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심술( 讀心術)
쇠 발찌가 발목을 꽉 조였다.
발버둥 쳐도 발은 빠져나올 수 없고 살가죽만 찢어진다.
속살이 드러나고 피가 나더니 곧이어 피가 엉겨 붙으며 극심한 통증이 온다.
돌을 들고 발찌에 이어진 쇠사슬을 찍어보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자신도 모르게 발버둥을 치자 피딱지가 떨어지며 뼈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큰 소리로 외쳐봐도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벌떡 일어났다.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창을 열자 입동의 찬 바람 따라 싸늘한 달빛도 쏟아져 들어왔다.
스물한살 노총각 일각이는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직도 악몽의 공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물에 가서 찬물 한 바가지를 벌컥벌컥 마시고 방으로 들어와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심했다.
“그래, 인제 그만둘 때가 됐어!”
벽에 걸린 다섯개의 활을 잡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할아버지의 활을 태우려니 눈물이 났다.
물푸레나무를 일곱번 쪄서 일곱번 그늘에서 말려 실톱으로 얇게 잘라 고운 사포로 표면을 말끔하게 갈고는,
아교로 겹겹이 붙여 모양새를 잡고 광목천으로 꽁꽁 동여매 여섯달 동안 부엌 아궁이 위에 걸어둬
연기로 훈제를 해 만든 것이다.
한아름이나 되는 독침 화살과 광에서 꺼낸 올무 뭉치를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새벽하늘 아래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일각이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할아버지·아버지로 이어져 내려온 사냥꾼 가업이 이렇게 막을 내렸다.
새벽닭이 울고 희미하게 동창이 밝자 일각이는 피아골로 올랐다.
자신이 놓은 올무에 걸린 첫놈은 반달곰이었다.
발목이 어젯밤 꿈속의 자기 발목과 같았다.
밤새도록 발버둥 쳐 피딱지가 뼈를 덮었다.
올무를 풀어주자 멀찌감치 기다리던 새끼들에게 달려갔다.
담비 한마리도 풀어주고 여기저기 놓았던 올무를 걷고 하산길에 다른 사냥꾼의 올무에 걸린
사슴· 수달· 족제비· 노루 등등도 풀어줬다.
광 속에 쌓아둔 모피를 팔아 고구마 두가마, 콩 세가마를 샀다.
눈이 쌓이면 짐승들에게 뿌려줄 참이다.
일각이는 구례로 내려가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퍼마셨다.
“일각아, 잘했다. 네가 사냥을 그만두고 수많은 내 자식들을 살려줘 고맙기 그지없구나!”
그날 밤 꿈에 두자나 되는 흰 수염을 휘날리며 긴 지팡이를 짚은 산신령이 나타났다.
장날 구례 장터를 어슬렁거리던 일각이는 자기도 모르게 야바위판 앞에 끼어들었다.
‘저 야바위꾼에게 갖다 바친 돈이 얼마이던가’.
호리호리한 초로의 야바위꾼이 일각이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었다.
일각이는 깜짝 놀랐다.
‘한참 못 본다 했더니 나의 봉이 제 발로 찾아왔구나.
반달곰을 잡아서 첩을 얻은 부자 영감에게 웅담을 바가지 씌웠나?
그래 들어와, 한판 붙어보자고’.
일각이는 야바위꾼 머릿속에 들어간 듯 야바위꾼 생각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일각이는 빙긋이 웃더니 종지 세개 앞에 쪼그려 앉아 조끼 주머니에서 열냥을 꺼내 판돈으로 걸었다.
야바위꾼의 손놀림은 여전히 빨랐지만 일각이는 야바위꾼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왼쪽 종지를 손으로 덮고 살며시 들어 올리자 그 속에서 새하얀 백통 반지가 나왔다.
종지 세개를 돌려 어느 종지 속에 반지가 들었는지 맞히는 야바위 판에서 연거푸 다섯판을 맞혀
백오십냥을 따자 바람잡이들이 슬며시 판을 거뒀다.
그 뒤 구례 장터에서 촌부들의 주머니를 털던 야바위꾼들이 자취를 감췄다.
사또가 형틀에 묶어놓고 곤장을 쳐서 자백을 받아내던 무리한 수사도 사라졌다.
사또가 일각이를 불러 혐의자의 생각을 곧이곧대로 끄집어내니 피를 튀길 일이 없어졌다.
지리산 산짐승들을 살려준 총각 일각이는 산신령님으로부터 탁월한 능력,
독심술(讀心術)을 전수받아 종횡무진 활약하다가 마침내 소문이 한양까지 올라가 의금부의 부름을 받았다.
무리하게 처음부터 곤장을 쳐서 문초할 수 없었던 고관대작들의 생각을 끄집어내니 모든 사건이
너무나 쉽게 해결되었다.
일각이는 한양에서 신(神)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주지육림 속에 빠졌지만 구례 장터가의 국밥집이 그리웠다.
구례 사또가 피아골에서 단풍 구경을 하는 일각이를 찾아 한양으로 데려갔다.
천자문도 읽지 못하는 사냥꾼 일각이는 의금부 당상관에 올라 거추장스러운 사모관대를 입고
팔자에도 없는 책상에 앉아 한양에서 탈출하여 지리산으로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더라.
첫댓글 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