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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월아산에서 보던 함안의 방어산으로 올라본다.
방어산 이름부터 특별하고 뭔가 있을 것 같은 산인데, 1950년 6,25 전쟁 때 북한군의 진출선인 함안은
낙동강 방어선인 워커라인 주축으로써 (남강 남쪽의 방어산-오봉산-전투산-여항산) 북한군 6사단과 미군 25사단이
치열하게 싸워 북한군 6사단 병력의 60%-70%가 괴멸된 곳이고,
백이산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던 윤리 하나를 목숨보다 더 높이 받들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마음을 갖고 숨어든
생육신 한분이 조려 선생의 혼이 담긴 곳이다
이른 아침 자가용으로 함안군 군북면 사무소에 주차하고 택시로 방어산 자락의 군북면 박곡리 삼박골로 향한다
초입에 갈대를 닮은 이대(竹) 사이로 지나면 본격적이 산길인데 어느 집안의 무덤을 지나면서 사람들이 찾지 않는지 길이 없다.
잠시 비탈진 경사에 자라는 잡목을 뚫고 올라가면 소나무 숲이 이어지는데 곳곳에 소나무 제선충에 걸려 죽은 소나무를
벌목하고 약품 처리한 곳이 보인다.
"추운 날이 되어야 진정 푸른빛을 더하는 소나무
사대부들이 좋아했던 소나무
마을 어귀를 지키며 조상님들 산소를 지키는 소나무"
"나무는 결코 눕지 않는다" 했으나 소나무 제선충은 소나무를 눕게 했으니 한번 걸리면 어떠한 처방도 듣지 않고 죽음뿐이다.
삼국시대의 명의 화타나 조선 최고의 명의 허준이 살아와도 안될 일로 보인다
제선충이 이 땅에 들어온 건 30년 정도 되었으며 그동안 죽은 소나무는 대략 1천500만 그루 이상인데
동해안의 호미곶 인근이나 경남 의령이나 창녕 인근으로 가보면 누렇게 말라죽은 소나무가 엄청 많다.
위에 열거한곳 이외 산이 누렇게 변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고 산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철 푸른 소나무는
우리나라 산림의 4분의 1이지만 언젠가는 멸종할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동안 각 지자체마다 제선충을 잡겠다면 쓴 금액 또한 엄청난데 전체 사업비가 2조(벌목, 약품값)를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방어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있으나 마나 했지만
곳곳에 전사자 유해발굴한 곳이다.
이곳에 오는 길에 막걸리라도 한병들고 와야 함에도
뭐가 그리 급했는지...
이 길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머나먼 타국땅에서 전사한 모든 미군분들께 잠시나마 고개를 숙여본다
방어산 정상 직전에 만나는 고만고만한 오형제바위가 길을 지키고
지나온 봉(峰)과 산아래 들판 사이로 남강과 함안과 의령의 넓은 들판이 보이고
멀리 대구 현풍의 비슬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 옆에 창녕의 천황과 화왕 영취산 줄기가 길게 이어진다
남강이 굽이치는 곳으로 의령군 화정면 들녘이 활을 닮은 듯 반달처럼 보이고
진주의 집현산이나 광재산 넘어 멀리 구름이 보이는 곳은 지리산 천왕으로써 뭔가 감추어 놓은 듯하다
방어산 마당바위
방어산은 조선 인조 때 묵신우 장군이 왜구가 침입했을 때 방어했다는데서 유래를 찾을 수 있고
한국 전쟁 때 미군이 북한군을 방어했던 곳이다. 말 그대로 왜적을 침입했을 때 방어했다는 곳인데 이곳에 서면 발아래 조망이
하늘에서 보듯 끝없이 펼쳐진다
참고로 낙동강 전투 중 최대의 격전지로 알려진 곳이 있다면
칠곡군 유학산은 9번 뺏고 뺏긴 곳, 328 고지는 15번 뺏고 뺏긴 곳(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첫 배경이 된 곳)
그리고 3일간 19번이나 뺏고 빼앗긴 함안 661 고지(전투산) 전투
방어산에서 괘방산-오봉산-661 고지-여항으로 이어지는 산길에는 그날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으며
각 산들마다 정상에 서면 멋진 조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방어산 정상에는 최고의 명당이라 생각이 들 정도로 잔디가 곱게 깔린 마당바위에 정상석만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풍수지리에서는 산 능선에 묘를 쓰는 반면에 산 정상에 묘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문중의 산이건만 정상에 조상들의 묘를 쓰지 않은 것 같다.
