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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두 선생님께 (북송 성리학의 이해와 정좌 공부)
2026년 8월 26일
이성두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
한문학에서 중국 성리학으로 옮겨서 공부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상채, 남전을 말씀하셨는데
송대 성리학 연구에 관하여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북송 시기 성리학자들의 철학사상이나 문학 작품을 읽고 이해하시려면 반드시 불교와 도교의 서적들을 읽고 이해하시고 동시에 수양 공부를 실제로 배우시고 직접 공부해보시길 건의드립니다.
주희가 편집한 몇몇 서적들을 읽고 북송 시기의 학술을 이해하시면 모두 틀립니다.(全錯!)
주희는 불교와 도교를 상식 수준만큼도 배우지 않았고 무조건 싫어하였습니다. 주희의 어록과 서신을 보면 불교와 도교에 관한 이해 수준은 정말로 한심합니다. 사실상 주희 학술에서는 당나라의 불교와 도교를 비롯하여 북송 초기 천태종 부흥과 도교 부흥이 완전히 끊어진 문화 단절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주희 이후에는 삼교 합일(三敎合一)은 꿈도 꾸지 못하였습니다.
북송 시기에 어떤 학자인들 수양 공부를 실천하지 않았겠습니까? 정명도와 사량좌 모두 널리 전수하였던 공부 방법은 정좌(靜坐)하여 핵심 진리(大頭腦)를 깨달을 때까지 사유하는 방법(静坐尋討)이었고, 글귀를 읽고 이해한 뒤에 외워서 암송하는 것을 쓸데없는 짓(玩物喪志 : 외물 서적을 외우고 놀다가는 자신의 사유 능력을 잃는다.)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정이천조차 진공섬(朱光庭, 字公掞, 1037-1094)에게 사량좌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개인 문제를 스승에게 여쭙고 스승의 해답을 들으면 다시 깊이 생각하여 깨닫는다(切問近思)”고 소개하였습니다. 정명도가 말한 “정좌심토(靜坐尋討)”와 정이천이 평론한 “절문근사(切問近思)” 둘은 같은 뜻입니다. 정이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사량좌를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불교에 귀의하다시피 하였답니다.
주희도 이런 수양 공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실천하지 않고 무조건 불교 참선이라고 비난하고 철저히 배격하였습니다. 주희는 정좌(靜坐) 공부를 초학자가 맹자 말처럼 방심(放心)을 수습하는(收) 보조 수단으로 이해하고(朱子欲以靜坐補小學收放心一段工夫)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북송 학풍을 단절시킨 큰 잘못입니다. 수나라 지자대사(智顗, 538-597)는 참선에 관한 여러 서적에서 육바라밀 가운데 선바라밀(禪波羅蜜)의 공덕(효과)이 가장 뛰어나고 빠르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어느 학자가 주희의 이런 엉터리 주장을 믿겠습니까? 사실상 정주학의 주경(主敬) 공부 효과가 정좌 공부 효과를 대체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수당(隋唐) 시기의 천태종이나 화엄종 및 선종의 정좌 방법 또한 북송 초기의 불교와 도교 및 성리학자들의 공부 전통을 단절한 것입니다.
특히 북송 초기에 불교와 도교의 부흥과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대 말기에 고려 체관(諦觀) 스님의 도움을 받아 지자대사(智顗, 538-597)의 천태종이 부흥하였습니다. 이를 계승한 지례(知禮, 960-1028, 『四明尊者敎行錄』, 卷七 : “字約言, 金姓, 世爲明人” 속성 김씨이고 김일선 후손이며 四明에 정착함. 실제로는 신라 출신 이주민) 대사는 망심관(妄心觀) 관점에서 7년 동안(1000-1006) 산외파(山外派) 진심관(眞心觀)을 비판하였고 논제(論題)와 논지(論旨)가 널리 알려져서 송나라 진종(眞宗)이 법지대사(法智大師) 법호를 내렸고 문학가 양억(楊億, 974-1020)이 지례대사를 옹호하였습니다.
