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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텔라의 마음공부 >
고양이 예삐이야기
글 | 스텔라 박
예삐라는 이름의 고양이
2년 전,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는 후배를 만나기 위해 LA의 마당 쇼핑몰 내의 한 매장에 갔다가 생후 2개월이 갓 넘는 아기 고양이를 보게 됐다.
예전에도 고양이를 키웠던 적이 있던 나는 이 녀석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졌다. 첫 눈에 사랑헤 빠진다는 게 무엇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나는 수행자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아름다운 대상을 욕망하는 덫에 빠진 것이다.
“한 번 안아봐도 되나요?”라는 나의 간청에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응대했다.
이름을 물었더니 예삐란다. 너무 예뻐서 예삐란다. 예삐는 정말 예뻤다. 아몬드형의 눈, 자그마한 얼굴, 앙증맞은 코와 입… 어느 한군데 미운 곳이 없었다. 이마에는 M자형의 무늬가 있었다. 여러 종자가 섞였지만 그래도 굳이 분류하자면 고등어 태비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에서 가장 흔한 고양이 종류 중 하나로 체구는 자그마하다. 새끼 고양이들에게는 온 세상이 경이의 대상이다.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궁금증을 표현하는 예삐를 바라보는 나는 온 몸에서 짜르르 전율이 흐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저히 이 아가를 두고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던 나는 고양이 주인에게 물었다.
“저, 예삐를 일주일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잘 보살피다가 데려올께요.”
예삐를 키우던 박선생님은 선뜻 나의 요청에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줬다.
나는 예삐를 강보에 싸서 집으로 데려왔다. 처음에 집을 낯설어 하던 예삐는 가구 아래 들어가 숨기도 하고 까칠한 태도를 보였지만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정어리를 꺼내면 어느 틈엔가 쪼르르 내 앞에 와 있었다.
그렇게 꿈같은 일주일을 보내고 예삐를 데려다주려 하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겨울철에 입는, 그것만 입으면 이불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따뜻하고 보드러운 감촉의 내 잠옷에 예삐를 싸서 가져다주면서 이렇게 부탁했다.
“예삐도 아빠(박선생님) 밑에서만 크는 것보다는 섬세한 엄마의 보살핌을 함께 받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일주일에 하루만 예삐를 데려다가 봐드리면 어때요?”
박선생님은 나의 간곡한 요청에 썩 내키지는 않아 하면서도 “예스” 하셨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데려와서 지내다가 데려다주기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연말이 가까워오자 박선생님은 술자리가 계속 된다며 당분간 나더러 맡아 키우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는 “야호”를 외치면서도 겉으로는 표정 관리를 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렇다가 지난 해 1월, 인도로 요가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다시 박선생님께 예삐를 데려다 드렸다. 인도 요가 학교의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그리 많은 이들과 연락을 주고 받지는 않았지만 박선생님과는 정말 뻔질나게 카톡 메시지를 나누었다.
“예삐, 잘 지내요? 사진 좀 투척해주세요.”가 주요 메시지였다. 그러면 박선생님은 예삐가 온 몸을 동그랗고 말고 잠자는 모습, 쥐 모양의 인형을 가지고 노는 모습 등을 찍어서 보내주셨다. 사진만 보고도 나는 예삐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예삐 엄마 되기
그리고 지난 해 6월 다시 LA로 돌아왔을 때, 박선생님은 그 비즈니스를 접고 애완동물이 허락되지 않는 아파트에 입주한다며 예삐를 내게 맡기셨다.
그리하여 나는 예삐의 엄마가 되었다.
나는 집이 없더라도 예삐만은 번듯한 집이 필요할 것 같아고양이 콘도를 구입해주기도 했다. 고양이 콘도를 주문해서 도착한 첫날, 조립을 마치고 예삐를 집 안에 넣어주자, 예삐는 정작 고양이 콘도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것이 담겨온 상자를 더 좋아했다.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에게 이런 현상을 얘기하자 그 친구는 웃으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고양이들이 워낙 그래. 그래도 한 1년 정도 세월이 지나면서, ‘자리만 차리하는 것, 이제 버려야지’, 생각하면 딱 그때쯤부터 이용하기 시작해.”
경험에 근거한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예삐의 경우 6개월 이후부터 자신의 집에서 낮잠도 자고 맨 꼭대기 층에 올라가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게 되었으니까.
고양이와 함께 하기 위해 이사를 결정하다
그런데 지난 달, 집주인이 내가 고양이를 키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 입주할 때 계약서에 ‘노 펫(No Pet)’이라는 항목이 있었던 것을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했었다.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이사를 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물론 예삐를 다른 곳에 입양시키는 선택사항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예삐와 떨어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이 말이 억지임을 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예삐와 함께하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다.
