불어 호흡하면서 도덕적인 삶의 모습을 구현할 때 그것이 곧 사회를 밝히고 중생을 제도하고 역사를 향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면 항상 스스로를 반조(返照)하면서 세상의 흐름을 깊게 들여다보고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스님의 맑은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희망차다. 스님의 탁월한 기획력, 추진력의 비밀이 깊은 수행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아니 어쩌면 머나먼 전생부터 세운 원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자유인의 길, 도인 찾아 오대산에 깃들다
“어릴 때부터 세상이 답답해 보이고, 막연하게나마 ‘나는 세속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습니다. 고등학교 때 경허 스님 행장을 읽고 자유인, 도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지요.”
‘대자유, 도인’, 말만 들어도 설레던 시절이었다. 출가 수행을 통해서 자유로운 도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길을 떠났다. 운수행자로 떠돌다가 당대 최고의 도인으로 추앙 받던 한암 스님께서 주석하셨던 오대산 월정사에 도인이 있다는 주위사람들의 귀뜸을 받고, 월정사에 깃들었다.
“출가하기 직전 꿈을 꾸었는데, 내가 조그만 동자가 되어 둥근 바위 위에 앉아 있더군요. 허공에 한문으로 된 책이 둥실 떠올라 있고, 눈만 척 하면 책이 한 장씩 넘겨지는데, 좋은 소리를 하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주위를 돌아보니 여러 채의 기와집 가운데 가장 커다란 청기와집이 눈앞에 클로즈업되고, 지붕 용마루의 용이 살아서 움직이며 승천하는 꿈을 꾸었지요.”
전생 일이었을까, 미래를 예견한 것일까. 어쨌든 당시 월정사 법당은 전국에서 보기 드문 청기와였기에 초발심 행자는 더욱 신심이 깊어졌고 오로지 도를 깨쳐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무능해지면 평생 정진하는 수좌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행자 때도 염불보다는 앉아서 참선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수계 받고 나서 곧바로 선방에 가겠다고 했다가 은사스님(만화 스님)께 야단도 맞았지요.”
강원 공부는 체질에 안 맞아 선원으로 향했다. 전생부터 공부한 덕분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참선공부에 대한 나름의 확신이 생겼다. 엿새 동안 잠도 오지 않았고, 경계가 확 열리면서 화두가 현전(現前:눈앞에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하였다. 벌레 한 마리를 봐도 사랑스러웠다.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가슴으로 쏟아졌다.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적적하고 자신이 넘쳤다.
“그런 체험이 지금까지 중노릇의 큰 힘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 후 주위사람의 권유로 중앙승가대학에 입학해서도 늘 선방에 가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졸업하자마자 선원으로 향했다. 망월사, 상원사, 전주 난고사 선원 등지에서 정진하다가 상원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다.
“역량도 부족하고 정진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선원을 개원했지요.”
스님은 상원사 주지로 부임하자마자 북방제일선원으로 유명했던 상원사 선원을 재개원하였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열악했다. 선원이 소실된 상태였는지라 큰법당인 문수전을 대중방으로 사용, 부득이 결제 중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문수도량인 상원사 입장에서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공부가 최우선이었다. 공부 욕심이 컸기에 스님 역시 결제 철이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대중들과 함께 똑같이 수행하였다. 동시에 요사, 방사, 선원불사를 원만히 성취할 수 있었다.
“천하에 제 아무리 좋다는 것도 정진에 비유할 수 있겠나. 모든 게 정진분상에서는 몇푼어치도 안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어느 날 저녁 그 생각이 다 녹아들었습니다.”
첫 체험 이후 십수년 만의 일이었다. 두 달 가까이 잠이 안 오더니 화두가 성성해지고 세밀해졌다. 그 전에는 호흡이 거칠어지고 엔돌핀이 쏟아지듯 용맹 정진하겠다는 분심이 일었는데 세밀한 경계 속에서 전신이 녹아버리고 시원해졌다. 산뜻하고 새로운 경계가 열렸다. 그 이후부터는 분심이랄까, 심신을 어찌할 수 없는 경계가 사라져버렸다. 모든 것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세상에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산문선정비위도(山門禪定非爲道) 대경부동시위도(對境不動是爲道)라, 산문에서 고요히 선정에 드는 것이 도가 아니다. 경계를 대하여 동하지 않는 것이 바로 도다.’라는 말이지요. 곧 삶을 지키는 것이 바로 도입니다. 정중(靜中)에서 힘을 얻어서 시끄러운 곳(動中)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 되면 소임살이도 수행 분상에서 할 수 있지요. 물론 초심자는 정(靜) 위주의 철저한 수행 이후에 동정(動靜)을 겸비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스님이 이사(理事)를 겸비하고, 한암 스님의 계정혜 정신과 탄허 스님의 열린 자세를 두루 갖춘 분으로 칭송받는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수행을 통해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면 본분을 놓치지 않고 깨어있는 삶 자체가 그대로 수행이므로 어떤 일이든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삶의 주인공으로 살라…
“고정관념이 모든 시비의 뿌리입니다. 본바탕이야 허물이 붙을 게 없어요. 어떤 것도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게 없다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을 체득해야 자유인의 삶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나도 버리고 법도 버리라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일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스님의 파격, 혁신, 열린 자세는 수행의 분상 속에서 정형화된 관념을 깨뜨리고 현상의 본질을 꿰뚫은 통찰력에서 비롯된 듯싶었다. 부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무유정법,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는(殺佛殺祖) 조사선의 가풍은 분명 이 시대의 희망이다. 절대적인 고정관념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가. 스님이 교계에서는 처음으로 단기출가학교를 개설한 것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으로 큰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출가라는 용어가 은둔, 소극 등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니게 되었는데, 출가야말로 자기라는 조그만 집에서 대아(大我)로 나아가 삶의 주인공으로 사는, 진정한 행복과 성공의 길임을 스스로 체험을 통해 알게 될 것입니다. 일생 동안 수행자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노라면 삶의 무게도 훨씬 가벼워지고 인생을 의미 있게 가꾸지 않겠습니까.”
월정사 단기출가학교는 크나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원자가 너무나 많아 경쟁률도 치열하다.(50명 모집에 보통 4,5백 명이 몰린다.) 급변하는 현대사회, 부초처럼 떠도는 삶 속에서 참 나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중생들의 고민을 직시하고 여러 가지 대안을 내놓으신 스님은 분명 이 시대가 요청하는 도인이다.
“조사선적 입장에서는 오로지 간절히 본분을 직시해서 다가오는 일상의 번뇌를 깨달음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순간순간을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이지요. 그래서 임제 스님께서 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入處皆眞), 삶의 주인공이 되어 살라는 말씀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주인공으로 사는 삶을 체득하고, 모든 게 인연법으로 이루어지니, 세상을 복밭으로 보고 곳곳에 복의 씨앗을 심어 너와 내가 더불어 사는 삶을 구현할 때 이 세상이 그대로 만 가지가 구족한 연화장 세계가 되지 않겠습니까?”
역시 듣던 대로였다. ‘멋진 스님을 모시고 일해서 너무나 행복하다’는 종무원들의 환한 얼굴이 스님을 닮아가고 있었다. 월정사(033-332-6661, www.woljeongsa.org) 종무실에서부터 연화장세계는 꽃피고 있었다. 한동안 월정사병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취재정리|사기순(sakisoon@hanmail.net)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