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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마태복음 22장 15-22절 / 15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바리새인들의 음모에 의한 질문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트집을 잡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올무가 되게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궁리한 끝에 의견을 모아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었습니다. 이는 다음의 질문을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1) “우리에게 말해 주십시오.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게 한 것은 예수님이 답변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흠이 될 만한 문제가 되는 발언을 했는지를 찾아내 그것으로 트집을 잡아서 예루살렘에서 쫓아내거나 체포 할 함정의 올무에 걸리게 할 심사에서입니다. 따라서 악한 생각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유도성의 질문을 하게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이 질문으로 시작된 예수님을 시험하는 일은 이후에도 계속되어서 모두 세 차례에 걸쳐서 행해집니다, 본문에서의 로마의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22:15-22)을 비롯하여서 부활과 천사의 영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질문(22:23-33),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것인지를 물은 한 율법사의 질문(22:34-40)이 그것입니다.
이 중 첫 번째에서 바리새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시켰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이들이 예수님을 ‘참되시다’고 말한 것은 문자적으로는 ‘숨기지 않는다’, ‘진리를 사랑한다’를 뜻합니다만, 이들의 의도는 예수님을 진리를 사랑하며 진실을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공경의 의도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하는 질문에 숨기지 않고 대답해 줄 것을 은근히 강요하는 것에서 하는 말입니다. (2)그리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여 규정한 법칙과 행동 방식을 따르며 이를 가르치신다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서 대답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그동안 가르쳐 온 행동에 맞게 대답하면 어떤 대답을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3)그리고 또한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은‘피하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유념하다’, ‘마음 쓰다’는 의미에서인데 바리새인의 제자 또는 헤롯 당원인 자신들 그 누구도 마음 쓰지 말고 소신껏 대답할 것을 요구하는 것에서입니다. (4)그것으로 자신들은 예수님을 사람을 외모만을 보고 판단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의 제자들이요 또는 헤롯 당원인 자신들의 입장과 체면을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이 알고 있는 그대로 대답해 달라고 말하는 것에서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5)그것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에 대하여 대답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예의를 갖추어 높여 드리는 것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대화의 전형적인 수사학적 방법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대화술에 있어서 먼저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높여 추켜 세워주는 말을 한 뒤 대답하기 어렵거나 곤란한 질문을 하여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며 한없이 추락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의 사주를 받은 그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께 한 질문은 진심어린 마음에서 한 질문이 아닌 위선에 의한 질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음모 계책에 숨은 의도
바리새인들의 지시를 받은 질문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품은 악한 의도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라고 책망하시며, 그들에게 세금으로 내는 돈으로 사용하는 동전을 예수께 내보이게 하시고서는 그 동전에 새겨진 형상이 누구이며 새겨진 글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를 물어2) “가이사의 것입니다!”라는 대답을 하는 그들에게 “그렇다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려라”는 것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보게 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에서 ‘가이사의 것’은 앞에서의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이 질문한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을 말합니다. 로마인들이 인구조사를 한 기록장부인 등기부의 기록에 의해서 인두세 – 주민세 - 를 부과했습니다. 로마 정부는 식민지에 거주하는 백성들 중 남자 14세, 여자 12세 이상이면 65세까지 인두세를 납부하게 하였습니다. 이 인두세는 납세의 의무를 띠고 있으므로 해당자는 누구나 반드시 내야했습니다. 로마 정부가 로마 시민이 아닌 유대인에게 인두세를 부과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방 권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고통스러움을 피부적으로 느끼게 해 주고 있습니다.유대인들은 이 동전을 사용하여 세금을 낼 때마다 로마의 점령을 고통스럽게 상기함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를 질문하게 한 것은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나라인 로마 정부에 납세의 의무를 짊어지고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서 ‘(~것이) 옳으니이까’에 사용된 단어의 원문이 지닌 뜻은 ‘적법합니까(합법적입니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는 로마법과 관련된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과 관련한 질문을 하는 것에서입니다. 