몇몇 산들이 그러하겠지만 충북 영동의 백화산 주행봉 정상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묘주인께서 "100일 기도 후 선몽해서 찾은 곳이라" 하여 후손들이 고인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시신을 지게에 짊어지고 올라 지극정성으로 묘를 썼다고 한다
묘는 김 씨 집안의 7대조 어른으로써 200년 정도 되었고, 특별히 벌초는 하지 않지만 등산객들이 오르고 내리는 도중에
별초 아닌 벌초가 되는 곳이다
깎아지른 곳에 묘를 쓴 후손들의 지극 정성을 느끼게 하는 충북 영동의 백화산 주행봉
이곳 방어산 정상도 백화산 주행봉보다 더 빼어난 곳이건만 곱게 깔린 잔디와 두 그루의 나무 그리고 정상석이
비움의 미학만 느껴질 뿐이다
☆참고로 방어산을 오를때는 군북면 박곡리(가덕마을),가덕마을에서 올라가시기 바라고
제가 찾아간곳은 길이 별로이니 가지마시기 바란다
방어산과 능선 따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6사단은 경기, 충청, 전라, 진주를 거쳐 경남 함안까지 내려와
8월 7일부터 13일까지 미군 25사단과 북한군 6사단과의 치열한 교전을 벌린 곳이다
능선 따라 우측 진주시 지수면 방향으로는 경사가 심하거나 절벽으로 되어있고
함안 방향으로는 경사가 심하지 않다
세월 낚는 낚싯대로 세월 보내기 좋은 곳
좌측 멀리 지리산-그 앞으로 진주의 집현산-그 옆에 둔철과 정수산과 있고
남강이 흐르는 곳에 반달처럼 보이는 곳 뒤에 의령의 법화산(곽재우 장군이 왜적 수천 명과 싸워 이긴 곳)이고 그 뒤에 멀리 보이는 곳은 황매산이 희미한데 가장 잘 보이는 산은 의령의 진산인 자굴산이다.
조선 중기에 들어와 낙남정맥을 절하(切下)할 상소를 올라온다
장재곤 :주상전하 진주의 산줄기 하나 절하 하옵시면 수많은(남강이 흐르는 진주 의령) 농경지가 홍수로부터 안전하옵니다"
정조임금:무어라~~~
삼국시대 이전부터 여름 장마철이면 덕유산, 지리산, 황매산, 백운산 같은 고봉에서 거침없이 흘러온 덕천강, 임천강, 양천, )이
모두 진주와 의령평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으니 이를 해결하고자
조선 정조 때(1796년 정조 20년) 장재곤이라는 사람이 남강물을 사천만으로 방류해 홍수를 방지하여 농토를 확보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쓸데없는 소리라며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엄한 벌을 내린다는 기록이 있다.
구한말 시대 때 영남춘추(1934년 경남 진주에서 발행된 신문)에 남강 홍수를 방지하고 비옥한 농토를 확보하기 위해서
산줄기 하나를 절하(切下)하고 남강물을 사천으로 보내면 땅 8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1 정보:3천 평(15 마지기)
8 천정보:2천4백만 평
이후 일제강점기 때(1936년)에 남강댐(진양호) 공사를 하다가 해방과 동시에 중단되었으며
1949년도에 다시 공사를 시작했으나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다시 공사는 중단되었다.
낙남정맥은 이렇게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남았다가 1962년에 다시 착공하여 7년 뒤인 1969년도에 남강댐이 완공된다.
낙남정맥은 중간에 맥이 끊어져 희생되었지만 진주. 의령의 드넓고 비옥한 농토가 물로부터 안전해진 결과로 이어졌다
눈앞에 보이는 남강 따라 늘어선 평야들이 한여름 집중 장마기간에 홍수로부터 안전한 지역이 되었지만 끊어진 낙남은또 어쩌나...
가운데 멀리 보이는 곳은 사천의 와룡산이고 가운데 소가 누은듯한 곳은 진주의 월아산이고 그 뒤에 보이는 곳은
하동의 금오산으로 보이고 월아산 앞으로 보이는 넓은 들녘은 진주시 사봉면으로 반성천이 굽이 흐르는 곳이다.
멀리 사천의 와룡산 앞으로 보이는 산들은 낙남정맥 산줄기이니 고성군 양전산이나 대곡산쯤 되겠고
그 옆으로 연화산일 것 같다
방어산을 지나가며
어석재 방향으로
구름이 보이는 곳은 지리천왕
우측으로 남강이 굽이 흐르는 곳에 의령의 법화산이 보이고
좌측에 크게 보이는 곳은 월아산이고 그 뒤로 하동 금오산이 고개를 내민다.