새로 아파트를 알아보면서 깜짝 놀랐다. 요즘 아파트 주인들 가운데는 애완동물에 대해 돌려주지 않는 디파짓(Nonrefundable Pet Deposit)을 부과하고 한 달에 45-60달러정도의 애완동물 렌트비를 부과하는 곳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대부분의 장소는 애완동물 금지였다.
점점 1인 가구가 늘고 있다. 그리고 혼자 사는 이들 중에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이들이 제법 많다. 그런데 아파트 임대료는 점점 높아가고 거기에다 강아지, 고양이가 뭘 얼마나 한다고 애완동물 렌트비까지 받는지…. 강아지는 모르겠다만 고양이는 집을 망가뜨릴 염려도 없고 목욕도 시키지 않기 때문에 물을 더 사용할 일도 없는데 말이다. 다른 생명체를 가까이에 두고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독신자들의 정서함양에 도움이 되는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애완동물로 인해 이 사회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 모두의 이해가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제도적인 권익 보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쨌든 나는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3번 이사를 했던 것에는 미칠지 모르지만 딸내미 같은 예삐를 위해 이사를 결정했다.
고양이들은 관찰의 대가
예삐가 모든 고양이를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예삐를 지켜보면서 나는 고양이들의 관찰력과 인내력에 혀를 내두른다. 아침이면 예삐는 자기 집 2층에 올라가 창밖을 내다본다.
뭐가 그리 볼 게 있나, 나도 옆에 서서 밖을 봤더니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가끔씩은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참새들이 시야에 들어오면 예삐는 너무 좋아서 희한한 소리를 낸다. 또 전깃줄을 타고 곡예를 부리는 다람쥐가 지나갈 때도 있다. 그럴 때, 예삐는 미동도 않은 채 다람쥐를 응시한다. 그렇게 그녀는 한 시간도 넘게 고요히 앉아 있다.
예삐가 창밖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을 보며 나는 옛 선사들이 했던 “화두를 참구할 때에는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해야 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아직 예삐는 쥐를 잡아본 적은 없지만 뭐든 작은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거의 쥐를 앞에 둔 것 같은 행동을 보인다.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할 때에는 쥐구멍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오직 쥐구멍만 뚫어져라 응시한다. 결국 어느 한순간도 잡념을 두지 말고 일념으로 마음을 챙기며 집중하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수행하라는 뜻에서 선사들은 이런 표현을 즐겨 사용하셨던 것 같다.
숭산스님과 고양이
고양이는 또 숭산스님과도 에피소드가 있는 동물이다. 숭산스님이 마곡사의 후원에서 소임을 맡아 보던 때의 이야기이다. 제사에 쓰기 위해 손두부를 만들어 커다란 나무통에 담가두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두부 한모가 사라졌단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스님은 더욱 철저히 문단속을 하고 잠들었는데 다음 날 나가보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출입한 흔적이 없는데도 두부가 사라진 게 이상해, 스님은 밤을 새서라도 두부 도둑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나무통뒤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3시가 가까워질 무렵, 고양이 한 마리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타나 두부 담긴 통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스님은 가만히 숨을 죽이고 고양이의 거동을 살폈다. 고양이는 두부가 담긴 나무통 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고요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통 안의 두부를 지켜보더란다. 그랬더니… 세상에, 이런 일이. 나무통 속의 두부 한 모가 고양이의 눈길을 따라 물 위로 떠올랐고 고양이는 얼른 두부를 낚아채먹고는 작은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사실 논쟁의 여지가 많다. 고양이는 육식동물이라 내가 실험해본 바에 의하면 예삐는 두부에 손도 대지 않는다. 하지만 절에 살면서 먹을 게 없어지면 뭐는 못 먹을까, 싶기도 하다.)
두부 도둑이 누구인지를 찾아낸 스님은 “고양이일지라도 고도의 집중된 응시력을 이용하면 물속의 두부를 수면으로 끄집어 올리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저 정도의 집중력과 노력이 있으면 무엇인들 못 이루겠는가.”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니 숭산스님이 큰 깨달음을 얻고 가르침을 펼 수 있었던 모멘텀은 고양이가 제공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니까야 중 고양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가운데 ‘고양이의 경’은 고양이와 쥐의 비유로 수행자와 여인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수행승들이여, 옛날에 한 고양이가 어린 쥐 한마리를 쫓아 하수도의 쓰레기 더미 위에 서서 '이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오면 그때 내가 그를 잡아먹어야지' 라고 생각했다.
