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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기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왕국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심을 고백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일에 헌신하며 주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기를 새롭게 결단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 20절 이하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나라와 권세를 다스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은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세상 모든 권력과 인간을 심판하시는 날 완성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재적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였습니다. 눅 17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 중심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나를 다스리신다면 나는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온전히 다스리시는 교회라면,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그리스도가 임하시고 다스리시며, 온 가족이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섬긴다면 우리 가정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또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오늘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순종하며,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까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기 위해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방, 오늘의 튀르키에에 위치한,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지정학적으로 소아시아 내륙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세워져서, 로마 제국내 각 지역에서 실려온 물품들이 활발하게 유통되는 국제적인 무역항이었습니다. 에베소에는 당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리는 아데미 신전과 2만 4천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원형 극장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 2년 이상을 거주하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에베소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에베소를 떠나서 복음 사역에 진력하던 사도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옥중에서 씌여진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들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에베소 교회의 소식을 전해 들은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전해 들은 바울은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16절에서 바울은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의 기도로 이어집니다. 에베소교회 교우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는 첫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하는 간구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우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 여기서 지식이란 말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호세아 4:1,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경제도 중요하고, 군사력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경제가 어렵고,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이 백성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으니, 이 땅에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 같은 죄악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으니 이렇게 나라가 안으로부터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여호와를 알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사전적으로는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정확히 깨닫고, 그것에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내는 능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그 사역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90편에서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날을 계수할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그 세월이 언젠가 끝이 있고 그 시간이 참으로 짧아서 신속히 날아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해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정한 지혜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계시’는 감추인 것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하나님 깨우쳐 알게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저희 부부가 결혼기념일을 지났습니다. 독신주의자였던 제 마음을 바꿔놓은 사람이 제 아내입니다. 어느 날, 다락방의 가까운 후배 하나가 제게 와서, ‘아무개 자매가 형을 좋아한다’면서 잔잔한 제 가슴에 돌을 던졌습니다. “왜?”믿어지지 않아서 ‘그럴 리가 없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쫓아보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다시 와서는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형을 좋아하는 마음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안 보이는데, 궁예의 독심술을 익힌 것도 아니고, 네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또 쫓아보냈습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했는데, 그러다가 그만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속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데, 어떻게 그 속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까? 넘겨집어 그런줄 알았다가 낭패를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당신을 보여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당신을 드러내실 때 우리는 그 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러 ‘계시’라고 말합니다. 베일에 가려진 것이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공부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한계가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주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옵소서”. 아무리 이성적이고 똑똑한 머리를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계시의 영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도 못하게 됩니다. 거기서 비극은 시작됩니다.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과 같은 죄악이 넘쳐나고, 부부관계나 인간 관계도 깨어지고, 공동체도 무너집니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한순간에 무너지고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상을 보고, 세상을 살아갈 참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처음으로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계시의 영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의 영을 주셔서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서 시험 성적 잘 받고 인생에 성공하자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의 기도요 목표인 것입니다.
또, 18절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마음의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들에게는 신체 기관의 일부로서의 눈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눈과는 다른 또다른 눈이 있습니다. 내면의 눈, 마음의 눈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은 확실한 것 같지만 사실 확실한 것도 아닙니다. 왜냐 하면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육체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중요한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북한산에서 비교적 오르기 쉬운 봉우리가 족두리봉입니다. 불광역 쪽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봉우리입니다. 언젠가 그 산레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머리에 모발이 하나도 없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병색이 짙었지만 아직 꽤 젊어 보이는 남자분이었습니다. 그 곁에는 그의 아내인 듯한 한 여성이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아내인 것 같았습니다.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그분들은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음이 틀림없었습니다. 제가 본 것은 병으로 고통받는 한 사람과 그의 아내가 함께 힘겹게 산길을 오르는 모습이었지만, 저는 그분들에게서 삶을 향한 의지를 보았고, 함께 고통을 나누는 부부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 삶에의 의지가 아름다웠고, 부부의 애틋한 사랑에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그래서 옆으로 비껴서서 그분들에게 길을 내어주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분들을 위하여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단순히 눈 앞에서 펼쳐지는 현상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 보고 사람들은 쉽게 실망하기도 하고, 마냥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좀 더 깊은 곳을 보고, 그 너머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본질을 볼 수 있다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더욱 아름답고,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삶은 더욱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2-23절에서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육신의 눈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눈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니 그 눈이 흐려져서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도 보지 못합니다. 흐려진 눈으로 보니 자기 자신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보는 눈도 왜곡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을 위하여 마음의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 비로소 알 수 있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18절, 19절에서 바울은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미래의 소망을 볼 수 있습니다.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부르심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삶이 힘들고 믿음을 지키가 힘겨운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겪고 있는 삶의 고통이 너무나 크고 아프지만, 그러나 마음의 눈이 밝은 사람은 눈 앞의 그 현실 때문에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너머 미래를 바라보며 소망을 갖습니다. 그는 지나간 일들에 매여있지 않습니다. 어떤 유행가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나간 것에 매여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부르심의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은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우리는 미래에 속한 소망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실 때 우리는 비로소 미래에 속한 부르심의 소망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알게 되는 것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상속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소망 안에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풍성하고 충만한 삶의 기업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하나님은, ㅇ“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풍성한 기업을 바라보면서 아브라함은 비록 낯선 땅에서 많은 시련과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부르심의 소망 안에서 내가 누릴 기업의 풍성함을 볼 수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능력이 무엇인지는 20-2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능력, 그리스도를 하늘로 올리셔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게 하신 능력, 예수님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능력, 만물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시며 그리스도를 교회 머리로 삼으신 능력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그 능력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그 귀한 능력이 오늘 우리 안에서도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구가하며 재물과 쾌락의 우상 앞에 절하고 춤을 추는 오늘의 세상 풍조 속에서, 온갖 유혹을 이기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따라, 그 기업의 영광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함께 해 주실줄 믿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기도하고,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을 알고,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고, 그리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믿음으로 승리하며 오늘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