지나온 방어산이고 바로 앞은 방어산 마애사
등로는 한적하니 좋고 바람은 시원하다
마당바위와 방어산성이 있는 곳을 지나
높이 8미터가량의 선바위( 흔들바위)
넘어질까 봐!~~ 차마 밀지는 못하겠다
옛날부터 함안과 진양(진주) 쪽으로 기우는 곳에 부자가 난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방향을 보니 진주 쪽으로 조금 기울어져있다
전설이 그러하다니 흔들바위 인근으로 부자가 있나 살펴보면 반경 15KM 안에
경남 의령 정곡면에 삼성 그룹 이병철 회장
함안 군북면에 효성그룹 회장
진주시 시수면 LG그룹 회장이 태어난 생가가 지척에 있기에 방어산 흔들바위에서 기(氣)를 받아 보시면 좋을듯하다
괘방산으로 가다 보니 산능선에 움푹 파진곳이 있어 뭘까하며 들어가 보니 돌축대를 쌓아 올린 연못이 있고
그 속에 작은 봉분이 보인다.
어떤 시기에 만들었는지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지...
연못? 바로 위에 나지막하게 돌담으로 울타리로 만든 오래된 무덤이 하나 더 있다
단순하게 연못 기능인지,인위적으로 만든 연못 속의 무덤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앞에 무덤주인께서 연못을 만들고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을 표현한 건지
산에 다니면서 이런 건 본 적이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그런 곳이다.
마침 이곳을 지나는 산아래 주민께 여쭈어보니
이 길을 수없이 지났지만 생각 없이 지나서 그런지 처음 본다고 하신다.
연못은 맞지만 왜 능선에 만들었는지?
아니면 연못 속에 또 다른 무덤인지?
조금 전 내려오던 방어 산성과 연관이 있는 건지?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결론은 모르겠다!로 내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 아시는 분 계시면 010-9082-6172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괘방산 정상
조망은 없고 돌탑만 자리를 지킨다
전사자 유해발굴 지역을 지나며
어석재
진주와 함안을 연결하는 도로
어석재 이후로는 길은 별로이나 그렇다고 다니지 힘들게 할 정도는 아니며
곳곳에 전사자 유해 발굴한 곳이 보인다.
낮은 봉(峰)에 유해발굴한 곳이 촘촘하게 있고
멀리 여항산과 오봉산 방향
작은 어석재에서
오봉산 등산안내도
가야 할 숙제봉과 백이산 방향
제산령에서 본 가야 할 백이산
함안 군북에서 진주시 이반성면으로 오고 가는 고갯마루인데
오봉산으로 가지 않고 좋은 길 따라 백이산으로 진행한다.
제산령 (帝山嶺)
임금제(帝) 자를 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조선 인조대왕께서 왕이 되기 전 제산령을 지나 도선대사가 창건한 오봉산 중턱에 자리하는 성전암에서 100일 기도를 올린 뒤에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날의 왕께서는 다니던 흔적은 없지만 왕께서 잠시 쉬던 고갯마루이니 잠시 배낭을 벗어 놓고 쉬어간다
까탈스러운 오봉산은 오르지 못하고 둘레길 따라 편하게 진행하니
고만 고만한 소나무들이 줄지어 자라고 갈비가 수북하게 깔린 등로가 너무 좋다.
그동안 하천길을 걸으며 시멘트이나 아스길만 죽어라 걷는 것에 비하며 거위털을 밟고 걷는 느낌이다
조망 없는 숙제봉에 올라
백이, 숙제는 은나라 제후국의 왕자로써 아버지가 똘똘한 셋째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숙제는 첫째인 형 백이에게 왕위를 "형님이 먼저 하소"라며 양보한다
그러나 백이는 아버지의 유언이라며 사양했고 숙제 또한 왕위에 오르지 않은 인물이다.
가족 간에도 나눌 수 없는 권력이건만 형님먼저 아우먼저... 서로 양보하다가 두 형제가 이웃나라이며 제후국이던 문왕(서백창)에게 몸을 의탁(依託)하러 찾아갔지만 막상 찾아가니 문왕이던 서백창은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강여상과 함께 은나라(주왕)를 정벌하러 가는 길이다.