로마법으로는 당연히 적법할 것이나, 하나님의 율법으로도 적법할 것이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헤롯 당원은 팔레스틴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종주국 로마의 정책을 적극 옹호하며 인두세 납부의 의무를 지는 것을 찬성하는 입장이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이방 군주에게 납세의 의무를 진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로마 황제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고 로마 황제를 하나님과 동일한 위치에 두는 것으로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 질문을 하게 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율법과 로마법의 대치에 있게 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하며 의도적으로 헤롯 당원과는 다툼에 있게 하며 자신들에게는 옹호에 있게 해 나가고자 하거나 의도한 계획대로 되지 못하여 헤롯 당원의 입장을 지지하는 답변을 하면 또 다른 속셈인 하나님의 율법을 들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므로 세금을 로마 황제에 바칠 수 없는데 세금을 로마 황제에 바치라고 하니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도록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케 하는 자로 몰아가려는 의도를 깔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보낸 그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께 한 질문은 어떻게 답변을 하든지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올무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1)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답변을 주면 다만 하나님만 섬김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며 바리새인들의 반발을 살 것입니다. (2)가이사에게 바치지 말고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답변을 주면 로마 황제의 명을 거역하여 납세를 하지 못하게 하니 로마 정부에 반역을 하는 것이라며 헤롯 당원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이 예수님을 공경하는 어투로 하지만 실상은 위선에 의한 시험의 의도임을 간파하시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심은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내세우며 그 앞에서 의로운 자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실상은 한갓 선을 가장한 겉모양뿐이고 속에는 선은 없이 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에 적합한지 부적합한지를 물어 예수님을 멸시하고 대적할 올무로 삼고자 하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고 범함에 있어온 것을 예수께서는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그들 자신이 가이사의 형상과 가이사를 신격화하는 글이 새겨진 동전을 소유하고 있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었으며, 로마 정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의 현실 문제를 들어 자신들이 반대하며 혐오하는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바리새인들의 의에 덮여 있는 외식을 드러내시며 책망하셨습니다만, 그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납부해 온 것에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여기서 ‘바치라’는 말의 원문이 지닌 문자적인 뜻은 ‘넘겨주다’, ‘이양하다’, 곧 ‘양도하다’, ‘줌으로써 정리하다’인데, 본문에서는 빚이나 의무에 관련되어 ‘응당 치러야 할 것을 갚아 버리다’를 의미합니다.이 단어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에 각각 사용됨으로써, 국가와 하나님에 대해 각각 가지고 있는 의무를 반드시 성실하게 이행해야 함을 가리킵니다.
국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납세를 비롯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충돌하며 위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무를 이행함에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가이사를 신격화 하는 글이 새긴 로마 정부가 발행한 화폐를 가지고서 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이사가 만든 것이 통용되고 있는 것을 가이사에게 돌려주는 것일 뿐입니다. 로마 정부가 가이사의 명령을 받아 만든 가이사의 형상과 가이사 숭배의 글이 새긴 동전은 그 소유가 가이사(로마 정부)입니다. 그러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로마법이며, 그 법의 이행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나라 화폐로 사용하는 동전에는 동으로 만든 십원짜리 동전이 있는데, 여기에는 불국사의 다보탑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돈을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사용합니다. 이 돈을 사용하면서 불교의 종교를 따르며 그 종교를 신앙하고 섬긴다고 여겨 그 동전을 숭배하는 분들이 있는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기독교 신자이든 기독교 신자가 아니든 아무도 없습니다. 불교 신자의 경우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십원짜리 동전은 국가에 의해서 조폐공사인 한국은행이 발행한 화폐로 그 소유가 국가에 있습니다. 동전이든 지폐이든 이 화폐에 어떤 사물의 형상이 새겨져 있어 중요한 유물로 여기며 어느 인물의 초상이 새겨져 있어 그를 존엄한 자로 여긴다고 해서 그 화폐를 소유한 기독교 신자가 우상숭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의 소유이니 국가가 정한 법대로 국민은 화폐의 가치에 따라 사용합니다. 예전에 모회사에서 만들어내는 OO이란 음료가 판매되고 있는 것에 불매 운동이 기독교에서 있었습니다. 그 음료는 이단이 만드는 것이며, 그 음료를 사서 마시는 것은 없어져야 할 이단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해서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와 상관없는, 이교도인이거나 무신론자이거나 안티기독교에 있는 자들이 생산하는 식품을 비롯한 수많은 제품을 기독교인이 아무런 생각 없이 사서 먹고 마시며 입고 쓰며 사는 것은 그래도 되는 것인지요. 어떤 음식 하나를 사서 마실 수 없으면, 그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전체를 사서 먹을 수 없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식 없이 당연히 구매의 행위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을 받은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유인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돌려드려야 합니다. 대제사장과 장로와 서기관으로 있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할 지위의 자리에 있는데 따른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짊어지게 한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죄를 깨닫게 하며 그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야(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하는데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대제사장과 장로와 서기관의 권위 있는 의무를 충성스럽게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림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로마 정부가 가이사의 형상을 새겨 넣은 발행한 동전의 화폐로 세금을 낼 수 있는지에 신경을 쓰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거룩한 율법과 그 율법의 의무를 수행함에 있는 직분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여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일은 