도교에서는 잘 알려졌듯이 도사 진단(陳摶, 871-989)이 내단(內丹) 수련을 주장하였고 선천 역학을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진단은 북송 태종을 2번 뵙고 안민(安民) 정책을 건의하였습니다. 주진(朱震)의 말이 지나치더라도 진단의 학술사상은 북송 성리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宋史』, 「朱震傳」 : “陳摶以先天圖傳種放,放傳穆修,穆修傳李之才,之才傳邵雍。放以河圖、洛書傳李溉,溉傳許堅,許堅傳范諤昌,諤昌傳劉牧。”)
북송 초기 천태종 지례대사와 도사 진단 및 성리학자들의 사례를 보더라도 정좌 공부는 주요 방법이었고 보조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북송 시기 성리학자들에서는 정좌심토(靜坐尋討, 切問近思) 학풍이 유행하였으나 남송 시기에는 읽고 외우는 암송(暗誦)이 학풍이 되었습니다. 양송(兩宋)의 학풍이 상당히 다릅니다. 요즘 말로 외워서 답안을 순간적으로 찍는 수능시험이 있고 또 이해한 내용을 논술하는 방식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남송 이후부터 원명청 시기에는 송대 성리학자들의 글귀 가운데 요점들을 외우고 시험 답안지에 옮겨놓은 암송이 학술이었답니다.
고려시대에는 훌륭한 스님들이 많아 일반인들도 정좌 공부를 잘하였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자학을 잘 배운 나라가 바로 조선입니다. 조선에서 수양 공부를 말하면 기껏해야 김시습 선생의 숨쉬기 운동과 퇴계 선생의 신세기 체조에 불과합니다. 서경덕 선생에 이르러서 정좌하는 공부가 그나마 조금 나아졌습니다. 1990년대까지도 성리학 연구자들은 수양 공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이단이라고 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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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인종 연간에 관원들이 신정(新政)을 논의하지만 재야 학자들은 경세(經世)를 위하여 유학을 공부하였고 일부는 도교와 불교를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장재(張載, 1020-1077)도 어려서 전쟁에 관심이 많았다가(少時談兵) 21살(1041)에 「邊議九條」를 지어 당시 서하(西夏) 방어 군무(軍務)를 실행하던 범중암(范仲淹, 989-1052)에게 올렸습니다. 범중암이 젊은 장재에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전쟁을 연구하고 행동하는 협(俠)이 되지 말고 유가 경전을 연구하는 유(儒)가 되라고 타이르고 『중용』을 공부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유행에 따라 불교와 도교 관점에서 『중용』을 공부하라는 뜻입니다.
범중암은 실무에 밝은 행정가이기에 사회변화(social change)를 잘 알았습니다. 아무튼지 인종 연간에는 당말오대(唐末五代) 시기의 무신(武臣) 사회에서 점차 사대부(士大夫) 문인(文人)로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박정희 대통령부터 전두환과 노태우까지 무인 정권이었으나 민주화운동이 결국에 문인 정권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사회변화가 북송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해 당말오대(唐末五代)에는 지식인들이 옆구리에 긴 칼을 차고 다니면서 혼란한 사회를 안정(安定)시키겠다고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이들은 의기(義氣)가 충만한 협(俠)이었습니다. 늦어도 인종 연간과 신종 연간에는 사대부 사회가 점차 형성되었습니다.
인종의 뒤를 이어 신종 희녕(熙寧) 2년(1069)부터 왕안석 신법(新法) 개혁이 시작되자 이를 반대하거나 참여하다가 좌절한 관원들과 학자들은 재야에서 불교 스님과 도교 도사를 모시고 심성론과 수양공부를 배웠습니다. 한당(漢唐)을 뛰어넘어 요순과 하은주 삼대를 연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원풍(元豐) 4년(1081)에 북송은 국력을 기울여 섬서 오로(陝西 五路)의 20여만 대군을 파견하여 서하(西夏)와 전쟁하였는데 영락성(永樂城)에서 철저히 패배하였고 이때부터 쇠퇴하였습니다. 신종이 십여 년 동안(1069-1081)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실행한 개혁의 결과는 패전이 되었고 결국 신법도 무너졌습니다. 억울하던 신종은 화병이 났고 원풍 7년(1084) 연회(宴會)에서는 손을 부들부들 떨고 말 못하는 심한 중풍 증상을 보였다가 38살(1085)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난 신종 입장에서 보면 누가 제일 밉겠습니까? 바로 신법을 반대하였던 구법당 인사들입니다.
