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에 섰다. 물이 흘러가는 길을 따라 마음이 강 아래로 흘러간다. 가늘한 바람에 수양버들 가지 끝이 물에 닿을 뜻 말 듯 하늘거린다. 하늘거리는 가지를 잡고 일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혀 본다.
강물은 어제도 오늘도 쉴 새 없이 흐른다. 흐르는 물은 수많은 사연을 실어 나른다. 강을 바라보며 한 가닥 희망이라도 실려 올 것이라 믿었던 여인의 그림자가 떠오른다.
여인이 그토록 기다리는 사람은 강과 같은 분이었다. 곁에서 강처럼 넓은 가슴으로 깊은 마음으로 감싸줄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였다.
할머니가 그러셨다. 일제 강점기 때 민족 말살 정책으로 커다란 트럭의 바퀴가 동네를 돌아, 청년들을 가득 실어 바다에 모조리 들어부어 떼죽음을 시켰다고.
민족의 대 동맥을 끊으려던 참상은 벌건 핏물도 거부한 채, 보글보글 흰 거품만이 떠올랐다. 거품 속에 몸부림치던 청년들을 바라본 할머니의 가슴에 방망이가 내리쳤다. 할머니의 강심은 그때 부터 무덤이 되었다.
강의 무덤 가운데 박혀있는 또 한 사람, 월남전에서 전사한 나의 둘째 형부, 군의 강력한 명령으로 두려움을 안고 파병된 길을 갔다. 끝까지 투쟁하고 승리의 깃발을 들고 돌아오리라는 꿈과 희망이 제대를 앞두고, 단칼에 끊겨져 강 속에 탑으로 가라앉았다.
사람마다 제각기 강이 있다. 짧고 길고 좁고 넓고, 깊고 얕은 차이가 있을 뿐 다 같이 흘러가는 강이다. 가다가 바위에 부딪히고 다시 휘돌아 쉬어 가기도 하지만 금세 또다시 일어서 흘러간다.
여인이 바라보고 서 있는 강은 밤이면 중천에 뜬 달을 바라본다. 강과 달, 어쩌면 너무나 잘 어울리는 황홀한 심사다. 강과 달은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며 한 몸이 되어 둥둥 떠간다. 강은 달을 담고 사그라질까 물 위에 띄워서 어루듯 받치고 달은 물 위에서 노래한다. 참으로 차디찬 사랑 노래다.
여인은 지아비를 머나먼 타국으로 보낼 때 별리의 쓰라림을 그렇듯 강가에서 맞이했다. 강물과 뒤섞인 바다 끄트머리 항구에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지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끝내 한 줌의 재로 돌아왔던 야속한 사람, 존재와 부재의 가름을 헤집고 미친 듯 강가로 나가 치마폭 드리우고 넋 놓고 앉아 있기를 얼마였던가. 끝내 강물은 얼었고, 여인은 꽁꽁 언 채로 서서 망부석이 되기를 염원했다. 강물이 언 채로 풀리지 않기를 바랬다.
님이 떠나간 자리에서 꼭 닻을 내릴 거라는 한 가닥 희망으로 섰건만 끝내 돌아서야만 했던 강기슭,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외로움과 서러움이 갈피 없이 뒤섞인 혼돈 속에 이별을 차라리 배반이라고 내뱉는다.
홀로 감당해야 할 일들을 수없이 뒤척이다 강과 바다가 맞닿은 자리에 또다시 섰다. 외롭고 쓸쓸한 여정의 끝, 여인은 그때서야 님의 부재를 보았다.
강물 위로 푸른 수양버들이 또다시 출렁인다. 강과 수양버들, 대립의 출렁임이다. 밝음에서 어둠으로 밀려드는 정체 속으로 그림자가 가라앉는다.
핏물이 거품으로 적시던 할머니의 강과 물속에, 꼼짝 않고 박혀있는 언니의 강 위로 도도한 역사의 흐름은 자유롭다. 백로 한 마리가 강기슭에 서서 하늘을 쳐다본다. 떠나보낸 아픔을 뭉게구름이 감돌아 사라진다. 순류와 역류를 거듭하는 물살이 잠시 제 자리에 선다. 저문 강기슭에 갈대만이 부질없이 흔들린다. 모든 것을 안으로 품고 밖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 유연함이 서럽다.
석양을 안고 황혼의 길을 따라 오색으로 반짝이는 물 위에 붉은 낙엽을 띄운다. 불명의 연서, 음표다.
수양버들 내리는 강가에 서서 푸른 강물을 바라보며, 언젠가 우리도 저 강물 위에 하나의 음표로 떠서 흘러가리라 떠나가리라.
첫댓글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장마가 물러서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네요.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건강 잘 보존하시어 앞으로 정감이 넘치는 좋은 작품 많이 내시기를 갈망합니다.