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지 보시의 종류가 있는데
어느 경전이든지 ‘보시공덕’을 이야기한다. 특히 불자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금강경’에서 ‘무주상보시’와 그 공덕의 스케일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 보시에 관한 이야기는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 보시에 관한 내용은 금강경에서 보는 삼천대천세계와 같은 우주적스케일은 아니다. 매우 교훈적이고 합리적이고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그 내용은 무엇일까.
이어서 부처님은 아난다 존자에게 보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아난다, 보시의 청정에 네 가지 종류가 있다.
보시하는 자는 청정하고 받는 자는 청정하지 못한 보시,
보시하는 자는 청정하지 못하지만 받는 자는 청정한 보시,
보시하는 자도 받는 자도 모두 청정하지 못한 보시,
보시하는 자도 받는 자도 모두 청정한 보시.
(맛지마 니까야: 142 닥키나위방가 경 9-14)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설명한 보시의 종류가 네가지임을 알 수 있다. 보시하는자와 보시받는자 2인에 대하여 4가지 경우의 수가 나오는데, 이런 문구는 경전에서 자주 보는 정형구이다. 이처럼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서 설하기 때문에 불교는 과학적이고 때로 수학적인 종교라 한다.
네가지 경우의 수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다음과 같다.
막행막식하는 스님에게 보시하였을 때
첫째, 보시하는 자는 청정하고 받는 자는 청정하지 못한 보시의 경우이다. 이에 대하여 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계행을 지키는 사람이 계행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얻은 것을 기꺼이 보시하면
보시하는 사람의 계행이 보시를 청정하게 하네.
(맛지마 니까야: 142 닥키나위방가 경 9-14)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철저히 지키는 재가불자가 ‘막행막식(莫行莫食)’하는 스님에게 보시하였을 때 그 보시의 효과에 대한 것이다.
술을 마신다든가 가게를 돌아 다니며 탁발행각을 한다거나 계를 가볍게 여겨 ‘반승반속’의 생활을 하는 스님들에게 보시 하였을 때 어떤 효과가 있을까.
계를 어기며 탁발행각을 하는 스님에게 보시한다는 것은 ‘거지’에게 보시하는 것과다름없다. 아니 그 보다 못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시하는 자의 삶이 청정하여 올바르게 얻은 것을 아낌 없이, 그리고 보시를 하면 큰 과보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아낌없이 보시 하였을 때, 비록 상대방이 청정하지 못한 자이지만 그 보시는 청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청정한 보시에 머물 뿐 공덕에 대한 말은 없는 것으로 보아 과보는 가져 오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더러운 돈을 보시하였을 때
둘째, 보시하는 자는 청정하지 못하지만 받는 자는 청정한 보시의 경우이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계행을 지키는 사람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이 없이
바르지 못하게 얻은 것을 마지못해 보시하면
받는 사람의 계행이 보시를 청정하게 하네.
(맛지마 니까야: 142 닥키나위방가 경 9-14)
막행막식하며 오계를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감각적 욕망에 휘둘려 살아가는 재가불자가 청정하게 살아가는 수행자에게 보시하였을 경우이다.
그런데 그 보시자는 정당하게 번 것도 아니다. 또 보시를 한다고 해서 큰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저 돈 나가는 것을 아깝게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 인등을 단다거나 49재등 보시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닥쳐서 어쩔 수 없이 돈이 나가게 되었을 때, 아마도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낄 것이다.
그런 돈을 청정한 수행자가 받았을 때 비록 더러운 돈이라 하더라도 그 보시는 청정하게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시하는자는 계행도 지키지 않고 더구나 바르게 번돈도 아니고 거기에다 마지못해 주었으므로 공덕에 대한 과보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최악의 보시
셋째, 보시하는 자도 받는 자도 모두 청정하지 못한 보시의 경우이다. 이 경우 ‘최악의 보시’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계행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도 없이
바르지 못하게 얻은 것을 마지못해 보시하면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둘 다 보시를 청정하게 하지 못하네.