수행승들이여, 그때 그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마을이나 거리로 들어가는데 몸을 가다듬지 않고 말을 조심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지 않고 주의 깊음에 머물지 않고 감관을 제어하지 않고 간다고 하자.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했기 때문에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고양이의 경, S20.10, 전재성 번역)”
이 경은 사띠하지 않을 때, 쉽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빠지고 재난을 겪게 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먹이를 구하러 쥐구멍을 나온 생쥐는 사띠가 확립 되지 않은 탁발수행자이다. 그리고 쥐구멍을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는 수행자를 감각적 쾌락에 빠트리고자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여인에 비유된다. 선가에서 고양이를 사띠의 대명사처럼 이야기 하는 것에 비해 볼 때, 어찌 보면 그 역할이 바뀐 셈이지만 어쨌든 고양이는 깨어 있는 마음에 대한 메타포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양이 예삐
고양이 믈루
장 그르니에(Jean Grenier)의 저서, <섬(Les iles)>에는 ‘믈루’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나온다. 알베르 까뮈의 선생님이기도 했던 장 그르니에는 믈루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통해 자기자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구절구절, 어쩜 이렇게도 잔잔하면서도 섬세하고 아름답게 글을 쓰는지.. 나는 그를 내가 좋아하는 작가 반열에 올려놓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그르니에는 어린 고양이 한 마리를 주워다가 믈루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일상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눈다. 믈루와 그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은 그르니에의 따뜻한 시각으로 인해 더없이 신비롭고 아름답게 묘사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화자인 그르니에는 그렇게도 가까이 삶을 함께 하던 믈루를 수의사 쎄르벡씨의 도움을 받아 안락사 시킨다. 그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먼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믈루는 온 몸에 상처를 입고 불구의 몸이 되어 부엌 구석의 상자 속에 처박혀만 있다. 거리에 내놓았을 경우 어찌 될지도 모르는 믈루, 털이 여기저기 보기 흉하게 빠져 누구에게 맡아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믈루… 그리고 고양이라는 동물은 사람보다 장소와 사랑에 빠지는지라 종착지를 알 수 없는 그의 불안한 여행 길에 그를 동행할 수도 없다..…
떨어질 수 없어 예삐를 데리고 이사가는 것을 택한 나로서는 믈루를 안락사시키는 그르니에에게 “안 돼!”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 나름대로의 충분한 이유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싸늘하게 식은 믈루의 시신을 자신의 집 정원에 묻고서 남은 이사 준비를 하며 끝나는 이 작품은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그르니에는 믈루가 침묵으로 이런 말을 그에게 했다고 썼다.
"나는 저 꽃이에요. 저 하늘이에요. 또 저 의자에요. 나는 그 폐허였고 그 바람, 그 열기였어요. 가장한 모습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시나요? 당신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를 고양이라고 여기는 거에요. 대양 속의 소금 같이, 허공속의 외침 같이, 사랑 속의 통일 같이, 나는 내 모습 겉모습 속에 흩어져 있답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그 모든 겉모습들은 저녁의 지친 새들이 둥지에 들 듯, 제 속으로 돌아올 거에요.
고개를 돌리고 순간을 지워버리세요. 생각의 대상을 갖지 말고 생각해 보세요. 제 어미가 입으로 물어다가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도록 어린 고양이가 제 몸을 맡기듯 당신을 가만히 맡겨보세요"
와… 놀랍다. 생명 자리에서 우리는 결국 하나임을… 내가 너임을… 네가 나임을… 내가 우주임을… 네가 우주임을… 나라 할 만한 것이 없음을… 너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음을… 우리는 무엇도 아니고, 어느 것도 될 수 있음을… 그르니에는 믈루가 전하는 침묵의 언어 속에서 듣고 있다. 그리고 믈루가 전하는 달콤한 말, “어린 고양이가 어미에게 제 몸을 맡기듯, 당신을 가만히 맡겨보세요.”을 통해 아무런 저항 없이 현존 앞에 항복(Surrender)하는 지혜와 참기쁨을 말하고 있다.
고양이들의 게으름은 이 세상 어떤 부자들도 향유할 수 없는 사치이다. 고양이들의 “가르릉” 소리는 그 어떤 만족감의 표현보다 더 큰 충만함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느끼게 해준다.
나는 밤에 수행을 하다 말고 가끔씩 예삐를 껴안고 눈물을 뚝뚝 흘린다. 예삐와 나, 모두 같은 재질의 생명체로 만들어져 있음을 온 몸으로 느끼며 전율한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지만…. 그래도 큰 변수가 없다면 나는 아마도 예삐가 마지막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 보드라운 털을 만질 수 없다는 것은 큰 슬픔일 것이다. 하지만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할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예삐의 보드라운 목털을 만지며 예삐와의 인연에 감사한다. 예삐를 통해 세상을 향한 사랑이, 연민이, 더욱 자라남을 체험한다.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
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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