희녕 연간에 장재(1020-1077)의 아우 장전(張戩, 1030-1076, 1050년 진사)은 높은 관원들의 사주를 받아 신법을 적극 반대하였는데 당시 신법 반대에 나섰던 주요한 젊은 관원 8명 가운데 일원입니다. 진사(1057년 진사)가 되어 얼마 지나지 않은 장재는 아우에 연좌되어 관직을 포기하고 귀향하였고 이렇게 이장(二張)이 관장(官場)에서 퇴장하였습니다. 따라서 북송 시기에 장재가 실험 운영하고 주장하였던 “토지를 경작자 평민이 소유하는 정전제(井田制) 논의”는 사라졌습니다. 이정(二程)은 처음부터 정전제를 미쳤다고 반대하였고 주희도 정전제를 현실에서 어떻게 실행하겠냐며 난색을 나타냈습니다.
정명도(程顥, 1032-1085)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뒤(1057년 진사) 희녕 2년(1069)에 젊은 수습 관원으로서 신법 개혁에 발탁되었으나 왕안석 신법을 소극적으로 반대하다가 물러나게 되자 낮은 관직이라도 얻으려고 왕안석에게 서신을 보내 부탁하며 아부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이천은 처음부터 관직에 나가 사람들을 이끌 성격도 아니고 공부한 실력도 부족하였습니다.
이정(二程) 형제는 아버지 정경(程珦, 1006-1090)의 등살에 떠밀려 몇몇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하였는데 주렴계를 만날 때도 소강절을 만날 때도 아버지가 데리고 가서 첫인사를 드렸습니다. 요즘 말로 형제는 파파보이였습니다. 아무튼지 아버지 정경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 아들은 아버지 말 잘 듣고 어른들 눈치 보는 착한 아들이자 학생이었고 스스로는 꼼짝도 못하였답니다.
당시 신법을 반대한 인물들은 중소 지주로서 토지 농장을 경영하고 고리대금을 운영하여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현존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신법을 반대하며(특히 청묘법), 아무런 개혁도 하지 말고 “조용히 있는 대로 그냥 살자며 안정(安靜)”을 내세웠습니다. 정말로 부자증세를 반대하던 보수파입니다.
이들은 신종과 왕안석이 요순의 통치술(治道)을 모른다고 비난하고 평민사회의 균전(均田)과 균부(均富)를 반대하였습니다. 사실상 부유층으로서 국가에 세금 내기 싫다는 항세(抗稅)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정(二程)이 내세운 주경(主敬) 공부의 정치적 속뜻도 “개혁하지 말고 현재 상태로 그냥 살자는 안정(安靜)”입니다. 요순임금이 얼마나 많이 개혁하고 바쁘게 현장을 돌아다녔는데 요순 정치가 무슨 안정입니까?
이들이 바로 송대 사대부 계층이며 문인 사회의 중심 역할을 다하며 성리학을 탄생시켰습니다. 남송 시기에도 성리학은 사대부 계층의 핵심 이익을 지키는 도구가 되었답니다. 마치 후한 시기와 삼국 시기에 높은 관원과 돈 많은 상인 및 평판 좋은 학자들이 대토지를 매집하고 농장을 차려 장원(莊園) 경제를 이끌면서 전한 시기의 경학(經學)을 조술(祖述)하던 것과 닮았습니다. 조선시대 양반 계층이 대토지를 경영하고 많은 노비를 증식하여 돈을 벌면서 송나라 정주학을 암송하였던 것과도 닮았습니다.
관직에서 자의 타의로 물러난 관원이나 지식인들이 재야에서 유학을 새롭게 연구하고 후학 교육에 치중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때부터 당나라 시기 스님들처럼 유학자 어록(語錄)들이 나오고 출판되었습니다.