숙제봉을 뒤로하고 백이산으로
백이산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백이와 숙제 형제 이야기
행실을 깨끗하게 했음에도 굶어 죽은 두 형제 이야기
문왕 (서백창) 뒤를 이은 무왕(희발:주나라 건국한 분))이 은나라(상나라) 주왕을 정벌한 이유는 주왕의 폭정에서 비롯된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였지만
백이와 숙제는 "신하로써 군주를 친 무왕이 아주 잘못되었다"며
"그건 절대 안 될 일이라며" 이 꼴 저 꼴 보기 싫다며 수양산에 고사리 뜯으러 갔다
주왕과 절세미인 달기가 무왕의 손에 죽고 어느 날이던가 수양산에서 열심히 고사리를 뜯어먹으며 살던 두 형제 앞에 나타난이가 있었으니
"이것 보슈 주나라가 싫다며 떠난 두 분께서 어찌 주나라땅에서 자라는 고사리를 뜯어먹는가"라며 책망하자
한때는 고죽국의 왕자로써 임금 자리도 서로 양보하고, 나라를 떠난 백이과 숙제 형제는 소심한 성격이었던지
곡기(穀氣)를 끊고 죽어 버렸다.(아무것도 안먹고 안 마시고...배불리 먹고 죽는 방법은 없나)
이 부분에 대해서 조선시대의 충신이셨던 매죽헌 성삼문 선생께서는 "수양산을 바라보며"라는 시에서
"백이와 숙제를 한탄한다"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그 땅에서 나는 고사리를 캐 먹었다는 말인가.
비록 풀(고사리)이라고 하지만 그것 역시 누구의 땅에서 생겨난 것이냐!~"
※백이 ,숙제 두어른이 성삼문 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무척 얄미웠을것 같다.
우울한 이야기 하나 하자면 최근 통계를 보면 OECD국가 38개국 중 자살률이 우리나라가 1위라는데 한 해 평균 1만 명이 넘었고
작년에는 하루 평균 40명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한다.
바로 앞은 괘방산이고 가운데 방어산 우측 멀리 보이는 산은 황매산 그리고 그 옆에 잘려나간 부분은 자굴산 자락
멀리 황매산 그리고 의령의 자굴산 모습
바로 앞은 괘방산
괘방산 옆 멀리 뾰족한 곳은 하동의 금오산
좌측으로 사천의 와룡산이 보이고
석교천따라 함안군 군북면과 평야지대가 보이고 돌탑 부근에 보이는 산은 삼봉산과 천제봉이고
멀리 어렴풋이 합천 적중면의 운석공 환종주길에 만나는 미타산으로 보인다.
낙남정맥길이며 가운데 전투산과 여항산이고 좌측 멀리 광려산 자락이나 마산의 무학산도 보이는데
전투산에서 여항 서북산까지 1950년 8월 21일에서 9월 14일까지 미 제27연대와 제24연대가 함안면 파수리 전투산에서 북한군 제6사단·제7사단과 전투에서 피아간 5천명이상 전사한 곳이기에 갓뎀이라는 별칭이 붙은것으로 유명하다.
좌측 멀리 밀양의 종남이나 덕대 같은데 그 앞으로 화개지맥길에 만나는 방송국탑이 보이는 곳 자양산이고
그 뒤로 한 성질하고 조망 없는 무릉산(武陵山 )과 청룡산, 마산의 천주산이 고개를 내민다. 우측 멀리 보이는 곳은 무학산인 것 같고
가운데 삼봉산이 있고 그 뒤 좌측으로 비슬산이 겨우 보이고 그 옆으로 창녕의 화왕산-영취산이 이어지고 우측에 자양산이 보이는데 날씨가 조금 더 좋았다면 영남 알프스 억산이나 운문산까지도 보일 것 같다.
기다림의 끝판왕이라는 강태공이 위수에서 대나무 낚싯대를 드리우고 하염없이 세월을 낚았다면
이곳 백이산에서 사방으로 보이는 조망을 보며 이산 저산 마음에 드는 산들을 낚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첫댓글 적석산환종주 걸으면서 본 오봉산 방어산 라인이 눈길이 가 언젠가 가보리라 생각한 방어산이네요.
월아산과 방어산 백이,숙제 언젠가 가보겠죠.
글 잘보고 갑니다.
함안쪽 산들이 산 정상에 올라
호연지기를 키우기에 좋을 것 같습니다.
운석공 환종주 길과도 연계되고
사기에 나오는 백이 숙제의 사연과
치열했던 낙동강 방어선까지
모든 역사를 가슴에 품고가는 그런
산인것 같습니다.
늘 평안한 걸음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