(맛지마 니까야: 142 닥키나위방가 경 9-14)
비록 오계를 받은 재가불자라 하더라도 온갖 불법과 탈법을 저질러 재산을 모으고 감각적 욕망에 휘둘려 막행막식 하며 살아온 자가 역시 막행막식으로 살고 있는 청정하지 못한 스님에게 보시한 케이스이다.
인등이나 49재등과 같이 보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보시를 하긴 하였는데 큰 기대도 가지지 않고 다만 돈 나간 것에 대하여만 아깝게 생각한다면 그 보시는 어떤 것일까. 더구나 보시를 받는 스님 역시 ‘막행막식’하며 계를 어기며 ‘반승반속(半僧半俗)’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떠할까. 이 경우 최악의 보시라 볼 수 있다.
계를 파한자에게 보시 하는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자기에게 시물을 보시한 사람들에게 큰 결과를 생기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여러해 된 오물 구덩이처럼 청정해지기 어렵다. 화장터에서 가져온 나무처럼 승(僧)과 속(俗)의 둘 모두로부터 제외된다.
(청정도론, 1장 계)
계를 파한자에 대하여 ‘오물 구덩이속’과 같고, 더구나 ‘화장터에서 타다만 나무토막’과 같아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청정도론에서 이어지는 표현을 보면 “비구라고 주장하지만 비구가 아닌 것이 마치 소의 무리를 따르는 당나귀와 같다”라고 하였다.
언젠가 신도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스님을 목격한 적이 있다. 등산로 하산길에 있는 음식점이었는데, 머리에 모자를 썻지만 복장이라든가 겉으로 본 모습은 스님임에 분명하였다.
한편 술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중에 카페를 운영하는 여주인이 있었다. 그녀는 절에 다닌다고 하였다. 술과 웃음을 팔아 번 돈으로 절에 시주한 돈은 어떤 성격일까.
비록 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 한자가 보시한다고 할지라도 보시를 받는자가 청정하다면 그 보시 또한 청정하게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덕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보시를 한자나 보시를 받는자가 모두 청정하지 않고, 더구나 보시에 대한 과보의 믿음도 없이 마지 못해 보시 하였다면 그 보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마나한’ 보시가 최악의 보시라는 것이다.
진정한 보시는 무엇일까
넷째, 보시하는 자도 받는 자도 모두 청정한 보시의 경우이다. 이 경우 최상의 보시라 볼 수 있다.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계행을 지키는 사람이 계행을 지키는 사람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얻은 것을 기꺼이 보시하면
그 보시는 커다란 과보를 가져온다고 나는 말하네.
(맛지마 니까야: 142 닥키나위방가 경 9-14)
오계를지키며 살아가는 재가불자가 보시를 하면서 그 과보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청정한 수행자에게 기꺼이 보시하였을 때, 커다란 공덕을 쌓기 때문에 최상의 보시로 본다. 그런 수행자는 어떤 경우일까.
글을 쓰면서 많은 네티즌들로 부터 글을 받는다. 그 중 어느 수행자를 알게 되었는데 그 수행자가 어느 날 선물을 하였다. 이메일로 ‘파일’을 보내 온 것이다. 이른바 ‘법보시’이다. 글을 쓸 때 참고하라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파일 대부분을 보내 준 것이다.
그 것은 ‘불교경전’이었다. 숫따니빠따, 법구경, 상윳따니까야등 무려 11종에 달하는 것이었다. 해외에서 공부를 하다 보면 책이 짐이 되기 때문에 노트북에 넣고 다니면서 본다고 하였다.
그런 법보시 파일에서 ‘보시’를 키워드로 검색하였다. 그 결과 어떤 보시가 최상인가, 누구에게 보시해야 공덕이 되는가에 대하여 찾을 수 있었다.
=진흙속의 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