하지 않고 외식을 행함에만 있는 악함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예수께서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을 올바르고 제대로 권위 있게 수행함으로써 자신들이 행하는 일인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여 주께서 행하실 구원의 권능에 복종하는 믿음에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로 있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악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은 앞서의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비유’(22:1-14)에 의해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오직 택함을 입은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바인 하나님께서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푸시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없을 것임을 의도해 주시고 있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깨달을 것이나, 듣지 못하는 자는 그로 인하여 화를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침에 있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함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그 권위에 복종함에 있기에 삶을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삽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여 권면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14)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13)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것이 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께 바침이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몸입니다. 그러한 몸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의로운 일을 위해 살 수 있게 해 주셨으니, 마땅히 그리하여야 합니다. 이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 있게 실행됨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0장 7-21절에서 이야기 하시는 중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양은 그 목자의 음성을 아나니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목숨을 버린다’는 표현을 직, 간접적으로 11절, 15절, 17절, 18절 네 번에 걸쳐 언급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이를 받들어 구속주로서의 사역을 행하심에서 목숨을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림에 있었습니다. 이는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살아가는 삶의 원리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자신들 가장 앞에서 행하신 것을 본 그대로를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디트리히 본 회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구원은 무료이지만(값없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당신의 목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내려놓은 그의 목숨은 영원히 잃음에 있지 않으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의 몸과 목숨은 그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인 까닭에 천국에 의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그와 함께 할 것이 산상설교에서 약속된 바에 따른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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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 당시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의 대리 통치자인 헤롯 왕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주로 세리의 임무를 담당하여 세금을 징수했고, 로마 정책을 홍보하는 친로마적 성향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유대인들은 매국노로 인식했다. 그런 까닭에 바리새인들에게서 헤롯 당원은 창기와 더불어 죄인으로 여겼다. 그러한 바리새인들이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 질문을 하게 한 것은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손을 잡는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한 것은 속셈이 있어서 이다. 그것은 만일 예수님이 세금 징수에 반대의 의사를 표명하면 헤롯 당원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안 그래도 예수가 자신들의 체제에 방해된다고 여기고 있는 판에 로마 황제에 반대하는 자로 몰아 체포의 빌미를 갖게 하고자 함이며, 반대로 세금 징수에 옹호하면 바리새인들의 반발을 일으켜 세력을 모을 수 있어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는 적극적인 기회로 삼고자 해서 이다. 결국 어느 쪽으로든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악한 생각의 계책에 있었다.
2) 예수님 당시에 통용되는 세금으로 내는 동전은 로마 동전으로 은전인 데나리온이 사용되었다. 이 동전은 앞면에 예수님 당시 로마 황제인 티베리우스(디베료)의 흉상이 새겨져 있고(황제 기간; 14-37년. 아우구스투스의 후임자). ‘신적인 아우구스투스의 지엄한 아들 티베리우스’라고 그를 ‘신적인 아들’이라고 묘사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신의 권좌에 앉아 있는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상이 새겨져 있고, 티베리우스를 대제사장(오늘날의 교황 칭호)으로 칭하는 것에서 ‘폰티펙스 막시무스’란 글이 새겨져 있다. 로마 황제가 이러한 동전을 세금으로 내게 한 것은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4중적으로 도발적이다. (1)로마 황제를 ‘신적인’ 존재로 삼은 것 : 로마 황제에게 ‘신적’인 명칭을 붙이므로 신격화 하여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함에 있게 하였다. (2)신격화 한 로마 황제의 형상을 새긴 것 : 로마 황제를 신격화한 동전을 유대인에게 사용하게 하므로 하나님 외에 다른 형상을 새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그것을 소유함의 악한 죄에 있게 하였다. (3)황제의 어머니가 신의 권좌에 앉은 것 : 황제의 어머니를 신적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으로 함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함의 모욕을 주고 있다. (4)티베리우스를 대제사장이라고 한 것 : 이스라엘의 레위 지파 중 아론의 집에서 대제사장이 세워지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대적하여서 이방인인 로마 황제가 스스로 대제사장으로 불리어 유대교를 로마 황제의 지배에 두고자 하는 함으로 유대교를 더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