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먼저 인간적인 위로를 건네세요
제게는 몸의 아픔과 마음의 아픔에 대한 명상과 묵상을 많이 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생각들을 정리해 <눈물의 만남>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몸이 아플 때 / 흘린 눈물과
마음이 아플 때 / 흘린 눈물이
어느새 /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네
몸의 아픔은 나를 / 겸손으로 초대하고 맘의 아픔은 나를 / 고독으로 초대하였지
아픔과 슬픔을 / 내치지 않고 / 정겹게 길들일수록
나의 행복도 / 조금씩 웃음소리를 냈지
수녀원에서 사십 년 넘게 생활하며 좋은 말을 너무 많이 듣다보니 어느덧 그것이 타성처럼 되어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제가 아프고 나서 비로소 모든 사람과 사물에 대한 감사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해본 적이 없을 때에도 '마치 수술한 환자가 회복실에서 깨어나 처음 세상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으로 감사한 생활을 하자'고 글로는 썼지요. 하지만 제가 그런 입장이 됐을 때, 그 감동과 놀라움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수술 후 아무것도 못 먹던 저는, 아직 피주머니를 지닌 채 수녀원으로 돌아온 이후 미음부터 시작해 조금씩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보호자 수녀님이 제게 포도를 딱 한 알 주셨습니다. 그 포도 한 알의 황홀함은 저에게는 지구만큼 큰 것이었지요. '어머나, 세상에 포도라는 것이 있었지. 어쩌면 이렇게 달콤할 수 있을까.'
한 알만 더 먹었으면 하는 제게 보호자 수녀님은 "오늘은 세 알만 먹어요', "오늘은 네 알 줄게요" 하고 선심을 쓰셨지요. 포도 한 알에서 비롯되는 기쁨, 이보다 더 김동스러울 수 있을까요.
병상에 있는 동안 이처럼 작게만 생각했던 것들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병실에서 사람들이 툭툭 던지는 말을 들으면서 제가 건강할 때 사람들에게 다니면서 했던 말들에 대해서도 많이 돌아보았습니다. 좋은 말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한테 강요하고 잔소리했던 것들이 참 많은 경우에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고, 너무 형식적이었다는 반성도 했습니다.
저는 평생을 기도하고자 수도원에 온, 말하자면 봉헌자임에도 불구하고 몸이 너무 아플 때는 사람들이 문병을 와서 계속 기도만 하는 것에도 거부감이 생겼습니다. 수도자로서 십자가 위 예수님의 고통을 그 어느 때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임은 분명했지만, 열이면 열 명이 모두 똑같이 기도만 할 때 야속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인간적인 위로를 먼저 해주고 그다음에 기도하자고 해도 늦지 않을 텐데 말이지요.
그때 제게 누구보다 인간적인 위로를 건네셨던 분은 바로 옆방에 입원해 계시던 김수환 추기경님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귀찮게 해드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피해 다녔지요. 그런데 제가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추기경님이 오히려 먼저 만나고 싶다는 기별을 보내오셨습니다. 영광스런 마음으로 그분의 방에 갔을 때, 추기경님이 저한테 물으셨습니다.
"수녀도 그럼 항암이라는 걸 하나?"
제가 "항암만 합니까, 방사선도 하는데" 하고 대답했더니 추기경님은 무언가 가만히 생각하시는 듯했습니다. 저는 추기경님이 주님을 위해서 고통을 참아라, 그런 말씀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대단한 고위 성직자이고 덕이 깊은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주님이라든가 신앙, 거룩함, 기도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추기경님은 이렇게 딱 한마디 하셨습니다.
"그래? 대단하다, 수녀."
그 한마디, 인간적인 위로가 제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순간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추기경님의 그 한마디 속에 모든 종교적인 의미와 가르침이 담겨 있었습니다. 덕이 깊은 사람일수록 그처럼 인간적인 말을 하는 것임을 그날 깨달았습니다.
9 •11 테러로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가장 상처가 된 것은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였다고 합니다. 사고로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을 너무나 쉽게 종교적인 말로 위로했을 때 무척 마음이 상했다고 합니다. 좋은 말이라고 해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위로에도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합니다.
음식점에 가서 차림표를 보고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매일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도 메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쁨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기쁨의 덕담을 해주고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는 슬픔에 어울리는 위로의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내 마음의 수첩에 언어의 차림표를 마련해 두고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요.
날마다 새롭게 결심하고 새롭게 사랑하고 새롭게 선한 마음을 갖고 새롭게 고운 말을 연습하는 것은 우리 생의 의무이고 책임입니다.
고운 마음 꽃이 되고
고운 말은 빛이 되고 중에서
이해인지음
첫댓글 위로도 기술이 필요하네요~~
어려운 일인듯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