철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정치 후견인으로서 구법당 영수 사마광과 소동파를 불러들여 상당 부분의 신종 개혁을 폐기하였습니다. 새로 권력을 잡은 구법당 인물들은 사실상 안정(安靜) 이외에는 정견(政見)도 없고 실무능력도 없다시피 무능하였습니다. 따라서 신법당 인물들과 조정에서 정책을 놓고 다툴 때마다 헛소리를 이어갔습니다. 결국 정쟁(政爭)이 격화하다가 당쟁이 되었고 서로 원한이 커졌습니다.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건립되면서 당쟁은 더욱 격화하였고 진관(陳瓘, 1057-1124)은 『존요집(尊堯集)』 10권을 출판하여 신종을 변호하며 북송 멸망의 죄를 왕안석에게 덮어씌우고 배척하는 데 나섰습니다. 이런 정치 현상이 이정 문인들과 주희 학술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주희가 남송의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철종 연간의 개혁 반대파 가운데 극렬하였던 정이천을 본받았습니다. 주희가 북송 오자(五子)를 편집하여 도통(道統)을 만들었는데 누구를 넣고 빼고는 사실상 정치적으로 개혁 반대파(張載, 정명도, 정이천)이거나 재야에서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소강절)이거나 영향력이 없는 사람(주렴계)입니다.
이정(二程) 문하의 학생들을 훑어보면, 정명도는 왕안석 비난에 앞장섰던 양시(楊時, 1053-1135)를 극진히 아끼고 말년에는 여기저기에 자랑하였습니다. 이정은 나머지 학생들이 찾아오면 받고 안 찾아오면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장(二張) 문하에서 배운 여씨(呂氏) 형제들은 장재가 세상을 떠난 뒤 이정 문하에 들어가서 많이 혼난 뒤에야 이장의 학술 주장을 포기한 듯이 행동하면서 이정을 따르는 듯 마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사량좌는 처음부터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출세하려던 모범생이었습니다. 기억력이 좋아 과거시험 모범답안들을 기가 막히게 잘 외웠다고 합니다. 결국 고향에서 잘 배우고 외웠던 『예기』를 공부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사량좌는 정명도가 암송(暗誦)이 공부가 아니라는 꾸중(玩物喪志)을 들은 뒤에야 외우는 학습(暗誦 공부)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유(思惟)하는 학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아무튼지 이들은 모두 인종과 신종 시기에 스스로 생각하고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창조적인 학자들을 닮지 못하고 그저 선생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다고 설명하는 해설자가 되었습니다.
주희도 마찬가지지만 주희 이후에 전파된 주자학은 암송이 중심이고 스스로 문제를 생각하고 해결하는 학자도 아니고 그저 과거시험에만 합격하기를 바라는 수험생이었습니다. 이들이 운 좋게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원이 되면 자신들의 관직을 지키고 재산을 축적하던 속유(俗儒)가 많았습니다.
명청시기 교육환경을 보면 퇴직한 관원들이 어려서 암송하여 외운 글귀를 늙어서도 읊을 수 있으면 학생들을 가르치고 야단쳤기 때문에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퇴직한 늙은이가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서원에 부잣집 아이들이나 배운 집 자식들은 찾아가지 않고 못사는 집에서 할 수 없이 아이들을 보내서 배웠는데 성취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청나라 초기에 황종희는 지방 여론을 중앙정치에 반영하자(下意上達)고 주장하였는데 지방 여론은 지방에서 서원을 장악한 향신(鄕紳) 여론이었습니다. 조선 시기에 서원에 가서 배우는 까닭이 무엇이겠어요? 힘께나 쓰는 퇴직 관원이나 향신(鄕紳) 학자의 추천서를 받아 관원이 되려는 것입니다. 이들이 서로 뭉쳐서 관계(官界)에서는 소위 카르텔(사색당파)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이 무슨 수양 공부를 하고 창의적인 견해를 내놓겠습니까?
사량좌를 비롯하여 이정 문하의 여러 학자는 스님과 도사를 만나 불교와 도교를 배우고 수양공부도 따라서 시도하였습니다. 정명도 자신부터 그랬으니까요. 현재 학계에서도 왜 정명도를 주목하는지는 오히려 심학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잘 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