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靈川子 申潛(1491~1554)
영천자 신잠은 기묘사화 직후인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돼 장흥에 유배돼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을 가르치고, 풀려난 후 태인(泰仁)현감으로 부임했다. 기봉은 영천자가 떠난 후 마땅한 스승을 찾을 수 없자 태인으로 그를 만나러가서 일재(一齋) 이항(李恒)을 소개받아 그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해 출사하게 한 사실은 앞에서 확인했다. 그러나 영천자를 전라도 출신으로 보는데 다소 문제가 있다. 그는 증조(신숙주) 이후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전라도 태생은 아니다.
5) 橘亭 尹衢(1495~1542)
윤구의 자는 형중(亨仲), 호는 귤정(橘亭)이다. 아버지는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이다. 그는 1513년(중종 8)에 생원시 1516년(중종 11) 식년문과 병과에 합격, 홍문관 주서(注書), 사가독서, 홍문관 주서, 수찬, 지제교,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날 때 거짓으로 복명한 죄로 삭직된 후 고향 해남 삼산 녹산역(錄山驛)으로 유배돼 18년간 지냈다. 영암 유배설도 있다.
삭직과 유배의 표면상 이유는 복명의 내용이다. 즉, 영의정 정광필과 우의정 신용개가 재상후보로 이계맹(李繼孟)을 천거하자고 했는데, 귤정이 박세희(朴世熹)의 말을 듣고 안당(安瑭)으로 복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세희와 함께 죄를 주자는 말도 나왔으나 귤정에게만 죄를 주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그는 귀양살이를 마친 1538년 전라도사로 복직한 뒤 홍문관 부교리를 역임하기도 했으나 체직하고 귀향했다.
그는 유배 중 1521년 신무옥사로 장흥에 적거한 영천자 신잠(申潛)과 동복에서 적거한 최산두(崔山斗)를 비롯해 박상(朴祥), 임억령(林億齡) 등과 종유하며 지냈다. 당시 남도에서는 귤정, 최산두, 유성춘을 「호남 3걸」이라 부를 정도로 문명을 날쳤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자신의 아들 홍중(弘中)과 의중(毅中)과 영광출신 사매당(四梅堂) 이응종(李應鍾․1522~1571) 등을 가르쳤고, 임억령과도 사승을 맺어줬다.
윤홍중(尹弘中, 1518~1572)은 윤선도(尹善道)의 양조부로 급제 후 1554년 평안도 평사를 역임했다. 윤의중(尹毅中, 1524~?)의 자는 치원(致遠), 호는 낙촌(駱村)으로 윤선도의 친조부가 된다. 문과급제 후 평양감사, 대사헌, 형조판서를 지냈으나 1589년 정여립옥사 때 남인으로 지목되면서 환로가 평탄치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윤선도, 윤두서(尹斗緖), 윤덕희(尹德熙) 등의 후손이 출사가 막히는 계기가 된다.
안항공파 32세.전남 강진출생.서울 거주.
잘보고 갑니다.
부장공/35세/63년/김천생/일산거주
윤구의 가문이 쟁쟁합니다. 윤선도와 윤두서 등 한시대를 주름잡던 인물이 즐비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